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산업 디자인이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디자인에서 독일의 역할은 매우 크다. 비록 독일 디자인이 프랑스 디자인처럼 세련되지도, 이태리 디자인처럼 낭만적이지도, 영국 디자인처럼 재치 넘치지도 않지만 믿음직한 독일 디자인을 세계에 알려온 브랜드들을 통해 독일 디자인의 진수를 느껴보고자 한다. 글/ 석현정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초빙교수 (파버카스텔, 헹켈 글/ 최태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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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 카스텔 1761년에 설립해 역사가 245년이나 되는 파버 카스텔(Faber-Castell)은 어린이 용품, 화방 용품, 필기구 라인, 디자인 라인 등 연간 18억 자루의 연필과 색연필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브랜드이다. 파버 카스텔은 색연필의 경우 색상이 120여 가지나 될 만큼 다양한 디자인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파버 카스텔의 디자인은 세계적인 디자인 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2000년 <비즈니스 위크>지에서 베스트 제품으로 선정되고, 2001년 iF 디자인상을 수상하는 등 연필 디자인의 혁신적인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페이버 캐슬’이라고 읽지 않고 독일식 발음인 ‘파버 카스텔’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서 이미 우리 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것을 알 수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 Benz)와 BMW는 폭스바겐, 아우디, 포르셰를 생산하는 자동차 왕국 독일에서도 자신만의 강한 브랜드를 구축해왔다. 2차 대전 당시 전투기 엔진을 생산했기에 전투기의 프로펠러 형태에서 따온 벤츠의 삼각형 엠블럼이나 초창기 생산하던 항공기 엔진의 형태에서 따온 BMW의 엠블럼은 그 자체만으로도 럭셔리 자동차의 아우라를 뿜어내기에 충분하다. 벤츠는 중후한 CEO에게 어울리고, BMW는 성공한 젊은 남자에게 어울린다. 벤츠는 더 안전할 것 같고, BMW는 더 빠를 것 같다. 남편이라면 벤츠를, 남자친구라면 BMW를 몰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브랜드 이미지는 일관되게 진행한 그들의 브랜드 전략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결과이다. 몇 년 전 BMW 4 시리즈와 BMW 7 뉴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기존 라인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한 기술+오버 디자인’이라고 수많은 이들이 혹평한 것을 보면서 브랜드 이미지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브라운과 디터 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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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Braun)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디터 람스(Dieter Rams)가 정의했고, 디터 람스의 디자인 언어는 브라운에 의해 정립됐다. 심지어 디터 람스를 미스터 브라운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브라운의 제품들은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를 실천한 산 교본이었다. 꼭 필요한 조형만으로 디자인했음에도 브라운의 제품들은 심미성, 안정성, 기능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훌륭한 것(good form)’이었다. 아울러 브라운의 모든 제품은 일관된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데, 이는 디터 람스가 기업의 임원 위치에서 경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가능했다. 오늘날 말하는 디자인 경영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60년 브라운이 미국의 질레트(Gillette)에 합병될 당시 제품 디자인 부서만은 질레트가 브라운에 합병된 것을 보면 브라운 디자인의 가치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디자인 어워드 협회 iF와 레드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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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디자인의 대단함 뒤에는 조직적이고 끊임없는 관리 시스템이 있다. 역사적으로 연방정부 시스템을 유지해온 독일은 각 주마다 비영리 디자이너 협회가 있었다. 각 협회는 해당 주의 디자이너들을 관리하며 디자이너가 잘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주었다. 이후 그들 중 상당수는 부분 혹은 전면 민영화되었고, 경쟁력 있는 디자인 센터는 수익 모델을 구축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산업으로 전환했다. 그 중 박람회의 도시 하노버에 자리한 iF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 에센(Essen)에 있는 레드돗(Reddot)은 디자인 상을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해 미국의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거듭났다. 그 밖에도 각종 행사를 기획해 디자인을 산업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영화된 디자인 진흥 기관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 디자인계 전체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초고속 열차 ICE3와 노이마이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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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열차 ICE3는 백사 같은 몸매와 달리 인테리어는 따뜻하고 편안하다. 나뭇결 소재와 블루 계열의 텍스타일, 그리고 불투명 유리의 조화로운 디자인에서 재질과 색의 차이를 완벽히 소화해낸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고속열차를 디자인한 노이마이스터(Neumeister)는 기차,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 분야 세계 최고 디자이너이자, 독일이 초고속열차 부문에서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 노이마이스터, 그리고 그에게 기술적 플랫폼을 제공해온 독일 기차 산업의 사례는 왜 독일이 디자인 선진국인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준다. 디자인 박람회 암비엔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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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잡화를 주제로 하는 암비엔테(Ambiente)는 이 분야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생산 업체는 박람회에 새로운 디자인 프로토타이프를 전시하고, 바이어들은 프로토타이프를 보고 물량을 주문한다. 박람회는 디자인 공급자와 수요자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장소이며, 젊은 디자이너들에게는 자신을 알릴 기회를 얻는 장소이다. 이처럼 암비엔테와 같은 독일의 박람회 문화는 디자인을 정당하게 사고파는 디자인 상거래 문화의 정착을 보여준다. 헹켈의 쌍둥이 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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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년 역사의 헹켈(J.A. Henckels)은 몰라도 쌍둥이 칼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에게는 쌍둥이 칼로 더 잘 알려진 헹켈의 칼은 세계의 수많은 칼 중 단연 최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다. 헹켈은 칼은 잘 자르고 잘 써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칙으로 칼을 디자인했다. 절삭면을 기하학적으로 배열해 그 각도가 전체 칼날의 구조와 일치하게 했고, 칼날을 지탱하는 손잡이 치수와 칼 전체 치수의 비례도 고려했다. 또한 세계적으로 각기 다른 음식 문화에 맞춘 마케팅도 폈다. 곡류를 주로 섭취하는 아시아 시장에는 부드러운 절삭력을 지니고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칼날이 아래로 향한 칼로, 육류 섭취가 많은 유럽과 미주 지역에는 칼날이 중앙으로 날카롭게 향하는 것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아울러 재료의 특성을 고려해 용도가 다른 칼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칼 하나로 고기 썰고 과일 썰 때, 독일인들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의 대명제를 칼 하나에까지 적용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