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사
법주사의 말사인 안심사는 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절로 `제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뜻에서 안심사(安心寺)라 이름지어졌다.
요사를 지나 절마당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소나무 동산에 둘러싸여 있고 그 오른쪽 높은 곳으로 영산전이 보인다. 대웅전의 왼쪽에 산신각이 보이고 더 들어사면 세존 사리탑과 탑비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창건 이래로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원명국사가 중건하고 조선 광해군 5년(1613)에는 비로전을 중건했으며 인조 4년(1626)에는 소암스님이 거의 허물어진 절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대웅전에 걸려있는 판목현판의 `안심사 고적 연대표`에 적혀있다.원래 비로전으로 지어진 영산전은 근래에 들면서 나한들을 모시고 있다하여 영산전이 되었다. 내부의 불단 앞에 놓인 괘불함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어있는 괘불이 보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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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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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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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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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영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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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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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대웅전에서 바라다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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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대웅전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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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대웅전
보물 제664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이다. 맞배 건물로는 이례적으로 건물 측면에 공포가 구성되어 있다. 측면을 3칸에서 2칸으로 축소하면서 본래 팔작지붕이던 것을 맞배지붕으로 개조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때 측면에 있는 공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풍판(風板)을 달아 특이한 구조를 고수한 듯하다. 이러한 변형으로 인해 정면과 후면의 공포 구조가 다르게 된 점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건물 외부는 민흘림을 가진 원형기둥 위로 창방(昌枋) 평방(平枋)을 엮고 내외 3출목 공포를 올렸다. 단청은 금모로단청(錦毛老丹靑)에 창호는 꽃살문과 우물정(井)자 살문, 판문 등으로 마감하였다. 주련(柱聯)은 없으며, 편액(扁額)은 관지와 도서는 없으나 영산전의 주련 글씨와 동일하며, 결자가 불규칙적이나 심의(心意)로 쓴 행서이다.
건물 내부는 조선시대 여느 구조와 같은 우물마루 상부에 불탁과 닫집을 배치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을 2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으며, 포벽과 반자에는 연화를 비롯한 당초문을 장엄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내부에는 소조삼세불상과 삼세후불탱, 신중탱 및 동종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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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대웅전 삼세불
안심사 대웅전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수인으로 가지는 석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 약사불, 오른쪽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과거ㆍ현재ㆍ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삼세불(三世佛)이라 칭해진다. 재질은 흙으로 빛은 소조상(塑造像)으로 얼굴이 크고 평판적이며 신체가 우람한 모습이다. 이들 모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좌상으로 17세기 대웅전 중건시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본존인 석가불은 높이가 193㎝이며 좌우의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172㎝로, 대체적으로 장중하고 투박한 느낌이다. 머리는 돌기형 나발에 원통형의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앙계주를 지니며, 얼굴은 사각형에 약간 고개를 숙였다. 두 볼은 투박함 맛을 없애기 위해 양쪽 볼에 힘껏 양감을 주었으며, 대의표현은 군의(裙衣)를 갖춘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옷주름은 매우 두껍게 표현되었다. 좌우의 불상도 각부의 조각 수법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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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대웅전 닫집
닫집은 대웅전의 규모와 불상의 크기에 비해 매우 큰 불전형(佛殿刑) 구조로, 전면 중앙부가 돌출된 정자형(丁字刑)의 물림 닫집이다. 그 모습은 양측이 절단되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돌출된 한칸과 뒤쪽의 3칸으로 나누어진다. 가구수법은 겹처마에 공포는 내5출목ㆍ외8출목으로 화려한 다포를 구성하고, 기둥 사이에는 평방과 창방으로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내부는 4칸으로 구획을 지어 각각의 포를 구성하고, 천판에는 고색의 단청으로 운용문(雲龍文)을 장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 형상이 직선적이고 허주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 일반적인 닫집과는 구별되지만, 건물의 내부 장엄에 비해 조밀한 다포의 장엄은 조선후기 불전 장엄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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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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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외부 석조물
삼성각(三聖閣) 앞에는 석탑(石塔)의 부재가 놓여 있다. 현재 안심사에는 석탑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이 탑재로 보아 과거에는 석탑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화강석을 방형(方形)으로 다듬고 윗면에 1단의 괴임이 있는데, 이 탑재는 기단부(基壇部)의 중석(中石)이나 탑신석(塔身石)으로 추정되며, 탑재의 크기로 보아 석탑의 규모는 작았을 것으로 보여지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또한 대웅전 앞뜰에는 여러 개의 석물들이 있는데, 괘불대를 받치고 있던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된 괘불지주(掛佛支柱)와 석등(石燈) 2기 그리고 어느 정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맷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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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세존 사리탑, 사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삼성각(三聖閣)의 왼편 뜰에 있는 세존사리탑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 직접 조각하여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리탑 앞에 있는 세존사리비 추기(追記 : 1781, 정조 5년)에 의하면, 탑은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동안 내려오던 중 구룡산에서 발견되어, 광우(廣祐)ㆍ등원(等元) 두 스님이 다시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한다.
대웅전 서쪽 뜰에 봉안되어 있는 탑비(塔碑)로서 탑비는 높이 17㎝의 비좌(碑座) 위에 높이 150㎝, 너비 60.5㎝, 두께 26.5㎝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높이 30㎝, 가로 95㎝, 세로 69㎝의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비 형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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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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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영산전
충북 유형문화재 제112호
조선중기 1613년(광해군 5)에 건립된 건물로 대웅전 앞 동남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安心寺毘盧殿重創序'를 통해 1613년에 창건된 후 1842년(헌종 8)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수기는 1982년 이후 없어져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전각은 17세기 초창 당시에는 안심사의 또 다른 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한 비로전(毘盧殿)이었지만, 최근 나한(羅漢)을 모신 영산전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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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내에 괘불함에 보관된 괘불
안심사 괘불
국보로 제297호
안심사 괘불은 1652년(효종 2) 조성된 것으로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괘불은 전체길이 7.51m, 전체 폭 4.87m의 크기로 중앙에 키모양의 광배(光背)를 지닌 석가모니불을 큼직하게 그린 다음,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하여 사천왕과 범천ㆍ제석천ㆍ14대 제자ㆍ용왕ㆍ용녀ㆍ벽지불(?支佛) 등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군도형식(群圖形式)의 불화이다.
주존(主尊)인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머리는 전체적으로 윤곽선만 나발(螺髮)이 표현되었다. 나지막한 육계에 비해 중간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된 것이 특징이며, 신체는 어깨가 넓고 풍만한 형태로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표현은 그다지 세련되지는 못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으며, 붉은색의 법의(法衣)와 함께 광배에 장식된 화려한 꽃무늬로 본존불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본존의 어깨 위쪽 상단에 좌우로 대칭되게 자리하고 있는 14대 제자와 신중ㆍ벽지불 등은 위쪽으로 갈수록 작게 묘사함으로써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수미단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문수ㆍ보현보살은 각각 연꽃과 여의를 들고 녹색 원형 두광을 갖추고 서 있는데, 풍만한 신체미가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각각 7위씩 협시하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표현은 평면적이기는 하나 검은색으로 음영을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인 색채는 녹색과 붉은색이 주조색이며, 본존의 광배로부터 인물에 이르기까지 사각형에 가깝게 표현하여 엄격함이 느껴진다.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안심사 괘불은 전련(전憐)의 증명으로 비구 신겸(信謙)ㆍ덕희(德熙)ㆍ지언(智彦)ㆍ진성(眞性)ㆍ신율(信律)ㆍ삼인(三印)ㆍ경원(敬元)ㆍ명계(明戒)ㆍ혜일(惠日) 등 9인의 화원이 참여하여 조성한 것이다.
1649년 조성된 청주 보살사 괘불이나 1657년 조성된 연기 비암사(碑巖寺) 괘불은 모두 신겸이 조성한 것으로 그 도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인데, 특히 비암사 괘불은 도상의 내용이 안심사괘불과 같아 이를 모본으로 하여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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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영산전내 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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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에서 바라다본 대웅전과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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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사 충혼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콘크리트 벽돌채로 기와를 올렸다. ‘충혼각(忠魂閣)’이라는 편액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각은 한국전쟁 때 전사한 군인과 경찰들을 위해 1980년대 중반 인근 부대에서 세웠으며, 매년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전각의 내부에는 이들 영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원래 영산전(靈山殿)에 있던 조선 후기에 제작된 법고(法鼓)가 옮겨져 있다.
안심사 찾아가는 길
청원 IC 또는 청주에서 507번 국도를 따라 척북3거리 조치원 방향으로 접어든 뒤 2, 3km를 지나면 왼쪽으로 ‘안심사’ 입간판이 있다. 표시대로 왼쪽 방향으로 접어들어 1.7km 정도 올라가면 안심사가 있는데,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며 자동차로 사찰 입구의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청주와는 자동차로 불과 1,20분 정도 거리에 인접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