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79문
제 79문 왜 그리스도는 떡을 자기 몸이라고 또 잔을 자기 피 또는 자기 피를 통한 새 언약이라고 일컬었으며 바울은 왜 떡과 잔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연합, 교제)라고 불렀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중요한 이유 없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성만찬을 통해 한 비유 곧 떡과 포도주가 몸의 생명을 부양해 주듯이 우리 영혼이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과 그의 흘리신 피가 음식과 음료가 되어 이를 통해 영생으로 자라게 한다는 비유를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이 가시적(可視的) 표시와 보증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곧 우리가 육신의 입으로 이 거룩한 표시를 기념으로 받을 때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함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마치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인격 속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고 처리한 것 마냥(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지불하고 하나님을 만족토록 한 것 마냥) 너무나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됨을 확신시켜 줍니다.
-Cur ergo Christus panen appellat suum corpus, calicem vero suum sanguinem, seu foedus per suum sanguinem: Paulus item, panem et vinum, communionem corporis et sanguinis Christi?
-Christus non sine gravi causa sic lopuitur: Videlicet, non solum ut nos doceat, puemadmodum panis et vinum, corporis vitam sustentant: sic etiam crucifizum suum corpus, et effensum suum sanguinem, vere esse animae nostrae cibum ac potum, puo ad vitam acternam nutriatur: Verum multo magis, ut hoc visibili signo ac pignore nobis certum faciat, nos non monus vere, corpus corporis et sanguinis sui, per operationem Spiritus Sancti, participes esse, puam sacra ista symbola, in eius memoriam, ore corporis percipimus: Tum etia, puod eius passio et obedientia, tam certo nostra sit, puam si ipsimet pro nostris peccatis poenas dedissemus, et Deo satisfecissemus.
( 해 설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에서 태어나셨다면 성만찬식에서 무슨 음식을 사용하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떡과 막걸리라고 대답한다. 또 실제로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그렇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하면 틀렸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떡과 포도주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식에 속한 것이었다. 우리는 막걸리를 주식으로 마시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식은 밥과 국이 주식인 것이다. 만일 막걸리를 성찬식에 사용하는 경우 그것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밥과 국으로 세우셨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에 태어나셔서 떡과 포도주로 세우셨다. 만일 밥과 국으로 거행하셨다면 매우 불편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볼 때 예수께서 팔레스타인에 태어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왜 예수께서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
우리가 이미 앞서 살펴본 대로 성만찬식은 화체설이나 공재설로도 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 은유법에 강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단순한 은유법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고 본질이 거기에 함께 하느냐 않느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Ursinus는 이런 물음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1) 떡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에는 유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주식이던 떡과 포도주는 이 생애의 생명을 부양해주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를 영생으로 양육한다. 2) 떡과 포도주는 입으로 받아먹으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영혼의 입인 믿음으로 받아먹는다. 3) 떡이 이로 씹히어 잘게 부수어자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부수어졌다. 4) 떡과 포도주가 식욕이 없으면 먹거나 마시지 못하듯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5) 한 끼의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곡식이 필요하고 한 잔의 음료 포도주를 위해서 수많은 포도가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1)
2. 새언약과 신비한 연합
여기서 문제는 왜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새언약’으로 표현했고 바울은 ‘교제’로 표현했나에 대한 것이다. 새언약인 이유는 성만찬식이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구약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의 유대인들은 외적인 차원에서 율법을 지켜 완전한 데로 도달하려고 했지만,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했지만, 지금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간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찬식은 이 인간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 변화를 일으킨다는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만찬은 이 신비한 연합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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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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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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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약속의 말씀
◇◇◇◇◇ 예수를 봄 (집례자)
◆예수그◆ →→→→ ▣▣▣
◇리스도◇ ←←←← ▣나▣
◆의표징◆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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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의 말씀
떡과 포도주 ↘↖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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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
◎예수그◎
◎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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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 때 목사님이 약속의 말씀을 읽어주시며 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음을 가지고 떡과 포도주를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루신 구원 사역을 깨닫고 내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여 그 분과 신비한 연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의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합당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이 바로 ‘전가적 칭의방법’인 것이다.(Zurechnung, imputativa iustitia). 즉 예수를 믿는 우리를 즉 예수와 신비한 연합을 이룬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고 그 순간부터 성령의 사역이 내 속에 일어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범신론적인 오류를 범하나다. Osiander는 칭의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神性이 그리스도의 人性이라는 통로(Kanal)을 통하여 내려와 믿는 자 속에 본질적으로 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리스도의 본질이 그리스도인 속에 본질적으로(wesenhaft)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Calvin, Melanchthon등은 이 칭의론에 대항해서 강력히 싸웠다. 흥미로운 것은 통일교 구원론의 구조가 이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즉 문선명의 피를 받아야 죄가 탕감되고 정결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겐 피가름이 필수적이다. 구원자의 본질을 받아야 하니까(infusa iustitia).
그런데 성경은 우리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칭의함을 가르친다. 즉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순종을 보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언도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가 하나님의 법정 선언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고 가르친다.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롭다고 칭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통해 칭의함을 받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찬식에서 이 사실을 기억해야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