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사우에서 병천을 거쳐 천변을 따라 목천으로 이동하다 병천 가전리 김시민장군 유허지에 들렀다
처는 근처에서 봄빛을 받으며 냉이를 캔다 하여 나는 마을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임진왜란 3대첩 중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유허지이다
장군이 9세 때 이곳에서 지내다가 냇가 이무기를 활로 쏘아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사사처(이무기를 쏘아 죽인 곳)이다
김시민 본관은 구안동(安東) 김씨(조선후기 김상헌의 후손으로 세도정치를 한 신안동김씨-장동김씨-와는 구별된다).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신. 김방경(金方慶)의 12대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아버지 형제가 김인갑, 김제갑으로 의재 김제갑(金悌甲)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원주 영원산성에서 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부인 이씨와 차남 시백과 함께 순절한 인물이다.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우리 취옹공 오정원(수촌공 오시수 부친) 의 사위 김봉지의 증조부인 김시양은 숙부 김인갑의 아들로 김시민과는 사촌간이다
김시민장군은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 · 진해 ·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 ·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 · 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1592년(선조 25) 8월에 진주목사로 취임한 김시민장군(金時敏)은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9월 고성과 창원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내쫓았다.
그러자 김해성에 있던 일본 장수인 가토[加藤光泰]·하세가와[長谷川秀一] 등은 9월 24일 2만여 명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경상우도의 조선주력군이 있는 진주성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진격소식을 들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김시민을 독려하고,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과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전만호(前萬戶) 최덕량(崔德良)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김시민과 이광악은 3,8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방어작전을 세웠다. 10월 6일 일본대군 3개 종대가 진을 치자 이날 저녁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으로 하여금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서 호각을 불며 불을 지피게 하여 대군의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몄다. 8일 일본군이 대나무다리를 기어오르며 3층의 산대(山臺)에 바퀴를 달아 공격해오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 산대를 파괴하고 화약불을 성 밖으로 던져 소나무 언덕을 불지르며 올라오는 적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날 진주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 휘하의 구원병 500명이 왔고, 9일 김준민(金俊民)·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이 2,000여 명의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도 구원병 2,000명을 거느리고 왔다.
이튿날 새벽에 일본군이 동문과 북문으로 쳐들어와 김시민이 이마에 적의 총탄을 맞아 의식을 잃자, 대신 이광악이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막아냈다. 적진의 영막에서 불길이 일어나서 일본군은 퇴각했다. 이 싸움은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의 대병력을 물리친 대승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더불어 호남을 방어해 북진하려는 왜군에 참담한 타격을 준 전투이다
이 싸움에서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 ·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김시민장군 5대조 김철균의 묘비이다 그 옆으로 증조부 김수형의 묘가 있다
진주성 전투는 김시민 장군이 죽은 후 채 몇 개월만에 다시 제 2차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은 다시 대병력을 투입하여 1593년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함안·반성·의령 등을 점령했는데, 당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은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거제현령 김준민, 해미현감 정명세(鄭名世), 사천현감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일본군을 막기 위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도원수 권율(權慄)과 순변사 이빈(李),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함안에 있다가 6월 16일경 일본대군의 위세에 눌려 패주했으며,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판관 성수경이 진주로 돌아와 김천일·최경회·장윤과 의논하여 수천 명의 관군과 의병장을 배치한 다음 경계를 엄중히 했다.
20일 9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고 22일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25일 일본군이 동문 밖에 토산(土山)을 만들고 망루를 세워 조총과 포를 쏘자, 성 내에서도 황진의 지휘하에 토산을 만들어 대적했다.
26일에는 일본군이 나무궤에 짐승가죽을 덮은 것을 등과 머리에 둘러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성벽을 파괴하려 하자 조선군은 큰 돌을 내려뜨리고 활과 총을 쏘는 격전을 되풀이했는데, 김준민이 앞서서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27일 일본군이 5곳에 큰 언덕을 만들어 그 위에 울타리를 세워놓고 성 안쪽으로 조총을 쏘아대어 성내에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한 일본군이 구갑차(龜甲車) 위에 군대를 싣고 성벽에 돌격하자 황진 등이 구갑차를 불태워버렸다. 일본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계속 돌진해왔다.
저녁에도 북문으로 쳐들어왔다가 이종인에 의해 퇴각했다. 이날 밤중 일본군이 비밀리에 서문 쪽의 성벽에 구멍 낸 것을 다음 날 아침 황진이 발견하여 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황진은 전사했다.
29일에는 일본군이 불이 붙지 않는 생우피(生牛皮) 여러 장을 덮은 구갑차 3대를 돌진시켜 성벽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군은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어 점차 촉석루 쪽으로 후퇴했고,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은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한편 이종인·강희열 등은 모두 전사했으며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일본군도 손실이 적지 않았으므로 곧 철수하게 된다.
그렇게 김시민은 후대를 잇지 못하고 죽고 형제인 부사 김시회(金時晦)의 아들 김치가 대를 잇는다.
조카였던 김치는 증 영의정 김시민(金時敏)에게 입양된다. 그리고 그 아들이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김득신(金得臣)이다.
목천에서 발원하여 목천을 거쳐 병천을 거쳐 오송을 거쳐 청주 미호천으로 그리고 미호천이 또 다시 금강으로 합류되는데 바로 그 중간 이 냇가를 터전으로 안동김씨는 이곳에서 세거를 하고 김시민장군을 탄생시킨 것이다
냇가와 들판이 봄볕을 받아 따스하니 정겹고 한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