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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처음 네 제자의 소명과 문둥병자와 중풍병자의 치유 및 마태의 소명과 금식 논쟁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4:14-9:50까지 이어지는 전 3차에 걸친 예수의 갈릴리 사역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본장에서는 1-11절의 주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처음 네 제자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사건, 12-16절의 문둥병자 치유 사건, 17-26절의 중풍병자 치유 사건 및 그 와중에서 발생한 예수의 죄사하는 권세에 대한 논쟁, 27-32절의 마태의 소명 장면과 이에 즈음한 바리새인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답변, 33-39절의 금식의 준수에 대한 논쟁 등의 순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1-11절의 네 제자의 소명 장면은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보여 줌으로써 그 역시 주님의 소명(召命)을 받아 회개 중생(重生)하고 각각 사명을 맡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먼저 베드로 등이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못 잡은 고기를 주의 말씀을 좇아 행한 결과 그물이 넘치도록 잡은 사실은 죄로 오염된 인간은 인생의 모든 문제와 소망을 혼자 해결하거나 성취할 힘이 없으며 오직 완전한 인자되시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Grace)로만 풍성히 그리고 완전히 해결되고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제 주님의 명(命)대로 하여 많은 고기를 잡는 이적(miracle)을 체험한 베드로 등에게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제자의 소명을 주신 사실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물고기 곧 이 땅에 제한된 육적 차원의 것들만 추구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만난 후 주님 안에서는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영원한 영적 차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12-16절의 문둥병자 치유 이적은 먼저 자신이 죄로부터 절대 순결하여 우리를 구할 유일한 인자이신 주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질고(疾苦)를 능히 고칠 능력이 있으시며 동시에 죄인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는 열정이 있는 분이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문둥병(leprosy)은 성경적으로는 죄의 심각한 결과와 전염성을 상징하는(레 13:45, 46) 것이었는바 이 기사는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로서 세상에 오사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창조 당시의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 구원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특히 강조하여 보여 준다 하겠다.
17-26절은 유명한 네 친구에 의해 지붕으로부터 주님 앞에 내려진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치유 사건의 경우와 달리 특이하게도 질병의 치유로 끝나시지 않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까지 선언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을 죄로부터 순결한 인자이며 동시에 인간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罪)까지 해결하실 수 있는 구속주이시요, 또 죄용서의 권한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발단이 되어 인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분의 메시야직을 인정치 않으려는 서기관들과 논쟁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는 주께서 자신의 메시야 직을 공개하기 이전 단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목격한 자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제2위 성자로서 죄를 사하는 절대적 권세를 가진 사실 나아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의 해결을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추호의 주저 없이 밝히셨다. 이러한 사실에서 주님은 사역 초기부터 구속사역을 통하여 천국 구원을 도래시킬 당신의 영원한 메시야 직과 그 직무의 내용에 대하여 인지하고 계셨음을 확인케 된다.
27-32절은 주께서 레위 곧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의 친구들과 식사한 사건 때문에 야기된 비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 체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그 식민 정부에 붙어서 세금 징수를 대행하던 세리(the tax collector)들은 폭력과 포탈을 일삼는 자들로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주님이 제자로 부르셔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복음의 사도(使徒)가 되게 하신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감화력, 그리고 인간은 그 누구나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등은 무시한 채 유대 지도자들은 무조건 비방만 하였던 것이다. 이에 주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영혼의 병자 같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는 당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밝히시는 동시에 실제로 자신들은 영적으로 더욱더 완악한 자일 수도 있으면서 자신을 의인(義人)으로 착각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도 꼬집으셨다. 이 기사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할 유일한 인자로서 어떤 자들을 자신의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지에 대하여 와 나아가 주님의 구속(救魔)으로 말미암는 구원(救援)을 얻기 위해서 죄인된 우리가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한 구속사적 교훈을 강조한다 하겠다.
마지막 단락인 33-39절은 금식 문제로 당신께 질문해 온 요한의 제자들 또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보도한다. 이것을 단순히 금식 문제에 대한 질의 응답으로 이해하면 그 참뜻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메시야로서 구약의 예언과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새로 개시하신 신약 시대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참 본질 또는 그 결과를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문제를 제기한 것을 기회로 구약 또는 유대교와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는 일단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한 구약의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 오셔서 지금 활동하고 계신 분이셨다. 그리하여 예수는 금식 또는 여러 율법 조항을 요구하는 구약 및 유대교와는 달리, 그 모든 율법조항의 요구와 목적들을 구속사역을 통하여 당신이 대신 성취해 주신 분이시다. 또한 일단 십자가수난을 통해 구속사역을 필하시고 승천(昇天)하신 후 다시 재림(再臨)하셔서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을 개시하실 새 약속 곧 신약을 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즉 구약을 일단 성취한 자신의 부활 승천 이후 천국이 최종 실현되는 세상 끝 날까지 구속사가 잠시 더 진행될 것이며 마침내 때가 찰 때 다시 재림하여 천국을 구원 최종 실현시키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분이시다.
본 단락은 바로 이런 주님의 존재와 약속에 의하여 구분되는 두 시기 곧 자신이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있는 시기와 승천이후 재림까지의 중간 시기에 성도들이 각각 그 두 시기에 맞추어 구약 시대 또는 유대교와는 다른 유형의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구속사가 신약으로 발전한 시점에서는 헌 가죽부대, 헌 옷 같은 구약의 율법이 아닌 더더욱 구약을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의 종교 의식이 아닌, 생베 조각 같은 신약의 복음에 마땅한 새 형식의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결국 이는 당신의 강림과 구속사역으로 전혀 새로운 구속사(救境史)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진행될 것임을 밝힌 것이었다.
외울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처음 네 제자의 소명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문둥병자의 치유
12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중풍병자의 치유와 사죄 논쟁
17 ○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마태의 소명
27 ○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금식 논쟁
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본문 & 자료 노트
지리배경- 5:1 갈릴리(게네사렛) 바다
막 4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5:1-8 베드로의 순종을 통한 영적 교훈
시돈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해왔기 때문에 그 일엔 잔뼈가 굵은 어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웬일인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실패의 밤이 지난 후에 그는 예수를 만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의 명령을 들었다. 그러자 고기 잡는 일에 능통했던 그였지만 한낱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양의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이러한 시몬 베드로의 순종의 모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순종하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함(민 15:39)
2. 주의 말씀에 대한 절대 권위를 인정하여 순종해야함(신 4:2)
3. 주의 명령에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함(대상 28:9)
4. 주의 명령에 어떤 핑계도 없이 즉각 순종해야함(마 9:9)
5. 지극히 작은 일에도 순종해야 함(마 25:21)
6. 신앙의 동지들과 힘을 합쳐 함께 순종해야 함(눅 5:7)
7. 인간적 판단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까지도 순종해야 함(히 11:7)
보감-5:1-11, 네 제자의 소명 장면을 통한 교훈
막 1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연구-5:8, 베드로
벧전 2장 연구자료 참조
인물연구-5:10, 야고보
막 10장 연구자료 참조
난제해설 -5:12-26 죄와 질병과의 관계
'질병'은 반드시 자기 죄 때문에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큰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주 많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고민으로 인해 심각한 신앙의 위기에 처한 사람도 많다.
본문에는 예수께서 문둥병자와 중풍병자 및 온갖 병든 자들을 치유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을 토대로 하여 죄와 질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1. 질병의 궁극적인 원인
인간 세상에 질병이 생기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인간 아담의 타락과 함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며, 그 죄의 영향으로 이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당시의 원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질병은 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일반 은총(Common Grace) 가운데 보호 보존하셨으며,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에 아담의 타락 이후 온 인류가 죄의 영향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보호함을 받고 그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2. 질병의 일반적인 원인들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하나님은 동일한 일반 은총을 베푸사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신다. 그렇다면 질병과 같은 육체적 고통은 왜 생기는가? 본문을 보면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그 병이 자기 죄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암시되어 있으나, 그 외 문둥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자의 경우 그 병이 그들의 죄와 특별한 연관이 없음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질병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질병의 일반적인 원인들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죄:
질병의 원인 가운데 자기 죄의 결과, 또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로 오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 요 5:14의 28년 된 병자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집의 온갖 영향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사 자기 죄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게 하신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 죄인은 속히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이다.
② 연단을 위한 하나님의 시험:
질병의 또 하나의 원인은 성도가 참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그 믿음의 크기를 시험(Test) 하기 위해, 혹은 장차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따르도록 하기 위한 연단을 위해 하나님이 질병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히 12:10; 벧전 4:1-3). 그 대표적인 경우로 우리는 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욥은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가정과 모든 재물과 아내와 친구들까지 잃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견뎌냈을 때에 그 믿음이 더욱 크게 성장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축복을 갑절로 받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성도들은 감사히 여기고 믿음으로 잘 견뎌내야 할 것이다.
③ 하나님의 영광:
요 9:1-11에 기록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목적 때문에 질병이 오는 경우도 있다. 즉 만 천하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또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질병을 그 도구로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 질병이 걸린 자는 처음에는 그 고통이 심하겠지만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때 장차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3. 의의
질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무조건 낙망하기 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질병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았음을 깨닫고 속히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는 잠시 고통을 겪었으나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면 그 자신에게 있어 질병은 오히려 저주가 아닌 축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또 질병이 믿음의 성숙과 연단을 위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그 질병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많은 자들과 더불어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형제들이 질병에 걸렸을 경우에도 성도들은 어리석게 상대를 정죄하거나 무턱대고 동정하는 자세보다는 질병이 오히려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인줄 알고 성숙된 자세로 위로나 권면하는 일이 요청된다 하겠다.
삽화-5:19 팔레스틴 가옥의 지붕
팔레스틴 가옥의 지붕은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고, 나무 석가래를 골조 삼아 흙으로 덮여진 평평한 곳이었다. 삼상 9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5:22, 아시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피기노스코'이다. 이는 '~위에'(on)를 뜻하는 전치사 '에피'와 '알다'(to know)를 의미하는 '기노스코'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개역 성경에서 대부분 같은 의미로서 '알다'로 번역이 되고 있는 '기노스코'와 '에피기노스코'의 차이점이다.
먼저 '기노스코'는 종종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배워서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 14:7의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이 단어는 종종 알고 있는 사람 또는 사물간의 교제나 결합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마리아가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언급(눅 1:34)에서 이 같은 용법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아시고'에 해당하는 '에피기노스코'는 전치사 '에피'가 부가됨으로써 지시적인 의미가 '기노스코'보다 더 강하게 반영되었다. 그래서 이는 알려지는 대상에 대한 더욱더 완전하게 꿰뚫어 아는 지식을 뜻한다(빌 1:9; 딛 1:1). 즉, '기노스코'가 어떤 대상에 대해 온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앎이라면, '에피기노스코'는 특정한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의 속성, 뜻, 성향 등을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부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결혼 생활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에피기노스코' 대신에 ‘기노스코'를 쓴다.
따라서 본절에서 '에피기노스코'는 곧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논 내용을 차츰 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속성과 성향, 악한 의도 등을 단번에 아셨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람의 깊은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눅 16:15).
보감-5:31 의원, 그리스도의 10대 특징
1. 능숙한 의원(막 9:18-29)
2. 훌륭한 의원(요 5:1-9)
3. 사랑의 의원(마 8:2,3)
4. 긍휼이 많은 의원(마 12:11-13)
5. 관대한 의원(눅 22:50,51)
6. 병든 자로 자신의 병을 알게 하는 의원
7. 값없이 고침을 주시는 의원(눅 5:14)
8. 결코 실패지 않는 의원(요 4:46-54)
9. 병을 완전히 고치는 의원(눅 5:25)
10. 죽음까지도 치료하는 의원(요 11:43)
주요주제-5:12-26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
요 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5:14 예수의 함구령
눅 9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 연구-5:27-29, 마태
마 9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5:24,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5:1-11 처음 네 제자들의 소명
전장(눅 4장)에서는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고 승리하신 후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셔서 복음을 증거하고 또한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장은 예수께서 네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하시기 위해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모습, 그리고 당시 동족들에게 배척받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된다. 본문은 그 쭝에서 첫 번째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다. 특히 베드로와의 만남을 인상적으로 처리하고 야고보와 요한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초대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갈 2:9).
이 기사는 공관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마 4:18-22; 막 1:16-20),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가령 ①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홀로 거니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군중이 옹위하였다고 한다. ②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받기 이전에 제자들을 부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고침 받은 이후로 기록하고 있다. 3 마태와 마가는 안드레를 포함하여 네 명을 불렀다고 기록하나 누가는 안드레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④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대면 장면에서 베드로가 고기 잡는 기사를 생략하고 있으나 누가는 자세하게 기록한 것 등의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 따라 시간적인 순서나 사건의 내용을 일부 생략하고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서 살펴본 바 있다(눅 2:1-20).
한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초월한 메시야로서의 신적 권능을 보여 주심(4-7절)으로 베드로 자신이 스스로 죄인됨을 발견하도록 하셨다(8절).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깨달은 것으로서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있는 자들이 아닌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구원의 은혜가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예수님의 부름은 자신의 사역이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 죄인들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취해진 것인데 이는 다음에 소개될 병자들의 치유 사역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꾼을 세우실 때 세상적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자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부족하고 천한 자들을 세워 충성케 하신다는 것이다(고전 1:26-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된 자들은 교만과 자랑을 버리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②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즉각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순종과 함께 그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 큰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베드로는 어부로서의 노련한 경험, 지식, 힘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다. 이 때 그는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고(7절) 예수님 앞에 선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어 큰 축복을 받는 자가 되었다(마 16:13-19).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 나서는 (11절)헌신적인 결단력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헌신적 결단력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최우선적인 조건이다(마 16:24-27 : 14:26, 27:3:8).
5:1 무리가 옹위하여. - 여기서 '옹위하여'(에피케이스다이)라는 말은 '~의 위에'를 의미하는 '에피' 와 '세워지다'를 의미하는 '케이마이'의 합성어로, '위로 놓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면에서 몰려듦으로써 서로 밀리게 된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거의 호수에 빠질 것과도 같은 상황에 직면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밀려오는 무리를 피해 배에 올라 무리들을 가르치신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3절). 게네사렛 호숫가. - '게네사렛 호수'는 성경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구약 시대에는 히브리 철자법에 따라 '긴네렛 못'이라 하였다(민 34:11; 수 12:3). 여기서 '긴네렛'은 '비파'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비파와 같이 생긴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 그 이름이 와전되어 '게네사렛 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갈릴리 바다'로 불리워졌다(마 4:18; 막 1:16). 한편 요한복음에 나타난 '디베랴 바다'(요 6:1)라는 명칭은 '게네사렛 호'를 가리키는 로마식 이름으로 이는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게네사렛 호수' 서편에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한 것에서 유래했다. 아무튼 이 호수 주변 지역은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대표적 중심지였다(마 3:13; 4:23; 15:29; 막 1:39; 7:31; 요 4:3; 4:47). 게네사렛 호수에 대해서는 막 4장 자료노트 '갈릴리 바다'를 보다 참조하라.
5:2 호숫가에. -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 곳을 가리킬 때, 구약의 표현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항상 '바다'( 다랏사)라고 부른 반면, 누가는 항상 '호수'(림넨)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던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이방인으로서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의 사고 차이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 길이가 약 21km, 폭이 약 13km로 그다지 넓지 않은 게네사렛 호수에서 사용되었던 배들은, 갑판이 없는 작은 어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 배들은 호숫가로 쉽게 끌어 올려놓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호숫가에 배가 있었다'는 표현은 호숫가에 배가 정박해 있었거나 아니면 호수 주변의 육지로 배가 끌어올려져 있었던 상태에 있었음을 묘사한 말이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어부들이 고기를 잡고난 뒤에는 항상 다음 출어를 위하여 선구(船具)를 점검하고 그물을 손질하여 깨끗이 보관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이다. 한편 여기서 '어부들'(호이 할리에이스)이 구체적으로 '두 배'의 주인인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킨다는 것은 본 절 이후의 문맥과 마 4:18-21의 설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서는 호수에 밀려 빠질 위험에 있었다(1절). 이에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사 육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나아가 예수께서 배에 오르심으로써 무리들을 보다 잘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보다 더 잘 들었을 것이다.
5:4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예수께서는 무리를 가르치시기를 마치고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주인인 베드로에게 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 속에는 베드로를 비롯해 어부들의 믿음을 살펴보고자 하는 특별한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깊은 물속에는 고기가 없다는 것이 어부들에게 상식이었고, 지금의 시간이 고기의 이동이 많은 새벽이 아니라 고기의 이동이 전혀 없는 한 낮임을 감안할 때 예수의 명령은 시몬 베드로와 어부들에게는 고기 잡는 일에는 전혀 문외한인 목수의 정신없는 소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다분히 시험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하여튼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 명령을 하신 것은 그가 배의 주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오랜 어부 생활을 통하여 그가 어부들의 우두머리 격되는 숙련자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5:5 선생이여. - '선생이여'(에피스타타)라는 명칭은 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누가만이 사용하는 단어로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는 '랍비'( )가 단순한 존칭어인 반면, 이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에 대해 '랍비'라는 말 대신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눅 8:24,45; 9:33,49; 17:13).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그물을 내리리이다. - 여기서 '밤이 맞도록'이란 표현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밤을 새웠다'는 뜻으로, 이는 시몬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마음속에 많은 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베드로는 ① 지금이 시간적으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낮이었다는 것, ② 장소적으로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깊은 곳이었다는 것, ③ 그물을 씻어 놓은 뒤라 헛수고에 따르는 노력상의 손해가 된다는 것, ④ 자신은 숙련된 어부였으나 예수는 고기를 잡아본 적이 없는 목수였다는 것 등의 이유로 예수의 말씀을 순종하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이 일단 어부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의 지식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에 순종하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그의 겸손과 믿음이 돋보이는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믿음과 겸손이 그로 하여금 예수의 제자가 되는 축복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는 축복을 얻게 했다.
5:6 그리 한즉…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결국 놀라운 축복의 열매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밤새 고기를 잡기 위해 온갖 수고를 다했지만 그 소득이 거의 없던 것과는 달리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결과 고기로 인해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어획을 올린 것이다. 여기에서 '찢어지는지라'(디에르레쎄토)라는 말은 미완료 수동태로, 이 말의 보다 정확한 표현은 그물이 '찢어졌다'는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찢어지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하니. '본절에서 '손짓하여'란 표현은 시몬의 배가 호수 한 가운데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말로는 동료들을 부르는 것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준다. 한편 여기서 '다른 배에 있는 동무'에 대해서는 이들이 단지 고용된 품꾼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으나(Lenski, PluImmer), 10절과 마 4:18-21과 막 1:16-19의 기록에 따라 이 동무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Hendriksen, Robertson).
잠기게 되었더라. - 여기서 '잠기게 되었더라'(호스테 뷔디제스다이 아우타)는 말은 동작의 개시에 따른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는 배가 물에 '잠기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뜻으로서 잡은 고기의 양이 얼마나 많은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분명히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은 기적적인 일로서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8 시몬 베드로가. - 이처럼 두 이름을 결합시킨 이 형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이곳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고기 잡는 어부 '시몬'이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로의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음을 시사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적 기술이다. 사실 '베드로'란 명칭은 나중에 주어진 이름이었다(마 16:18; 요 1:42). 베드로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나를 떠나소서. -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가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예수 앞에 엎드리고만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자존심과 자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겸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는 죄인이 취할 마땅한 자세였다. 아울러 '나를 떠나소서'라는 베드로의 말은 단지 두려움 때문에 예수께서 배에서 떠나실 것을 요구하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신적인 능력을 감히 비천한 인간이 마주 대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이런 사실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여. - 예수에 대한 호칭으로, 본래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으나 성경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하여튼 베드로는 조금 전에는 예수를 '선생'이라고 불렀던 반면, 지금은 '주'라 부르고 있다. 그의 대(對) 예수관이 변화한 것이다. 즉 그는 예수의 신적인 능력을 그의 두 눈으로 목도하고 경험한 뒤부터 예수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베드로의 자아관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목도한 뒤, 그 자신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대(對) 신관을 소유한 자는 바른 자아관을 갖게 된다(출 20:19; 삿 13:22; 욥 42:5, 6 ; 사 6:5). 한편 여기서 '죄인'(하마르톨로스)은 형사상의 범죄자(Crimimal)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도덕적인 죄인(Sinner)을 가리킨다.
5: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놀라고. - 여기서 '놀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놀라움에 사로잡혀'라는 뜻으로, 본절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의 배에서 같이 고기 잡았던 어부들이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고 두려움과 놀라운 감정 때문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했음을 나타내 준다.
5:1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3대 제자에 속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예수의 변형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도 함께 참여했다(마 17:1;26:37). 야고보에 대해서는 막 10장 연구 자료에, 요한에 대해서는 요일 2장 연구 자료에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동업자. - '동업자'(코이노노이)라는 말은 7절의 '동무'(메토코이)라는 명칭보다는 그 뜻이 더 깊은 것으로, 이는 단순히 친교의 관계를 넘어서 어떤 일이나 사업에 서로 협력하여 기쁨과 고통을 같이 나누는 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무서워말라. - 예수님의 신성을 목격하고 두려워 떠는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베드로를 안심시키고 있는 장면이다. 특별히 여기서 '무서워 말라' 또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새로운 신적 소명을 부여하는 놀라운 축복이 전제된 말이었다(겔 2:6; 단 10:12).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다가왔음을 시사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는 베드로가 단지 고기 잡는 어부에 불과했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취하리라'(조그론)는 말은 '죽이지 않고 산채로 사로잡는다'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조그레오'( )에서 파생한 말로, '위험에서 생명을 건져낸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베드로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예수를 좋으니라. - 여기서 '저희'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좇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비록 그들이 버린 것이 배 두 척과 거기에 팔린 그물이 전부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가진 소유의 전부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가족의 삶의 토대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가진 바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이처럼 기꺼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신적능력에 대한 경외심과 아울러 그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약속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본절에서 '예수를 좇으니라'는 말은 이제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로서 그들이 지금까지의 수동적 자세를 버리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설기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5:12-26 문둥병자와 중풍병자의 치유
앞단락(1-1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세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러 병자들을 신적 권능으로 치료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본문은 크게 나누어 문둥병자 치유 기사(12-16절)와 중풍병자 치유 기사(17-26절)로 나뉜다.
원래 성경에서 문둥병은 여러 가지 피부병을 통하기도 하는데,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으며 가정과 사회를 떠나 격리되고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접촉이 금지되어 있던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 그의 병을 깨끗이 치유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사회의 통념적인 장벽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행위로 고통 받는 이의 아픈 현실을 깊이 이해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13절). 또한 이는 자신이 인간을 질고(疾苦)에서 건져내시는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 사역의 근본적인 목적은 병을 고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각색 병자들이 모일 때에 그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기도 하셨다(16절), 그리고 중풍병자의 치유 장면에서는 병 치유에 앞서 죄를 사하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병 고침보다는 근본적인 죄의 해결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셨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구원 사역이 일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인구원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기득권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신적인 예수님의 권세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서 보이시는 신적 권세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를 범한 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계신다. 이 '인자'라는 용어는 본서의 주제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메시야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칭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 보기에 비천하고 가치 없는 인생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새롭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는 구원의 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우리는 이상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들은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들이 처한 고통을 나눠 가지며 또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② 인간이 직면한 모든 문제는 죄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죄이며, 그 죄의 문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단번에 드림으로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5: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 본절은 단순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셨다고 말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이 동네의 안이 아니라 밖에 계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는 마을 안에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레 13장). 즉 예수가 문둥병자와 만났다는 것은 그가 마을 밖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 동네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동네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의 중심지였던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Hendrikson). 혹자는 이 동네가 예수께서 산상 수훈을 말씀하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핫틴 산' 산록에 있는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명확하지는 않다.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 마태(마 8:2)와 마가(막 1:40)와는 달리 누가만이 '온몸에' 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는데, 의사인 누가는 이 말을 통해 이 문둥병자의 상태가 매우 만성적이고 심한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문둥병'이란 일명 한센병이라 부르는 병이나, 성경에서는 일반 피부병도 문둥병으로 취급하고 있다. 문둥병과 관련해서는 레 13,14장 본문과 자료노트에 상세히 언급되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예수를 보고 엎드려…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레 13:45,46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온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또한 이 문둥병자는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눅 17:12)라는 기록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둥병자의 태도는 매우 절박한 자신의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자신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이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그의 고백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말 속에는 문둥병자가 자신에게 향하신 예수님의 뜻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문둥병자와 접촉을 하게 되면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적 사고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가능한 한 문둥병자와 멀리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병이 곧 나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행동이었다(마 9:29; 막 6:56).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내가 원하노니'란 예수님의 말씀은 문둥병자의 '주여 원하시면'이란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대답으로서 이 말씀은 또한 만물을 움직이고 주관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깨끗함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신적인 명령은 문둥병자에게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성취될 수밖에 없는 말씀인 것이다.
5: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 여기에서 '경계하시되'(파렝게일렌)라는 말은 강한 명령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말은 흔히 군사적 명령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었다. 막 1:43에는 '엄히 경계하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중한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 본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세 번째 함구령이다. 병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예수께서 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자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오인됨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방해받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요 6:15). 눅 9장 자료 노트, '예수의 함구령' 참조.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증거하라. - 이는 레 13,14장에 기록된 규례를 준수하기 위한 조치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마 5:17)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과는 달리 예수께서 이번에는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는 율법의 준수를 적극적으로 명령하신 이유는 제사장이 여러 사람 앞에서 문둥병자를 정결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통해 문둥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모여 오되. -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의 소문이 급속히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오고 말았다. 막 1 :45을 보면 고침 받은 문둥병자는 매우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사람의 행동은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결과 예수께서는 그를 만나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하는 허다한 무리로 인해 그의 사역에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음을 본절은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퍼지매'(디에르케토)와 '모여 오되'(쉬네르콘토)는 다같이 미완료 시제로 예수의 소문이 계속해서 퍼져나갔다는 것과 그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왔음을 나타내 준다.
5:16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 자신에게로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도하시니라'(프로슈코메노스)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기도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계속적인 기도 생활은 누가복음에서 매우 자주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누가는 예수님의 생명력 있는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눅 3:21; 6:12:9:18; 11:1:22:41).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 여기서 누가는 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 9:1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이 가버나움을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가르치실 때에'(엔디다스콘)라는 표현은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을 가르치시는 행위가 예수님의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바리새인. -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은 이곳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마태와 마가는 이들을 보다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여튼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말로, '구별하다', 혹은 '분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들의 기원은 마카비 시대(B.C. 167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본래 이들은 신앙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들의 분리적인 태도는 점차 내면적인 면보다 외면과 형식에 치중하였던 까닭에 성경에서 외식주의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교법사. - 여기서 '교법사'(노모디다스칼로이)라는 말은 '선생'(디다스칼로스)과 '율법'(노모스)의 합성어로, 이는 회당이나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명칭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는 흔히 '서기관'이라고 불리워진다(마 5:20; 23:34). 이들에 대해서는 마 5:2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당시 서기관들은 대부분이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벌써 예수에 대한 음해 음모가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 이 구절의 원어상 보다 정확한 표현은 '예수에게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하더라'이다. 여기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며, '능력'은 구체적으로 병 고치는 '기적'(뒤나미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 능력을 간헐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소유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18 한 중풍병자를…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 막 2:3에 의하면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 데려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침상 채로 데려왔다는 사실에서 중풍병자의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별히 누가는 일반적인 중풍병자를 가리키는 '파랄뤼티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마태(마 9:2)와 마가(막 2:3)와는 달리, 오래 전부터 중풍에 걸려 증세가 심한 병자를 가리키는 '파랄렐뤼메노스'라는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 앞에 데려온 중풍병자의 정확한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막 2:3 주석 참조.
5:19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 그 당시 유대인의 지붕은 평면으로서 대개 바깥에서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기와를 벗기고'(디아 톤 케라몬)라는 말은 그 집의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다는 통상적인 표현으로, 막 2:4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 기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 당시의 가옥 구조는 일반적으로 건물의 중앙에 뜰(court) 이라고 불리우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고, 이 뜰에 팔레스틴 지역의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자 천이나 가벼운 기와로 지붕을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Ryle, Cobbin), 막 2장 연구 자료 신약 시대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 참조. 그리고 본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이 뜰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이 계신 뜰의 위쪽 기와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던 것이다.
5:20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던 네 사람과 중풍병자가 구체적으로 예수께 어떤 말씀을 드렸다는 기록은 공관복음서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진실한 믿음을 충분히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무언의 요구를 이미 받아 들이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네가 나음을 입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인간 세상의 대부분의 질병이 죄에 원인이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는 중풍병자가 어떤 은밀한 죄를 범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가 유입되면서 질병도 인간을 괴롭히는 악의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선 본장 자료노트, '죄와 질병과의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예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죄가 질병의 원인임을 밝히고 육체적 질병보다는 영혼의 질병이 더 근본적인 문제임을 지적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드러내셨다.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참람 죄를 범한 것으로 비난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본절의 '받았느니라'는 말을 현재형 '아피엔타이'로 기록한 반면, 누가는 완료형 '아페온타이'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태와 마가가 예수의 죄 사함의 선언에 그들의 기록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의사인 누가는 예수의 죄사함이 선언되는 순간 중풍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이 임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Carson).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죄를 사하겠느냐. - 예수님의 약점을 들추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좇아 다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 사함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자기들끼리 모여 이것이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논의했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참람(신성모독)한 행동으로, 종교적으로 극형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당시 유대 전통에 의하면 '참람죄'란 ① 하나님께 부당한 속성을 돌렸을 때, ② 하나님께 당연한 속성을 돌리지 않았을 때, ③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침해하였을 때 적용되는 것이었다(Bengel). 한편 이것을 논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피해 은밀하게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는 모의와 계략을 꾸미는데 익숙한 저들의 교활한 습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5: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무슨 의논을 하느냐. - 여기서 '아시고'(에피그누스)라는 말은 중풍병자와 그 동행자들의 마음을 아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중을 꿰뚫어보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논의를 파악한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도리어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고 반문하심으로써 그들의 계략을 공개적으로 들추어내시며 그들의 생각을 반박하고 계신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직시하는 자신의 신적 능력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어느 것이쉽겠느냐. - 죄 사함에 관한 문제와 병자를 고치는 문제는 모두가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두 문제는쉽다거나 어렵다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이 물으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보다 말로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이 더 쉬운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죄 사함은 외적 증명이 필요 없었던 반면 중풍병자를 고치는 것은 외적 증명이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중풍병자에 대해 치유의 이적을 베푸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지니셨다는 것과 죄 사함을 선포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라고 할 수 있다.
5:24 인자가. -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란 예수께서 자신의 신분을 설명하실 때 자주 사용한 호칭으로서 이 말은 복음서에 무려 80회 이상 나타나며, 모두가 예수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 아울러 '인자'란 호칭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는 말로, 이 말의 성경적 의미는 단 7:13,14에 잘 나타나 있다. 인자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집으로 가라. - 예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니신 자신의 신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금까지 소망이 전혀 없던 중풍병자가 깨끗이 나음을 받아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간다면 이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과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었다.
5: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집으로 돌아가니. - 예수님의 말씀은 즉각적으로 실현되었다.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신적 자격을 문제 삼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든 시비를 종식시키는 일이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라는 말은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표현으로,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크게 찬양하는 중풍병자의 기쁨에 넘친 행동을 묘사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성도들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상징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5:26 모든 사람이 놀라. - 여기서 이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는 '놀람이 모든 사람을 사로잡다 '(에크스타시스 엘라벤 아판타스)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를 잘 드러내 준다. 아울러 이 곳에 사용된 '놀라'(에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씩이나 '비몽사몽간에'라는 말로 번역되었는데(행 10:10; 11:5; 22:17), 이는 흔히 신적인 광경을 목격한 인간의 경외스러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기이한 일. - '기이한 일'(파라독사)이란 '보편적인 일과 또는 일상적인 경험에 상반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이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보았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5:27-32 세리 레위의 소명
앞단락 (12-2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사회에서 천대받고 소외되던 육체적 병자들을 고치심을 통해 그의 구원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셨다. 이제 더 나아가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동족들의 미움과 질시를 받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을 통해 자신이 죄인의 구주요 친구임을 보여 주신다 (27-30절).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동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착취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라 하여 죄인 취급했을 뿐 아니라 교제하는 것조차도 기피했었다(마 9:9-13; 막 2:13-17). 따라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를 비난하였다(30절).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오신 자신의 메시야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심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누가가 이렇게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본서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기피하던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사실 모든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이가 똑같은 죄인으로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롬 3:1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나 지식의 풍부함을 들어 스스로 교만하여 의인임을 자부했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들은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통해 죄가 너무 많다거나 너무 사악해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절망하여서는 안 된다. 마태는 당시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직업을 가진 자로서 이성적 사고로 볼 때 부르심에 합당치 못한 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고 제자로 삼으셨다.
② 예수님의 '나를 좇으라'라는 부르심에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좋은 마태의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결단과 순종을 보이는 자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시 세리로서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풍요한 생활을 했음직한 마태의 결단과 순종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던 한 부자 청년이 결국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그냥 돌아감으로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것(마 19:16-30)과 비교된다.
5:27 레위라 하는 세리가. - 여기서 '레위'라고 불리는 사람은 막 2:14에는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하며, 마 9:9에는 '마태'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볼 때,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마태복음의 기록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레위란 이름은 본명이고 마태란 이름은 제자가 된 이후의 이름일 것으로 여겨진다. 마태에 대해서는 마 9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세리'에 대해서는 눅 3:12 주석을 참조하라.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이란 공물이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장소를 가리키는데, '세관에 앉았다'는 것은 당시 레위가 단순히 세금을 받고 있었던 행동 그 자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더 깊은 뜻으로 그의 직업적 성격을 부각시켜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가버나움은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까닭에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국립세관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마태가 세리로 있으면서 세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보시고'(에데 아사토)라는 말의 원어상 정확한 의미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나를 좇으라. - 현재 미완료 명령 시제로, 주저함과 지체함이 없이, 그리고 한 번 좇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따른다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마태에게 세리로서의 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즉각적으로 자신을 좋을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5: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좋으니라. -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선 레위의 행동에서 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었고, 또한 예수님을 만나 보는 것을 소망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누가는 '그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누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다른 제자들의 경우(11절)와 같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부한 위치에 있었던 마태의 결정도 매우 헌신적이고 단호한 것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29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예수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예수를 만난 그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잔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은 본절과 눅 14:13에만 나오는 단어로, '환영연회'를 가리킨다.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 이 잔치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마태가 초대한 사람들로서 그들 모두는 마태의 직장 동료들이거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가 이들을 잔치에 초청한 것은 단순히 그들과 친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자기가 영접한 예수님이 귀한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기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기 위한 배려가 전제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아울러 '함께 앉았는지라'(에산 메트 아우톤 카타케이메노이)란 말을 직역하면 '모든 손님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 부근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잔치에 초대된 모든 손님들 간에 자연스러운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5: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의 정확한 표현은 '바리새인과 저희들(바리새인) 가운데 서기관들'이란 뜻으로서 본절은 이들이 마태가 베푼 잔치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초대받았다 할지라도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Robertson, Spence). 그러나 그들은 집 바깥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할 궁리를 하고 있다가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이 되자 노골적으로 제자들에게 비방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 율법의 형식적인 규범을 강조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멸시를 받던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불결한 일로 여겨졌다. 특히 세리들은 민족의 반역자일 뿐만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하는 자들로서 그들과 친밀한 교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율법의 정결성을 훼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때와는 달리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정면적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비방을 가했던 것이다.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쓸데 있나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록 표면적으로는 제자들을 비난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의도가 예수님을 비방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당시 흔히 유행되었던 본절의 격언을 통해 그의 행위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계신다. 특별히 여기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을, '의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병든 자'는 '세리'를 비롯해서 구원과 영적 치료가 필요한 모든 '죄인'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하듯 예수 자신은 죄인들의 영혼을 치유하러 오신 자이므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의인은 없다(롬 3:10). 따라서 누구에게나 영혼을 치유하실 의원인 예수가 필요하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영혼이 건강한 의인인 체했던 까닭에 그들은 의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자는 결코 예수를 영접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이다. 이처럼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찾아가 주시고 그 영혼을 깨끗케 치유해 주신다.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회개시키러 왔노라. - 예수께서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 구절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죄인'과 '의인'을 구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마음과 생활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죄인들에게는 회개를 통한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만 자신을 마냥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심으로써 도리어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 사용하는 '의인'이란 명칭은 마음이 강퍅해서 도리어 구원을 얻지 못할 사람을 가리키는 반어적 표현인 것이다. 한편 '회개시키러'(에이스 메타노이안)라는 말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만이 첨부시키고 있는 말로 이를 통해 누가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통회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예수께서 말씀하신 '죄인'의 개념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Hendriksen, Morris).
5:33-39 금식 논쟁
앞단락(27-3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심을 통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그의 사역을 소개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더불어 금식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시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요한의 제자들과 자신들의 제자들과 비교하여 비난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이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극복하시고 새로운 시대의 새 복음을 예고하신다. 즉 신랑과 혼인집 손님(34,35절), 새 옷과 낡은 옷(36절),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37-39절)의 비유로 유대교의 낡은 전통이나 가치관에서 탈피하여 메시야의 새 질서와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율법에서 금식에 대한 규정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종교력 7월 10일)에 금식하는 것이 있었다(레 23:27).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국가적 수난을 기념하는 연 4차의 금식일이 있었다(슥 7:5; 8:19).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그 후에 전통과 유전을 따라 모세가 산에 올라간 목요일과 산에서 내려온 월요일을 금식일로 규정하였다(눅 18:12). 그리고 그 규정의 이행 여부를 신앙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금식의 본래 목적과 의의(삿 20:26; 삼상 31:13; 왕상 21:27; 대하 20:3; 시 35:13)를 무시한 행위로서, 금식을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행위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형식과 외식주의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시대에 선포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신다. 결국 이것은 유대교의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 하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33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훼손시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드러내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마 5:17).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미 낡은 형식과 외식을 벗어 버리고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될 것을 교훈해 준다(고후 5:17).
5: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 여기서 '저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 9:14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의 상황으로 볼 때, 예수께 질문을 한 사람들이 단지 요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또한 그리하되. - 유대인들 가운데서 금식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 1년에 한 번, 즉 속죄일에 금식하는 것이 정해진 법이었다(레 16:29 주석 참조).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한 번의 금식이 네 번으로 늘어났고(슥 7:1-12; 8:19), 예수님 당시는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자주 행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다(눅 18:12). 또한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도 자주 금식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들은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회개의 방법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많이 강조하던 요한의 사상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마 3:4; 11:18).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금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예수께서 금식을 부정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금식이 적절한 목적과 방법으로 이행되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으셨다(마 6:17). 다만 예수는 형식적인 금식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그 또한 금식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은 금식을 구원의 방편으로 생각한 반면, 예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이미 얻었으므로 금식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는 더 이상 율법도, 금식도 필요가 없다. 그곳에는 오로지 자유와 평화와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는 금식을 할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의 금식에 관한 문제 제기는 단순히 금식에 관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본질적인 차이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주기적으로 금식하지 않았던 까닭에 본절과 같은 질문을 제기 받았던 것이다.
5:34 혼인집 손님들이. - '혼인집 손님들'(투스 휘우스 투 포노스)이란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을 가리킨다. 이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신랑의 친구들을 가리키는데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그 모든 준비를 책임지고 잔치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 있어 이들의 책임은 매우 막중한 것인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을 혼인잔치에 비유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혼인 잔치를 성실히 진행하는 신랑의 친구라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신랑의 친구들은 혼인 잔치가 진행되는 한 주간 동안만큼은 금식일이 되어도 금식하지 않았다. 이는 흥이 나야할 혼인 잔치를 망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금식은 보통 애곡이 동반되었던 까닭에 금식을 하면 혼인 예식이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켜 그의 제자들의 금식함이 적절치 못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5:35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금식할 것이니라. - 여기서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울러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슬픔을 가져다 줄 것을 예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비록 자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지금은 즐거워하고 있지만 신랑되신 자신을 잃게 되는 그 순간 이후에는 제자들 또한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겸비하게 살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빼앗기리니'(아파르데)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물리적인 폭력이 개입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극단적인 죽음을 이미 직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5:36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합하지 아니하리라. - 만일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난 다음 그것을 가지고 낡은 옷을 기우는데 사용한다면 두 옷 모두 버리는 결과가 되는데, 그 이유는 새 옷은 찢어지기 때문이고 낡은 옷은 새 옷에서 찢어낸 천 조각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비유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우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것을 잡아당겨 그 헤어짐이 더욱 심하게 된다는 마태와 마가복음의 비유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마 9:16; 막 2:21) 두 비유의 본질적인 차이는 아무 것도 없다. 하여튼 이 비유는 ① 예수의 새로운 복음과 율법주의적 낡은 교리는 조화될 수 없으며, ② 율법주의적 사고로는 예수의 살아 운동력 있는 복음을 감당치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5:37,38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넣어야 할 것이니라. -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는 대개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런 가죽 부대는 오래되면 가죽이 딱딱해져서 부스러지기 쉬웠다. 그래서 낡은 부대에는 술을 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효되지 않은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술이 발효되면서 나온 가스로 인해 부대가 터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술은 반드시 가죽 부대에 담았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비유로 생명력 있는 복음을 유대주의적 낡은 사고로는 수용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그들의 율법주의적 낡은 사고는 결국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고 해치는 것 밖에 될 수 없음을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좋다 함이니라. -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데 익숙한 사람은 새 포도주를 마시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묵은 것이 더 좋다'는 고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유전과 전통적인 율법의 형식적 범주 속에 익숙해 있던 바리새인들은 결코 예수께서 제시한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묵은 것이 좋다'는 표현은 누가만이 독특하게 첨부시키고 있는 말씀으로, 이는 인위적인 율법 의식을 중시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애써 거부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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