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섭(1916~1956)미술관 / 해설사 김진성
반갑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 이중섭미술관에 오신 여러분들께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곳은 이중섭 화가의 예술혼과 천재성을 기리기 위해 2002년 ‘대향이중섭’ 으로 개관한 이후 2004년 1종 미술관으로 등록, 현재 ‘이중섭미술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2년 3월 현재 이곳에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 원화는 은지화 27점, 유화 15점, 편지화 2점, 엽서화 10점, 수채화 2점, 드로잉 4점 등 총 60점이 있습니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송천리에서 부유한 집안의 삼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납니다. 민족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임용련·백남순 부부를 만나 미술 수업을 받고, 1937년 일본으로 유학가 동경 소재 ‘문화학원’에서 서양미술을 공부합니다. 재학시절인 1939년 학교 이년 후배였고, 그 후 부인이 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납니다.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전쟁에서 폐색이 짙어진 일본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징집령을 내립니다. 일본에 있던 이중섭은 징집을 피해 1943년 8월 고국으로 홀로 귀국합니다.
● 가족과 함께 제주에서의 생활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을 거치며 자신의 고통과 고뇌를 독창적인 예술 언어로 승화시켜서 화폭에 담아내는데요, 특히 서양 표현기법을 배워서 우리 민족 고유의 감수성과 정서를 담아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합니다. 북쪽의 도시인 원산에서 살던 이중섭은 어떻게 한반도의 남쪽 끝 이곳 제주에 오게 됐을까요. 1950년 6·25전쟁으로 피난 길을 나서게 됩니다. 12월 6일 원산을 떠나 12월 9일 부산에 도착, 피난민 수용소에서 약 한 달간 지내게 됩니다. 이후 정부의 피난민 소개령에 의해 1951년 1월 15일 기항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 제주에 도착합니다.
카톨릭 종교단체 수녀들의 권유로 1951년 1월 19일 서귀포 성당에 도착, 당시 송산동 반장이었던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빌려준 약 1.4평의 방에서 가족들과 지냅니다. 서귀포에서는 약 열 한 달을 머물렀는데요, 피난민이었기에 종교단체가 주는 배급과 이웃 주민들이 건네준 고구마, 보리쌀로 겨우 생계를 유지합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의 부인 이남덕여사는 1951년 12월 말경 부산으로 돌아갈 때 집주인 김순복여사에게 “가족들과 함께 지낸 서귀포에서의 생활이 원산에서 결혼하고 지낸 5년여의 생활 보다 더 행복했다.”고 작별인사를 했다고 전합니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고자 1951년 12월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갑니다. 부산 피난민 수용소 생활 중 아내는 폐결핵에 걸리고, 각혈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지만, 전쟁 중이어서 치료는 힘들었습니다. 그즈음 이남덕여사는 친정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과 유산 상속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으로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고, 1952년 6월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갑니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부산, 통영, 진주, 대구 그리고 서울 등을 다니면서 의욕적으로 창작활동에 열중하지만 그의 유랑생활은 고독하고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중섭은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만 40세의 짧은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게 됩니다.
● 이중섭의 엽서화와 사랑
이중섭 특유의 예술성은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편지화, 은지화, 엽서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 엽서화를 통해서 젊은 청년 이중섭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전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일본에서 고향인 원산으로 귀국한 이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일본인 애인 마사코에게 청혼을 합니다. 연애편지처럼 사랑의 감정을 담은 엽서를 그림과 함께 바다 건너 일본으로 보냅니다. 엽서화 중 ‘사과 따는 남자’는 능금 곧 사랑을 따는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무제 1943’은 보름달처럼 둥근 애인의 옆에 심기 불편한 사내아이의 모습과 그 아래 천진스런 아이를 작게 그리고 있습니다. 헤어져 있지만 너를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지낼 거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엽서화 ‘토끼풀’에서 토끼풀은 애인을, 양쪽의 꽃과 줄기는 이중섭의 손과 팔로 포옹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풀밭위의 소와 사람들’은 강한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소가 된 이중섭이 자기 애인을 발로 누르고 뭇 남성들을 뒷발질로, 앞머리로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내겠다는 사나이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 작품입니다.
엽서화를 통한 이중섭의 사랑 고백에 그의 애인 마사코는 조선과 일본사이 연락선을 힘겹게 얻어 타고 현해탄을 건너 한국에 오게 됩니다. 중섭과 마사코는 1945년 5월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조선 전통의 혼례식을 치릅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건너온 덕이 많은 여자’란 의미로 ‘남덕(南德)’이란 한국식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 주고 일본 이름을 쓰지 말라고 했답니다. 남덕과 함께 한국에서 자손을 번창하고 큰 가족을 이루어 내자는 중섭의 희망이 담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중섭은 일본을 떠날 때 마사코에게 사랑의 징표로 자신이 사용했던 ‘팔레트’를 남기는데요, 2012년 이남덕여사는 이중섭 미술관을 방문하고 그때 받은 팔레트를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엽서화는 2018년 총 88점이 확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