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위치: 스칸디나비아반도 서부
인구: 5,529,455명 (2023년 추계)
수도: 오슬로
면적: 385,186㎢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노르웨이 왕국 (Kingdom of Norway)
기후: 해양성기후
민족 구성: 켈트족, 게르만족
언어: 노르웨이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단원제
종교: 복음루터교(85%) 기타 15%
화폐: 노르웨이 크로네 (NOK) 환율계산기
국화: 전나무
대륙: 유럽
국가번호: 47
GDP: USD 443,252,000,000
인구밀도: 17명/km²
전압: 220V / 50Hz
도메인: .no
노르웨이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유럽의 국가. 국토 중앙과 남서부가 넓은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다. 국민 대다수는 노르웨이인이고, 공용어는 노르웨이어이다.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이며, 화폐단위는 노르웨이크로네이다. 전통적인 어업 및 임업 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업과 제조업이 증가했다. 주로 서비스업·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업·경공업·중공업에 기반을 둔 경제가 발달했다. 포괄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토 회원국이다. 1994년 유럽 연합 가입을 거부했다. 면적 385,186㎢, 인구 5,529,455(2023 추계).
수도는 오슬로이다. 16만 개 이상의 호수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이 산악국가는 북위 58~72°(북북동에서 남남서로 약 1,753km)와 동경 4~32°(동남동에서 서북서로 약 430km 폭) 사이에 걸쳐 있다. 북쪽으로 바렌츠 해, 서쪽으로 노르웨이 해 및 북해, 남쪽으로 스카게라크 해협, 동쪽으로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연방 등과 접하고 있다.
자연환경
영토의 반 이상이 해발 500m가 안되며, 단지 15%만이 해발 975m를 넘는다. 지질학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들(10억~20억 년)의 일부로 형성되어 있다. 산계(山系)는 영국 제도를 형성하는 칼레도니아계의 연장으로, 최고봉인 갈트회피겐(2,470m)이 남쪽에 있다. 글로마 강(599km)이 가장 주요한 강이며 뫼사 호(368㎢)가 가장 큰 호수이다.
250만 년 전에 시작된 제4기에 여러 번 빙하로 뒤덮였고 지금도 약 1,700여 개의 빙하가 있으며, 북해안과 서해안은 협만들에 의해 만입되어 있다.
알래스카와 거의 같은 위도상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곳의 기후가 더 따뜻한 것은 멕시코 만류 덕분이며, 이 만류는 협만의 동결을 막아준다. 7월 평균기온은 남쪽의 17℃로부터 북쪽의 10℃까지 변화한다. 또한 1월평균기온은 남동 해안의 -2℃로부터 내륙 골짜기의 -10℃까지 기온차가 있다. 연평균강우량은 동쪽의 750㎜ 이하로부터 서쪽의 약 2,052㎜까지로 큰 차이가 있다. 빈번한 돌풍이 발생하며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북부 노르웨이는 백야(白夜)의 지방으로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해가 지지 않고, 또 반대로 11월말부터 1월말까지는 해가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색인:한밤의 태양).
고도가 낮은 지역에는 낙엽수림(너도밤나무·서양물푸레나무·느릅나무·단풍나무 등)이 있으며, 고도 850m까지는 침엽수림(가문비나무·소나무)이, 더 높은 곳에는 버드나무와 키 작은 관목들이 있다. 북극권 북쪽에는 소나무가 주로 내륙 골짜기에서 자란다. 이 나라 전역에서 순록을 비롯해 굴로·레밍·여우·담비·수달 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어업과 제재업에 종사해온 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이후로 광업과 제조업 활동이 크게 증가했다. 철을 이용한 합금과 금속합금 부문에서 세계 최대 수출국에 속한다. 서유럽 최대의 근해 유전, 천연 가스 산지와 유럽 최대의 타이타늄 광석 매장지가 있으며, 수력발전과 마그네슘 금속 생산에 있어 세계 최대 생산국에 속한다.
국민
인구의 98%는 게르만계(북유럽인, 유럽중부인, 발트 해 연안인)이며 최대 소수민족은 약 0.6%를 차지하는 랩인이다. 인구의 15세 이하의 인구가 전체 15% 정도이며, 65세 이상 역시 16.6% 정도이다. 평균기대수명은 대단히 높아서 남자는 80.6세, 여자는 84.3세이다(2020). 인구밀도는 비교적 낮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생률은 감소했다. 영아사망률과 결핵발병률을 낮추기 위해 보건관리를 개선한 결과 사망률 역시 낮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이주가 엄청나게 증가해, 인구의 4/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출국이민과 입국이민의 수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 인구증가율은 1% 내외의 수준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다. 2023년 기준 인구는 552만 명이다.
언어
공식 언어는 노르웨이어이다. 노르웨이어는 단일한 노르웨이어가 아니라 보크몰과 뉘노르스크라는 저마다의 문어체계를 갖춘 표준어가 둘 있다.(노르웨이어 분쟁) 오슬로 중심의 동부와 남부는 보크몰(85%)을 베르겐 중심 서부와 북쪽지방은 뉘노르스크(15%)를 사용한다.
문화
바이킹 시대에 속하는 고고학적 발견, 북부 랩인의 문화, 진보된 디자인 학교 등의 자극으로 예술, 공예, 산업 디자인이 나란히 꽃피고 있다. 가구, 에나멜 그릇, 섬유, 식탁, 보석 디자인 등은 역사적·민족적·전위적 양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노르웨이어는 사용하는 인구수로 볼 때 세계적으로 작은 언어공동체이지만, 출판활동에 있어서는 선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 발간되는 새로운 책들은 노르웨이어로 쓰여진 창작본들이다. 노르웨이 작가들은 문학적으로 중대한 기여를 했다. 가장 유명한 작가는 극작가인 헨리크 입센이다. 그밖에 국제적으로 뛰어난 작가들로는 비외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크누트 함순, 시그리드 운드세트 등이 있다. 상설극장들이 여러 시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립이동극단인 리크스테아트레트가 있어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20세기의 노르웨이 화가들은 멕시코 화가들과 더불어 벽화 제작에 가장 뛰어나다. 벽화 이외에도 회화는 물론이고 여러 매체의 앙상블라지, 그림이 든 직조, 건축에서의 비구상예술 등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노르웨이의 가장 유명한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에드바르트 뭉크는 표현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구스타프 비겔란의 작품들은 오슬로에 있는 비겔란 조각공원에 수집되어 있다.
역사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알려진 가장 초기의 것은 해안을 따라 발견되는 석기 도구들로 BC 7000~6000년의 것들이다. BC 3000~2500년 사이에 새로운 이주자들이 동부에 정착했다. 기원후 첫 4세기 동안 노르웨이인들은 로마에 정복당한 골족들과 접촉했다. 서구에서 로마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400~600)에 노르웨이에서는 웅장한 무기와 금으로 만든 물건을 함께 매장한 족장들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800~1050년은 바이킹 시대로, 당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약탈원정을 떠났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그린란드에 정착했고, 빈랜드(뉴펀들랜드 해안) 원정에 나섰다.
900~1035년의 노르웨이 땅에는 여러 국가들이 형성되어, 각 국가는 일단의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1015~30년에 울라프 2세 하알손이 전체 노르웨이 최초의 왕이 되었다. 울라프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빠져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1130~1240년에는 노르웨이 왕위를 둘러싸고 여러 세력간에 내란이 벌어졌다. 내란 후기 동안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호콘 4세(1217~73)가 이 기간에 통치했다. 13세기 후반과 14세기 대부분을 통해 왕의 부와 권력은 증대했다.
1389년 포머른의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후에(1397)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왕이 되었다. 1442년 에리크 왕의 폐위 후 노르웨이는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하며 새로운 헌법을 갖기는 했으나, 스웨덴과 합병된 1814년까지 덴마크 왕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웨덴 왕에 의한 지배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해에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인들은 투표로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그결과 덴마크의 카를 공이 호콘 7세로 선출되었다.
1905~14년 노르웨이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이 나라 해운업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정책적으로는 전쟁 동안 중립을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정부의 경제정책은 자유주의 진로를 추구했다. 1927년에 이르러 노르웨이의 실업률은 20%에 달했고, 대공황기에는 33%까지 증가했다. 이같은 경제적 불황 아래서도 양대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경제발전과 공업성장을 이루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0년 독일군이 침공하여 노르웨이군을 패배시켰다. 노르웨이 왕과 정부는 영국으로 피신했으며, 독일의 점령은 대전의 종결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5~65년까지는 노르웨이 노동당이 거의 계속 집권했다. 1930년대에 시작된 많은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이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1965년 우익 연합세력이 노동당 정부를 축출한 뒤 1971년까지 집권했다. 그후 노동당은 1981년까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그기간 중 얼마 동안 노르웨이 최초의 여수상인 그로 하를렘 브룬틀란이 노동당을 이끌었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당 행정부가 1981~86년 집권했지만, 1986년 브룬틀란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집권했다.
종교
노르웨이는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루터교 국가였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노르웨이의 국교는 루터교였으나, 국교법 개정에 따라 2017년 1월 1일부터 루터교는 국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루터교 의식(Ritual)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졌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과 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체: 4,920,305명 (100%)
기독교: 명 (83.6%)
루터교: 3,911,622명 (79.4%)
비기독교: 133,219명 (2.7%)
이슬람교: 106,735명 (2.1%)
그 밖의 종교: 1,188명 (0.02%)
무교이거나 잘 알 수 없음: 671,411명 (13.6%)
노르웨이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노르웨이는 6·25전쟁 당시 이동외과 야전병원단을 보내주었다. 양국은 1959년 3월 2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9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노르웨이는 1980년에 주한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양국은 1956년 3월 메디칼센타 설치운영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65년 5월에 특허 및 상표권보호 협정, 1969년 10월에 사증면제 협정, 1969년 10월에 국제운수에 있어서 선박 및 항공기의 운영에 대한 상호면제 협정, 1973년 2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2년 10월에 경제 및 기술협력협정, 1984년 9월에 해운 협정, 1985년 1월에 무역 및 통상 협정, 1999년 11월에 경제기술산업협력협정 개정 의정서, 2002년 1월에 수산협력 협정, 2006년 9월에 한-EFTA를 체결한 바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노르웨이 수출액은 47억 79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선박·해양구조물·승용차·타이어 등이고, 수입액은 26억 27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선박용부품·펌프·배전 및 제어기·기타어류 등이다.
노르웨이는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 119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중공업·대우중공업·삼성중공업·현대미포조선·STX조선 등이 진출해 있고, 302명의 한국민 교민과 151명의 체류자가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1982년에는 재 노르웨이한인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인 입양고아가 살고 있다.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80여 일간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