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가나 혼인 잔치 이적과 성전 정화 사건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인 1:19-12:50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즉 본서 전반부에서는 예수 공생애 기간 중에 일어난 여러 사건 가운데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을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으며 본장 역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문맥의 본장에서 먼저 전반부 1-12절은 요한복음 기자가 제시한 예수의 7대 표적 중 첫 번째 표적으로서 가나 혼인 잔치 이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제 1차 갈릴리 사역을 개시하시기 이전 초기 유대 지역 사역 기간 동안 유대와 갈릴리 지역을 오가시면서 사역을 행하시던 때의 사건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신성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입증해 보이신 첫 번째 사건이었다.
예수의 다른 모든 이적들과 마찬가지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이 이적도 결국 예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지배하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소유하신 분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싶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4절)에 행하신 것이었기에 그 구속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 즉 이 사건은 과거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사역자로 사용하시기로 할 때 곧 그들을 부르신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그 능력을 부여받아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언제든지 원하시는 때에 그 능력을 발휘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소유하신 분임을 증거해 주고 있어 그의 신성을 입증하는 좋은 표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이 표적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부된 성도들이 장차 천국 혼인 잔치에서 누리게 될 그의 구속의 은혜의 풍성함과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다(요 10:10).
후반부 13-25절은 공관 복음에 기록된 소위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에 행하신 성전 정화 사건(마 21:10-18)과는 구별되는 요한 만이 기록한 것으로서 초기 유대 사역 기간 중에 행하신 제 1차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본문은 성전 정화 사건과 함께 유대인들이 예수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성전을 정화했는지 그 권위를 입증할 만한 표적을 요구한 사실과 이에 대한 예수의 응답을 기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전체의 강조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전 정화의 권위를 입증할 만한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자기 몸에 비유하시면서 십자가 수난과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비유의 형식으로 암시적으로 말씀하셨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예수께서 당신의 신성을 세계 만방에 입증해 보이실 최대의 표적임과 동시에 공생애 최후의 표적이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최후의 표적은 결국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다 행하시고 구속 사역을 결정적으로 성취하실 즈음, 끝까지 그분을 참 구세주요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배척한 유대인의 배척을 통해 주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받으시면 서도 끝까지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사실과 구약 선민인 유대인의 예수 배척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이해가 요구되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처럼 예수의 첫 번째 표적과 아직 수행하시지는 않으셨으나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최종적으로 행하실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표적을 주실 것에 대한 주님의 예언을 언급하고 있는 본장 전체에서 발견하는 바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즉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첫 표적에서 마지막 표적을 행하시기까지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되 끝까지 예수가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사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구속 사역을 행하신 유일무이한 구세주요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고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의 모습에서 예수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곡해하고 나아가 이를 저지하려는 현 세상의 공중 권세자 사탄(엡 2:2)의 지배 하에 있는 전적 타락한 인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롬 3:10,11). 또한 인간의 불신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표적들을 보여주시되 최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표적을 보여 주시기까지 하사 결국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신약 성도들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주신 그분의 극진한 사랑과 은총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수의 표적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외울 말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
제 1표적 가나 혼인잔치 이적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제 1차 성전 숙정
13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1-11 가나 혼인 잔치 이적의 영적 교훈
이 기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의 사역 기간 중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혼인 잔치 참석자들을 놀라게 해 주셨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준다.
사실 영적 교훈
1. 혼인 잔치(1절) 천국 구원의 잔치
2. 목마른 사람들(3절) 구원을 갈망하는 자
3. 빈 항아리(6절) 빈 마음
4. 예수의 명령(7,8절) 구원을 주시는 권세
5. 종들의 순종(7,8절) 주님을 믿는 마음
6. 물로 채워짐(7절) 새 생명 얻음
7. 물이 포도주됨(9절) 사망에서 영생을 얻음
8. 손님의 기쁨(10절) 천국 성도의 기쁨
지리 배경-2:1 가나
요 4장 자료 노트 참조.
지도-2:1 가나의 위치
도표-2:1-25 예수의 공생애 일람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도표-2:13-22 예수의 1,2차 성전 숙정 사건 비교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성전 숙정 기사는 공관복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4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이 기사를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기사로 보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두 기사의 시점이 서로 다르고, 공관복음과 본문에서 쓰인 표현들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 도표에서 그 차이점들을 비교해 보자.
1차 성전 숙정 2차 성전 숙정
1. 시기 예수의 공생애 고난주간 중 월요일
초기 유대사역(요 2:13) (마 21:12,13, 막 11:15; 눅 19:45)
2. 예수께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 매매하는 자, 돈 바꾸는 자, 비둘기파는
책망하신 자들 돈 바꾸는 자들(요 2:14) 자들(마 21:12; 막 11:15; 눅 19:45)
3. 책망하신 이유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듬
만듬(요 2:16) (마 21:13; 눅 19:46)
4. 구약의 인용 없음 사 57:7; 렘 7:11을 인용함(마 21:13)
5. 유대인의 반응 예수께 표적을 요구하며 예수의 어린아이들이 예수께 ‘호산나’ 찬양을
말씀을 불신함(요 2:18-22) 돌림을 보고 분노함(마 21:15)
원어연구-2:18. 표적(表蹟)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세메이온이다. 이는 '표시하다', '나타내다', '가리키다', '알리다'라는 뜻의 '세마이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신호'(sign), '표시'(mark), '표적'(token)이라는 뜻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세메이온'은 일반적으로 어떤 인격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알게 해주는 표시를 가리킨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는 징조, 혹은 전조(portent)를 가리킨다(눅 21:11,25; 행 2:19; 계 12:1,3).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있을 어떤 큰 일을 미리 계시하시고 그 일을 성취하시기 전에 이러한 표적, 곧 전조(前兆)를 주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대비하게 하시는 것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그 표적들은 대개 초자연적인 이적들이었으나 일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표적을 보이시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께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스스로 입증할 만한 증거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시면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표적 이외에 더 크고 확실한 표적은 없음을 암시적으로 보이셨다(마 12:38-40).
삽화-2:6 돌 항아리
경건한 유대인들이 식사 전후에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 두던 항아리로서, 항아리 하나에는 보통 70-100l의 물을 채울 수 있었다.
2:1-12 가나혼인 잔치에서의 예수의 첫 번째 표적
본서 전체는 크게 세 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 1-12장은 예수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 13-17장은 이런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시는 각종 계시와 교훈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제 18-21장은 이제 구속 사역을 통하여 인간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성자 예수의 부활을 보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첫째 대지(1-12장) 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 가운데서 저자 요한이 선정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해 주는 예수의 7대 표적(요 2:1-11; 4:46-54; 5:1-9; 6:5-13,19-21; 9:17; 11:1-44)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본문은 그 가운데서 첫째 표적으로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이적을 언급하고 있다(본장 연구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 참조). 즉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잔치석상에 초대를 받으셨다(1,2절). 그런데 잔치 노중 포도주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했으니(3절) 이를 해결키 위해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3-11절). 이러한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거해 준다.
첫째는 예수께서 신성(神性)을 지닌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은 만물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지니는 메시야적 주권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으니, 이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니신 권세에 근거 한 사건이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된 성격을 증거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하였다(마 12:28; 눅 17:21).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에, 제자들을 혼인 잔치의 손님들에 비유하신 바 있다(막 2:19). 따라서 본서의 기록자가 공관복음서의 기록자들이 직접적으로 소개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마 4:17; 막 1:15; 눅 4;43) 대신에 혼인잔치에서 행하여진 예수님의 표적을 소개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희락과 기쁨을 예시해 줌은 물론 장차 그 나라를 완성할 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을 변화시켜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다(요 1:12; 10:10).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떨어진 포도주가 다시 가득히 채워진 것처럼 날마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이 같은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증거해야 할 것이다(딤후 4:2).
2:1 사흘 되던 날. - 이 날은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날(요 1:43-51)로부터 이틀이 지난 그 다음날을 가리킨다. 지금까지는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거되었으나 본절부터는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해 그의 신적 능력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저자 요한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예수의 공생애의 첫 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11절).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조금 다른데, 마태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는 사건을(마 8:14,15) 첫 이적으로 기록하며, 마가와 누가는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사건을(막 1:21-28; 눅 4:32-37) 첫 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 사건이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있었던 첫 이적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 본서에만 나타나는 지명으로(요 4:46), 나다나엘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21:2). '가나'( )는 '갈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곳은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를 포함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요한이 이 지명 앞에 '갈릴리'라는 말을 기록한 것은 코엘레 수리아(Coele-Syria) 지역, 즉 레바논 골짜기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가나(요세푸스의 역사서에 나타남)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갈릴리 지방에만도 '가나'라는 곳이 10여 곳이 있어 본문의 가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유력한 장소로는 두 곳 정도가 꼽힌다. 한 곳은 케프르 켄나(Kefr Kenna)로서 나사렛 북동쪽 4.8-6.4km 지점의 마을이며 또 한 곳은 키르벳 카나(Khirbet Kana)인데, 나사렛 정북방 12.8-14.4km지점에 위치한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가 그 잔치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본절의 '가나'는 나사렛에서 가까운 '케프르 켄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하다.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 사도 요한은 그의 이모(즉 그의 모친 살로메의 자매)였던 마리아의 이름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12절; 요 6:42; 19:25). 마찬가지로 저자는 본 복음서에서 시종여일하게 자기와 자기 친척들의 이름도 알리지 않고 있다(요 1:35,37,40; 13:23; 21:20). 이는 본서의 독자들로 하여금 모든 시선을 그리스도에게로 집중시켜 그의 메시야되심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한편 예수께서 초청된 중요한 잔치에 예수의 어머니만 언급된 것으로 보아 예수의 육신적 아버지였던 요셉은 예수의 공생애 이전에 죽은 듯하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잔치에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잔치를 준비하는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잔치 음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3절). 하인들을 명령할 수 있었다는 것(5절)을 볼 때 그러하다. 이와 같이 마리아가 신랑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이 신랑이 마리아의 이종 조카인(요 19:25) 사도 요한이라는 전설이 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1절에서 마리아에게는 '계시고'(엔)란 표현을 사용한 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청함을 받았다'(에클레데)란 표현을 쓴 것이 대조된다. 그것은 마리아는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들 중 일원으로서 이미 잔치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오신 후 어느 시점에 초청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한편 제자들은 바로 며칠 전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예수와 함께 청함을 받을 수 있었는가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신랑과 예수의 제자들이 이미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가나 출신의 나다나엘의 초대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부름 받은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고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의 이종 사촌이며 제자들 모두는 서로 간의 친구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성스런 사역의 첫걸음을 혼인 잔치에서 시작하셨다. 세례인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으나(막 1:4-7), 스스로
를 혼인집 신랑으로 비유하신(막 2:18-22) 예수께서는 온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운 하나님의 나라를 갖고 오신 것이다.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 잔치집 주인이 원래 가난하여 음식이 모자라게 되었는지, 아니면 음식을 많이 장만하였으나 손님이 예상보다 많아 모자라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전통적 유대인의 혼인 예식이 일주간 혹은 이 주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는 점과 이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고(창 29:27; 삿 14:12) 특별히 예수와 그의 제자 등과 같이 먼 거리에서도 손님이 올 정도였음을 볼 때, 잔치 막바지에 예상외로 많은 손님이 몰려듦으로 인해 음식이 모자라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일상적 음료임과(창 14:18; 민 6:20; 신 14:26; 마 11:19) 동시에, 잔치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어 가는 중요한 음료였던 포도주가 모자랄 때 잔치를 베푼 사람들의 당황은 아주 컸을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아직 예수께서 그의 신분을 밝히 드러내거나 기적을 행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가 이 말을 왜 했는가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를 잔치집의 준비가 부족하여 음식이 모자란 것이 드러나 주인이 난처한 처지에 몰리기 전에 이 자리를 떠나라는 권유라는 해석이 있으나(Bengel) 어색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 음식이 떨어졌으니 영적인 권고, 즉 설교로써 손님들의 불안을 무마해달라는 부탁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Calvin)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다. 오히려 마리아는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던 잔치집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을 했다는 해석이 적당하다(Robertson).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4,5절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편 마리아는 이미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잉태된 메시야임을 천사의 방문을 통해 알고 있었으며(눅 1:26-38), 또한 예수가 세례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사건을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단순한 부탁이 아닌 예수의 권능을 통한 이적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 이 말은 '어머니'라고 번역된 것(공동번역 성경)보다 어색하고 무례하게 들린다. 그러나 '귀나이'(여자여)는 '귀네'의 호격으로서 책망이나 낮춤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그리이스에서 왕이 왕후를 부를 때, 혹은 자기의 아내를 사랑스레 부를 때에 사용된 존칭어였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 '여자'라는 칭호를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하셨다(요 19:26). 큰 슬픔과 비탄에 젖어 있는 어머니를 가장 인간적이고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부를 때에 이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 칭호 속에는 조금도 불손하거나 거친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한없는 사랑을 내포한 호칭이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부를 때에도 이 칭호를 사용하셨다는 것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 준다(요 20:15).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입니까?'를 의미한다. 대개 이러한 표현은 분노와 멸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삿 11:12; 삼하 16:10). 때로는 당면한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마 8:29; 막 1:24; 눅 8:28).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공손한 어투로 거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밝히고 있다. 그분이 여기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은 의도된 것이었으나 그러한 일의 동기가 마리아의 요청에 의한 것일 수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포도주 만들기를 거부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니고 단지 조금 지체하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말의 목적은 마리아의 걱정을 덜어주고 포도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라'는 약속된 '특정한 시간'(눅 14:17; 행 3:1)을 나타낸다. 성경에서는 보통 메시야의 수난의 때를 말하고 있으며 (요 8:20; 12:23; 13:1; 17:1). 때로는 미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정해진 그 시간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막 13:32). 어떤 이는 이러한 표현에서 예수께서는 공생애의 시작 시점에 이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실 구속사의 완성을 보고 계시는 것으로 해석한다(Mor
ris). 그러나 여기서는 협의적 의미로는 포도주가 부족한 것을 해결하는 신적인 권능으로서의 간섭의 때가, 그리고 보다 넓게 보면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공연히 나타내는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신적 권능을 가지셨으나 그의 사역을 수행해 나가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정된 시기에 지정된 일을 이루어 나가심으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 보통 성경에서 '하인'은 '둘로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고대 사회에서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던 '종' 또는 '노예'이다. 때로는 '하속', '일꾼'이라는 의미의 '휘페레테스'를 사용하여 '고용된 자'를 나타내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디아코노스'를 사용하였다. 이는 예속된 노예가 아니라 혼인식에 일을 돕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교회가 설립된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일꾼'(고후 11:23)으로 부름받은 사도를 나타낼 때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교회의 지도자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골 1:7; 살전 3:2).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4절에서 마리아가 예수에게 포도주의 부족을 알리고 어떤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거절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예수를 믿고 신뢰하는 차원에서 현명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즉 이제는 인간적인 조급함보다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뜻에 순종케 하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의 바른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항상 어떤 명령이든지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유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로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첫 이적을 경험하였듯이 우리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신 손길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 '결례'란 유대인의 씻는 일, 또는 세정식(洗淨式)을 말한다. 돌 항아리들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나 식사 전후에(마 15:2) 손을 씻기 위한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위생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 접촉한 부정한 것을 제거한다는 종교 의식적인 의미를 지녔다. 한편 그곳에 돌 항아리가 여섯이나 있었던 것은 가구들이나 그릇들을 씻는 데도 이 물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막 7:4; 눅 11:39).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물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돌로 만들어진 항아리들이 사용되었다. 물이 비교적 귀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지금도 물을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돌 항아리가 사용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통'(메트레타스)은 '측정하다'는 뜻인 '메트레오'에서 유래한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단지 본서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한 통을 현대의 계량 단위로 환산하면 약 8갤론 반 정도이다. 그러므로 한 항아리의 용량은 약 20갤론 정도이다. 따라서 여섯 항아리의 물은 모두 120갤론에 달하는 분량이며 이것을 리터로 환산하면 대략 420-720l에 달하는 많은 양이다 저자는 돌 항아리의 숫자와 용량을 밝힘으로 요한이 예수께서 베푸셨던 이적의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기록한 이 이적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2: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 '채우라'는 헬라어 '게미사테'는 '게미조'의 부정과거 능동태로서 '가득 채운다'는 뜻을 갖는다. 또한 '아구까지'(헤오스아노)는 '꼭대기까지'라는 뜻으로 이제는 물 항아리 가득 차서 더 이상 물을 부을 여지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표현은 항아리에 물만을 가득 채웠으며 다른 아무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과 다른 어떤 것도 추가될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순수한 이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2:8 이제는 떠서. - 동사의 목적어가 없다. 즉 여기서 저자는 구체적으로 항아리에 채웠던 '물'이나 이것이 변하여 생겨난 '포도주'를 뜰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떠서'의 헬라어 '안틀레사테'는 '고여 있는 물'이란 뜻인 '호 안틀로스'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주로 우물에서 물을 길를 때 사용되었다(요 4:7,15). 이를 근거로 이때 하인들은 물을 항아리에서가 아니라 우물에서 길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Westcott). 그러나 당시 하인들이 뜬 것은 분명히 항아리에 아구까지 채운 '물'이었다(9절 주석 참조).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 여기서 연회장이 신랑을 부르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9,10절) 초청된 손님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Trench, Alford, Wordsworth). 그러나 여기서 어원을 따져보면 그것이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연회장'(아르키트리클리노스)은 '권세자' '방백'을 뜻하는 명사 '아르케'와 '연회를 위하여 시중드는 사람들을 위한 세 개의 탁자가 놓여 있는 방'을 의미하는 '트리클리노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아르키트리클리노스'는 잔치를 위하여 시중드는 사람들의 총책임자를 가리킨다. 당시에 연회장은 손님들의 식탁을 돌보고 음식맛을 미리 보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새로 마련된 음식은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야만 하였다.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의 풍속에서 보면 연회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단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잔치를 주관하며 흥을 돋운다고 하였다(Platon).
갖다 주었더니. - 예수의 명령을 들은 하인들은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웠으며 즉시 떠서 내주었다. 즉 이 표현은 하인들의 무조건적인 순종과 충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순종의 결과 이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신 30:8). 또한 이런 자를 통하여 큰일을 행하신다.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도주를 연회장에게로 날라 갔다. 그리고 음식의 질을 감별하던 연회장은 늘 하던 대로 포도주의 맛을 보았으며 그 탁월한 맛에 아주 놀랐다. 한편 본절에서는 '물로 된 포도주'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물이었던 포도주'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Luther). 이처럼 포도주가 모자라 곤경에 빠졌던 잔치는 여섯 항아리나 되는 맛있는 포도주를 갖추는 풍족함의 자리로 변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 이적은 이처럼 완벽하다.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연회장은 여섯 개의 돌 항아리가 있는 방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포도주가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탁월한 맛을 보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하인들은 그 모든 상황을 알았다. 즉 하인들은 자기들이 떠온 것이 원래는 포도주가 아니라 돌 항아리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종들은 이 신비스런 예수의 첫 이적의 보증자들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 좋은 포도주를 내온 것에 대한 연회장의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여기서 '불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이'는 '외치다'라는 뜻인 '포네오'의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연회장의 놀라움을 현장감 있게 묘사한다.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 당시 잔치의 관습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잔치를 배설하는 자는 손님들이 취하기 전 감각이 가장 예민할 때에 최상의 포도주를 먼저 제공한다. 그러나 취하여 감각이 둔해진 후에는 좀 약하고, 질이 떨어지고, 덜 향기로운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러한 관례를 뒤집어엎는 결과를 내었고 이로 인해 연회장의 만족을 샀던 것이다. 혹자는 본절에 기록된 연회장의 말을 약간 꾸짖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나 그 근거는 희박하다. 오히려 그는 자기도 모른 훌륭한 포도주를 잔치가 끝날 무렵에 손님들을 더 잘 대접하기 위하여 간직해 둔 것에 대해 아주 자랑스럽게 칭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회장이 이 사건의 원인이 예수이시며, 이 풍성한 포도주는 그 분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손님들의 반응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침묵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만인에게 공개될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보여 주기 위한 저자 요한의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본문은 연대기적 순서로 볼 때 예수 공생애의 최초의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사를 매듭짓고 있다. 그러나 저자 요한은 이 사건과 관련된 신랑의 반응이나 그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는 오로지 한 사람 예수에게 이목(耳目)을 집중시켜 이 이적의 진정한 의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저자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하는바(요 20:31) 여기서도 이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는데 관심을 두고 그 결과가 제자들의 믿음인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표적' (Sign)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예고'라는 의미의 '세마'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 용어는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인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오트'의 대용어로 쓰였다. 또한 이 단어는 '표적', '기적'이라는 뜻의 헬라어 '테라타'( )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며 이 단어가 공관복음에서는 '표적'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편 구약에서 '오트'란 용어는 주로 하나님의 구속(救贖) 의지를 사람들에게 예고하며 증명하는 일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주로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내는 이적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마 16:4; 막 13:22; 눅 23:8), 결국 이 용어는 예수께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세주되심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이란 사건 자체나 결과보다 그것을 주신 동기, 또는 목적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본문의 사건도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 근본적 목적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신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표적이 있고서 당연히 뒤따라 일어났었을 놀라움 같은 사람들의 반응을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는 믿음의 반응만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표적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것이다. 한편 본문과 함께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에서 모두 일곱 개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2:1-11; 4:46-54; 5:1-9; 6:5-13,19-21; 9:1-7; 11:1-44) 이 사건이 첫 번째 이적이다. 물론 표적 없이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태도이나(요 20:29), 때로 표적은 의심하던 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좋은 계기가 되곤 한다.
2:12 그 후에. -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최초의 이적에 이어 저자는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응기기 위해 '그 후에'란 말을 사용한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이 말을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단수형인 '메타 투토'는 앞의 사건에 즉시 뒤이어 일어난 사건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요 11:11; 19:28). 둘째로 복수형 '메타타우타'는 앞 시간과 뒤에 벌어진 사건 사이에 상당한 시간의 거리가 있음을(Bemard) 나타낸다(요 3:22; 5:1,14; 6:1). 분문에서는 단수형을 사용하여 가나의 사건 직후에 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는 마 21:12,13; 막 11:15,18; 눅 19:45,46에 기록된 또 한 번의 성전 숙정 사건과는 시기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생애 가운데 성전 청결 사건은 2회에 걸쳐 있었다. 요한복음은 그 중 첫째의 사건, 즉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초기 유대 사역의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함에 비해, 공관복음은 둘째의 사건, 즉 예수의 마지막 고난 주간 중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 여기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같이 내려간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가족이 가버나움으로 이사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여러 날 계시지 아니 하시니라'란 표현을 볼 때 이사하신 것이 아니라 잠시 이곳에 머문 것을 말한다고 하나(Hendriksen), 막 6:3을 통해 판단해 보면 이 때 예수의 가족은 이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복음의 표현은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름만을 말하고 예수의 누이동생에 대해서는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말함으로써 예수와 그의 동생은 나사렛에 없었던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여동생들은 이미 나사렛 사람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나사렛에 남아 있었고 다른 가족은 이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지(高地)인 가나로부터 해변가인 가버나움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모두 움직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 요셉이 이 때 언급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 '형제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첫째로 '형제'는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 요셉의 전처의 소생으로 예수의 이복형이라는 주장(Grotius, Lightfoot), 둘째는 예수의 사촌들이라는 주장(Jerome, Augustine), 셋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의 친동생들(Tertullian. Meyer)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형제가 예수와 더불어 마리아와 함께 갔다는 측면 등을 고려할 때 이 중에 셋째 의견이 가장 정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 갈릴리의 고지대로부터 갈릴리 바다가 있는 저지대로 예수의 일행이 내려갔다. 가버나움이란 곳으로 측정되는 장소는 세 곳이 있다. '칸 민예'(Khan Minyeh)와 '아인 무다와라'(Ain Mudawarah), 그리고 '텔훔'(Tell Hum) 등인데 이 모두가 벳새다와 고라신 근처 호숫가에 있다. 그러나 이 중 텔훔 시의 가버나움으로 가장 유력시된다(Westcott). 이곳은 갈릴리 지역의 어업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므로 예수의 복음 전도지로 적당했을 것이다.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갈릴리 선교 근거지로 삼았으나 더 널리 복음 전파를 하기 위해서는 이곳에만 머무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 본문에서 가버나움에 오래 계시지 않으신 이유는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기 때문이다(13절).
2:13-25 제 1차 성전 숙정 사건
앞 단락에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은 예수의 첫 번째 표적과 그 의미에 관해 살펴보았다(1-12절). 이제 본문에서부터 요 3:36까지에서는 공관복음서가 언급하지 않는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을 숙정한데 대한 언급이다. 물론 예수의 성전 숙정 사건은 공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 21:10-18; 막 11:15-19; 눅 19:45,46). 그러나 그것과 본문의 것은 서로 다른 사건이다. 즉 본문의 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행하신 첫 번째 성전 숙정 사건임에 반해 공관복음의 것은 공생애 말기에 행하신 두 번째 숙정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본서 저자가 예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을 소개하면서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제 1차 성전 숙정 사건을 언급한 것은 예수의 사역의 성격과 성전의 의미를 보다 밝혀 주기 위한이다(본장 자료노트, '예수의 1,2차 성전 숙정 사건 비교 참조).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흠 없고 정결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오는 자들이 그러한 짐승을 가져오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사게 되었다. 또한 만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 세겔(Shekel)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바(출 30:13) 이를 위하여 로마나 헬라의 화폐를 세겔로 환전해 주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선의의 목적에서 비롯된 관행이 점차 부패하고 말았는데, 제사장들이 상납금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 장사치들의 독과점 행위(獨寡占 行爲)와 폭리 행위(暴刊 行爲)를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성전에서의 제사 의식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탐욕 행위이자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위하는 모독 행위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들을 성전 밖으로 모두 몰아내셨다(13-16절). 이는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교훈을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도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 즉 율법의 근본정신은 망각한 채 문자적 조문에만 얽매여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참되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무엇인지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전심 전력하셨다(마 5:7).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성격의 일면이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고 말씀하심으로 성전을 자기 몸에 비유하시며 죽은 후 삼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다(17-22절).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표론적, 모형론적 성격을 시사해 준다. 즉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성전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제, 만남의 장소였다. 그런데 이는 성육신하사 대속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을 이루신 참되고도 완전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하는 것이었다(히 9:11-28). 그러나 제자들은 당시에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야 비로소 깨달아 믿게 된다(22절).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공관복음에는 '유대인의'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이방인을 위하여 쓰여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또한 이는 본서 집필 당시에 벌써 존재했던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즉 유월절 어린양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와 대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Westcott).
한편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는 히브리어 '페사흐'에서 온 말로 '넘어간다', '용서한다' 등의 뜻이 있다. 즉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동안 노예 생활을 했던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장자를 치시는 10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어린양의 피의 표적이 있는 히브리인의 집을 그대로 넘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월절은 히브리인의 민족 해방일로서 오순절, 장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가장 큰 절기로서 유대인의 종교력으로 니산월이라 부르는 첫 달 14일 저녁에 베풀어져 7일간 계속된다. 이때가 되면 수많은 유대인이 먼 나라에서까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몰려왔다(13절; 요 11:55). 예수께서도 이러한 전통을 지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물론 문자적으로도 맞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낮은 지역이었고 예루살렘은 높은 산지에 위치하였으므로 ‘올라가셨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러나 이 말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관념을 이해할 땐 더 잘 알 수 있다. 즉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로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었으므로 타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2:14 성전 안에서. - '성전'을 표시하는 헬라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히에론'은 성전뜰과 건물 등을 포함하여 보다 넓은 의미로 성전 전체를 가리킨다(눅 4:9). 반면 '나오스'는 보다 좁은 의미로 성전 건물, 그 가운데서도 성소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의 몸이나(21절), 또는 성령이 머무시는 곳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고전 3:16,17; 고후 6:16)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성전'은 전자인 '히에론'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다시 남자의 뜰, 여자의 뜰, 그리고 이방인의 뜰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어 나오는 문장에 제물용 가축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성전 뜰 중 가장 개방적이었던 이방인의 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 여기 언급된 짐승들과 더불어 염소 등은 모두 제사에 사용되는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는 제사 드리는 사람의 빈부의 차에 따라서 선택되었다(레 1장). 한편 희생의 제물로 쓰일 짐승은 흠 없고 정결한 1년생이어야 하며 그 적격 여부를 제사장으로 부터 검사받아야 했기에 외국이나 먼 지역에서 여행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오는 것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팔므로 검사를 받을 필요도 없었던 제물을 사서 바치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제물로 쓰일 짐승 거래는 원래는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상업적인 수익을 얻기 위한 사업으로 전락하였다. 한편 이 모든 것은 배후에서 대제사장이 주관하였고, 이로 인해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된 상인들은 다시 대제사장에게 거액의 헌납을 하곤 하였다(Jeremias).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 당시 풍속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되는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은 성소에 반 세겔되는 속전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출 30:13). 그러나 당시 로마 세계에는 시이저의 화상(晝像)이나 이방 군주의 화상, 혹은 이방 우상의 상징이 들어있는 돈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유대 전통 통화인 세겔로 바꾸어 성전에 바쳤는데 그 과정에서 환전상들은 많은 이익을 남겼다. 당시 이러한 환전(煥錢)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관장했고, 이들은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Jeremias).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종교적인 명목을 내세워 인간의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 제도를 존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가 상업적 목적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의로운 분노를 드러내신다. 채찍은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심판의(사 10:26)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는바 여기서도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한 신적 분노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godet). 이처럼 채찍을 들고 호령하는 그의 권위는 당시의 세속적인 지배 계층으로 타락한 대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한 권위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인 본문에서와 같이 말기에도(마 21:12) 비슷한 사건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그가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할 자이지만 불의에 대하여는 진노하시는 분이심을(롬 1:18) 잘 보여 주고 있다.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당시 예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저자가 사용한 과격한 동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즉 '엎으시고'(엑세발렌), '쏟으시며'( 엑세케엔), '엎으시고'(아네트렐센)는 모두 평소의 무한한 사랑을 보이시던 예수에게 안 어울리는 거친 단어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쓰여져 악에 대응하는 분명한 그의 태도와 결정적이고 완벽한 성전 숙정 작업의 수행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불의에 대하여 용납치 않으시는 지극히 의로운 분이시다.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 저자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이 사건의 직접 목격자임을 암시하고 있다(22절). 즉 예수께서는 상황에 맞게 큰 짐승들은 채찍으로 내쫓고, 돈 바꾸는 상은 엎으셨으며, 이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들어 올리다'란 뜻이 있는 '가져가라'(아이로)란 말로써 명하신다. 당시 비둘기는 바구니와 같은 새장에 가두어 판 것으로 미루어 이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命名) 되었던(스 5:2,8; 눅 2:49) 성전을 가리켜 '우리들의 아버지의 집'이라 하지 않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본서에 자주 나오는 아주 독특한 용어이다. 즉 이 용어가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는 16회, 누가복음에는 4회 사용되었으나 본서에서는 27회나 나타난다. 이 말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신 것이다(요 1:14,18; 5:19,21). 즉 당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은 성전을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공회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알고 그들의 비호를 받았으나 예수께서는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그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신 것이다(눅 2:49).
또한 본절에서는 성전을 '장사하는 집'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유사한 상황에서 마태복음에서는 더 가혹한 표현인 '강도의 굴혈'(마 21:13)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당시 성전과 종교인의 부패상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 예수의 격정적인 행동을 보고 제자들은 신약에 자주 언급된 시편(22,89,110,118편) 중 하나인 시 69:9을 떠올리게 된다. 이 시편이 하나님을 참되게 좇음으로 당하는 핍박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적 예언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학자도(Weiss)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메시야의 사역을 예언한 시로 본다. 이런 사실은 시 69편의 4절은 요 15:25에, 9절은 요 2:17에, 25절은 행 1:20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더불어 바울도 롬 15:3에서 9절의 하반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다만 본문과 시편의 한 가지 다른 점은 '삼키리라'의 시제를 과거에서(카테파겐) 미래로(카타파게타이) 변화시켜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면서 예수에게 일어날지 모를 일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을 그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키리라'를 주의 전을 깨끗게 하고자 하는 열정에 휩싸인 당시의 예수를 가리킨다고 일차적으로 볼 수 있으나 동사의 시제가 미래인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실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Godet, We colt).
한편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스'는 '끓는다'는 뜻의 '제오'에서 온 말이다. 성경에서 이 용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신 29:20)을 나타내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열심(시 69:9), 인간적인 감정의 질투(잠 6:34)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말로서, 여기서는 예수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잘 보여 준다.
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 '대답하여' (아페크리데산)라는 낱말은 반대나 비판에 답하기 위해, 또는 남의 마음에다 무엇을 상기(想起)시키려 할 때 사용되었다(Vincent, 마 11:25; 17:4; 요 5:17; 19:1), 그리고 이 단어가 본문에서와 같이 '에이판'(말하다)으로 사용될 때에는 불만 섞인 항변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관용적 용법으로 쓰인다. 따라서 공동번역 성경에서 '대들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의 질문에 적대적인 감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유대인'이란 일반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당시 희생제사와 제물로 인해 커다란 이득을 보고 있던 유대 관원들을(서기관, 제사장, 성전에 소속된 하속들) 말하고 있다(Hendriksen)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은 메시야의 권위로 인해 위압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습성(習性)대로(고전 1:22) 그리고 그들이 입은 경제적 손해와 더불어 그들의 권위 상실로 인한 격앙된 심정으로 외적인 표적을 요구하고 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 당시의 관행과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의 행위는 기득권을 누리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가 어디에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할 때 표적을 통해서 하는 것이 전통적 방법이었다(신 18:22). 따라서 예수께 표적을 구하는 이러한 요청은 외면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예수가 하나님의 권위로서 이 일을 하고 계신가의 여부를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는 예수의 행동을 억제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였으며 성전 청결 자체가 하나의 표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질문은 정당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즉 이것은 말 3:1-3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시 69편의 성취임과 동시에 아무도 행하지 못했고 저항하지도 못했던 타락한 성전을 깨끗게 하는 예수의 행위 자체가 메시야가 드디어 성전에 임했다는 충분한 증거였으나 그들은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치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표적'에 대하여는 11절 주석을 참조하라.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엄청나게 기이한 명령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암시적인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도 그들은 말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성전'으로 쓰인 헬라어는 14절에 나오는 성전의 뜰과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는 달리 '나오스'가 쓰였다. 이 단어는 아주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성전 본체를 (행 17:24),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도 한다(19,21절).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고전 3:16,17; 고후 6:16; 엡 2:21). 그런데 본문에서의 그 의미는 2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성전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구약시대의 '성전'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출 25:8; 29:42).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도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이므로, 예수는 참 성전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께서 성전된 당신의 육신을 가리켜 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앞으로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22절).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당신의 죽음을 의미했듯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언은 바로 예수의 3일 만에 부활하여 다시 사심을 가리킨다. 특히 '일으키리라'는 '다시 살리다'라는 뜻인 '에게이로'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로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었던 예수께서 스스로 부활하실 것임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의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즉 후에 예수께서 체포되어 심문 받을 때 예수 자신이 성전 건물을 파괴하고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왜곡하여 예수님을 정죄한 것이다(마 26:61).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 본절은 예수의 생애와 관련하여 중요한 연대기적 자료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역사상 3번에 걸쳐 건축과 파괴가 반복되었다. 첫째의 성전은 솔로몬이 B.C. 959년에 완공한 것으로(왕상 6:37,38)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B.C. 586년에 파괴되었다(왕하 25:8-21). 둘째는 스룹바벨이 B.C. 516년에 완성하였고(스 6:15-18), 이 건물은 헤롯 성전이 지어질 때까지 훼손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셋째는 본절에 기록된 헤롯의 성전으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재위(在位) 18년째 되는 B.C. 19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Josephus). 그 후 성전은 약 A.D. 63년경. 총독 알비누스 때에 완공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지었다고 말한 것은 당시 예수의 나이와 이 사건의 발생 시기를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다. 즉 여기서 46년은 시작 연도 B.C. 19년을 시작점으로 한다면 A.D. 27년이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바와 같이 A.D. 1년에 예수의 나이가 4세이었다면 이 사건 당시 예수의 나이는 29-31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지었거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데'가 부정 과거형으로서 과거에 이미 끝나버린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본절에서 요한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서는 꼭 완공을 나타내기 보다는 '지금 이 정도의 완성도 46년이나 걸렸는데․․․․' 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은 성전 건축이 거국적인 행사로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시간적으로 46년이나 지났으나 아직도 완성을 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내가', 즉 자기 혼자서 3일 만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은 그들의 시각에서 는 아주 얼토당토 않은 말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구절의 서두에서 '네'(카이 쉬)라는 말이 '그리고 너'라는 뜻으로 '너'를 특별히 강조하여 '감히 네까짓 것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는 투의 멸시적인 어조로 나타난 것에서도 알 수 있다(Hendriksen). 즉 이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요령 부득의 대답을 한 것이다.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본 구절은 당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아니다. 후에 모든 일이 분명해지자 이 당시 예수의 말씀을 회상했던 저자 요한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며 이를 해설해 놓은 것이다. 요한은 이와 같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제 3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여 해설적으로 자세한 설명을 많이 한다(24,25절; 6:6; 7:5.39; 11:13,51,52; 12:6). 한편 구약시대에 상전이 임마누엘의 하나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듯이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인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므로 성전인 것이다.
2:22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모호한 의미로 인해서 더욱 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 그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이 예언을 실증하시고 또한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영적인 지혜를 주신 후에야 이때 하신 말의 의미가 제자들에게 분명하여졌다. 한편 본문에서 '살아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르데'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성전 건물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에 일어남을 보여주기 위해 수동형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음을 나타내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이 능동적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입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막 8:31; 9:9,31; 눅 18:33; 24:7,46; 행 10:41; 살전 4:14).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본문에는 저자 자신과 동료 제자들이 한 때 무지했음을 겸허히 고백하는 진실이 담겨 있는 기록이다. 비록 예수의 제자들이지만 그들도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메시야 사역에 대해서 무지와 몰이해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의 선물이 있고 난 후에는 그들에게 진정한 깨달음과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저자는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병행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요한이 마음속으로 일정한 성경구절을 생각하면서 '성경'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만약 후자의 경우로 본다면 여기서 '성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 특히 이 지상 사역 가운데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한 구약 성경 구절들을 지칭한다(시 16:9-11; 사 53장).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성취됨과 동시에 예수의 말씀도 그대로 성취되고 나자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었던 유월절 축제는 유대 종교력 첫 달인 니산월 14일로부터 21일까지 7일 정도 지켰으나 그 준비 기간까지 합한다면 대개 9일이나 10일간 동안 축제 분위기가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파스카'는 '유월절 기간 동안 내내'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음을 알려준다(Hendriksen). 예수께서는 14절에 기록된 성전 청결 사건 이후 계속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많은 이적을 베푸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드러내었으며, 또한 유월절 기간에 많은 사람 앞에 자기를 나타내심으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유대인들의 최대의 절기였던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엄청난 숫자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의도적으로 예수를 반대하고 해하려던 유대의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 외에도 먼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올 정도로 열심이 있었던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에 대한 선입감이나 질시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가 베푸신 초인적인 능력을 보고는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표적을 통한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롬 1:16)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예수께서 메시야인 것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11,12). 어떤 주석 학자는 본절에 기록된 '그 이름을 믿는 신앙'과 요 3:18의 '그를 믿는 신앙'은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나, 본절에 나와 있는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들이 표적을 봄으로 생긴 예수에 대한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Meyer). 이러한 지적이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을 것이나 이때 예수의 이적을 목격한 많은 이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예수는 상당히 인상 깊은 인물로 기억되었을 것이며 이는 후일 기독교의 이방 전파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 여기서 '의탁하다'(피스튜오)는 '신뢰를 가지고 의지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정어(우크)와 더불어 사용되어 표적을 보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을 의탁치 않으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헬라어 성경에는 한글 성경에서 생략된 역접 접속사 '데'(그러나)를 사용하여 이처럼 예수의 예상치 못한 반응을 분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을 신뢰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적을 보고 예수께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았던 그들은 예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후에 예수를 억지로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고까지 했었다(요 6:15).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참된 회개를 통해 예수의 바른 제자가 되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믿음은 일시적 믿음이요(마 13:20,21), 이적적 믿음일 뿐, 구원의 믿음이(갈 2:20) 아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 예수께서 자신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자들을 신뢰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한 본절은 예수의 전지성(全知性)을 나타내어 그가 신적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밝혀준다. 즉 예수께서는 저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저들이 가진 '믿음'의 허구성을 분명히 아셨다. 본서는 예수의 신적 선재성과(요 1:1-3) 더불어 이러한 예수의 전지성을 여러 곳에서 묘사하고 있다. 즉 베드로를 대하실 때(요 1:42; 21:17), 나다나엘과 니고데모를 처음 만나셨을 때(요 1:47; 3:3),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요 4:29)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까지 아시는 분이심을 잘 보여준다.
2:25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 여기서 '친히'(아우토스)란 말을 쓴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전지성의 신적 속성을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있는'(엔)이란 말의 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과거부터 있어 왔고 현재도 있으며 또한 미래에도 있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예수께서 시간적 제한 없이 아심을 나타내시고 있음에도 확인된다. 또한 여기서 '아시므로'(기노스코)란 말 역시 본질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입증이 된다.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 예수께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재판하는 인간 법관과는 달리 어느 특정인에 대한 증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실 수 있는 신적 통찰력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지엽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선재성(先在性)과 창조성에 기인한 초자연적이며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 것이다.
연구 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자기 선언
사도 요한은 한 마디로 예수는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을 가진 존재로서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세워진 인간 구속의 법을 성취하시고자 성육신하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우리의 유일 절대의 그리스도 구주임을 입증하고자 제 4복음서인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우리 구주가 되시는 진리의
여러 측면중 주께서 본래 제 2위 성자로서 가지신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세례인 요한, 예수의 제자들, 심지어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의 여러
직접적인 증언들을 통해서도 이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사도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일곱을 선정하여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표적(Sign)으로 제시하고 있고, 또 예수께서 스스로 성자요 우리의 메시야이심을 함축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예수의 7대 자기
선언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사도 요한이 제시한 예수의 7대 표적과 7대 자기 선언이라고 한다.
1, 정의
'표적'(sign)과 '이적'(miracle)은 같은 말이 아니다. '표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온'( )은 일차적으로는 어떤 개체를 다른 개체로부터 구별해 주고 알게 해 주는 기준을, 나아가서는 어떤 말이나 사실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초자연적인 사건, 또는 미래에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을 미리 알려주는 전조(눅 21:11,25; 행 2:19), 또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보낸 사람들의 신빙성을 보중하기 위해서 보여주시는 이적 또는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들임을 보이기 위해 제시하는 기적들이나 경이로운 일들을 가리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마 12:38; 16:1,4; 눅 11:16,29; 행 2:22,43). 따라서 초자연적인 사건인 이적은 하나의 표적이 될 수는 있으나 이적 자체가 곧 표적은 아니다. 또 굳이 이적만이 표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편 여기서 예수의 자기 선언(decaration)이란 특별히 예수께서 자신의 성자로서의 본래의
지위, 그리고 자신과 택한 백성들과의 관계 및 자기 사명, 곧 메시야직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계시하신 말들, 곧 '나는 ~ 이다'라고 하신 말들을 가리킨다.
2. 7대 표적과 7대 선언의 내용
1) 예수의 7대 표적
내 용 | 영적 의미 | 관련성구 | |
1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 그리스도 안에서 만 참 생명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 | 2:1-11 |
2 |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심 |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 받을 수 있음 | 4:46-54 |
3 |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심 |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영원한 얽매임에서 해방케 됨 | 5:1-9 |
4 |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심 |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무궁히 얻을 수 있음 | 6:1-13 |
5 | 물위를 걸으심 |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생의 어떤 풍파도 잔잔케 됨 | 6:16-21 |
6 |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치유하심 |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빛 가운데서 살게됨 | 9:1-41 |
7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부활과 영생을 얻게됨 | 11:1-44 |
2) 예수의 7대 선언
내 용 | 영적 의미 | 관련성구 | |
1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심 | 6:35 |
2 | 나는 세상의 빛이라 | 어두움에 갇힌 자들을 생명과 진리로 이끄는 빛이 되심 | 8:12 |
3 | 나는 양의 문이라 | 세상에서 수고한 자들이 평안과 안식의 처소로 들어가는 문이 되심 | 10:7 |
4 | 나는 선한 목자라 | 세상의 위협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심 | 10:11 |
5 |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 장차 성도들이 얻을 부활과 생명의 근거와 보증자가 되심 | 11:25 |
6 |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라 |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되심 | 14:6 |
7 | 나는 참 포도나무라 | 성도들이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영양분의 공급원이 되심 | 15:1 |
3.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바 예수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을 통해서 우리는 먼저는 예수가 성자로서 가지신 절대 신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절대 신성을 가지신 분이 성육신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이런 절대 신성을 가진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 구주이시니 우리의 구원도 절대 확실함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이런 7대 선언과 7대 표적에서 절대 신성을 가지고 우리의 그리스도로 오신 그분의 구속 사역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서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의 죄와 사망, 그리고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이 땅에 살 동안에 빛과 진리 가운데서 살며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사 모든 성도들을 부활케 하시며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때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 위에서 더욱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 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