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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은 지옥의 영혼들이 너무 안타까우셨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천사를 지옥으로 보내셨습니다.
천사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들 중 한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부인,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좋은 일 한 게 있으면 하나라도 말해 보세요.”
“하나도 없어요. 아, 참! 기억나는 게 있네요. 집에 찾아온 거지에게 양파 한 개를 준 적이 있어요.”
천사가 천국 기록 보관서에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양파를 찾아 다시 지옥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부인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이 양파가 천국으로 데려다 줄 증거물이니 한쪽 끝을 단단히 잡고 가시죠.”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지옥의 무리가 우르르 달려들어 너도나도 부인에게 매달렸습니다.
매달린 사람들의 무게로 양파 껍질이 벗겨질까 두려웠던 부인은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이 못된 놈들아, 저리 가지 못해! 착한 일 하나 한 적 없는 너희는 지옥 불에서 고생해도 돼!”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잡고 있던 양파의 껍질이 홀라당 벗겨져 다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가고 있습니까?
사랑의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주며 사람들을 섬기기 원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전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십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전도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가운데 내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위험요소가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을 가장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또 전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전도를 해야만 하는가?
또 어떤 자세로 전도를 해야 하는가?
전도를 통해 우리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전도는 능력이 아니라 심정입니다.
9:35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많은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양무리들이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지쳐있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타까운 심정, 짠한 마음에서 전도는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돌봐야 할 양들은 많은데 목자가 없는 것이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님 눈에는 지금이 바로 영적으로 추수할 적기였습니다.
농사를 지어 보면 추수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곡식이 다 떨어져서 그동안의 수고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때문에 추수할 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군들을 동원해서 얼른 추수를 해야만 합니다.
따지 않았으면 그 밤새에 내린 비에 떨어져 버릴 수있을 것입니다.
가을에 추수 때가 되면 온 동네에 비상이 걸립니다. 특히 가을걷이 즈음에 꼭 태풍이 오기 때문에 적기에 추수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추수 때 군인들도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추수를 하고 곡식을 창고에 저장할 때 정말 뿌듯하고 기뻤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전도하지 않으면 그 영혼이 사탄의 먹이가 되고, 방황하다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있을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이야말로 추수해야 할 적기입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양들이 많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병들어서 도움이 필요한 양들이 수두룩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은 영적으로 황폐하여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그 땅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한 양이 나타났는데 참 부담스런 양이었습니다.
대낮에 혼자 물 길러 온 왕따녀였습니다.
예수님이 정중하게 말을 거셨습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반응이 아주 까칠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장시간 동안 우물가 일대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선물과 영원한 생명수를 주제로 일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점점 여인의 마음이 열리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마음에서 생명수의 샘이 터졌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전도해서 데려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따녀가 사마리아의 전도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어떤 사람도 소망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과 같습니다.
“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요4:35)”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fields! They are ripe for harvest.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 이전에 관계성 맺은 양들. 또 캠퍼스에 올라가 보면 신입생 양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대학생활다운 생활도 못해보고 감옥같은 기숙사에 갇혀서 삽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바늘구멍 같은 취직자리를 얻기 위해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으로 고통합니다.
미국에서는 약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신경안정제인데 하루에 30톤이 팔린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에 취해서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이것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까 마약에 손을 댑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이태원까지 원정가서 놀다가 죄에 빠지고 나쁜 병에 감염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젊은이들을 추수하지 않으면 사탄이 다 빼앗아 갈 것입니다.
이단들이 스스로 추수꾼이라고 하면서 순진한 영혼들을 늑탈해 갑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하느님은 우리를 이 시대에 추수할 일꾼들로 세워 주셨습니다.
12제자들도 대단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훈련을 통해서 후에 큰 일군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장차 전 세계 영혼들을 추수하는 큰 일군들로 성장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간절한 목자의 심정, 절박한 심정만 있으면 누구나 전도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두부 전도왕』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순천에서 두부를 들고 다니며 전도하시는 반봉혁 장로님의 책입니다.
그분은 과거 술취함과 방탕함 가운데 있다가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왜 두부전도를 하는고 하니,
두부는 말랑말랑해서 사람들이 두부를 받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또 교도소에서 막 나온 사람이 두부를 먹잖습니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처럼 복음을 영접하면 다시 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전도합니다.
이렇게 전도해서 한해에 30명, 많게는 70명씩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교회를 세 개나 건축하고, 배를 타고 낙도를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자살직전의 여인, 전과 29범의 범죄자,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전도가 어렵지만 전도하고 돌아올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를 물에 빠진 강아지에 비유합니다.
강아지를 물에 밀어 넣으면 처음에는 안 들어갈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막상 물에 들어가면 너무나 태연하게 개헤엄을 친다는 것입니다.
전도도 처음에 나가기가 두렵지 막상해 보면 전도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전도이니 얼마나 귀합니까?
하느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이 시대에 목자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전도해서 추수하는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전도할 때 주님이 주신 권능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10: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현장에 보내시면서 무조건 등만 떠밀지 않으셨습니다.
가미가제식으로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능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하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 권능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앞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만납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3:6)
그러자 그 병자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서 걷기도 하며 뛰면서 하느님을 찬송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권세를 의지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람들이 베드로를 우러러 보자 베드로는 말합니다.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사도3:12,15)”
베드로에게 무슨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계집종 앞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28:18). 그 예수님이 전도자에게 권능을 부어 주십니다. 전도할 때 이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19,20절에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 했습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면 권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도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영적권세를 의지할 때 능히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양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김요나단 목자님이 20학번 신입생 수학과 장OO 형제를 만나 교제하고, 교회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신입생 양을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처럼 목자를 기다리는 양들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이 없네, 말재주가 없네. 능력타령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권능을 주셨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믿는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로마서 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믿는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처럼 귀한 복음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전해서 권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40일 앞으로 다가온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이런 권능이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간절히 기도합시다.
셋째로, 전도할 때 거저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라”
전도할 때 가장 먼저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천국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합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천국복음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각 사람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문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합니다. 영육 간에 병들고 고통하는 문제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양들의 이런 문제를 씨름하며 돕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면문제를 터치하면 양들이 반발합니다. 연락을 끊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대일 한두 번 해 서 양들이 금방 변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회 한 번 데려간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엎치락 뒤치락해야 합니다. 2년, 3년, 5년, 6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갑니다. 때로 손해의식이 듭니다. 보상심리가 생깁니다. 꼭 이렇게까지 퍼주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그래도 그 양들이 소망 가운데 자라면 좋은데, 뺀질거리고, 목자의 마음을 후비는 말을 하면 양을 돕고 싶지 않습니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고, 전도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잘 나서,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았습니다. 값없이 공짜로 받았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내가 어떤 의를 행한 것도 아닌데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오직 긍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도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거저주어야 합니다. 어떤 댓가도 바라지 말고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많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23-27절에 보면 그가 받은 고난목록이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복음 전하기 위해서 이처럼 많은 수고를 했지만 대접은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키운 제자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매도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전도를 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쏘리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행전 20:23,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목숨을 걸고 전도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전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
은혜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값없이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나 감사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은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4,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
그는 빚진 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핍박자요, 박해자로서 심판 받을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도의 열정과 심정이 있으면 또 전도의 열매가 맺힙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모니카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분들이 소감발표를 하는데 2시간가량이나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저도 모니카 할머니의 섬김을 많이 받았는데 수많은 대학생들이 그 집을 드나들며 할머니의 사랑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한 손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한 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저희 아이들을 붙들고 항상 찬송가 27장을 불러 주셨습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 나네 해같이 빛 나네”
모니카 할머니는 해같이 빛난 주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몸이 부서져라 헌신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은 한 마디로 “거저 주는 인생”이었습니다. 22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남편 사랑도 받지 못하고, 92세까지 자녀들, 손주들, 증손주들, 많은 선교사님들, 또 그 선교사님들의 자녀들, 목자들의 어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고, 온통 헌신하다 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피해자로서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에게서 한번도 슬픈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웃고, 기도하시고, 찬송하시고,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그 심령에 예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구보다 많은 상급을 받으실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점하나 남기고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모니카 할머니는 정말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저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 생명을 거저 받았습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았습니다.
선배 목자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거저 주어야 합니다. 거저 주는 인생은 결코 손해 보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것은 받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고 자신의 목숨조차 많은 사람의 대속제물로 주셨습니다. 이로서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자기자신도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앉는 축복을 덧입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행20:35).
어짜피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갑니다. 주기 싫어도 주고 가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왕 줄거라면 기쁨으로 주어야 합니다. 줄 수 있을 때 빨리 주고, 베풀 수 있을 때 힘껏 베푸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때 다른 사람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합니다. 이것이 남는 인생이요, 정말 복된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는 인생이요,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는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맨 마지막 절 42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소자 한 사람에게 전도하고 그를 키우는 것은 해산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상급을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전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헌신이 필요하고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도를 통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낌없이 주고 베푸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로서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상급을 쌓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거저 나눠주므로 많은 열매를 맺고 천국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을 죽기 전에 자신이 살던 사회에 내어놓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금동서(古今東西)가 다르지 않습니다.
동패낙송(東稗落誦)이라는 문헌에 보면 무일푼으로 살림을 일구고 절약하여 모은 남양 장씨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번 수천 섬을 행려 병자 치료비와 가난한 자들을 먹여 살리는데 썼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내가 모은 재물도 알고 보면 다 여러분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노인들이 평생 모은 거금을 학교재단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잊을만하면 보도되곤 합니다. 살벌해진 세상의 살기(殺氣)를 거두어가는 소식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청문회 현장은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세 살짜리 손자에게 12억 원짜리 집을 사준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20대 자식의 이름으로 수십억의 재산을 물려준 일도 있습니다. 조부로부터 받은 돈이라고 해도 공인의 자세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고관들의 자녀들은 잘 먹고 좋은 환경에 사는데도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허약한데서야 말이 됩니까. 입대할 조건에 불합격했다는 것이 그들의 수줍은 변명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숫자가 많다보니까 변명이 아니라 법적 당위가 되었습니다. 병역의 의무가 국민의 막중한 의무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은 스스로 이 땅에 살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Ⅰ. 복음전파의 우선순위를 함의하고 있는 명령 입니다.
본문 10장 5-6절에 『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는 한시적 명령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어야 한다는 구원의 순서를 역설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9-10절에 『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은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옛 북이스라엘 수도인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복자 "살만에셀"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고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이주시켜 혼혈족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아니했습니다(요 4: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선민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메시야 도래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 라는 설교 원칙을 정했습니다. 전도가 자신의 가까운 골육부터라는 원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먼저 자기 골육(종족)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는 골육부터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Ⅱ. 이적은 복음전파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장 7-8절에 『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고 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은 복음전파의 준비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눅 17:21).
이것은 심령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여기 『 천국 』은 장차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는 아직 그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가까왔다고 전파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전파의 핵심내용입니다.
복음전파 과정에 네 종류의 이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병든 자를 고치고 ② 죽은 자를 살리고 ③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④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 『 죽은 자를 살린다 』는 것은 예수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사명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욥바에 있는 다비다가 죽었을 때 베드로가 살려주었던 기적이 여기에 해당됩니다(행 9:36-41).
이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기사(奇事)(테라스)입니다.
놀랄만하고 희한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놓고 시비하는 자들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그 방법을 곡해하였지만 그 확실성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의심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적이 많아지면 이적이 못되고 보통사례가 됩니다. 따라서 이적의 희한성과 희소성은 이적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2) 표적(表蹟)(세메이온)입니다.
이적의 다른 이름이 표적인데 이적을 행한 자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는 생산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로 걸으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남편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생명과 기쁨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이적입니다.
이적은 예수 자신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행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적이 기독교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환난 날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와 함께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교회)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3) 능력(能力)(듀나미스)입니다.
이적의 다른 표현이 표적이라면 이적의 현장역사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신 창조적 능력을 말합니다.
이적이 어느 시대나 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지자들이라고 해서 다 이적을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으나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요 10:41).
신학자 "풀러"(Fuller)는 이적은 어린 교회의 강보라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하기를 "농부가 어린나무를 심고 그것이 어릴 때엔 울타리를 두르나 그것이 자란 후에는 걷어 치운다. 그와 같이 교회가 어릴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주셨으나 장성한 후엔 그것을 치우셨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Agustinus)은 초기에는 이적 자체를 부인하면서 "너는 이 이적을 믿으라. 곧 이적 없이 세계가 회심(回心)하게 된 이적을"이라고 했습니다. 이적의 최대 표징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Ⅲ. 기적에 대한 자신의 소유의식을 버리고 존재의식을 가지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10장 8절에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사역자와 모든 교인들이 가져야 할 대원칙입니다. 제자들은 서민들이었습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다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이적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자들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하던 교역자가 큰 교회를 하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받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능력은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나에게 있는 능력에 대해 존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존재의식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실존양식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소유의식은 극히 정상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칙적으로 존재를 소유해서도 안되고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존재이지 인간의 소유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은 그 능력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존재에서 오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은혜는 대가없이 거저 받는 공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기적과 축복이 바로 존재로부터 오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엡 2:5).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딛 2:11). 그 은혜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행 20:32).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행 15:11).
에베소서 2장 8절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9절에 『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무차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무런 댓가없이 거저 받는 은혜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주체인 나와 객체인 무엇과의 관계가 모두 지속성과 영원성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와 무엇이라는 객체는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케 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살후 3:2).
그 믿음의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15).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벧전 1:5).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라고 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 존재는 받는 것이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요일 3:16).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흘러가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있다더니 달의 땅을 파는 천체 부동산업자가 등장하고 화장한 유골을 우주에 뿌리는 희망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밤하늘의 별을 파는 별장사가 있다고 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파는데 산 사람의 이름을 붙여 소유증을 준다고 합니다.
고대 희랍의 여류시인 "사포"는 당신의 별이 너무 밝아질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별이라고 읊었습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작가인 "반데르포스트"의 소설에 보면 부시맨들은 성인식에서 주술사로부터 자신의 별을 제물로 주고 산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장차 밤하늘의 별 주인이 많아질 조짐입니다.
얼마 전에는 세종대왕도 별 이름을 얻어 우주로 진출했다고 합니다. 거저 존재하는 별을 거저 주어야지 팔고 사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존재는 소유할 수 없고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모든 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그것은 당연히 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만 합니다. 드릴 때는 내가 받은 것처럼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해서도 그 사랑은 여전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고 확정적입니다(롬 5:8).
마태복음 10장 37절에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드린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교회운동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 밖에 다른 방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거저 받은 내 목숨, 거저 받은 내 능력, 거저 받은 내 소유, 거저 받은 내 축복, 거저 받은 내 명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저 주고 또 주께로부터 거저 받읍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태복음 21장에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온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호산나”라고 외친다. 이어서 12절~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복음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서양의 기독교는 서양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의 모습을 금발과 파란 눈의 인자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나는 위의 마태복음 21절을 읽으며 정말 그런 이미지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위 기록의 장소는 신전 바깥 모습, 소위 말하는 이방인의 뜰이다. 그곳에서는 많은 거래가 오갔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명목하에 물건을 사고팔며, 이방에서 온 사람들의 돈을 바꿔주고 제물로 드릴 비둘기를 팔았다. 나는 심지어 사람들이 제물로 동물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은 상인들에게 수수료를 받고 그 동물에 흠이 있다고 거절하며 다른 동물로 바꿔오라고 시킨다는 얘기까지도 들었다. 이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추락한 본성과 죄짓는 성향 때문에 제사장 중에 그런 사람이 분명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상인들이 하던 일은 당연히 자선 사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윤을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위 구절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의 의미는 그들이 이윤을 위해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윤이 도적들에게도 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것이 돈벌이, 이익, 구매, 수익을 위한 판매가 될 때는 뭔가 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어떤 종교, 작가, 예술가 혹은 회사의 특정 인물을 지목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행동의 이유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의 거물급 기독교인과, 같은 그룹의 계열사인 세속적인 소유자들의 미국(그리고 아마도 세계) 성경 출판사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많은 비슷한 출판사/신문사를 소유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것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소유 그룹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고, 주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수익을 남기는 게 목표이다. 하나님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독교 단체나 기관은 당연히 이런 목표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목회와 막대한 이윤 창출은 공존할 수 없다! 만일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수많은 “목회”가 하는 일을 보시고 뭐라고 생각하실까? “5권 구매 시, 1권 무료. 말씀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만 단돈 10불. 장정판 50% 할인.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들이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내용이라면(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왜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가? 인터넷에서 모든 걸 무료로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왜 무료로 만들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것들(강의, 음악 등)을 돈을 받고 판매해도 된다는 내용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목회를 하도록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 부분에 대해 확실히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0:8-10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는 돈을 요구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셨으니, 우리도 이윤을 남기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위해 노래하거나 글을 쓰거나 목회를 하도록 재능을 주셨는가(모든 기독교인이 그렇지 아니한가)? 여러분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책, CD 등의 인쇄/제작을 위한 비용이 들며, 가격은 출판사/제작자가 책정한다)을 판매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로열티를 받지 말고, 전 세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무료 즉 온라인으로도 유통해야 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한다! 복음의 가격은 “무료… 이윤을 추구하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제에게 하느님의 능력을 주어 파견하시며
세 가지 능력과 세 가지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을 세 가지를 주셨는데 그 세 가지가 뭐냐!
치유능력, 구마능력, 말씀선포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제들에게 영적무기를 들리지 않고 그냥 내보내실 리가 없습니다.
세 가지의 엄청난 능력을 주시면서 세 가지 걱정과 세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그 세 가지 당부가 뭐냐!
첫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둘째, 전대에 여행경비나 돈을 지니고 다니지 마라.
셋째, 일꾼들이 자신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유다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을 랍비라고 하는데 랍비는 원칙적으로 돈을 받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그 근거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율법에 대한 계명을 거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규정에 랍비는 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거저 받었으니 거저 주어라! 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일까요, 하느님 것일까요?<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말끝마다 내차, 내 몸, 내 돈, 다 자기 꺼 라고 합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교만을 떱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가득히 쌓아놓고 창고가 모자라 하나를 더 지어 창고에 쌓인 곡식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건방진 놈!
영혼까지도 지꺼라고 합니다.
‘내 영혼아, 이제부터 싫컷 놀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이때 하느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오늘 밤에 네 숨통을 끊어 놓으리라!
그러면 네 창고에 가득히 쌓인 곡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느님의 사람이냐, 세속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인 대명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세속의 사람이요.
사랑의 대명사를 많이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세속의 사람은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어도 사고방식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중심입니다.
내 돈, 내 자식, 내 몸뚱아리, 내 자신....
교만하게 지 영혼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
교우와 이야기를 해보면 느껴집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구나!’
이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곳이요!
자식은 성모님의 자식이요.
내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요!
늘 양보대명사를 씁니다.
내 몸, 내 자식, 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재주 없는 사람 없습니다.
저기 호수마리아는 꽃을 잘 가꾸고~~
그 집에 갔더니 열대 야자수를 잘 키워 놓았어요.
어떤 자매는 뜨개질을 잘 하고~~
저기 요셉피나는 초 만드는 데 도사가 되었지요.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데.....
단추토마스는 무슨 재주가 있어요?
알루미늄 만드는데....음, 틸다는 무슨 재주?
재주가 있으니까 학교선생님 하겠지!
사제도 다 재주가 있는데 여기 있는 저를 보시면 재주가 많은 것 같습니까?
아주 지겹게 많아~~
그래서 얼마나 인생 피곤하게 사는지....무재주가 나아!
내가 가진 이 달란트, 내 꺼예요? 하느님 거예요?
<하느님 거예요.>
그럼 그 재주 봉헌하세요.
생색내지 말고 봉사하라~~ 그 뜻이예요.
너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거저 받은 것 가지고 생색내지 말아라!
니가 가진 것 니꺼라고 생각하니까 티내고, 왜 그러냐~~
랍비는 조건을 붙이지 말아라!
제가 경상도, 전라도...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하면서
언제 조건을 붙였던가!
아닙니다.
3-40명 모인 곳이나 3-4천명 모인 곳이나 똑같은 열의를 가지고 강의에 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사제에게 말씀선포능력을 주시면서 말씀의 카리스마를 주셨는데....
어느 신부나 그것이 내 것이라고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
나는 500명 이하는 피정 안 하겠다.
강사료가 얼마냐?
이렇게 교만을 떨기 시작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거두어 가십니다.
말씀의 카리스마를 가진 사제나 평신도회장들이 유명해지고
스타가 되기 시작하면 조건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몇 명이나 되냐~~
우리 성당은 시골이라 200명도 안 될 것 같은데요! 기껏 200명도 안 되냐~~
어느 경우에는 ‘내 책부터 판매해 줘야 한다.’
하면서 책부터 수백 권을 먼저 내려 보냅니다.
이렇게 조건을 붙이면 망쪼가 드는 겁니다.
어느 곳에 피정을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유명한 어느 신부가 피정을 다녀갔는데
강사료를 줬더니 차를 타기 전에 봉투를 한 번 만져 보더래요.
1분 뒤에 차를 돌려 다시 오더니 차창 밖으로
돈을 훽~~ 던지고 가더랍니다.
그 신부 돈 몇십만원 덜 받았다고~~
교우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물질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마라.
오늘 세 가지 능력 첫 번째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봉사한 후에 우리는 티내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어디 가서 봉사하면 일주일은 참지만 입이 근질근질하여 대모님에게 전화를 겁니다.
“대모님께 이거 말해야 되나~~ 내가 꽃동네 다니는 것 아슈?”
“어머나~~그랬어?”
“꽃동네에서 제가 똥오줌 좀 치고 있네요...그런데 이것 대모님만 알고 계세요..우리 수녀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요!”
이건 내가 이쁜 짓 한 것 소문 좀 내달라는 뜻이지
신부님 귀에 들어가서
“요즘 마리아가 이쁜 짓 하고 다닌다며?”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것 없습니다.
하느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둘째, 전대에 여행경비나 돈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옛날 의복은 허리띠를 했어요.
전대는 허리띠인데 거기에 돈을 넣어 묶고 다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자리에 당신 이외의 물질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나라에 대한 그 태도를 확실히 하라!
물질을 첫째 자리에 두지 마라!
'무소유‘ 란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내 꺼로 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제게도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죽고 난 후 장례미사에 온 신자들이 왔다가 돌아가면서
“글쎄 오늘 돌아가신 김신부님은 가진 것이라고는 수단 한 벌하고 구두 한 켤레가 그 양반 전 재산이래.”
그건 불가능 할 것 같아요!
혼자 사는 몽둥아리가 왜 이리 짐이 많은지~~
옮길 때마다 누구 주고 해도 옷장 안에는 1년 내내 한 번도 안 입는 옷이 왜 그리 많은지~~
본당의 날 같은 때 다 짐을 정리를 해도 왜 그리 자꾸 늘어나는지~~
여러분, 법정스님 아시죠?
그 분과 제가 친교가 있는데 어느 날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어요.
지금 강원도에 움막을 짓고 혼자 살고 계신데....
재래식 화장실에 귀뚜라미와 벗하며 지내십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성북동에 있는 요정을 개조해서 만든 길상이라는 곳에 오시는데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서울의 어느 사장님이 난을 하나 선물로 주셨답니다.
난 한 뿌리에 500만원인데~~
와~~그게 웬수가 되었답니다
그것 때문에 어디 갈 수가 있나~~
아침마다 닦아주고 어디가면 난을 누가 훔쳐 갈까봐 들고 다닌 적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난이 뭔데~~’
그래서 난을 도로 갖다 주고 나니까 두 다리를 쭉 뻗고 잠 잘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소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어도 주인은 하느님이다.
거저 받은 것이라도 내 재산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재산 내가 머리 굴려 모았는데요?’
그럼 신경 쓰라고 준 그 머리는 누가 주신 거예요?
하느님이 주신 거예요.
성서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기보다
힘들다고 그랬지요?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김신부의 방법!
먼저 그 큰 놈의 낙타를 토막을 쳐서 불에 구워요.
그럼 뼈만 남겠지~~
그 뼈를 절구에 빻아 가루를 만든 후 바늘귀에 깔때기를 꽂은 다음
가루를 깔때기에 불어 넣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먼저 죽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성령의 불로 태워서 가루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전대에 여행경비나 돈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그 뜻은
크리스천의 첫 번째 관심은 물질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임을 늘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려면
첫 번째, 죽어야 한다.
두 번째, 성령의 불로 태워야 한다.
세 번째, 가루가 되어야 한다.
천국의 문이 좁다지만 다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일꾼은 자기 먹을 것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
랍비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랍비의 기본생활을 뒷받침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 먹고 살기가 힘들지요?
하루 벌어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제가 양식과 끼니 걱정을 하지 않도록~~
예수님의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사제가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항상 돈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하시며 사제에게 의무를 부여하십니다.
사제는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신자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느냐!
동시에 우리도 넓은 의미의 사제직을 받았기에
이 세 가지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제의 세 가지 의무
첫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둘째, 전대에 여행경비나 돈을 지니고 다니지 마라.
셋째, 일꾼들이 자신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을 파견하면서 하신 이 말씀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가 제자들의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전파되길 바라셨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초대 그리스도교 사도들은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했고, 지금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의 선행은 신앙에 대한 징표이자 초대인 것이다.
40여년간 장애인과 한 평생을 보낸 한 수도자는
『참다운 행복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 가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며 참된 나눔은 「동정」으로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루가 10, 27)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가득할 때 올바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당장 먹을 끼니가 없는 이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수백 번 수천 번을 입으로만 외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행위는 나눔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무를 받았다.
「사랑실천」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하는 의무인 것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고,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또한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면서 가난한 이들이 곧 주님이심을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바오로 성인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까?』(1고린 4, 7)라고 물었듯이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잠시 받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월 마지막 주일인 26일은 사회복지주일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가난한 자로 만들어 아낌없이 내어놓아 서로 나누자는 주일이다.
이날 2차헌금은 국내외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큰 밑거름이 된다.
각 본당에서 모아진 작은 정성이 큰사랑으로 바뀌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지금 세계는 가난이 휩쓸고 있다.
올해 사회복지주일에는 조금 더 사랑을 보태는 적극적인 사랑실천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자.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어느 분들은 예수님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이 말씀을
너희가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주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남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판단을 합니다.
전형적인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기실 일전의 어느 분이 FaSS 세미나 광고를 보고
회비를 받는다는 것을 놓고
아니 거저 받았으면 거저 주어야지
왜 회비를 받으려고 하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진리를 알린다는 마음에 회비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다고 회비를 받는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각자 마음에 선한대로 하면 됩니다.
요지는, 진리의 기록인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세미나 할 때 회비를 받지 말라 받으라는
기록으로 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눈이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는 일을 거저 받은 대로 거저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 아, 그것 봐, 병을 고쳐주고는 돈을 받지 말라지 않는가?
생각하겠지요.
병을 고쳐 주고, 돈을 받고 안 받고는 이 말씀과 상관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전에는 영적으로 병든 자요,
죽은 자요, 문둥이요, 귀신들린 자였었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선물'로, '거저' 고침을 받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가 했던 똑 같은 생명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거저'로, 구원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부모로부터 값을 치르고 생명을 받지 않고
또한 자식에게 생명을 줄 때 값을 받고 낳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생명의 전달입니다.
거저 받은대로 거저 주는 것,
이것이 생명이 전달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엡2: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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