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산은 예천군 호명면 내성천변에 있는 해발 220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 산 아래에는 진성이씨 백송파와 연안이씨 별좌공파 집성촌[동족촌]이 있고, 산 위에는 고려 말 충신 노포 안준의 묘가 있다. 건지산은 유교 명산이자 풍수 명산이다.
대유학자가 탄생한 곳이어서도 아니요, 큰 서원이 들어서 있는 곳이어서도 아니다. 유교적 땅이름과 유교적 마을 공간 구성, 그리고 빼어난 유자(儒者)들을 배출한 스토리가 그야말로 이 땅 안 유교마을 풍수의 좋은 본보기[典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이 글의 제목에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넣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우리 전래 풍수 이야기의 대부분이 땅[지맥]을 잘못 건드려 피해를 입는 '풍수 동티'와 조상 묘를 잘 써서 후손들이 동기감응으로 ‘발복’을 받는 얘기들로 점철돼 있어, 혹여 일부 독자들이 제목만 보고 이 글을 그런 아류로 치부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토리[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은 약간 다르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전자가 영혼이나 주관적 가치판단 없이 그저 말만 옮기는 '카더라 통신' 수준이라면, 후자는 적어도 21세기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비과학적, 비상식적'인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거나 혹은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입장에서 자신의 머리로 재정립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준을 가리킨다고 본다.
필자가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 개념이 지닌 '스토리두어(storydoer)'라는 또 다른 개념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사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가미한다는 의의는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한다'는 차원에 머물 뿐이다.
그 개념에는 '실천적인 행태'라는 또 다른 중요한 차원은 빠져 있다. 속된 말로 '말뿐이지 행동은 영 딴판일 수 있다'는 의미도 함축돼 있는 것이다. 스토리의 세계는 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스토리두어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밟아야 제격이다.
스토리가 롤모델이 되어 그의 스토리두잉(storydoing)을 돕는다. 그리고 결국은 그 자신이 큰 바위 얼굴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장소에 깃든 긍정적인 인문혼은 그같이 그것을 모델로 삼고자 하는 스토리두어들이 생길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필자는 지난 수십 년간 동양의 유·불·도·풍수와 서양 인식론·지오그래피·양자역학 등을 탐구해 왔다. 그리고 모든 사상과 철학은 제각기 일장일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장점을 상황에 맞춰 유관적합하게 활용하면 되는 것이지 어느 한 사상만으로 온 우주와 세계를 설명하려 들거나 혹은 다른 사상을 공격하는 것은 속 좁은 단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20여 년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하의 책이 온 나라를 강타한 적이 있다. 동년배의 한 대학교수가 쓴 책이었는데, 인류 역사상 완전무결한 사상이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또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그런 책 제목을 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문화혁명 때 대학생들이 공자를 칭송한 비문을 부러뜨리자 그 다음 세대가 시멘트로 부러진 비문의 허리를 복원했고, 중국 사람들이 현재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양심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혈안을 올리자 이제는 또 '공자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유교를 비롯한 그 모든 전통 사상에는 그 어떤 전승 가치가 있는 고갱이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북은 '사람중심 경북세상'을, 예천은 '충효의 고장, 예천'을 삶터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현재 새 도로가 건설 중에 있지만 건지산은 경북 신도청의 서쪽, 자동차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도청 신도시 둘레길 제4코스에 놓여 있으며, 자연 생태환경도 빼어나다. 그 산에 깃들어 있는 인문혼(魂)을 잘 발굴해 주요 지점마다 스토리텔링 안내판에 게시해 놓을 것 같으면 공직자는 물론 관광객들이 신체와 정신을 함께 힐링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명소가 될 듯싶다.
◆ 건지산 산 이름[山名] 스토리텔링
이 땅에 같은 이름을 지닌 산은 수도 없이 많다. 2007년 12월 산림청은 전국 4,440개 산 중 가장 많이 쓰인 이름은 봉화산 47개이며 그 다음은 국사봉 43개, 옥녀봉 39개, 매봉산 32개, 남산 31개 순이라고 밝혔다. 봉화산은 예전 통신 수단인 봉화대가 있는 산이면 붙여질 수 있었던 이름이어서 자연스레 1위를 차지한 것 같다.
국사봉은 무속신앙에서 유래된 서낭당을 이어받아 나라에서 제를 올리는 곳이 늘어나면서 많아진 것 같으며, 옥녀봉은 풍수사상이 산 형상에 천상의 선녀를 상징하는 옥녀산발형·옥녀단장형·옥녀격고형·옥녀합개형 같은 다양한 명당 형국명을 붙이다 보니 저절로 숫자가 많이 생겨난 듯하다.
그런데 이들 산 이름에 못지않게 숫자가 유별스레 많은 지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건지산'이다. 남한의 산 이름만 해도 '건지산'이 34개소, '건지봉'’이 11개소, '건지매·건지메·건지미' 등이 6개소로 건지산 계통의 산 이름이 무려 50여 개소나 된다. 그 밖에도 '건지'에 '말[洞·里·村]'이나 '골[谷]' 등이 붙은 곳이 30여 개소가 있는데 그런 지명들은 거의 그 옆에 위치한 건지산 이름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건지산'의 한자 표기를 보면 '건'은 거의 '乾'으로 표기되었지만 ‘巾’이 7개소, ‘搴’도 3개소나 된다. '지'는 '止·之·芝·至·地'와 같은 여러 가지 글자로 쓰였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건지'가 한자명의 땅이름이 아닌 순 우리말 지명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구제한다'든가 '도와준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 '건지다'에서 '건디산'이 나오고 그것이 또 '건지산'으로 변형되었으니, '건지'라는 말은 곧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자어 '건지산(乾芝山)'을 해석하는 방법도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서울 구로구와 부천시에서는 '아주 먼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홍수로 떠내려가던 산을 건져내어 건진 산'이라 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됐다고 한다. 상주와 예천 경계에 위치한 건지산에 대해서는 또 향토사학자들이 '건(乾)’은 '크다'는 뜻이고 '지(芝)'는 '성(城)' 또는 '영(嶺)'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봉우리가 긴 산'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다 산의 모양이 방건(方巾)과 같다고 하여 '건지산'이라 부른다는 해석까지 덧붙여지니 '건지산'이라는 지명은 아직까지 명쾌한 결론이 못 내려진 상태로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필자는 순 우리말 '건디산'이나 '건지메' 같은 해석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하지만 적어도 한자로 표기된 지명만큼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명은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는 정신적 문화유산이자 장소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해당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 바로 그 자체다. 한 나라의 이름과 지명을 그 민족의 혼이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때문에 지명 해석은 그만큼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천의 '건지산' 한자 표기법이 그 같은 지명혼(地名魂)을 잘 입증한다. 그 산은 무려 세 가지의 상이한 '건'자 한자로 표기된다. 백송리의 진성이씨 가문에서는 '搴芝山'으로, 송곡리의 연안이씨 가문에서는 '乾芝山'으로, 그 산에 조상 묘를 두고 있는 순흥안씨 가문에서는 巾芝山'으로 표기한다. 이 세 지명이 바로 우리나라의 '건지산'이라는 한자 지명의 생성 배경과 본색을 밝힐 수 있는 열쇳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시피 이 세 한자말의 공통어는 '지(芝)'자다. '지'는 '지초(芝草)'를 가리키며, 그것은 군자나 선비를 상징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지초와 난초는 깊은 숲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우는 데 있어서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나 곧 그 향기와 더불어 동화되고,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절인 어물을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나 또한 그 냄새와 더불어 동화된다'는 말이 나온다. 지초와 난초를 군자에 대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芝)'가 '선비'를 상징한다면 '搴芝'는 '선비를 뽑는 것'을, '乾芝'는 '하늘같은 선비'를, '巾芝'는 '유건(儒巾)을 쓴 선비'를 뜻하는 게 틀림없다. 특히 ‘搴芝’라는 표기는 이 땅 안에서도 안동 도산의 진성이씨 가문의 퇴계 선생 묘역을 이루는 산과 이곳 예천 백송파 세거지 뒷산, 그리고 조선중기 대제학을 지낸 덕수이씨 택당 이식(李植)의 『동계기(東溪記)』에 나오는 양평의 건지산 등, 단 세 곳뿐이다.
예천의 이 건지산 세 한자 지명은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유교사회에서 세 명문가(순흥안씨, 연안이씨, 진성이씨)가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지은 일종의 ‘유교적 지명’이다. 과연 세 문중은 '건지산' 아래에서 그들이 설정한 이름 그대로 걸출한 선비를 뽑아 올렸던[배출했던] 것일까. 정답은 '예스'다. 그렇다면 '건지산' 지명 만들기에 '산의 생김새'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일까. 정답은 '노'다. 건지산 산정부가 ‘문필봉’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건지산 명구(名區) 스토리텔링
건지산은 남쪽의 금릉리 들판에서 보아도 뾰족한 문필봉의 이미지로 다가오고, 동쪽의 백송리 앞산[남산등]에서 바라봐도 잘 생긴 문필봉으로 보인다. 산 북쪽은 내성천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어 건지산 일대는 그야말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의 양수겸장 효익(效益)을 누릴 수 있는 터다.
조선 유교사회의 한 가문의 로망[소망]은 문인이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식으로 '문필봉을 낀 명당에 집을 짓고 살면 후손 중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인물이 난다'는 풍수설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런 유교적 꿈을 실현시켜줄 건지산 문필봉 산 밑에 양반가문들이 '선비를 반드시 배출하겠다'는 꿈을 담은 산 이름을 지으면서 삶터를 개척하지 않았을 리 만무한 일, 아닌 게 아니라 5백여 년 전에 이미 백송리에는 진성이씨가, 송곡리에는 연안이씨가 각각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 두 마을 터는 이전부터 건지산 동쪽 산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고려 말 충신 노포 안준(安俊)의 묘역과 더불어 이른바 건지산 유교 명구(名區)의 삼절(三絶)을 이루게 된다.
유교풍 집성촌의 핵심 경관은 종택과 정자다. 진성이씨 백송파 종택과 연안이씨 별좌공파 종택은 각각 건지산의 동쪽 기슭과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뒷산의 경사가 완만해 마을 한가운데로 내리뻗은 마을 중심지맥의 가장 높은 지점에 자리 잡았으며, 좌우로 긴 택지를 만들어 답답하지 않은 시야를 확보했다. 동족촌 안에서도 종갓집다운 공간적 중심성과 구심성을 잘 갖췄다.
송곡리 사곡마을은 동쪽과 서쪽은 구릉성 지맥이 둘러싸고 남쪽은 큰 들 너머로 마을 서쪽을 길게 돌아내려 간 나지막한 백호지맥이 빙 둘러쳐져 있어 포근하면서도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특히 종택의 내청룡 등(嶝) 수백 살 된 참나무 아래에서 안산(案山) 너머로 바라보이는 각양각색의 조산(朝山)과 의성 다인 비봉산 정상부의 종(鐘) 모양 풍광은 한 번 뇌리 속에 박히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흰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 사곡(沙谷)이라 부르게 되었다지만 지금은 물길 대신에 찻길이 마을을 두르고 있어 정자는 뒷산 중턱 계곡 숲속에다 지어 놓았다. 임진란 때 산화한 조상의 유업을 기리고자 안동시 와룡면 도수곡에 있었다는 무릉정(武陵亭) 기억을 되살려 이곳에다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하기야 마냥 트인 풍광만 즐기다가는 마음이 허[虛:산란]해질 때도 있을 것인즉 ‘집중할 수 있는 성소(聖所)’ 하나 갖추는 것도 음양 비보(裨補)풍수 차원에서 썩 괜찮아 보인다.
그 정자에서 공부해 사법고시를 패스한 후손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장소혼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회관과 숭모재(崇慕齋)를 지나 무릉정으로 올라가는 건지산 길은 피톤치드 왕국이다. 감미로운 자연의 향기가 온몸을 휩싼다. 마치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쇠락한 무릉정 건물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 앞 계곡에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연못이 위안이 돼준다. 그 연못 이름을 '도원지(桃源池)'로 명명해 무릉정과 조화를 이루게 한 후, 그 길을 신도청 둘레길 제4코스에 넣는다면 탐방객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다.
백송리 마을풍수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별도로 다뤄질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일단 개략적 내용만 언급하기로 한다. 백송리는 북쪽 내성천 쪽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지막한 능선이든 어쨌든 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쳐진 곳이다. 그래서 마을 터 자체가 매우 안온하게 느껴진다. 마치 새의 둥지 안에 들어온 것 같다.
그러나 닫힌 곳은 환경심리학상 때로는 갑갑함을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 절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내성천변의 선몽대다. ‘선대동천(仙臺洞天)’, ‘산하호대(山河好大)’라는 비석 글귀가 말해 주듯 선몽대에 오르면 마치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온 몸과 마음이 다 시원해진다.
사곡마을 터와 무릉정의 공간감이 개방감-폐쇄감이라 한다면 백송리 마을 터와 선몽대의 공간감은 그 정반대다. 한 답사 길에서 두 개의 대비되는 장소감을 느껴볼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순흥안씨 충정공파의 파조인 노포 안준의 묘와 백송재사(白松齋舍:墓下 재실)로 이루어진 구역은 건지산의 또 다른 명구다.
그가 조선 조정에서 함께 일하기를 권하는 태조 이성계의 청을 거절하면서도 배소(配所:귀양살이 하는 곳)를 경남 의령에서 예천으로 옮겨달라고 해 허락받은 것이라든가, 또는 경진리 옥동 노포촌에서 생활하면서 내성천 건너 건지산을 자신이 영면할 땅으로 삼은 것은 여간 범상치가 않아 보인다.
그는 『택리지』가 발행된 1750년보다 4백여 년 앞서 살았던 사람인데, 이미 『택리지』의 가거지(可居地) 선정 기준인 지리, 생리(生利), 인심, 산수 등에 정통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가 자리 잡은 옥동은 배산임수의 가거지 명당인 동시에 한천과 내성천이 합수하는 생리가 좋은 곳이며, 예천 고을의 인심은 예부터 알아준 곳인 데다 그가 묻힌 건지산은 산수 빼어난 선몽대를 바로 코앞에 둔 곳이기에 한 번 해보는 말이다.
하기야 건지산에 지령(地靈)이 있다면 아마 노포 안준의 고결한 선비 정신을 높이 사 그곳으로 혼령이 올 수 있도록 이끌었을 수도 있을 것인즉, 우리는 노포 선생 묘역의 풍수성만 볼 게 아니라 마땅히 그곳에 영면하고 있는 선생의 훌륭했던 인품과 교감하도록 애써야 할 것으로 본다. 건지산 유교풍수 스토리텔링의 진수는 바로 그 산자수명한 터에서 살다간 유자(儒者)들의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 건지산 삼유선(三儒仙) 스토리텔링
유선(儒仙)은 '신선 같은 삶을 산 유자[선비]'를 뜻한다. 신선 같다고 해서 현실의 부조리와 폭력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표상으로서, 또는 은일자(隱逸者)의 모습으로서의 유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적 모토대로 어지러운 시대에는 합리성과 이타성(利他性)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의 세계관을 현실에 그대로 구현한 의인까지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필자가 꼽은 건지산의 세 유선은 고려 말 충신 노포 안준(安俊·1353~?)과 선몽대를 일군 백송리의 우암 이열도(李閱道·1538~1591), 그리고 구한말 의인으로 칭송받은 송곡리 출신 애오와 이정기(李鼎基·1830~1917)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선비다운' 행적은 건지산의 세 가지 유형 한자지명, 즉 巾芝山-搴芝山-乾芝山과 딱 맞아 떨어진다. 그들은 오늘날 세태에 어떤 귀감이 될 만한 스토리를 남겼던 것일까.
노포 안준은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고려말 충신이다. 평생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유언마저도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죄인이니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뵙겠는가. 선조의 묘 곁에 장사 지내지 말고 묘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 유계[유훈]을 그대로 따랐는데, 중종 7년(1512)에 순흥안씨 족현손 안당(安瑭·1461~1521)이 영남의 관찰사가 되어 양양[예천]에 순시를 왔다가 노포안공의 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묘역에 들른 게 전환점이 됐다. 그는 충현의 무덤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묘갈명[墓碣銘:묘비에 새겨진 개인의 행적 기록]을 지을 자료가 혹시 집안에 전해오는가 알아보았는데, 그때 고려 삼은의 한 사람인 야은 길재가 안준을 '옥인군자(玉人君子)'로 칭하면서 보내온 편지글을 발견했다는 거다. 오죽했으면 안당이, "야은 선생이 통곡하며 썼다는 이 한 편의 서찰이 만권의 역사보다 낫다[吉再痛哭書 勝萬卷史也]"고 묘비석에다 써놓았겠는가.
안당의 이 묘비 기록은 또 다른 결실로 이어진다. 길재가 안준에게 보낸 편지글 내용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조선 경종 3년(1723)에는 청대 권상일, 풍암 홍상민, 현감 김근사 등 향내 유림들의 공의(共議)로 노포 선생을 용궁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일위(一位)로 봉안하게 된다.
또한 정조 22년(1798)에는 향내 유림들이 노포 선생의 시호가 내려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겨 연명으로 정단(呈單)하여 승지 이익운(李益運)에게 전달하고, 또 승지는 야은이 안준에게 보냈다는 편지글 내용을 구술을 통해 임금 앞에서 스토리텔링함으로써 마침내 정조대왕은 안준에게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야은의 편지글이 처음에는 집안의 문서로 보관돼 오다가 안당에 의해 묘비석에 기록되더니, 나중에는 또 수백 년의 역사를 초월해 『정조실록』 49권, 22년 10월 5일[을미] 3번째 기사로 그 내용이 왕조실록에 고스란히 재기록되는 이변이 연출되었으니, 그래서 ‘역사는 참으로 무섭다’는 얘기가 있는 것이다.
우암 이열도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자 문하생이다. 1538년 백송리[당시는 백금리]에서 태어난 그는 26세 때 선몽대를 짓고, 3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는 현재 백송리 마을 앞 난산(卵山)에 영면해 있는데, 묘갈명에 그의 선비정신을 잘 드러낸 일화가 적혀 있다.
그가 경산 현감으로 있을 때 도백(道伯·監司·관찰사)이 보자는 연락이 와서 급히 달려갔더니, 기껏 한다는 부탁이 책 표지에 제목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가 글씨를 잘 써서 도백이 그런 청을 하였겠지만 우암의 생각은 영 달랐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공무에 바쁜 사람을 사적인 일로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는 것은 관직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당하다고 본 것이었다.
비문에는, "말할 것은 공적인 일뿐이거늘 어찌 붓을 놀리라고 모독을 보이느냐[所言惟公事可己 以漫筆見瀆耶]"하고 큰소리로 말하며 탕건을 벗어던지고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뜻을 두지 않고 선몽대에서 지냈다고 적혀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도백의 '갑질'을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질타한 것인데, 연전에 윤 모 검사가 국회 청문회장에 나와 "나는 일[事]의 합법성 여부만 보려하지 사람[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을 보지는 않는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소위 코드 잘 맞추는 영혼 없는 상사들에 의해 좌천의 길을 걷다가 정권 교체로 현재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애오와(愛吾窩) 이정기는 사곡마을 연안이씨 별좌공파 출신으로 구한말 사회적 혼란기에 ‘의(義)’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임진란 때 선대의 이유(李愈) 형제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더니, 3백여 년 뒤에는 또 애오와공이 명문가 출신다운 헌신을 한 것이다.
전 재산을 풀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한 후 차용증서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으며, 병신년(1896) 창의시에는 예천군민의 의병참모장으로 추대되어 근동의 여러 문중들을 규합, 호응케 하는 데 앞장섰다. 의병대장 신돌석 장군은, "저 산[건지산] 밑에는 사람을 살리는[活人하는] 분이 산다.
어려운 사람은 저 산 아래로 찾아가고 부정한 사람은 부근을 다닐 때 조심해 다니라"고 말했으며, 불한당들조차도 사곡마을 앞을 지날 때는 조심하며, "비라이[備郞:조선시대 비변사의 종6품 벼슬인 낭관]어른[이정기를 가리킴] 잠 깨실라 발자국 소리를 내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른바 활인봉(活人峰) 전설이다.
그 옛날 격암 남사고는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 넙죽 절하며, “저 산은 활인산”이라고 말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산의 크기와 수많은 골짜기들을 보고 전란시 피난지로서의 적합성을 말한 것일 뿐, 인문학적인 상징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건지산이 활인봉으로 명명된 것은 '큰 바위 얼굴'이 현실 속에 구현된 것이나 다름없다.
풍수적인 문필봉이 인문학적인 활인봉으로 바뀐 것은 산이 사람으로 인해서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하늘같은 선비[乾芝]'에 의해서. 건지산은 인문의 향기 그윽한 '지란의 산'이다.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찾아보길 권한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