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몽롱시(朦胧诗)'란 어떤 시인가?
중국의 현대주의 문학을 선도한 '朦胧诗(몽롱시)'는 중국 공산당이 1978년에 개혁개방 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대두되었다. 이 새로운 문학 운동은 문혁(文革) 시기의 '지하문학(地下文学)'에 그 뿌리를 둔 것이었다. 1978년 12월에 북경에서 북도(北岛)와 망극(芒克) 등은 당국의 허가도 없이『今天(오늘)』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현실저항과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현대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변혁과 자유를 갈구했던 당시의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잡지 『今天』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사상 해방 운동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의 문학운동은 5·4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고, 당시의 상흔문학(伤痕文学)과 선봉문학(先锋文学)과 함께 중국의 새로운 시대의 전개를 앞에서 이끌었다. 이들은 주로 잡지『今天』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今天派'라고도 불린다. 이 '今天派'의 주요 성원은 북도(北島)와 망극(芒克) 그리고 서정(舒婷) · 고성(顾城) · 다다(多多) · 강하(江河) ·양련(杨炼) · 양소빈(梁小斌) 등이었다.
이들의 현대주의적 문학 주장은 곧바로 '몽롱시 논쟁'을 일으켰고 중국의 기성 주류 문단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면, 소위 이 '몽롱시 논쟁'이란 무엇인가? 1979년에 '금천파'의 젊은 작자들은 '북경의 봄'이라는 정치적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중국의 전근대성과 억압적 정치 체제에 대해 강렬히 저항하는 비판의 시들을 쏟아냈다. 그들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노선에 찬성하는 입장에 서서 이전에 문혁을 지지한 보수 좌파를 겨냥하여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문학적으로 금천파는 의상화(意象化) · 상징화(象徵化) · 입체화(立體化)의 수법을 통해 주체 의식을 선양하고 주관적 진실을 추구했다. 이런 문학 주장은 그 급진적 실험 정신 때문에 기성 문인들과 보수적 문단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문혁 시기의 문학에 익숙한 기성 문단의 문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그들을 새로운 정신 독초(毒草)라고 공격했다. 이를테면, 1979년에 시인 공류(公刘)는 잡지 『星星』의 복간호에 「新的课题―从顾城同志几首诗谈起(새로운 과제―고성 동지의 몇 수의 시로부터 논함)」라는 글을 발표하여 금천파의 문학 활동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냈다. 1980년에 유명 작가 장명(章明)은 잡지 『诗刊』에서 「令人气闷的“朦胧”(사람을 답답하게 하는 '몽롱함')」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여 금천파의 시의 몽롱함 즉 불가해함을 비판했다. '몽롱시'나 '몽롱시파'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81년 노시인 臧克家는 『河北师院学报』에 「关于“朦胧诗”(몽롱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몽롱시를 시가(詩歌) 창작의 불량한 풍조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기성 문단의 금천파(몽롱시파) 비판에 대해 반대하는 언론도 나타났는데, 이를테면 谢冕는 「在新的崛起面前(새로운 궐기 앞에서)라는 글에서 금천파(몽롱시파)를 옹호하여 난폭한 간섭으로 새로운 문학 운동을 이단으로 몰거나 독초로 낙인을 찍어 문학을 압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孙绍振는 「新的美学原则在崛起(새로운 미학 원칙이 궐기하고 있다)」라는 글에서, 그리고 徐敬亚은 「崛起的诗群(궐기하는 시군)」이라는 글에서 금천파(몽롱시파)의 문학 운동에 대해 긍정을 표시했다.
이렇게 금천파(몽롱시파)의 '몽롱시'는 1978년 이후 중국 문단에 커다란 반향과 찬반의 논란을 일으켜서 일대 풍파를 몰고 왔는데, 그들의 새로운 문학 운동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시련과 좌절에 부딪쳤다. 중국 공산당이 지나친 정치와 문학의 자유화 경향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1979년 말에 등소평은 자유 언론의 주요한 통로였던 대자보 부착을 전면 금지했고, 1981년에는 백화(白樺)의 소설 『苦恋』이 공개적으로 공산당의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황 악화에 봉착하여 금천파(몽롱시파) 시인들의 작품에는 현실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한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격한 현대주의의 실천과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기성 문단에 대한 도전은 현실의 두터운 벽에 부딪쳐 금천파(몽롱시파)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북도의 해외 망명과 1993년의 고성의 죽음으로 몽롱시파는 1980년대 후반에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일부 금천파(몽롱시파) 시인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작가들은 현대주의를 하나의 문학 기법으로만 간주하는 등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천파(몽롱시파)는 중국의 열악한 문학 풍토 속에서 현대주의의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추구하고 실현해 보려 했던 문학의 선구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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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