土山湾의 역사
(19세기 말 토산만 공예 공방의 입구, 위에 “土山湾”의 상해식 발음을 불어 T’ou-Se-We 로 적혀있다.)
토산만이 후대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이것은 문화의 비애이다.
현재의 상해에서 “토산만”이라는 지명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토산만”이 역사 안에서 서양의 예술이 중국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커다란 공헌을 세웠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토산만은 첫째로 중국인들이 유화가 무엇이고 유리상감화가 무엇인지 등의 서양의 예술 용어들을 알도록 한 것이다. “토산만”은 천주교의 시설이지만 특수한 세월과 상해라는 특수한 장소에 서양 예술이 중국으로 전입되도록 한 다리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적은 없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1. 토산만의 전 역사
기록에 따르면 “토산만은 肇家浜을 준설할 때 물돌이에 쌓아서 얻어진 이름이다. 청나라 同治 3년에 이를 깎아 평지로 만들었다.”라고 한다. 同治 3년은 1864년으로, 이 때 프랑스 선교사가 토산만의 둔덕을 깎아 평지로 만든 뒤, 더 이상 토산만의 옛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토산만이라는 지명은 줄곧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오늘날 徐家汇 주교좌 성당의 남쪽으로 약 80 亩정도의 땅이다.
토산만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예수회가 천주교를 대표하여 중국에 들어온 힘들었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천주교는 명나라 때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 “제례문제”로 봉건황제의 외국문화에 대한 탄압을 받았고, 끝내는 청나라 雍正 황제가 중국인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내리게 되었다. 雍正 황제는 또한 정식으로 북경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를 제외한 모든 선교사들을 중국에서 추방하였다. 이후 수 십 년 간 천주교는 “사교” 취급을 받아 철저하게 금지 당하였다. 100 여 년이 흐른 뒤인 1846년 프랑스가 청나라 정부가 100 여 년 동안 집행했던 “금교령”을 철회하도록 다방면에 걸쳐 노력한 끝에, “천주교가 사람들이 착한 길을 걷도록 하는 종교”라는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토산만 고아원의 고아들과 프랑스 선교사)
(토산만 성모원의 고아들과 프랑스 선교사)
徐家汇는 명나라 말기의 대학사이자 동서문화 교류의 선구자인 徐光启의 후예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청나라 정부가 천주교를 금한 100여 년 동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비밀리에 천주교 활동을 거행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청나라 정부가 “금교령”을 취하한 후, 徐家汇는 재빠르게 선교사들이 권토중래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어, 이 곳에 속속들이 대학, 중고등학교, 천문대, 도서관, 박물관, 화실, 인쇄소, 잡지사 등의 종교문화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어, 20세기 30년 대에는 근대 서양문화의 대외전파의 발산지가 되었고, 중국 내 라틴문화의 발원지가 되었다.
(20세기 초의 徐家汇)
당시 사회의 배경은 기본적으로는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연이은 전쟁이 발생하였다. 전쟁의 부산품은 바로 버림받은 아이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조계지였던 徐家汇에는 전쟁 고아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토산만 지역에 고아원(남자 아이들만을 위한 고아원, 이 고아원의 전신은 1855년 프랑스 선교사인 薛孔昭가 설립한 横塘育婴堂)과 성모원(여자 아이들만을 위한 시설)을 설립하여, 6세에서 10세 이르는 외교인 고아들을 수용하였다. 고아원의 부지는 당시 蒲西路 448号 이었고, 성모원은 徐家汇圣母院(漕溪北路) 안에 있었다. 1867년 당시에만 342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고아들이 성장한 뒤 사회에서 생계를 꾸려나갈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성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 유럽에서 구입하자면 운임비가 너무 비싸고, 또 운반해 오는 데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토산만은 이러한 종합적인 배경 하에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2. 토산만의 발전
1) 토산만 공예품 공장
1852년 선교사가 만으로 12세가 된 고아들을 선발하여 고아원 부속 공예 공방을 설립하고, 성물 제작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공예 공방에는 조각실, 회화실, 피혁실, 소목실, 대목실, 동제품 실, 인쇄소, 사진제판실 등등을 설치하였다. 이로부터 전통적인 중국의 공예 공방과는 완전히 다른 서양식의 공방이 토산만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한창 바쁜 토산만 공예품 공방)
2) 토산만 화실
토산만의 화실은 약간 이른 시기에 설치되었다. 스페인의 조각가이자 수사였던 范廷佐이 이미 松江의 横塘고아원에 설립하였던 종교예술품 공방이 1850년에 고아원의 이전에 따라 토산만으로 옮겨오게 되어, 점차적으로 회화와 조각을 위주로 하는 토산만 화실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는 토산만 공예품 공방 중에서 가장 영향력과 지위를 가진 회화실이기도 하다.
회실 초기의 책임자는 徐家汇성당의 보좌신부였던 范廷佐, 陆伯都 등으로 기초 단계였던 회화와 조각 공방을 후에 인쇄소, 청동제품 공장, 사진관 등을 갖춘 완전한 다방면의 종합 공방으로 발전시켰다. 성화와 성물의 복제와 모사, 판매를 통해 서양의 사실주의적인 회화 기법 체계가 중국에 세워지고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토산만 화실은 19세기 60년대 초에서 20세기 40년대 말까지 전후 80 여 년 동안, 몇 번의 변천과 개혁을 통해 후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丁悚의 《 上海早期洋画美术教育 》, 梁锡鸿의 《 中国洋画运动 》, 潘天寿의 《 域外绘画流入中土记 》 및 근대의 중앙미술학원의 院赵力이 편찬한 《 中国油画文献 》 등은 모두 이에 관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유화는 상해의 초기에는 토산만 화실을 상징으로 삼아 서양회화의 동양 진출의 역사적 서막을 열게 되었다.
(토산만의 젊은 화가들)
3) 토산만 인쇄소
토산만 인쇄소는 토산만 공방 안에 있던 인쇄 공장을 말한다. 1859년 프랑스의 천주교 수사인 爱桑이 상해에 설립한, 상해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석판인쇄 기술을 사용하였던 인쇄 시설로서, 1864년에 徐家汇으로 이전하였다.
1869년에 목판 인쇄로 출판한 중문 교회서적은 이미 70 종에 달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마태오 리치, 南怀仁, 艾儒略 등의 저작을 중간한 것이다. 1874년 상해교구가 인쇄소를 접수하여 인쇄기와 중국어와 외국어의 활자 등을 매입하고, 활판 인쇄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는 석판인쇄부를 설치하여 《益闻录》, 《格致益闻汇报》, 《圣心录》, 《圣教杂志》등의 간행물을 출판하였다. 1875년에는 콜로타이프를 도입하여 성모상 등의 상본을 인쇄하였다.
1894년에는 사진제판부를 설치하여 가장 먼저 석판인쇄, 콜로타이프 인쇄, 사진동판인쇄 등의 설비와 기술을 상해에 도입하였다. 1930년에는 서구문자 주조식자기 한 대를 들여왔다. 인쇄소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어 직원만 130 여 명에 달했고, 매년 출판하는 중국어와 서구어 서적은 100 여 종에 달했던, 중국 천주교에서 가장 이르고, 가장 규모가 큰 출판 시설이었으며, 당시 상해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인쇄소였다.
이 인쇄소는 주로 교회서적, 전례서, 성화, 달력, 교과서를 인쇄하였으며,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의 언어로 된 서적을 인쇄하였다. 이 외에도 프랑스 조계지의 문서, 보고서 양식, 통지문 등을 인쇄하였고, 지도와 사진이 딸린 중국의 기상, 지질, 수문관측, 풍속 등에 관한 서적과 자료들도 인쇄하였다.
(토산만 인쇄소)
4) 토산만 성모원 내의 공방
徐家汇의 성모원 역시 공예품을 생산하였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성모원 내에 자수, 레이스, 재봉 등의 작업실을 만들고 교회에서 미사를 거행할 때 사용하는 걸개, 제의, 제대포 등의 수를 놓았다고 한다.
(토산만 성모원의 자수공방)
3. 토산만의 작품
토산만의 초기 작품은 모두 천주교의 성물들과 성화들이었는데,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현재는 이 작품들을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徐家汇성당의 노인 신부님들의 기억에 따르면, 토산만의 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으며, 완전히 서양의 전통 공예와 기법에 따른 것으로 중국내의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생산 설비를 사용하였다. 20세기 초에 대량으로 외국으로 수출되어, 어떤 것들은 유럽의 왕실미술학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토산만에서 그려진 유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徐光启와 마태오 리치가 한 밤중에 등을 들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커다란 화폭의 유화이다. 徐家汇성당에 바닥에서 천장에 까지 이르는 “顶天立地” 작품은 오리지널이 아니라 복제품으로서, 원래의 그림은 이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원래의 그림은 서양 유화의 색채와 중국 세밀화의 필법이 결합된 것으로 해외에 까지 널리 알려진 드문 작품이었다. “阁老间”(원래 위치는 徐家汇藏书楼로, 오늘날의 카리타스 광장)의 한쪽 벽 전체에 그려진 것이었다. 중국공산화 이전 유럽의 한 박물관에서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고자 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생으로 무산되었었다.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 작품은 “제국주의 문화 침략의 흔적”과 타도되어야 할 “四旧”라는 명분으로, 徐家汇성당과 함께 파괴되었다.
(徐家汇성당의 원래 모습)
徐家汇성당은 1847년에 세워졌었으나, 1906년에 다시금 원래 자리에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여, 1910년에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안에 있던 성화, 성상, 원형 기둥은 모두 당시 토산만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건축물의 거대함과 설계의 정교함으로 인해 이 성당은 극동의 첫째 성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외벽의 기둥 위에는 복음사가의 발 밑에 4개의 동물의 머리가 돌로 제작되어, 비가 내리면 그 입에서 분수처럼 물이 쏟아지도록 되어있어, 배수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TV에서 보는 유럽의 교회처럼 당시 모든 유리창은 모두 스테인그라스로 되어 있어, 해가 뜨면 햇볕이 성전 안으로 쏟아져 스테인그라스를 통한 다양하고 영롱한 빛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이처럼 거룩함을 자아내는 스테인그라스는 어두운 성전의 채광에 유리하도록 만들어 졌다. 그밖에 徐家汇성당에는 당시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의 “네 가지 옛 악 처단” 운동으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徐家汇성당에 소장되어 있던 성물과 성화 등의 모든 종교 물품들을 태우는데 3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1982년 徐家汇성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기둥 위에 있던 네 동물의 머리를 시멘트로 만들면서, 옆에 배수관을 만들게 되어, 더 이상 배수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스테인그라스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徐家汇성당의 몇 몇 신부님들의 기억에 따라 스테인그라스를 만들고자 했으나, 당시 중국내에는 구하기가 어렵고, 수입비용은 너무 비싸 설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현재의 徐家汇성당의 정면에 있는 유리창은 모두 아크릴로 만들어져 세월이 지나면 퇴색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徐家汇성당에서도 여전히 “토산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다. 정교하게 제작된 복음사가의 얼굴 표정은 살아 있는 듯하고, 옷의 주름까지도 진짜처럼 조각이 되어 있다.
( 徐家汇성당의 내부와 외부, 토산만에서 생산된 스테인그라스)
마찬가지로 토산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徐家汇성모원(원래는 徐家汇수녀원이었으나, 지금은 上海老站이라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徐家汇성당의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의 건축, 徐汇中学 (원래 명칭은 이냐시오 공학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중고등학교로, 徐家汇성당과는 담을 마주하고 있다.)의 옛 건물, 市四中学(원래 명칭은 徐汇女中과 启明女校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여중고이며, 원래의 위치는 天钥桥路 100号로, 徐家汇성모원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의 启明楼와 敬业楼, 徐家汇藏书楼 (원래는 천주교 상해교구의 徐家汇藏书楼로서, 东方商厦 바로 옆이다.)의 건축물, 徐家汇天文台(상해시 기상국 내)의 오래된 건물 등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세월의 변천을 거치면서도 토산만 특유의 출생증명이라 할 수 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요사이의 조악한 복제품처럼 겉모양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안과 겉 모두를 꾸민” 담대한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상해시 第四中学의 启明楼와 敬业楼)
(市四中学의 전신인, 启明女子学校의 건물; 启明楼)
토산만의 작품은 현실주의와 낭만주의의 완벽한 결합을 이루어 온전히 자연과 작품을 조화롭게 통일시켜 놓은 것들이다.
이밖에 토산만의 작품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는 徐家汇藏书楼에 설치된 동판부식화인 “성 이냐시오 선종”을 들 수 있다. 이 “성 이냐시오 선종”이라는 작품은 다행히도 연이은 파괴의 액운을 피할 수 있어, 오늘날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토산만의 그림 작품이다. 성 이냐시오는 스페인의 귀족으로 예수회 창설자이며, 徐家汇성당의 주보성인이기도 하다.(徐家汇성당의 또 다른 이름은 천주교 상해교구 성 이냐시오 성당이었으나, 후에 이름을 천주교 상해교구 성모성당으로 바꾸었다가 오늘날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그림은 천주교의 성인인 이냐시오가 임종 전에 내려와 나팔을 불며,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아주 세밀하게 제작이 되어 있는데, 심지어는 성인의 옷 위의 단추까지도 아주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의 배경은 중국 전통의 写意기법을 사용하였다. 한 줄기 빛이 이냐시오 성인을 비추고, 그를 둘러싼 구름 속에 보일 듯 말 듯 천사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벽 안에 상감기법으로 박아 넣은 것으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를 듯한 큰 그림이나, 모두 동판을 사용하여 한 번에 부식시켜 만든 것이다.
(徐家汇藏书楼 내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화, 토산만의 후기 작품으로 캐나다 천주교 신자 소장품)
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화》는 1926년에 그려진 것으로 토산만 후기 작품이다. 테두리에는 동판에 해서체로 “1926년 5월 18일, 毛纶, 戴爱华, 冯奥吾신학생의 서품을 축하하며, 徐汇예수성심 신학교 1학년 증정”라고 새겨져 있다.
작품의 어두운 붉은 바탕은 생동감 있게 예수님 수난 때의 배경을 그려내고 있으며, 인물의 표정 또한 생생하게 살아 있다. 피부는 살아 있는 듯하며, 전체적으로는 농담을 결합하였고 붓 터치는 유연하다. 고전주의의 조명변화 중에 인상주의의 색채기법이 섞여 있는 것으로, 토산만 화실의 조기 작품들은 고전주의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깊이 새겨 볼 것은 수염과 머리카락, 피부에서 고전주의적인 어두운 색조와 인상파적인 차갑고 따뜻한 필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토산만 화실의 후기 기법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 유화의 조기 기법의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上海油画史》의 기록에 의하면 토산만 화실에서 출품한 유화 원작품은 오늘날 거의 소실되어 찾아 볼 수 가 없고, 일부 사료와 역사 기록 사진에서만 드물게 찾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화》는 오늘 날 그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진귀한 작품이다.
토산만의 작품은 모두가 완전히 종교화이거나 종교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신해혁명 이후 프랑스 조계지가 확대됨에 따라 토산만의 규모 역시 점차 확대되었다. 그 주위에 줄이어 학교, 인쇄소, 목공부, 도서관, 사진관, 慈母堂 등이 세워져, 그림을 배우는 아이들과 고아들을 받아들여 서양 회화, 음악, 인쇄 등의 선진 기술을 가르쳤으며, 수업은 모두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토산만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으나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토산만은 “광고”를 제작하여 신문지상에 싣기도 하였다. 오늘날 과학원의 로비에 있는 유리상감화에 토산만의 싸인이 새겨져 있으며, 파리 국제 은행, 상해공예미술연구소 등에도 같은 시기의 작품이 남아 있다.
[1] 토산만의 소실
공산화 이후 토산만 공방은 문을 닫게 되고, 기술자들은 각각 여러 공장의 직공으로 흩어졌다. 이전의 작품 또한 “문화대혁명” 등의 여러 원인으로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기술자들이 오늘날 생존해 있으나 이미 80세가 지났고, 또 설비 또한 없어 복원이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토산만의 공예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 가고 다시 되돌아 오지 않게 되었다.
[2] 토산만의 의의
1. 신자 수의 안정화
이것은 교회가 처음 토산만 공방을 세운 가장 근본 원인이었다. 당시 토산만 공방 일의 상당 부분은 토산만 고아원의 남자고아들과 토산만(徐家汇)성모원의 여자 고아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각기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모원의 여자 고아들이 성장한 후, 대부분 남자 고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당시 교회의 규정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의 후예들은 출생 후 9일 안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주교는 徐家汇에 안정적인 신자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徐家汇의 토산만 지역의 신자수는 다른 기타 지역보다 훨씬 많았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徐家汇를 떠나갔지만, 오늘 날에 徐家汇성당은 상해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상해교구의 중심이다.
(토산만의 조기 작품 사진)
2. 중국의 일세대 서양 미술과 공예 작가의 배양
토산만 공방은 중국 최초의 서양 예술 전문학교일 뿐만 아니라 중국 최초의 직업학교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李超의 말에 따르면, 최초로 토산만 화실을 만든 스페인 수사 范廷佐는 주로 소묘와 조소 과목을 담당하였고, 또 중국에 유화를 전파한 첫 번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태리 선교사 马义谷은 유화 과목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가져온 작은 양의 회화용품을 제외하고 물감과 캔버스, 젯소 등은 모두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 썼다. 따라서 马义谷의 유화수업은 물감의 연마와 조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학생들은 체계적으로 온전한 고전 서양 회화 기법을 배운 첫 번째 중국인이 되었다.
(소묘를 연습하고 있는 토산만의 화가)
이들 중 가장 이름을 떨친 이는 조소가인 张充仁으로, 闵行区 七宝镇 사람이다. 그는 토산만에서 그림을 배운 뒤 프랑스나 벨기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의 전대통령인 미테랑이 인정한 조소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산만 공방에서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토산만 성모원의 자수공방)
(유화를 연습하고 있는 토산만의 화가들)
(조각을 연습하고 있는 토산만의 화가들)
3. 동서문화교류에 대한 공헌
토산만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중국에 서양의 유화와 회화 기법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朗世宁과 같은 유화 작가는 북경의 원명원과 같은 우수한 작품을 설계하기도 하였고, 康熙황제의 많은 초상화들은 모두 서양 유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엄격한 봉건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일반 백성들과 관헌들은 서양의 유화와 회화기법을 알 수가 없었다. 서양의 유화와 회화기법은 상당한 기간 동안 황제 개인만을 위한 “어용 화가”들만의 것이었다.
(토산만의 비단 자수 병풍)
그러나 토산만이 출현한 이후에는 서양 유화와 회화기법이 비록 천주교 내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많은 중국의 밑바닥 백성들이 처음으로 서양의 유화와 회화기법을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성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관건이다.”라는 말처럼 토산만의 출현은 중국의 수많은 백성들이 서양의 문화를 알도록 한 것으로, 중국의 문화사, 동서문화교류사에 있어 토산만은 아주 커다란 공헌을 세웠다.
토산만 화실의 출현은 중국 油画史에 있어서의 의의는 아주 중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40년대에 徐悲鸿이 발표한 《신예술 운동의 회고와 전망 新艺术运动的回顾与前瞻 》이라는 글에서 “토산만 화실”에 대해 처음으로 역사적 가치와 위치를 부여하였다. 徐悲鸿은 토산만 화실은 중국 서양화의 “뿌리”이며, “동서문화의 소통에 귀중한 공헌”을 하였으며, “토산만(화실)은 중국 서양화의 요람”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토산만이 사라져 없어지고 그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여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이는 문화의 비애라 할 것이다.
(토산만의 회화실)
토산만이 “중국의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것들
u 최초의 직업학교, 최초의 서양 예술 전문 학교
u 최초로 스테인그라스를 생산
u 최초의 석판 인쇄 : 1876년 프랑스에서 도입하여 교황님 작품을 인쇄한 것은 중국의 첫 번째 선판화보인 《 点石斋画报 》보다 8년이 빠르다.
(중국 최초의 칼라 석판 인쇄술, 토산만)
u 최초의 콜로타이프 인쇄 : 光绪 원년에 도입, 사진 제판 중에서 세밀한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무인서관은 光绪 33년에서야 비로소 이 설비를 갖추었다.
u 최초의 기상 예측과 예보 : 기상관측소(현재 상해의 중심 기상대)를 세워, 기상 상황을 예측하여 이를 전선을 통해 와이탄外滩에 있는 천문신호대로 보내, 다시 황포강의 선원들에게 통보하였다.
(당시의 徐家汇천문대 연구실)
u 최초의 박물관 : 원래 이름은 “徐家汇博物院”으로, 후에 震旦대학(오늘날의 第二医科大学)으로 이전하여 이름을 “진단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중국의 동물학, 식물학, 곤충학의 연구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