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과 17번
승강장 쪽으로 들어오는 버스보다 빠른 속력으로 달려 2번에 올라탔다. 병적이다 싶게 약속시간 어기는 것을 못 견디는 성미 탓에 헐레벌떡 뛰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급한 마음에 차 안에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광명사거리에서 12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는데12시가 다 되었다. 차가 빨리 달리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조금 늦는다고 관계를 끊지도, 나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지도 않을 것은 알지만 스스로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 자리다. 사정을 말씀드리면 충분히 이해해줄 텐데 덜컹거리는 속내를 닦달하고 있다.
마음이 급하니 빈자리가 있어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앞이 훤히 보이는 지점에 서서 마음으로 핸들을 잡는다.
승강장마다 한두 명이 타고, 버스 안에 승객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하필 곳곳에서 내린다. 운전사는 젊은 사람이든 노인이든 올라탄 승객이 안전하게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출발한다.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운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난 지금 운전사를 칭찬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핸들을 뺏고 싶을 정도로 급할 뿐이다.
길양이가 도로 중앙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도 클랙슨을 누르지 않을 뿐더러 옆으로 비켜 가지도 않고 기다린다. 천하태평이다. 지금까지 이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게 운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가리대 사거리 승강장에 승객 한 분이 어정쩡하게 서 있다. 탈 것인지 말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차를 세워 말어? 내가 망설이는 사이 기사는 그 사람 앞에 친절하게 차를 세우고 문을 연다. 승객이 겸연쩍은 표정을 담아 양손으로 엑스 표시를 한다.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승객에게로 부글부글 끓는 국물처럼 올라온 화가 옮겨 탄다. 분명 자신의 일을 똑부러지게 하지 못하는 사람일 거야. 저렇게 버스 타는 일도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타인에게 인정받지도 못할 거야.
그러나 기사는 푸념 한마디 없이 이내 문을 닫고 출발한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닐 텐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유유자적하는 기사님이 원망스럽다. 소하동에서 하안동 우체국사거리까지 한 번도 자신의 운전 소신을 어기지 않더니 중간 지점부터는 승객 한 분 한 분에게 인사까지 했다.
“안녕하세요.”
제발 이번 승강장에서는 내리지도 타지도 말아라. 한 정거장만 멈추지 않아도 3분 정도는 앞당길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동동거리다 시계를 보니 비행기로 환승하지 않는 한 약속시간을 맞추기는 어려운 지경이었다. 순간 차라리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체념이 되었다. 이왕 늦은 것 마음의 여유를 갖자고 다독이니 세포 곳곳에 도사린 급한 짜증도 슬슬 풀어졌다.
2번은 옆으로 지나가는 같은 회사 운전자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가끔씩 뒷거울로 승객들의 안전을 살피기도 했다. 차창으로 올라탄 햇살이 그런 기사의 등을 흐뭇하게 비추었다.
기사는 신호가 바뀔 때도 한 박자 쉬었다 출발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위반한 차에 치어 생을 달리한 사촌 올케언니가 생각났다. 사촌오빠와 신축 건물에서 도색작업을 하다 새참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부부가 힘든 일도 마다치 않고 열심히 해서 살림이 탄탄해지던 시기였다. 신호 바뀌었을 때, 운전자든 보행자든 1분만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출발했어도 그런 끔찍한 사고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거울을 통해 기사님의 얼굴을 훔쳐봤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가무잡잡한 얼굴로 책임감이 강해 보였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듬직해 보인다.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차피 늦었는데 바른 운전 습관을 지닌 기사님을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며칠 후, 누구와 약속을 잡은 날이 아니므로 좀 빨리 가도 늦게 가도 상관없는 날이었다. 다음 차여도 좋고 그다음 차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17번이 바로 왔다.
조금 달리다가 우회전하는 자가용이 깜빡이를 넣지 않았던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승객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출발해서 어느 노인이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자꾸만 급출발 급정차를 했다. 차 안에 마음 급한 사람이 있는 걸까.
승객들에게 인사도 잘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한데 운전을 좀 과격하게 한다고 느껴졌다. 이번에는 거침없는 속력에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급하지 않으니 빠르게 달리는 차에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전에 너무 느긋하게 달리는 2번에게 더 빨리 달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죄 없는 그들을 원망하고 뭐라 하는 자신이 한없이 우습다.
2번을 탄 날은 급했고, 17번 탄 날은 느긋했다. 그들은 정해진 노선을 달리며 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때론 급하게 때론 여유롭게 운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말이 있다. 2번과 17번이 무슨 잘못인가? 내 마음의 총을 맞은 2번과 17번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