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카데미 제10회 강좌 요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페미니스트 에세이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박희진
모더니즘의 기수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소설가 울프가 마흔일곱이라는 나이에 내어놓은 이 글은 비소설류의 산문이다. 1928년 5월 울프는 옥스포드의 여자대학 뉴넘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케임브리지의 여자대학 거튼에서 또 한 번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을 토대로 그것을 수정 보완한 글이 이 에세이이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118쪽의 이 책자는 주제나 형식면에서 모두 특이하다. 이 글은 오늘날 1920년대 영미계 페미니즘의 결산으로 간주되어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 청탁받은 강연의 제목이 ‘여성과 소설’인데 왜 ‘자기만의 방’으로 고쳤는가에 대해서 추궁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위의 제목이 지나치게 거창하니까 차라리 자그마한 의견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옥스브리지에서 점심 초대가 있는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300여 년간 잘 다듬어진 잔디 위는 남자만 걸을 수 있고 여자는 거친 자갈길만 다닐 수 있으며, 여자는 도서관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같은 날 저녁식사는 여자 대학인 뉴넘에서 하게 되어 있었는데, 두 군데서의 식사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2장의 세팅은 대영박물관이다. 화자의 숙모가 사망해서 연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다. 이날(1919)은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던 날이기도 하다. 고정 수입 500파운드가 생긴 이후 필자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검은 뱀인 분노가 증오와 함께 스러지고, 화자는 그 동안 그렇게나 분노를 끓게 한 남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또한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독점한 돈과 권력은 그 속성상 소유한 자들의 간을 뜯어내고 허파를 쪼아먹기도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공포와 한에서 연민과 관용의 단계를 넘어 가장 위대한 해방,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역사가에게 구체적으로 엘리자베스 조 영국에서 여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고 하면서 여성 문학사를 더듬는다. 유명한 영국의 사학자 트레벨리언 교수의 『영국사』에 기록된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1470년경부터 고찰해 나간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누이동생 주디스도 이 장에 등장한다.
4장의 세팅은 아직도 대영박물관이다. 드디어 18세기 말엽 아프라 벤(Aphra Behn, 1640~1689)이 등장해서 처음으로 직업 작가가 된다. 이 사실은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난관들을 극복해 나갈 방향 제시를 하고 있는 5, 6장은 이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울프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5장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처음으로 카마이클이라는 여성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글을 쓴다. 필자는 앞으로 100년은 더 지나야 참다운 여류시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한다.
마지막 장인 6장의 때는 1928년 10월 26일이고 장소는 런던이다. 필자는 ‘양성론’을 들고 나와 결론을 대신한다. 작가란 모름지기 셰익스피어와 같은 양성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작가 자신의 성에 대해서조차 걸림이 없이 글을 씀으로써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울프는 이 책자에서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인 독립은 투표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생각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척추 속의 램프, 즉 우리의 정신활동에 불을 밝힐 수 없다”고 힘주어 이야기하는데, 이 견해는 작품 도처에 되풀이되어서 나타난다. 즉 소설 예술이라는 것이 거미줄과 같은 것이어서, 가볍게이기는 하지만, 네 귀퉁이가 모두 실생활에 달라붙어 있다고 운을 뗀다. 계속해서 예술이 보기보다 건강, 돈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물리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한 경제적인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독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은 물론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이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저자는 여기서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남성처럼 글을 쓰고 남성처럼 살고 남성처럼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자기만의 방은 닫힌 공간이면서 동시에 열린 곳이며, 모든 사람들의 동의하에 그리고 여성 자신이 그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남성의 아량에 의해 얻은 방은 결코 정신적인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만의 방이 부여하는 긍정적인 고독 안에서 예술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양성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식면을 살펴보면 우선 여섯 개의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각 소품에는 논평이 따라붙고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한 해설이 뒤따른다. 특기할 사항은 화자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화자가 단일한 주체임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화자 ‘나’는 자기주장을 열심히 펴나가는 듯하다가는 줄임표(…) 뒤로 슬쩍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진지하고 심각해지는가 싶으면 장난기 어린 유희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글의 방식은 설명적이지 않고 암시적이며, 겸양의 제스처를 드러내며, 공격적이지 않고 방어적이다.
분노와 같은 검은 감정은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 이 작품의 세련미 넘치는 표면구조와 시공을 넘나들며 구술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스트 기법의 심심찮은 등장은 이 에세이가 다름 아닌 20세기의 글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바로 이런 스타일 자체가 절대로 사치가 아니라 무서운 비수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건이다.
그러니까 그 옛날(1579) 베이컨이 쓴, 다분히 경구적인 최초의 영미계 에세이로부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에세이라는 장르의 글이 실로 멀리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리하여 역사, 풍자, 문학비평 그리고 자기 고백이 뒤섞여 있는 이 글은 작가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내게 된다. 싸르트르가 말하는 소위 작가의 ‘상황(situation)’의 분석을 가능케 해 준다. 즉 울프라는 작가가 그녀가 받은 교육, 그녀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문학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성장한 인물인가, 그녀는 이 모든 역류에 어떤 방식으로 항거하며 자신을 주장했으며, 이 항거 자체가 그녀의 인격을 어떻게 연단했는가를 우리는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원래 그 정의가 헐렁한 에세이라는 장르가 최근에는 장르 허물기의 경향마저 두드러져서 이와같이 특이한 형태의 에세이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