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강) 가나 혼인잔치
본문 <요1:1~12> 읽고~
(본문의 대략 줄거리가)~가나 지역의 한 혼인 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청을 받았는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통상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7일 정도 지속되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포도주이기 때문에 주인이 각별히 챙길 테니 이런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지만, 어쨓든 난감한 일이 벌어졌고, 이것을 예수님이 정결예식에 쓰는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채우라고 해서 그 물을 떠다 주었더니 더 좋은 포도주가 되었다는 주님의 첫 번째 표적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에 많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혼인 잔치집, 6개의 돌항아리, 거기에 물을 아구까지 채웠더니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 그런데 나중 포도주가 먼저 것보다 맛이 훨씬 좋았다는 등등..과연 이런 말들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왔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국을 보고 온 것인데, 그것에 대해 언급한다는 게 사람의 말로는 형언치 못하겠다고 입을 닫아 버렸다. 천국의 모습을 보니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너무도 기쁘고 놀라운 차원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빌4장에서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한다. 비록 육신의 일들이 막히고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힘들어도 너는 천국 백성이니까 장차의 영광을 소망하면 지금의 고난은 비교도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바울은 침 뱉음을 당해도, 빰을 맞아도, 우겨 쌈을 당해도 웃었다.
ㅎ님 나라는~ 천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한다. 즉 천국은 ㅎ님의 의로 가득한 곳이요,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는 말이다. 주님도 이에 대해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차원이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의 평강과 기쁨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지만 ㅎ님이 주시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는 절대적 평강과 절대적 기쁨인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남녀간의 혼인잔치로 자주 비유한다. 아마도 세상에서도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이 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부자 되고 성공 출세하고 자녀가 잘되는 것도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지만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남녀간의 혼인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만 있으면 비가 새는 초가산간도 문제가 안된다. 반대로 모든 것이 구비되었거나 천하를 얻었어도 사랑이 없으면 헛것이다.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사랑은 모든 걸 아우르며 덮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고 초월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이 쏟아지는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혼인을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단순히 세상에서 천국으로의 공간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남녀간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는 혼인을 빗대서 설명한다. ㅎ님을 남편으로 성도인 교회를 아내로 묘사한다. 그래서 창2장에서부터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의 부부관계를 엡5장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비밀을 공개하고 있다. 호2장에서도, 여호와 ㅎ님이 이스라엘과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과 진실됨으로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아가서의 솔로몬과 슬람미의 사랑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아리땁고 스펙 좋은 여자들이 즐비했지만, 게달의 장막 같은 검은 피부색을 가진 무수리 신분의 슬람미를 사랑해서 혼인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죄인을 사랑해서 구원하시는 ㅎ님의 구속사에 대한 비밀한 내용이 아가서이다.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 19장과 20장에 가서 ㅎ님의 구원의 대장정이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막을 내린다. 성도인 교회는 바로 어린양 IX의 아내로 청함을 받은 고귀한 신분이다. 구원이 뭐다?(그리스도의 아내로 혼인하는 기쁨의 잔치이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처럼 성도야 말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항상’과 ‘범사’라는 말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이다.. 좋은 일에는 누구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가 얻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는 너무도 고귀하고 놀라운 일이기에 고난과 불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나눌 말씀이 그리스도의 아내로 혼인하는 그 기쁨에 대해서 나누는 내용이다.
가나에 혼인 잔치가 열렸다. 가나는 나사렛에서 가까운 가난한 동네이다. 거기에 주님과 제자들이 초청되었다. 그런데 잔치가 벌어지는 와중에 포도주가 떨어져 버렸다. 혼인잔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차야 하는데, 흥을 돋우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주인으로서는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그 때에 모친 마리아가 나서서 예수께 말한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떻게 좀 해보라고.. ’ 마리아가 음식까지 간섭하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친척집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절박한 순간에 마리아가 예수께 도움을 청한 것은, 30년 전에 천사의 수태고지를 떠올리며 ‘이런 때에 기적을 보여서 메시야됨을 입증해 보이라는 열망’이 내포된 말이었다.
(눅1:31~) 천가가 나타나서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ㅎ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큰 자, ㅎ님의 아들(메시야),,이제 기회가 왔으니, 기적으로 증명해보라는 의도의 요구였다.
그러나 마리아의 요청에 주님이 냉정하게 거절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신다. 여기서 ‘여자여’(헬/귀네)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쓰는 존칭이다.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데, 마치 모르는 여인에게 말하듯이 한 것은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이제부터는 사적인 관계를 털어버린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라고 말하신 의도는 -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이러한 문제나 해결하고자 함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눅12:13~에서도,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신의 유산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질책을 하신다. 예수 믿는 목적을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다시 말) 혼인 잔치의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런 것을 구하고 있는 당신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언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난처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죄 문제 해결하러 온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소망하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요? 마리아가 생각했던 예수를 소망하고 있다면 이들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육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라면 그저 예배당만 열심히 다니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사람은 죄 문제를 예수로 해결 받은 자들을 말한다.
(눅5:32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주님의 양”이란 바로 이들을 말한다. 죄 밖에 안나오는 자신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 피로 대속을 이루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죄인이 아닌 자들은 예수와 상관이 없다. 그저 세상 복을 구하고 세상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성전 마당만 밟는 이방인이다.
마리아의 요구가 오늘날 교회가 주님에 이름을 부르면서 요구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주님 주님의 힘을 좀 보여 주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는 자가 이렇게 잘된다는 것을 좀 보여 주십시오.’ 이게 바로 고지론이다. 성공주의 신학이요 기복주의이다. 믿는 자가 성공 출세하면 이게 세상에 ㅎ님의 살아계심이 증명되니까 ㅎ님 좋고 나도 좋고 식이다. 이게 인본주의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ㅎ님을 설정하여 믿음을 각색하는 것이다.
‘주님 기적같이 내 소원을 좀 들어 주세요. 기적같이 내 병을 좀 낫게 해 주세요. 기적같이 내 비즈니스 좀 회생시켜 주세요.’ 마16장에서 베드로가 그러했다. 주님이 십자가지고 죽으셔야 한다니까 막아서면서 ‘절대로 그렇게는 안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황되는 거잖아요.?(하자)’
-주님의 대답은 매몰차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귀가 똑같은 시험을 주님께 시험 했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께 가서 뭐라 그랬어요? 네가 ㅎ님의 아들이면 증명해 봐- 돌로 떡을 만들어 봐/ 성전에 서 뛰어 내려 봐, 천사가 수종든다며,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너를 보고 야 진짜 메시아구나, 힘 있는 자구나 하고 쫓아올 거 아니야? 한번 해봐 이렇게 미혹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A4 용지에 가득적어서 새벽부터 철야까지 기도하는 것이 곧 마귀의 사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헛된 것을 추구하는 양태를 보면 가관이다. 배나 지옥 자식 만들었다. 기독교가 아니라 무당잡교이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니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라고 질타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죄 때문에 오신 분이시지, 예수님은 여러분에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거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성령으로 여러분 안에 지금 들어오셔서 세상의 욕심을 털어내고 계신다. 그걸 위해 필요하다면 있는 것도 가져가 버리신다. 그래서 ‘ㅎ님의 은혜가 아니면 난 아무 것도 아니네요’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사건과 환경을 잡아 돌려서 인생의 배가 깨어지게도 하시는 분이 ㅎ님이시다. ㅎ님의 관심은 영혼의 구원에 있지 육신의 형통을 주시는 거짓 신이 아니시다.
탐욕으로 얼룩진 인생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도 안하면서 그저 자기 인생의 형통의 포도주만 채워달라고 아우성들이다.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 잔치집에 포도주를 구하는 마리아에 요구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신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 대답 안에 기독교에 핵심 교리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내 때’라는 이 용어는 요한복음 내에서만도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때란 모두 예수님에 십자가를 가리키는 거다. (볼까요?)
(요7장 30절)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데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의 때가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 죽음이죠.
(요8장 20절) 이 말씀을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에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십자가에서 아직 죽을 때가 안됐다라는 그런 뜻이다.
(요12장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십자가의 죽음이죠
(요16장 32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이게 십자가란 말이다.
(요17장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보시다시피 여기서 가리키는 때는 모두 예수님에 십자가에 때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에 흥을 돋우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이,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그 주님에 대답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땅의 잔치에 흥을 돋우기 위해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주님은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십자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나는 포도주 만들러 온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지러 온 사람이다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포도주를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그 포도주가 주어졌을 때에도 역시 주님을 찾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목적이 포도주에 있는 사람들이 포도주를 주님께 열심히 구했어요. 그런데 마침 포도주가 주어졌어. 그러면 그때도 주님을 찾을까요? 목적이 달성이 되면 주님은 가던 지 말던지 상관없어요.
(예화/ 어느 노인이 암에 걸렸는데, 목사가 기도해서 낳았데요. 우연인지 사단의 장난인지..그래서 한 3년인가 교회를 다니더니 더 이상 안나옴. 그래서 심방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 정도 나가 주었으면 대충 값을 치루었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고 화를 내더라는 것임.. 이처럼 목적이 달성되면 ㅎ님 바이바이..이게 사람의 성정이고 본심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이 목적인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나에게 주어지는 어떤 것이 목적인 사람은 그게 주어지게 되면, 예수는 언제든지 차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게 목적이니까 그거는 무늬만 신자이지 속은 불신자다..
그렇게 자기에 삶에 물질이 채워지고 과학문명에 발달로 편안한 삶이 찾아오게 되면 자꾸 주님을 자기에 삶 속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예배당은 비워져 간다.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힘이 주어지면 절대 하나님 안 찾는다. 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진짜 돈이 주어지면 그들은 반드시 교회를 떠난다. 아니 겁나서 완전히 떠나지는 못해도 언제든지 골프 치러 가고 싶으면 가고 언제든지 여행가고 싶으면 가고, 지 마음대로다. 성도가 아니라 종교인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하인들에게 비어있는 여섯 개의 돌 항이라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신다. 그 여섯개의 돌 항아리는 본문에 표현대로 하자면 유대인들에 결례를 행할 때 쓰는 돌 항아리였다는 것이다. 결례라는 것은 정결하게 닦는 예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 혹은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손발을 그리고 몸을 청결하게 닦아야 했다. 그건 율법도 아니고 그냥 장로들에 유전이었다.
(마가복음 7장 3절) 바리세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에 유전을 지켜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켜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기록)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돌 항아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장로들에 유전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유대인들이라면 그 돌항아리는 항상 맑은 물로 가득차 있어야 된다. 닦아야 되니까. 그런데 그 돌 항아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네요? 그 비어있는 돌 항아리들은 율법의 교리와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개의 빈 돌 항아리는, 복음과 전혀 상관없이 어떤 종교행위를 열광적으로 하는 어떤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렇게 안을 확 열어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의 신앙 양태를 고발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 항아리들에다가 물을 가득 채우라 그러신다. 그리고 참 기쁨과 참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게 되는 것인가를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물들이 모두 포도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포도주는 주로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한다.
성경은 지금 형식뿐인 유대교를 참 기쁨을 상실한 잔치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 포도주가 떨어진 그 혼인 잔치집을 형식만 남아있는 유대교로 지금 비유하고 있는 거다. 그 잔치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치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보혈이 뿌려져야 비로소 그 잔치집이 참 잔치집이 될 수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 진의인 것이었다.
본문 <요1:10~11>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처음 포도주보다 나중 포도주의 맛이 좋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율법 행함에도 기쁨이 따른다. 율법을 준수하며 ㅎ님 말씀대로 사는 자신을 보면서 그런 자신을 ㅎ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해 하고 만족하여 갖는 즐거움을 말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널뛰기 신앙이다. 잘할 때는 스스로 만족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혹은 죄에 넘어질 때는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은 어둠에 잡힌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생성된 신앙은 처음부터 자신의 행함과는 무관하게, 오직 IX의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기에 변함이 없다. 영원히 변치않는 구원이 믿어지니 ㅎ님의 은혜와 사랑에 그저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이다. 이 진리 안에서 자유함이 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과 평강이 넘친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을 아시는가? 맛보았는가? 아니 지금 그 기쁨 안에서 누림을 갖고 있는가? 이게 바로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이루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포도주인 것이다.
그래서 마26:27절,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언약의 피니라.(하심) 먼저의 포도주는 옛언약의 포도주이고, 나중의 포도주는 새언약의 포도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옛 언약은 사람의 율법행함에 방점을 둔 율법이고, 새언약은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ㅎ님의 의를 말한다. 성도는 이 새언약에 의해 구원받은 존재들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처음 행하신 표적이었고 이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한다. 기적과 표적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적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표적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낼 영적인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적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표적은 사인(세메이욘)이다.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즉 장차 IX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을 표적이라고 한다.
모친 마리아가 예수께 부탁한 것은 기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을 거부하시고 표적으로 일하신 것이다. 물론 사람의 눈으로 보면 둘 다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사람의 육적인 필요를 챙겨주는 기적을 행하신 게 아니라, ㅎ님의 영원전 언약을 성취하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한 죄인의 구속을 표현하신 것이다.
여기에 6개의 돌항아리가 등장한다. 이게 또한 큰 비밀이다. 본문 요2;1절을 보자. 사흘 되던 날에.. 요1장부터 계속해서 저자는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 하더니 이번에는 사흘이라고 말한다. 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일까? 이런 표현 말고, 그 다음에, 혹은 그 후에, 그리고 나서, 등등의 기법으로 얼마든지 내용을 이어나갈 수 있는데, 날짜를 헤아려 보라고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요1;29절(이튿날-주님의 성육신을 첫째날로 보고 이튿날이면 창 1장의 둘째날이다). 34절 이튿날(창1장의 3째 날에 해당됨..이에 대한 설명은 이미 앞에서 다 함, 참고) 43절 이튿날(창1장의 4째 날에 해당), 여기서 사흘이면 몇째 날인가? (하루 이틀의 이튿날이듯이.. 하루 이틀 사흘임)..그러니까 4째 날을 기준으로 하루 이틀 사흘이니(넷, 다섯, 여섯) 즉 6째 날이다. 이것을 이중으로 보증하기 위해서 6개의 돌항아리라고 말한 것이다.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라는 의도가 깔려있는 ㅎ님의 배려요 친절함이다. (왜 하필 6개 항아리인가?)
그렇다면 창1장의 6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1장의 6일 창조후 7째 날에 안식은 물질 창조를 빗대서 성도의 구원을 6단계로 설명한다고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1째~3째 날은 IX의 사역으로서, 1째날의 빛은 성육신을, 2째날의 궁창은 십자가 사건과 장사됨을(유월절과 무교절이다. ㅎ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없다), 3째날은 바다가 물러가고 땅이 드러나 씨맺는 나무와 채소가 난 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초실절이다.)
그리고 4~6째날은 성령의 사역이다. 4째날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는데, 해달별에서 해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상징하고, 달은 십자가 복음을 품은 교회를 상징하고, 별은 복음으로 낳아진 ㅎ님의 아들들인 성도를 상징하며, 5째날은 나팔절로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5째날은 생략되었다. 그것은 오순절 성령 사역으로 교회가 탄생되는 4째날과 많은 부분이 겹치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가나의 혼인잔치가 바로 6째 날이다. 속죄절이며 동시에 초막절이다. 속죄가 일어난 육신 안에 성령이 오셔서 사람성전을 기념하는 것을 초막절이라 한다. (육신=풀과 나무)
그렇다면 창1장의 6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창1:25~28> 읽고, 이 날에 땅에 기는 짐승과 ㅎ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다. 이 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다. 참고로 6(여섯)이라는 말은 ‘탈색되다’의 의미를 가진다. 농사로 비유하자면 농사가 잘 되어서 추수 때가 되면 벼 이삭이 하얗게 탈색된다. 잘 익었으니까 추수해도 된다는 신호를 농부에게 보내는 것이다. 가라지도 탈색된다. 밭에서 자라는 가라지는 깜풍기라고 해서 까맣게 변한다(신기: 까맣기에 깜풍기). 논에서 자라는 가라지는 피라고 해서 벼이삭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어려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다 푸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구별이 안된다. 그래서 함부로 뽑다가는 벼를 뽑을 수 있기에 주님도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다. 그만큼 비스므리 하여 분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속일 수가 없다. 확연히 드러난다. 탈색되기 때문인데 이를 성경은 6째날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날이다. 알곡은 알곡으로서 가라지는 가라지로서의 본 모습이 나타난다.
오랜 동안 교회생활하면서 신앙을 해 왔는데, 느지막한 때가 되면 성령으로 거듭난 자와 성령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탐심으로 신앙해온 자가 구별되어 쪼개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짐승과 사람으로 표현한다. ㅎ님의 성령이 없으면 짐승이다. 성령이 임해서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 자는 ㅎ님의 아들이고 사람이다. 이 중요한 일이 6째날에 이루어진다.
27절을 보자, 사람(단수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에서 남자와 여자(자칼과 네케바이다/남자 여자는 이쉬 이솨아..인데) 자칼 네케바(수컷, 암컷- 연합된 한 쌍을 상징함-머리와 몸/하늘과 땅/양과 음/빛과 어둠..처럼 한쌍을 말한다.) 그래서 설교 때 종종 해를 품은 달로 표현하기도 함. 그래서 6째날의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ㅎ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산자요 ㅎ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이다.). 아니면 죽은 자요 이방인이요 짐승이다.
창2장, 아담이 잠든 새, 갈비뼈 하나 취해서 여자를 만들고 데려오니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 즉 아담의 형상을 빼어 닮은 존재가 하와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쏟으시고 탄생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24절(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것이 ㅎ님이 영원전에 설계하신 구원의 작정이다. 그리스도와의 한 영이 되는 사랑의 합일체로 창조하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엡5:31절에서 이를 해석(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말이다)..고 설명함
요4장~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네가 남편이 5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구나). 지금 이 여인이 6째 남자를 행복을 기대하고 만났지만 행복이 채워지지 않아서 물동이를 이고 물 뜨러 나온 것임. 주님이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지금 남편도 행복을 주지 못하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행복하지 않지? 참 행복은 참 남편인 그리스도를 만나야 된다. 그러면 배에서부터 생수가 터져 나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깨닫는 날이 6째 날이라는 말이고, 그 때가 바로 IX를 만나는 때인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6개의 빈 돌 항아리로 비유하심(6: 탈색됨: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때를 말함)
<계19:7~9> 읽고 ..
7절~ 아내가 예비하다(복음을 믿어서 얻는 구원을 말함/ 물론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8절~ 세마포, 성도들의 의의 행실(율법 행함이 아니라, 복음으로 입혀지는 믿음의 의)
9절~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다(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임, 복 있는 자들이다.)
<계21:1~2> 읽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은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존재다. 구원받은 교회요 성도를 말함. 어린양의 신부를 말한다. IX의 십자가 능력으로 죄와 사암의 세력이 다 물러가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기에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함.(바다: 마귀의 영, 죄와 사망의 세력을 상징함). -> 이것은 미래적인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6째 날에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고후5.17절(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절대적 기쁨과 평강의 존재가 됨). 묵시 속에서의 신분이 이렇게 놀라운 것임을 역사 속에서 깨닫고 살라는 말이다.
(말씀 정리)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표적은, 십자가의 피로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는 사랑과 기쁨의 관계로 창조하시는 IX의 사역을 보여주는 영적인 메시지이다. 이것을 6일 동안의 일하심으로 다 이루시고, 7째 날에 안식하시는 ㅎ님의 구원의 경륜임을 깨닫고, 성령을 받아 구원받은 우리도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에 참여했기에 지금 날마다 평강을 누리라는 것이 ㅎ님의 뜻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어떤 노력과 힘으로 된 게 아니라 오직 IX의 십자가 은혜로 받은 선물이기에 날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더 높이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원을 주신 ㅎ님과 어린양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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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