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와 영역
포항은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해안 최대의 만(灣)인 영일만을 끼고 있다. 북으로는 청송 영덕군과 서로는 영천, 서와 남으로는 경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1,127.24㎢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최북단으로는 북구 죽장면 하옥리, 최남단은 남구 장기면 두원리, 동쪽 끝은 남구 대보면 강사리이고 서쪽 끝은 북구 죽장면 두마리이다. 포항은 동해안의 관문이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농 공 상 어업이 고루 발달하고 해상과 육상교통 및 철도교통이 연결되는 경상북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역사
포항은 넓게는 영일군(迎日郡), 좁게는 연일(延日)과 흥해(興海)를 모태로 하여 발전해왔다. 포항이라는 지명은 통양포(通洋浦 지금의 두호동)의 포(浦)자와 형산항(兄山項)의 항(項)자가 합쳐져 포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개(浦)의 목(項)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포항시(浦項市)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일만의 중심 해안지역에 영일(迎日)(연일(延日))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비공식적으로 해맞이 해돋이 라는 뜻의 비공식적인 지명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이라고 생각된다.
포항지역은 신라 초에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 하였고, 경덕왕 때는 임정현(臨汀縣)이 되었다가 고려시대에는 영(연)일현(迎日:延日)이 되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장기군 영일군 흥해군 청하군으로 나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영일군으로 통합하였다. 1949년 포항읍이 시로 승격하여 영일군과 분리되었고, 1983년 의창읍이 흥해읍으로 변경되었고, 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어 포항시가 되었어 2003년 1월 현재 2구, 4읍, 10면, 19동, 357리, 634통, 6063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
해안에 위치하여 내륙에 비해 겨울이 따뜻하고 기온의 연교차도 작으며 강수량도 비교적 많고 해류로 인해 안개도 자주 끼는 편이다. 1월 평균기온은 1.6℃이고 8월 평균기온은 25.4℃로 연교차는 23.8℃이며 전체적으로 평균기온이 1950년대의 13.2℃에 비해 평균기온이 13.8℃로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이다. 평균 강수량은 1120.3㎜이고 강수량의 최근 많이 커져서 1998년 9월 30일 1일 516.4㎜가 내린 기록도 있다. 매년 1∼2회의 태풍이 통과하면서 많은 풍수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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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포항시는 전체적으로 동쪽의 바다 쪽을 제외하고는 높지는 않지만 산지로 둘러싸인 형태이며 그사이를 형산강이 지나가고 그 주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있다. 북서부는 태백산맥의 남단부 산지인 내연산(710), 구암산(807), 보현산(1124)까지 청송군과 경계를 이루며 계속해서 도덕산(703), 어결산(510)까지 영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형산강으로 인해 잠시 연결이 끊어졌다가 운제산(471)으로 올라섰다가 동해의 장기읍 두원리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포항을 남북으로 나누는 형산강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흘러오는데, 안강과 기계를 지나는 기계천이 합류되어 많은 토사를 하류로 운반하여 영일만의 바다에 퇴적하여 큰 삼각주를 형성하였다. 신광일대에서 발원하여 흥해를 지나 동해로 흘러드는 곡강천과 운제산에서 발원하여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냉천등이 대표적이며 이 하천 주변에 안강과 흥해, 신광 분지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자리잡아 많은 쌀을 생산하고 있다. 포항시가지는 형산강에서 퇴적된 삼각주와 해안의 모래가 운반되어 형성된 사주에 의해 발달하였으며 사빈의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송도와 북부, 칠포, 월포 등 맑은 물과 완만한 경사로 각광받아왔다. 장기반도는 신생대 제3기 화산활동으로 화산암 및 현무암이 분포하며, 구룡포에서 장기곶에 이르는 지역의 해안은 해안단구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다.
인구
포항시는 2002년 12월 31일 현재 167,754세대에 511,667명이 거주하여 경상북도 전체인구의 18.6%를 차지하고 2위 도시인 구미보다 인구가 16만 명이 더많은 경북 최대의 도시이다. 이중 북구와 남구가 각 50%정도로 고르게 분포되어있다. 광복당시 31251명으로 집계되었던 인구는 6 25직전까지 50131명으로 늘었다 전쟁후 다시 45949명으로 감소하였다. 1950년대 후반 해병대의 주둔과 경제개발, 1962년 국제개항장의 지정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1961년 6만 명, 1968년에는 7만 명을 돌파했다. 1970년 포항제철이 들어오면서 비약적인 증가를 하여 1973년에 10만, 1980년 20만, 1988년 30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 좁은 지역으로 인한 과밀현상의 지속과 철강공단의 경기침체로 인한 인력감축등으로 연10%의 인구증가율이 2%대에 머물게 되고, 영일군과 통합전인 1994년에 327504명에 이르게 된다. 최근에는 2001년 517천명에서 2002년에는 513천명으로 감소하였다.
시가지의 변화
항구도시로 성장한 포항은 원래 형산강의 구하도에 속하는 수로의 항만과 배후산지 사이의 좁은 해안에 형성되었다. 현재 이곳은 시청, 경찰서, 항만청, 세관, 여객터미널 등이 모여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어나 신도시가 구시가지 남쪽에 연이어서 형성되었으며, 섬으로 분리되었던 형산강 하구의 송도일대도 시가지화 되었다. 오천 지역은 해병대의 주둔으로 군사적 기능의 성격을 가졌으나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며 연일, 대송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흥해는 도로의 확장과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신도시 형태로 발달하였으며, 특히 포항제철의 사택단지와 포항공대가 들어선 효곡동 일대가 서구형의 신시가지로 쾌적한 주거환경을 바탕으로 발달했으며 최근 주변의 이동지구와 유강지구에 대단위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포항의 새로운 발전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
포항은 옛날 갈대우거진 습지로서 한산한 어촌에 불과했으며 주업은 어업으로 영일만의 풍부한 어족자원을 바탕으로 1930년대부터 어업전진기지로 부상하면서 1940년대에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도시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어족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자 인구가 늘어나지 않고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을 기점으로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어업도시에서 임해공업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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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세계적인 철강도시로서 조강연산능력 910만 톤의 제철소와 10만톤 이상의 배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항구조건등을 갖춘 세계적인 임해공업도시로 탈바꿈하여 철강산업이 이 도시의 중심산업이 되었다. 앞으로는 철강산업외에 포항공대의 연구시설을 활용한 첨단산업도시로 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업은 경지면적이 15,367㏊로 농가당 1.11㏊이며 이중 논의 면적이 67.2%, 밭은 32.8%를 차지하고 있다. 농가인구는 13,818가구에 38,767명으로 전체인구의 7.5%로 낮은 편이며 농작물의 재배현황은 쌀과 보리는 곡강천 유역과 형산강 지류 및 하류의 평야지역에서 생산되며, 채소는 영일만 중심의 근교농업 지역에서, 감자 고추 양송이 잎담배 약초 등은 죽장면과 기계면의 산간지역에서 각각 생산된다. 가축중 한우와 젖소는 기계 장기 신광 흥해면 등에서, 돼지는 흥해읍 구룡포읍 기계 죽장 청하등에서 많이 사육된다. 수산업은 경북에서 가장 발달하였고 어획량은 2001년 47,166t에서 2002년 39,874t으로 감소하였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주요 어종(魚種)은 어류에는 가자미류, 넙치류, 꽁치, 쥐치, 정어리, 볼락, 전어, 고등어, 노가리, 상어, 대구등 20여종이 넘으며, 패류는 굴, 전복, 백합, 고막 등이며, 해조류는 미역, 우뭇가사리 등이고 기타 오징어, 새우 낙지 등이 있다. 이 지역의 바다는 남해와 달리 바다가 거칠어 바닷가의 육지에 설치해놓고 바닷물을 끌어올려 사용하는데 주로 광어 등이 양식된다. 공업은 포스코를 포함한 1∼3단지와 청림지구 등 5개의 철강산업단지와 청하에 농공단지가 있으며, 218개의 입주업체에 26854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다. 이 밖에 동해면에 동해백토 화학공업과 식품공업, 섬유공업, 구룡포의 수산물과 과일 가공업 등이 있다. 광산물로는 흥해읍에서 청하면에서, 고령토는 오천읍과 장기면에서 각각 산출된다.
나. 지역의 특성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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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과 주위 고을은 주로 해안에 접해있는 지리적 위치와 왜(倭)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서울인 경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섬나라 사람인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이를 막기 위해 일찍부터 이 지역을 국토방위의 전진기지로 요새화 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으며 신라시대부터 해안에산성을 쌓고 이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흥해의 남미질부성(南彌秩夫城) 과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오천의 고현성(古縣城), 장기의 구 장기읍성(舊 長 邑城) 등이 그 예이며 고려에 들어와 영일읍성과 흥해읍성의 축성으로, 조선시대에 장기읍성과 영일읍성의 증축으로 이어진다. |
고려 우왕 13년(1387년)에 영일현 통양포(현 포항시 두호동)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설치하여 정규수군과 병선을 배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이 고장의 특산물로는 흥해군은 鰒(전복), 대구어, 청어, 홍합, 광어, 방어, 사어( 漁:상어), 古刀漁(고등어), 해의(海衣:해태 해초 김), 해삼, 곽( :미역), 세모(細毛), 우모(牛毛), 죽전(竹箭), 송어, 홍어, 송이(松 ), 銀口漁(은어) 등이고, 영일현은 밀봉(蜜蜂), 죽전(대살), 송이, 해달(해다리:물개), 방어, 연어, 복, 방풍, 광어, 대구어, 홍합, 은구어, 청어, 해의, 곽, 여석, 황어, 전어, 사어, 홍어, 고도어 등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옛모습은 조선 중기 때까지도 오늘날 포항보다 넓었던 영일현(迎日縣)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옛기록에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형산성(兄山城) 아래 근오지현(斤烏之懸)의 북쪽에 거친 돌무더기가 점점이 밝혀 있고 활과 같은 긴 모래밭이 푸른 바다에 다달아 사초(莎草)가 만연하고 도처에 습기가 차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고을이 못된다」 「포항은 옛적에 영일만 일각의 사람이 적게 사는 시골 벽지 어촌이다」 「영일현(迎日縣)은 경주에 소속된 현으로 동쪽 가에 있고 그 지역이 또한 통양포(通洋浦)에 까지 다다랐으니 실로 왜구(倭寇)가 내왕하기 좋은 요충지다」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의 곳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천연의 좋은 항구조건과 형산강의 하구가 넓고 깊어 해운수송이 가능했고 1731년 영일현 북면 포항리에 전국 규모의 포항창진(浦港倉鎭)이 설치되어 함경도이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양곡을 포항창에 운송 보관하였다가 함경도로 운송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전라도와 함경도를 연결하는 상거래의 중계지가 되면서 영남권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된다. 일제식민시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으며 결국 그들에게 모든 상권을 빼앗기고 대다수의 상인은 영세상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
현재
1960년에 들어서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포항제철이 이 지역에 설립되면서 많은 대기업이 포항지역에 입주하게 되어, 포항지역의 경제는 과거 수산업, 관광, 유통산업 중심에서 철강산업 중심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항만조건, 공업용수, 부지확보 등에서 월포, 삼천포, 울산, 보성 등 다른 경쟁지역을 보다 유리한 판정을 받아 1970년 4월 1일 제1기설비공사의 착공을 시작으로 1973년 103만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하고 계속 확장하여 1983년 조강연산 910만 톤의 생산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이 지역은 우리나라 중공업 발달의 주축인 남동임해공업지역의 출발점으로 우수한 인적자원과 사회기반시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세계 제1의 제철도시로 발전하였으며, 국가 기간산업의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주요지역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미래
철강산업은 많은 에너지와 자본이 소요되는 산업으로 우리나라의 여건에서는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철강산업을 바탕으로 발전한 포항은 앞으로 새로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 포항시는 철강분야에서는 「하이테크 철강도시 건설」이라는 목표로 신금속을 중심으로한 첨단소재산업으로의 발전을 모색하고, 「첨단과학 산업도시 육성」의 목표 하에 포항공대 인근의 방사광 가속기와 연계된 테크노파크 조성에 힘쓰고 있고, 「환동해물류 중심도시 건설」에 맞추어 영일만 신항 건설과 고속도로, 동해선 철도 부설 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공업도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해양문화 관광도시 조성」을 위해 호미곶, 장기읍성의 문화관광과 포스코, 포항공대 등의 산업관광, 내연산, 죽장 계곡 등의 자연관광 등으로 국민여가생활의 증감과 균형 있는 도시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가볼만한 곳
죽도시장
삼각주의 섬이었던 죽도는 논과 갈대로 우거진 곳이었으나 1924년부터 착수된 형산강제방축조공사와 1932년의 남빈동매립공사 등 포항항의 각종 공사의 영향으로 마을 어귀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부터 1920년대까지 선박출입으로 번성하던 부조시장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이 고장의 상권을 주도하게 되었다. 1946년 5월 일제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현 죽도시장터에 소규모의 노점으로 시작하면서 죽도시장이 시작되었으며 6·25동란 전까지 400여 각종 도소매상이 즐비하여 죽도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6·25로 완전 소실되었다. 동란 후 죽도동의 유지들과 이전의 상인들이 부흥회를 조직하여 1954년 7월19일 경상북도로부터 상설남부시장으로 인가(9,443평)를 받고, 동년 8월13일 개시하여 더 큰 규모의 시장을 재건하게 되었다. 1955년 현재 도매상 50여점포, 소매상 500여점포, 기타 노점이 1천여 가까운 경북 굴지의 상설시장을 형성하여 조선후기와 일제 강점기의 포항장과 여천장의 명성을 이어받아 경북 동해안의 상권을 장악하고 대구 서문시장과 쌍벽을 이루는 전국최고의 수산물 시장으로 부상했다. 죽도시장의 최대 번성기였던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는 경북 동해안 및 강원도 일대의 농수산물 집결지로 경북 동해안 유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죽도시장은 부산의 자갈치 시장, 마산의 어시장, 목포의 수산시장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드는 어시장으로 인근 바다에서 잡힌 명태, 게, 문어, 대구, 도다리 등 동해안에서 잡히는 어종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다. 죽도시장의 물량의 유통을 보면 풍어와 흉어를 가늠 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대형할인 매장의 등장과 인터넷 상거래의 등장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상인들은 자구의 노력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종합개발계획을 마련하여 변화를 모색하고있다.
내연산 보경사
- 내연산
포항의 명산 내연산은 보경사와 12폭포 계곡으로 유명하며 주변 7개의 봉우리가 모여서 커다란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높이 710 m.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불리다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이 산에서 견훤(甄萱)의 난을 피한 뒤에 내연산이라 개칭하였다. 이 산의 남록, 포항에서 북쪽으로 약 30 km 되는 곳에 고찰 보경사(寶鏡寺)와 그 부속암자인 서운암(瑞雲庵) ·문수암(文殊庵) 등이 있다. 보경사 부근 일대는 경북3경(慶北三景)의 하나로 꼽히는 경승지를 이루어 좋은 관광지가 되고 있는데, 그 주된 경관은 내연산 남록을 동해로 흐르는 갑천(甲川) 계곡에 집중되어 있다. 즉, 경북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지는 갑천계곡은 상생폭(相生瀑) ·관음폭(觀音瀑) ·연산폭(燕山瀑) 등 높이 7∼30 m의 12개의 폭포, 신선대(神仙臺) ·학소대(鶴巢臺) 등 높이 50∼100 m의 암벽, 깊이 수십 척의 용담(龍潭) 등 심연(深淵) 및 암굴(岩窟) ·기암괴석 등이 장관을 이루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연간 30∼35만명의 관광객이 찾아 포항지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1983년 10월 1일 영일군에 의해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보경사
보경사는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 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동해안 지역에서는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다. 중국에서 가져온 팔면보경을 명당에 묻고 그 위에 절을 세우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예언대로 연못이 있는 명당에 거울을 묻고 절을 세워 보경사라고 이름지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지금의 보경사는 중건을 거듭해 대부분 조선시대 양식만 남아있다.
오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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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24Km정도 떨어져 있는 오천읍 운제산 동쪽에 자리잡은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라 하였으나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수도장시 계곡상류 반두석에서 놀다가 서로 수도 한 법력을 겨루어 보고자 하여 낚시로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는데, 그 중 생환한 고기 한 마리를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한데서 나‘오(吾)’, 고기‘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전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
국내 대부분의 유명사찰이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반면 오어사는 사찰 앞으로 드넓은 저수지가 펼쳐져 사뭇 인상적이다. 북쪽 기슭의 홍계폭포와 동쪽의 오어지(吾魚池), 산정상부에 건립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한 자장암, 오어사 옆의 작은 다리를 건너 암벽을 지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원효암 등과 어울려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오어지 제방을 지나 오어사로 들어가는 호수주변 도로를 따라 걸으면 절을 찾는 불자의 마음을 현혹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옆 전시실에는 1995년 오어지에서 출토된 고려 동종(銅鐘)도 전시되어있다. |
호미곶
- 역사성 일찍이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南師苦)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 (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고, 고산 김정호 는 대동여지도를 들면서 국토최동단을 측정하기위해 영일만 호미곶을 일곱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임을 확인, 호랑이 꼬리부분 이라고 기록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호랑이가 연해주를 할퀴고 있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이곳을 ‘호랑이 꼬리’라고 이름하였고 영일만의 일출을 조선십경(朝鮮十景)중의하나로 꼽은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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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 神光 : 평안도 白頭山 天池 이 가운데 일출은 경상도 포항 장기현 대보리 일출을 으뜸으로 여겼다. 포항 장기는 현이 있던 장기 읍성내에 배일대(拜日臺)를 세워 평소에도 일출 및 陽光을 즐기던 곳 으로 지난 90년 표석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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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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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 앞바다에서 1907년 일본의 수산대학교 실습선이 좌초하여 승무원이 실종되는 등 각종 해난 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일본은 우리나라의 해안시설물 미비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고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1908년 12월 우리나라 정부에서 호미곶 등대를 건설하게 되었고 1982년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우리나라 동해안 연안을 운항하는 선박과 포항항을 입출항하는 선박의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등탑은 백색 팔각형으로 높이 26.4m 하부둘레 24m이며, 등탑내부는 6층, 108개의 철제주물 계단을 설치하였고 등탑 각층 천장에 대한제국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철근 |
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만으로 쌓아올렸다. 등탑의 출입문과 1층 내부에 르네상스 풍의 조각과 팔각기둥이 설치되어, 그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고 규모가 전국 최대(最大) 최고(最古)의 등대로 알려져 있다. |
호미곶 등대박물관
영일군 대보리에 호미곶 등대 옆에 1985년 등대 박물관을 건립하고, 도등, 발전기, 등명기, 무종, 무선 전화, 송신기, 등부표 등 등대와 관련된 700여 점의 자료가 전시하였다. 1996년도부터 제 2 전시관과 각종 부대 시설 건립 및 전시물 보완을 위한 확충사업을 추진하고 2002년 4월 19일 재 개관하게 되었다. 기획전시관, 등대전시관, 해양수산관, 야외전시관등이 갖추어져 있다.
호미곶 보리밭 유채꽃 메밀밭
호미곶 일대에 보리밭과 유채꽃 단지, 메밀밭을 조성해서 관광객에게 바다와 어울려진 아름다운 풍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얀 등대와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많은 사진작가와 미술동호인들이 찾고 있으며 보리는 높은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상생의 손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지 6개월 만인 그 해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두 손이 상생(상극의 반대)을 의미한다. 성화대의 화반은 해의 이미지이며, 두 개의 원형고리는 화합을 의미한다. 상생의 두손은 새천년을 맞아 화해와 상쇄의 기념정신을 담고 있다. 재질은 청동과 화강암이고, 성화대와 함께 오른손과 왼손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포항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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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포항제철이다. 그만큼 포항에서 포항제철이 주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특히 국내 대기업으로는 유래가 없는 1972년 12월 31일, 본사를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전하여 지역의 경제, 사회, 문화, 교육발전 및 사회 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이바지하여 포항을 대표하고 포항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듯 하다. 제철공업은 철광석을 제련하여 선철과 강철을 생산하는 공업으로 포항제철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목표로 경제개발계획중 2차 경제개발 기간 중이었던 1970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대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하게된 이유는 큰배의 접안이 가능하고 영일만이라는 자연적 조건에 의한 항구발달에 유리한 점과 형산강의 풍부한 공업용수, 넓은 배후시설등이라고할 수 있다. |
공장건설 3년만인 1973년 연간 103만톤 생산규모의 제1기공사를 완료하였는데 이는 해방후 우리나라가 1973년까지의 총생산량과 맞먹는 양이기도 하다. 제철소는 수익은 낮으면서 많은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여 후진국에서는 어려운 산업으로 인식되어 출발당시 자금의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당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대일청구권자금 7천만 달러를 바탕으로 오늘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현재 270만평의 부지에서 매출 11조원 내외, 종업원 19,000 여명, 조강 능력 2,800만 톤으로 주로 열연, 후판, 선재, 냉연, 전기강판, 스테인레스 스틸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포항제철은 포항을 대표하는 국가 기간산업이자 포항의 중요한 산업 관광자원이다. 거대한 규모의 시설에 잘 정돈된 공장환경, 수천도의 고온으로 쇳물을 만드는 용광로와 각종 철강재의 생산과정은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주며, 한국의 경제발전을 선도한 세계 굴지의 철광회사라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심어준다. 1980년대 이후 연평균 60만명이상이 방문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다나까 수상, 영국의 대처 수상등 각국의 귀빈들의 한국 방문때 반드시 들리는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60년대 농업 중심의 1차 산업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했는데 그것이 70년부터 81년까지 영일만에 세워진 여의도의 3배에 달하는 270여만 평의 포항제철소 입니다. 포항제철소는 열연, 냉연뿐만 아니라 피아노 선이나 못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선재, 모터를 만들 수 있는 전기강판, 녹슬지 않는 스텐레스 등의 다양한 제품을 조금씩 생산하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되어있고, 선진 철강업체와 경쟁할 수 있도록 생산품목이나 규격에 있어서 상호 보완이 되도록 만들어져있다. 포항제철에 문의하면 개인 단체별로 견학이 가능하며 약 1시간정도 주부안내사원의 안내로 공장을 포항제철의 차량으로 돌아볼 수 있다. |
영일 장기읍성
장기읍성은 옛 장기군의 진산(鎭山)인 동악산의 동쪽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과 같이 왜구 침략을 막는 중요한 기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도로 축성된 성이다. 성의 둘레는 1.3㎞이고, 성내 면적은 약82㎡로 성문은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으나 서문은 후대에서 폐쇄 시켰으며 성의 중요 방어시설인 치(雉)를 12개소에 설치하였다. 축성당시 규모는 수구(水口)로 추정되는 동북쪽의 계곡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 쌓여 졌다. 현재 성의 보존상태는 서남쪽과 서북쪽, 동북쪽의 성벽 일부만 양호하게 남아 있고 동남쪽의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기저부만 2∼4단 남아있다. 지금 읍성내에는 장기향교와 주민 16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1999년부터 복원공사를 실시하였다.
해수욕장
- 칠포해수욕장
포항시에서 북쪽으로 13km 거리에 있는 칠포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 2km , 폭 70m, 평균수심 1m 총 넓이 9만 7천평에 하루 10만명 수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백사장은 왕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주변에 바다 낚시도 가능하다. 인근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암각화 유적인 칠포리 암각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9호)가 있고 각종 편의시설이 비교적 잘갖추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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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포 해수욕장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부근, 호수같은 영일만을 업고 있는 구룡포해수욕장은 포항에서 24km, 구룡포읍에서 1.5km가량 떨어져 있다. 반달형의 백사장은 길이 400m, 폭 50m, 넓이 6,000평으로서 하루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해안경관이 수려하고 영일만 해돋이와 바다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잘 구비되어 있다
- 화진해수욕장
포항시에서 북으로 20km가량 떨어진 화진해수욕장은 백상길이 400m, 폭 100m 평균수심 1.5m , 총 1만평의 백사장에 하루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나무가 많고 물이 맑으며 주위 경관이 좋아 가족과 함께 피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게다가 송라면 보경사 12폭포를 인근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경하고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들릴만한 곳이다.
- 송도해수욕장
포항송도해수욕장은 예로부터 은빛 모래와 주위의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조건이 좋은 이름난 해수욕장이지만 공단설립과 일부 백사장 유실로 지금은 폭 30m,길이 1,700m, 면적이 11만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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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포해수욕장
백사장길이가 900m, 폭70m 총 19,000평의 백사장에 하루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물이 맑으며 , 수심이 얕고 민박이 잘 형성되어 있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되는 곳으로 동물성 프랭크톤이 많아 꽁치 등 바다고기가 풍부하여 월포방파제에서의 낚시는 일품이다. 조용한 분위기와 깨끗한 물로 점차 관광객이 늘고 있으며, 주변에는 대한적십자사 청소년 수련관과 포항제철의 월포수련관이 있다. 또한 남쪽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2㎞내려가면 이가리 해안의 솔밭과 암석으로 자연발생유원지가 있어 해수욕과 삼림욕을 함께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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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해수욕장
길이 1,750m에 폭 50m, 12만평의 백사장을 갖춘 북부해수욕장은 인근의 송도해수욕장과 더불어 포항의 도심권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이름나 있으며, 가족단위 피서에 적합한 곳이다 |
- 도구해수욕장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이 서린 이곳은 백사장 길이 400m , 폭 50 m , 넓이 1만2천평의 규모로써 하루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포항제철 인근에 위치하고 있고 교통이 편리하므로 각급 학교와 일반기업체의 하계수련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해병대 훈련장으로 이용된다.
포항팔경(浦港八景)
1)형강모우(兄江暮雨) - 형산강 저녁나절에 비내리는 모습
2)죽림청풍(竹林淸風) - 죽림산의 맑고 부드러운 바람
3)신포수조(新浦垂釣) - 신포에서 즐기는 낚시
4)서제춘수(西堤春水) - 서쪽 저수지에서 흐르는 봄날의 물
5)갈산반조(渴山返照) - 갈산(水道山)의 해질 무렵에 반사되는 모습
6)용택화룡(龍澤火龍) - 용택(龍澤-항구동의 북서지역)의 낙조현상
7)원포귀범(遠浦歸帆) -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의 모습
8)평사낙안(平沙落雁) - 모래펄에 내려앉은 기러기의 모습
라.발자취
포항지구 전투
6 25가 시작된 지 1달여만 인 8월초 적의 공세에 밀린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왜관-낙동리-청송-영덕까지의 약120㎞구간에서 인민군과 힘겨운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8월 7일 적 12사단은 안동 동남쪽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기계 안강지구까지 진격하여 도평동(기계북방 40㎞)을 점령하였고 8월8일 죽장(기계 북방 20㎞)에 도달하였고, 8월 11일에는 일부 병력이 포항에 침입해와 아군 3사단이 고립위기에 처하게 되었다포항을 상실하게 되면 포항 남쪽에 위치한 오천(영일)비행장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며, 포항은 동해지구에 있어 육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항구시설을 갖춘 교통의 요로로서 이 지역이 점령당하면 영천 대구 경주 방면까지의 진출이 가능하게 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아군의 포항지구 방어는 그만큼 중요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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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신속히 설치하고 병력의 부족으로 학도의용군이 참전하게 되어, 포항여중일대에서 장갑차 5대를 앞세운 적과 거의 맨주먹으로 싸우다시피 하여 60여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김춘식외 57명의 학도의용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6 25전쟁중 가장 비참한 전투로 기록되고있는 포항지구 학도의용군 전투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학도의용군 충절을 戰歿學徒忠魂塔(포항시 용흥동산 103의 1번지)와 學徒義勇軍 6 25戰跡碑(현 포항여고 앞)에 서워 그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결국 아군은 유엔 해군으로부터 LST 4척을 지원 받아 3사단과 경찰등이 구룡포로 철수하게 되어 인민군에게 유엔 해 공군의 발진 기지로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포항을 적은 8월 11일에 수중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유엔 해 공군의 집중적인 포경과 폭격으로 식량보급은 물론이고 중장비, 탄약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전투력이 급감하였다. 아울러 공격중인 3개 부대의 협조된 작전도 이루어지지 않아 포항에 진입한 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아군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반면 유엔군도 가용 전투력이 제한되었지만 해 공군의 긴밀한 지원으로 인민군을 격퇴하고 포항 및 기계 지역의 요충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민군이 다시 공격에 나서기 위해서 상당기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포항전투 이후 9월까지 동해안 지역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고,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낙동강 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에 실패하게 되어 국군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 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인민군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에 반격작전을 이행하게 되는 한국전쟁의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던 전투였다. |
.포항 전투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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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인민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엔 해·공군의 발진 기지였다. 이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제12사단, 제5사단, 766유격 연대 등을 집중하여 8월 11일 포항 진입에 성공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유엔 해·공군의 집중적인 포격과 폭격으로 식량 보급은 물론이고 중장비 탄약 등을 지원받지 못하여 전투력이 급감하였다. 아울러 공격중인 3개 부대의 협조된 작전도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
포항에 진입한 후 스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반면 국군과 유엔군 역시 가용 전투력이 극히 제한되었지만 해·공군의 긴밀한 지원으로 인민군을 격퇴하고 포항 및 기계 지역의 요충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민군이 다시 공격에 나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부대 정비에 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포항전투 이후 9월까지 동해안 지역 전선이 소강(小康)상태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자세한 자료:www.koreanwar.go.kr> 가장 비참한 전투로 기록에 남는 것은 포항 전투이다. 1기에 참전했던 학도의용군 71명 전원이 이름없는 고지에서 숨을 거뒀다. 꺽일 줄 모르는 학도병의 전운은 북한군을 밀어붙이고 고성, 함흥 등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팬 대신 총을 들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자" 는 구국의지는 인천 상륙작전 ,낙동강 북진, 서울 수복, 38선 북진 평양탈환, 중공군 개입, 1.4 후퇴 등 격랑 속 전투력의 뒷받침이 되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인민군과 학도병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싸울 수 있는 힘은 적개심이 전부였다. 함께 혈서를 쓴 전우가 쓰러져 가는 전장에서 타오르는 분노만이 전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을 용감케 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성은 일찌감치 잃어버렸다. 상대가 같은 민족이고, 이념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자리잡을 여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의 조국은 살고있는 땅이 남쪽이냐 북쪽이냐에 따라 결정될 뿐이었다. 동족 상잔이라는 인식의 여지가 자리잡을 여유조차 없었다. 내 땅은 내가 지킨다는 전의만 불탔다 |
부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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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장시(場市)는 1750년 이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흥해군의 읍내장, 여천장, 영일현의 읍내장과 포항장, 浦市場(아랫부조장), 장기현의 읍내장, 청하현의 읍내장, 기계장, 신광장, 죽장장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포항장(1 6일), 여천장(4 9일), 부조장(아랫부조장:10 20 30)은 영남굴지의 포항창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영일만권 중에서도 물산이 풍부하고 교역도 활발하고 교통도 편리한 특히 해상교역의 중심지역 장시로서 이 고장의 상업발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부조장은 경주부에 속했던 강동면 국당리 소재의 웃부조시장과는 구별되는데, 연화장이라고도 불리 |
는 웃부조장은 선박접안이 불편하여 규모가 큰 장시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고 영일현 서면 중명동의 아랫부조는 선박접안이 용이하여 전국규모의 시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부조장은 대포구의 지형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상거래를 하였으며 형산강의 수로와 육로를 통해 경북의 내륙지방인 안동 대구 상주 영천 경주 등지의 농산물과 포항을 비롯한 동해안의 해산물을 교역하는 큰 장시로 성장하였다. 당시 전라도의 쌀과 함경도의 명태와 북어를 직접 수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설사 직접 수송한다 하더라도 중간에 항해용품의 공급과 안전운항을 위한 기착지로서 포항을 경유하였다. 이로써 대포구인 포항항은 전라도의 양곡, 함경도의 해산물, 강원도의 토산물이 집산 하는 상거래의 중요한 요지가 되었다.
이런 역할을 주로 부조장이 담당하였으며, 함경도 전라도 강원도 방면의 상선들이 형산포구 양안에 정박한 광경은 장관이었으며, 말 한 필에 한사람의 마부가 따라 가며 수십에서 수백여필씩 일열 종대로 행진하는 상인들의 대열은 이곳이 동해안의 원산, 남해안의 마산, 서해안의 강경에 필적할만한 부조시장의 융성함을 느끼게 해주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시장의 번영으로 장세(場稅)의 수입이 증가하여 관리들은 장시의 운영권을 장악하여 세금징수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조선왕조 말기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했을 때 영일 현감의 자리가 가격이 높았다던가, 이 지역 일대에서 발견되는 여러 비석들도 부조시장의 번영에 이바지함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당시의 융성함을 알 수 있다.하지만 19세기 후반 개항과 상설시장의 등장으로 이 지역에서의 상업은 점차 침체되어가고 부조는 지금 몇몇 가구가 농업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로 변모해버렸다.
마.먹거리
과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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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메(매/미)기는 본래 싱싱한 청어의 맑게 비치는 두눈을 꿰어 말렸다는 뜻의 관목청어(貫目靑魚)로 표기되던 것이 관목(貫目)으로 줄여 표기하게 되고 관목의 발음이 관메기에서 과메기 또는 과미기로 변하게 된 것으로 영일만 근처에서 잡히던 대표적인 어종인 청어를 말려 만든 이 고장 특유의 전통식품이다. 과거 포항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일만 지역에서 청어가 겨울에 맨 먼저 잡혔는데 ≪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 기록에 보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반드시 맨 먼저 여기서(형산강 하류) 잡힌다고 하는데 먼저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이를 잡았다. |
잡히는 것의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는 기록이 있듯이 영일만 바다는 어족의 회유지로 해조류가 풍부하여 청어의 산란지로 적합하였다. 청어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바다에서 잡힌 어종으로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황해도 등 전국각지에서 잡혔는데 구한말에는 청어의 주산지가 동해로 옮겨와 1934년에는 동해에서 1년에 5만톤정도 잡히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수온의 상승으로 희귀해져 대부분 북태평양 원양어선에서 잡아오는 것으로 맛이 훨씬 떨어진다. 다른 지방보다 유독 포항지방에서 청어 과메기가 유독 진상품으로 유명해진 것은 영일만에서 잡힌 청어의 품질이 최고로 좋았으며, 농산물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이 지역의 좋은 대용식품이었다고 생각된다.과메기의 만드는 방법은 음력 동짓날 추운 겨울에 잡힌 청어를 배를 따지 않고 소금도 치지 않고 그냥 온 마리들을 배가 위로 오도록 엮어 그늘진 곳에서 겨울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말려 만드는데 즉 냉훈법(冷燻法)으로 얼렸다 녹혔다를 반복해서 말린 동결건조(凍結乾燥) 식품이다. 농가 부엌에서 소나무 가지를 때면 부엌안은 연기로 자욱해지는데 이연기는 통풍을 위해 추녀 바로 아래 뚫어 놓은 살창을 통해 나가게 되는데, 이 살창에 청어를 엮어 걸어두면 적당한 외풍으로 자연스럽게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소나무 연기의 향으로 훈제되어 이른봄에 잘 건조되어 있게 된다. 일제때만 해도 과메기를 가마니로 싸서 재우리(평시에 거름을 모으는 장소)에 짚을 덮어 저장해서 여름까지 먹기도 하였으며 먹는 방법도 오늘날과 달리 굽거나 찌거나 국을 끊여 먹는 등 다양하였으며, 특히 봄에 햇쑥이 날 때 국을 잘 끊여 먹었다고 한다.근래에 들어와 수온상승으로 청어가 잘 잡히지 않아 그대용으로 꽁치를 얼려말려 사용하고있는데 꽁치도 청어와 같이 불포화지방산과 핵산을 많이 함유하여 성인병예방과 노화방지에 유익한 건강식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겨울 꽁치로 만든 과메기는 이 고장의 특산식품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구룡포 지역의 해풍에 말린 과메기가 주목받으면서 생산이 급증하고 있고 전국적으로 향토건강식품으로 많이 판매되고있다. 과메기를 먹는 방법은 우선 적당히 말려진 과메기의 뼈와 껍질을 요령껏 발라낸 후 초장에 찍어 먹는데 과메기의 맛을 더하려면 생미역이나 실파 등을 곁들이는 것이 좋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상이 안주가 없다고 한다. 본격적인 과메기 철은 겨울이며 이때는 구룡포를 비롯한 해안일대에는 과메기를 말리는 덕장으로 장관을 이루는데 연간 약700억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되어 지역경제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
피데기 오징어
오징어는 우리나라 동해안 산이 맛이 제일 좋으며 그 중에서도 울릉도 근해와 영일만 근해의 오징어가 좋은 값이 칠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피데기는 그중 동해 청정해역 지역에서 어획한 오징어를 산지 신선한 바닷바람으로 70%까지 건조시킨 반쯤 말린 오징어로 피데기란 이름은 이지방의 방언인 피득한(수분기가 많은) 상태를 두고 지은 이름인 듯 하다. 피데기가 시중에 상품으로 유통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며 냉동장치의 발달로 최근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과거에 뱃사람들이 바다에서 갓잡은 오징어를 해풍에 말리면 반건조 상태의 피데기가 되는데 쫄깃하고 달짝지근한 맛과 해풍에 바래고 눅눅한 소금기가 어우러져 그 맛이 일품이다. 피데기는 적정수분 함유와 타우린(Taurin)및 베타민 (Betaine)을 적당하게 생성시킴으로 건오징어에 비하여 육질이 연하고 맛 또한 월등하여 구울 때 타우린 성분에 의해 특유의 피향을 내며, 이 성분이 중성기질을 억제하는 EPA와 머리를 좋게 하는 DHA, 간장해독작용, 성인병을 예방하는 HDL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노화방지와 건강장수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물회
포항물회는 포항을 중심으로 한 경북 동해안 일부 지방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원래 물회는 이 지역 어부들이 개발한 음식이며, 거친 바다와 싸우며 지친 몸이나 과음으로 지친 몸을 풀어내는데 물회 이상이 없다고 한다. 옛날 어부들은 회에 물을 붓고 양념을 해서 그대로 한 사발씩 퍼마시고는 그대로 바다로 향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부들 사이에서만 유행했던 음식이 차차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지역의 특산음식으로 정착했으며 음식의 명칭도 자연 포항물회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특히 과음후 아침에 물회한그릇은 속풀이로 좋으며 병후에도 좋은 음식을 알려져 있다.
조리법은 싱싱한 생선으로 회를 만들고 여기에 배, 생채, 깨소금, 참기름, 생강, 마늘, 김, 설탕, 고추장을 넣어 고루고루 잘 저어서 국수말이하듯 찬물에 부어 또다시 잘 저어서 양념과 회가 고루 섞이도록 해서 마시거나 퍼먹는다. 이때 횟감은 싱싱해야 하며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 물을 먼저 부으면 제맛이 안 난다고 한다. 물회의 횟감으로는 원래 광어라야 제맛을 낸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돈지, 오징어, 한치 등을 사용하지만 그 밖의 생선도 싱싱하면 아무지장이 없다. 사실 포항지역에서는 모든 횟감을 물회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곡강 시금치
겨울철 포항 지방에서 생산되는 시금치는 풍부한 일조량과 최저 온도가 높은 기후 조건으로 인해 인기가 높은 포항의 대표적 농산물이다. 포항의 시금치는 총 150여 ha에 연간 2,400여 톤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 중 흥해 지역이 100여 ha에 연간 1,700여 톤을 생산, 전체 생산량의 약 71%를 차지하고 있다. 흥해에서도 곡강리, 흥안리, 용한리등 주로 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며, 곡강리에서만 69ha를 재배하기 때문에 흔히 ‘곡강 시금치’ 라고 한다.
곡강 시금치는 풍부한 일조량과 최저 온도가 높은 기후 조건, 해안의 배수가 잘 되는 사질 토양에다 유기농법으로 재배되어 향기가 짙고 색상이 선명한 것이 특징인데, 최근 국립농산물검사소로부터 품질 인증을 받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등 대형 유통 센터로 고정 출하되고 있으며, 경상북도로부터 우수 농산물 생산 단지로 지정되었다. (자료 : 포항시농업기술센터)
청림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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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넓고 두꺼우며 섬유질이 적고 타지역의 부추보다 향기가 짙으며 각종 미네랄 및 철분이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특히 노병약의 식욕을 증진시키는 채소임. 부추는 진한 녹색의 부드러운 것이 요리에 적당하며 부추를 구입할 때는 가능한한 뿌리쪽의 흰색줄기 부분이 많은 것을 고르도록 한다. 흰 부분이 많을수록 맛이 좋다. 포항 지역의 시설 재배 작물 가운데 최고의 왕자는 뭐니뭐니 해도 부추다. 재배 면적이 현재 포항 지역의 전체 시설 재배 면적의 72%에 해당하는 170여 ha나 될 만큼 부추는 포항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향긋하고 매운 냄새와 깔끔하고 독특한 맛이 특징인 포항 부추는,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을 비롯한 전국 채소시장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우수 농산물이다. |
현재 포항 지역에서 부추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는 약 500 가구이며, 생산량은 연간 5,500여 톤 가량으로 전국 생산량의 약 80%에 해당한다. 부추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는 곳은 연일읍과 동해면, 청림동 등 주로 바다와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우리 지방 바닷가는 해풍의 영향으로 부추의 주생육기간인 겨울에도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습기도 적당해 질 좋은 부추 생산에 최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포항 부추가 전국 최고의 품질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해변 모래밭에서 재배하고 있고, 심층 지하수를 사용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사진 : 포항 부추)
바.축제
영일만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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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구)포항시와 (구)영일군의 통합으로 (구)포항시의 형산문화제와 (구)영일군의 일월문화제를 통합하여 운영하는 축제로 시작되어 1996년 10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철강과 군인 도시라는 이미지를 개선하고 포항시민의 문화적 행사로 자리잡으면서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속에 진행되고 있다. 주요 행사로는 연오랑세오녀 선발대회, 청소년 음악회, 월월이 청청, 모모포 줄다리기, 민속경기대회, 중앙상가 거리축제, 일월신제, 동해별신굿, 가장행렬, 어선퍼레이드, 불꽃놀이, 시민노래자랑, 서예 분재 사진 수석 미술 전시회, 한시 백일장, 해병대 장비전시회등 다체로운 행사를 치르고 있다. |
해맞이 축제
포항은 ‘연오랑 세오녀’설화의 고장이며 해맞이 고을 영일(迎日)이라는 지형과 남한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는 위치적 특성을 살린 해맞이 행사가 개최된다. 1999년 1월 1일 포항 승격 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첫 해맞이 축제가 개최되었으며, 북구 환호동 일대에 해맞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남구 대보면 호미곶에서 열린 축제는 향토수산물 장터, 먹거리 장터, 노래자랑, 인기가수축하공연, 불꽃놀이, 포항시장 신년사, 영화제, 풍물놀이, 해맞이 대북타고 등이 순서대로 진행되며, 이행사를 위해 포항시는 포항여객터미널에서 대보 선착장까지 여객선을 운항시켜 관광객을 수송하기도 한다
과메기 축제
포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과메기를 상품화하여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소비시장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자 1997년부터 매년 12월 북부해수욕장 특설매장에서 열리고 있다. 과메기 맛자랑 경연대회, 시식회, 과메기 빨리 엮기, 과메기 직판장 및 지역 특산물 판매장이 운영되고, 축제공연등도 행하여 진다
포항지역의 옛 고유 특산물인 시금치는 `93년 전국최초로 국립중앙농산물검사소로부터 곡강 시금치가 품질 인정을 획득하여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무농약 시금치에는 당분과 향기, 비타민B, 미네랄 성분이 어느 채소보다 많이 함유되어 있어, 먹어 보면 맛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포항 시금치의 맛은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