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제2조 ( ㉠ )은/는 (나폴레옹을 지지했던) 작센의 영토 58퍼센트를 갖고, 바르샤바 대공국의 일부인 포젠 공국과 단치히, 라인란트, 베스트팔렌을 차지한다. 제3조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을 정리하여 38개의 영방국가(Territorialstaat)를 모아 독일 연방을 창설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중략)… 제5조 스위스의 중립은 8국 위원회―영국, ( ㉠ ),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에의해 보장된다. - 「빈 조약」(1815) - (나) 독일은 하나이고 하나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38개의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중략)… 우리는 독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가 쓰러진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중략)… 독일이 북부 독일과 남부 독일로 분열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릇되고 잘못된 것이다. …(중략)… ㉡우리는 장래에 우리들 중 누군가가 관직에 들어간다면, 누구도 비밀 경찰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관직도 …(중략)… 그리고 출판된 서적의 검열과 관련된 어떤 관직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헤게비슈* , 「신념고백」(1817) - *헤게비슈 : 부르셴샤프트 운동가 (다) 독일헌법에 기초한 ㉢국민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제국헌법으로 공포한다. 제1조 독일제국은 현재까지의 독일연방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중략)… 제33조 독일제국은 내부의 모든 ( ㉣ )을/를 없애고 공동 ( ㉣ ) 구역을 갖는 하나의 통일된 ( ㉣ ) 및 무역권을 형성한다. …(중략)… 제70조 제국 최고권자의 명칭은 독일 황제다. …(중략)… 제137조 법 앞에 계급적 차별은 없다. 귀족 계급을 폐지한다. 모든 특권 계급을 폐지한다. 모든 독일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중략)… 공직은 능력에 따라 만인에게 개방된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게 군복무를 해야 한다. - 「프랑크푸르트 제국헌법」(1849) - |
<작성 방법>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들어갈 국명을 쓸 것.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들어갈 용어를 쓸 것. ◦(가) 이후 독일에서 나타난 사상적 흐름을 밑줄 친 ㉡을 참고하여 서술할 것. ◦독일 통일에 대한 ㉢의 입장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서술할 것 |
[2015년 A 기입형 10번] 관련
∙㉠프로이센
∙㉣관세 [사료로 읽는 서양사 4권 p256](관세동맹 등을 통해 추론 가능)
∙(가)이후 사상적 흐름 : 자유주의 확산
∙㉢의 입장 : 소독일주의(대독일주의 등 분열), (나)는 대독일주의
[서양사개론 p433∼434]
빈회의(1814~1815)는 전례없이 호화로운 국제회의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왕 등 각국 군주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1773~1859)를 비롯하여, 영국의 카슬리, 프랑스의 탈레이랑 등 각국의 쟁쟁한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매일같이 연회와 무도회가 열리는 가운데 협의는 막후에서 진행되었다. 유럽의 질서회복과 재편성을 위한 빈회의를 지배한 정신은 ‘신성한 정통성의 )’였다. 그것은 혁명 전의 상태를 정통적인 것으로 보고, 그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프랑스, 에스파냐, 나폴리에는 혁명 전의 부르봉 왕실이 복귀하고, 포르투갈에도 옛 왕실이 돌아왔다. 그러나 국경선이나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반드시 완전하게 혁명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특히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와 프로이센의 작센에 대한 요구가 과대하여 회의는 한때 정돈상태에 빠졌으나, 이에 대한 타협이 성립되자 기타 영토문제는 보상원칙에 따라 비교적 우호적으로 해결되었다. 중요한 결정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⓵ 러시아는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얻어 폴란드왕국을 세우고, 러시아황제가 그 왕위를 겸하였다.
⓶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을 지지하였던 작센의 북부와 라인지방을 얻었다.
⓷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39개국으로 구성된 독일연방이 되었다.
⓸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領 벨기에를 얻어 네덜란드 왕국이 되고,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었으며,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⓹ 오스트리아는 벨기에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디아를 회복하고 베네치아를 얻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외국세력이 지배하는 정치적 분열 상태로 되돌아갔다.
⓺ 영국은 지중해의 요지인 몰타섬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케이프 식민지와 세일론을 얻었다.
[서양사개론 p471]
빈회의는 두 가지 면에서 독일통일에 약간의 공헌을 하였다. 그 하나는 독일전체를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시로 정비하여 독일연방을 구성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가 네덜란드나 남부독일의 영토를 포기하고 북부이탈리아에서의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독일 내에서의 이해관계가 희박해진 반면에, 프로이센이 라인강 방면과 폴란드에 새로운 영토를 얻어 내외로 독일의 미래를 짊어지는 형세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독일의 통일과업이 오스트리아보다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사실 프로이센은 1818년 분산되어 있는 영토 내에서의 내국관세를 철폐하고, 인접국가들이 이에 참가하여 1833년에는 관세동맹이 결성되었으며, 1844년까지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방국가들이 여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관세동맹은 독일의 경제적 발전을 크게 촉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제적 통합은 정치적 통일의 길을 닦았다.
[서양사개론 p443]
2월혁명의 영향은 곧 프랑스에 인접해 있는 서부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게 파급되어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채택되고 3월에는 베를린과 빈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다(3월혁명).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0~ 1861)는 자유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헌법을 약속하였다. … 혁명적 분위기는 독일 전체에 고조되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1848년 5월에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독일의 각 연방대표들이 프랑크푸르트의 聖바울대성당에 모여 독일연방의 자유주의적인 개혁과 통일과업에 나섰다. 이 프랑크푸르트 의회를 구성한 전독일의 대표들은 대학교수와 교사, 그리고 법률가 등 독일지식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독일민중의 넓은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통일된 독일의 영역에서 非독일인지역을 제외할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통일의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택하려는 大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중심의 小독일주의문제에 있어서는 후자를 택하였다. 이어 1849년 3월 미국의 연방제도와 영국의회의 관례를 참작하여 자유주의적인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프로이센왕을 황제로 선출하였다. 이때는 이미 지난 해 가을부터 일기 시작한 반혁명이 강화되어가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적 의회가 만들어낸 帝冠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노력은 이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자유주의에 양보했던 독일군주들도 양보를 철회하거나 축소하고, 프로이센왕은 1850년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그것은 3월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반혁명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