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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사울 곧 바울의 대회심 사건과 베드로의 애니아 치유 및 다비다 소생 이적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8-12장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일련기사는 초대 교회의 선교사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일단 유대와 사마리아 등 팔레스틴 전역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 등이 이루어지고 특히 후에 이방 선교의 기수(鐵手)로 사역하여 가히 이방인의 사도로 칭해졌던 바울(Paul)의 회심 사건 등이 발생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당시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전 로마 제국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발론이 마련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전 ․ 후반부로 나된다. 먼저 전반부 1-31절은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초대 교회 핍박에 앞장섰으나 다메섹(Damasous)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로는 완전히 변화하여 오히려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의 복음을 전하며 특히 이방인의 대사도로서 사역하였던 사울 곧 바울의 대회심(大回心)과 관련된 일련사건을 보도한다. 그리고 후반부 32-43절은 베드로 사도의 팔레스틴 순회 사역을 룻다(Lydda)와 욥바(Joppa)에서 애니아와 다비다를 각각 치유하고 소생시킨 이적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본장은 전반부가 후에 이방인의 대사도가 된 바울의 회심을 다루고 후반부가 얘수의 12제자 중 수제자요 12사도 중 대표였던 베드로 사도(Peter. the Apostle)가 직접 애루살렘을 떠나 순회 사역을 행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다음 장에 보도되듯이 가이사랴(Caesarea)에서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 세례를 받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과정을 암시함으로써 결국 이제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이 이미 주께서 예고하셨듯이(행 1:8) 일단 팔래스틴 지역에 퍼지고 마침내는 모든 이방인을 향하여까지 전달되게 된 상황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전반부 1-31절에서 보듯 예수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그 도상(途上)에서 주를 만나고 또한 주의 섭리로 아나니아를 통하여 세례를 받고 회심하였다(1-19절). 그리하여 회심 후 이제는 정 반대로 순교를 각오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으며(20-25절) 회심 후 대략 3년만에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여 향후 이방인의 사도로 본격적으로 사역할 바울은 이미 유대인의 사도로서 사역하고 있던 기존 사도들과 교우하며 상호를 인정 존중하게 되었다(26-31절). 이러한 바울의 대회심 사건 일련기사 각 문단의 내용분해 및 각 세부 사건의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 강해주석란을 보라. 이제 본 개관에서는 후에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던 바울의 회심 사건 자체가 갖는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만 집중해 보려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토록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초대 교회 기독교인 숙청(肅淸)에 앞장섰던 사울이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는 완전히 변화되어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독교 복음 전파자가 되었던 그 급격하고도 철저한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더욱이 그는 유대주의자 중에서도 고도의 학식과 능력을 겸비한 촉망받는 소장 바리새파(Pharisee)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는 공고한 정치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로마 시민권(Roman Citizenship)까지 보유한 부유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단순한 종교적 개종(改宗)이 아니라 그야말로 오직 복음의 진리에 순복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의 보장을 버리는 순교적 결단을 강행한 대회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한마디로 그가 부팔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나서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지금 영광 중에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진정성(眞正性)과 절대성(絶對性)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독교의 복음은 전우주와 인간의 전존재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서의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진리임을 새삼 확인한다. 한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바로 나에게도 나타나서 바울과 같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게 해주면 나도 확신하고 주를 믿으며 바울처럼 전적 헌신의 생활을 살겠다고 말한다(눅 16:27-31).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체험과 변화를 바로 나의 체험과 변화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무오의 계시의 책인 성경이 바울의 사건을 기록하였으므로 우리는 이 사건이 허구가 아니며 실재적 사건임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이를 기록한 것은 7l를 통하여 결국 모든 성도가 바울의 체험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본 사건에서 그토록 철저한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을 오히려 가장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드신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에 담긴 섭리의 오묘함을 발견한다(행 22:21; 26:17). 실로 이런 대회심을 거쳐 사도가 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인간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고난과 노고를 끝없이 감당해야 했다(고후 11:23-33) .
또한 다른 사도들과도 또 달리 이방인 선교에 가장 앞장섰던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수없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비방과 도전을 받아야만 하였다(고전 제 9장 자료노트 참조).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자신의 소명(召命)을 확신하고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의 소명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구원의 복음이 선민(選民)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계 모든 이방인에게도 전해질 것이라는 구약의 여러 예언이 바울의 사역으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사 55:5; 단 7:14; 호 2:13). 이는 구속사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구속사를 예비하시고 진행하시며 또한 이를 필히 성취하심도 보여 준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와 여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약속 예언하신 구속사의 최후 최대의 약속 곧 이 세상의 종말과 새 천국(天國)의 도래의 약속도 필히 성취될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한편 후반부 32-43절은 베드로 사도의 병자 치유 및 죽은 자까지 소생시키는 이적을 동반한 능력있는 사역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도행전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제 대사도 베드로마저 예루살렘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순회 사역을 행해야 할 정도로 초대 교회가 팔레스틴 전역에 뿌리를 내렸음을 암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다음 장의 가이사랴에서의 이방인 고넬료 전도 사건의 배경을 보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거시적(巨視的) 관점의 의의들 곧 초대 교회의 확장 과정에 대한 개략적 이해와 특히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이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전이방 민족에게로까지 확장된 사실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각각 본서 서론과 롬 제 9장 개관을 참조하라. 다만 여기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베드로 사도의 권능과 이적이 갖는 다음의 두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만 주목해 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애니아가 치유되고 다비다가 소생한 사건이 예표적으로 증거하듯이 우리 주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 인생의 질고가 나아가 죄의 최종적 결과인 죽음마저 궁극적으로 해결되어 영생과 평안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둘째, 여기 보듯이 그 옛날 그토록 비천하고 부덕하던 베드로(요 18:15-18,25-27)는 주의 부활 승천을 목격하고 또 성령(聖靈)의 능력을 덧입어 위대한 권능의 사도가 되었다. 이는 우리도 순전한 마음으로 주를 의뢰하여 성령의 충만을 얻을 때 위대한 신앙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역동적 희망을 갖게해 준다. 실로 구속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한 이런 권능의 종들의 사역으로 전개되어 왔고 또 세상 끝날까지 전개될 것이다. 이에 바로 나도 죄의 오염으로 야기된 절망과 불안, 부정과 냉소를 나사렛 예수(Nazareth Jesus)의 이름으로 혁파하고 내가 처한 삶의 현장 바로 거기에서부터 위대한 신앙의 힘을 발휘하여 구속사의 대열에 한 용사로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외울 말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난 사울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울
10 ○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의 다메섹 복음 전도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사울의 다메섹 탈출
23 ○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도들의 인정을 받는 사울
26 ○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튼튼히 서가는 교회
31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에니아를 치유한 베드로
32 ○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 년이라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다비다를 다시 살린 베드로
36 ○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9:17 성령 세례와 성령 내주 및 성령 충만
본문에는 다메섹 도상 사건을 경험한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찾아가 자신은 주님이 보내신 자로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에 충만케 하기 위해 왔음을 말하고 그에게 안수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외에도 성경은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서로 연속된 성령의 사역이면서도 각각 독특한 측면을 가진 성령 세례와 성령 내주 및 성령 충만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 바 우리는 각각의 개념과 아울러 서로의 관계에 대하여 밝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성령 세례
'성령 세례'(Hely Baptism)란 성령이 한 죄인의 심령에 처음 임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하고 또 회개하여 중생케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성령에서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사 구속사를 주도하시기 시작하신 사건으로서 역사 전체의 입장에서의 최초의 단회적 사건이었다면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각 개인 안에 영속적으로 내주(內住) 하시기 위한 개시로서 한 개인의 입장에서의 최초의 단회적인 사건이다. 즉 성령 세례란 각 개인별로 그가 처음 구주를 영접하도록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같은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이 예언한 바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회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했던 바와 같이 일단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이 이 역사에 임재하신 이후에 각 성도 개개인에게도 임하시기 시작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각 개인 성도에 대한 인정과 구원의 인치심이다(고후 1:22; 엡 1:13; 4:30). 실로 타락 이후 완악해진 인간은 그 누구나 성령 세례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얼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성령 세혜를 받은 자이다. 그런데 이때 성령 세례는 개인별로 큰 감동과 격함으로 또는 잔잔하지만 확고한 깨우침으로 올 수 있다. 따라서 혹자는 성령 세례를 성령의 강력한 감동과 그로 인한 충만 상태와 혼동하여 특별한 신비 체험이 없기 때문에 성령 세례를 안받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참으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자신에게 그런 믿음을 주신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한편 물세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입문하는 외적인 의식으로서. 과거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성도 자신의 고백과 이에 대한 교회의 인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할 때(요 3:5) 그것은 성도에게는 성령 세례를 통한 내적인 체험과 물세례를 통한 교
회의 외적 공인(公認)이 동시에 요청됨을 가리킨다.
2. 성령 내주
성령 세례를 통해 각 사도에게 임하신 성령은 향후 계속 그 심령 안에 임재하시는 바 이를 성령 내주라 한다. 성령세례가 성령 내주의 개시로서 성도와 회개, 중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성령 내주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삶의 본을 따라 사는 삶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 때까지 지속케 하는 성도의 성화(santification)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령께서 한 번 성도 안에 내주하시면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성도의 보혜사(요 14:6)로서 반드시 천국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보호 인도하신다. 따라서 중생한 성도 안에는 항상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도 개개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이라고 말한 것이다. 실로 성도는 내주하신 성령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직접적 교제를 나누는 자이다.
이 얼마나 벅찬 기쁨인가!
3. 성령 충만
'성령 세례'가 처음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절대적 사건이라면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함께 이미 성도 안에 내주해 계시는 령님의 특정 시기의 특별한 감동으로 성도가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상대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다. 한 번 그리스도를 주(主)로 영접한 사람에게 있어서 성령 내주의 상태 자체는 결코 단절이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상태는 성도의 신앙 생촬과 밀접히 연관되어 그 정도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다. 종합하자면 성령 세례는 단회적 사건이고 성령 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 충만은 반복적인 사건 또는 상태라 할 수 있다. 한편 충만(헬, 플레로마)의 원어적인 의미는 한 척의 배에 물건을 가득 실은 상태, 혹은 컵에 물을 부었을 때 가득차서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과의 교제 자체는 단절되지 않으나 신앙생활에 정진(淸進)하기에 따라 성령이 충만할 수도 또 반대로 성령이 감동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인물연구-9:1-30, 바울
롬 1장 연구자료 참조
삽화-9:3 다메섹에서 발견된 주화
지도-9:3-22 사울의 다메섹 여행 경로
도표-9:18 신약의 세례받은 자들의 주요 실례
1. 예수 그리스도(마 3:13; 막 1:9)
2.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행 2:41)
3. 사마리아의 회개한 자들(행 8:12,13)
4. 에디오피아의 내시(행 8:38)
5. 사도 바울(행 9:18)
6. 고넬료와 그의 가정(행 10:48)
7. 루디아와 그의 가정(행 16:15)
8 간수와 그 권속(행 16:33)
9. 고린도의 신자들(행 18:8)
10. 에베소의 제자들(행 19:5)
원어연구-9:22, 증명하다, 굴복하다
'증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비바조'는 '함께'라는 뜻의 '쉰'과 '걷다'라는 뜻의 동사 '바시스'에서 유래한 '비바조'가 합성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같이 걷다'이다. 여기서 '함께 연합하다' 또는 '여러 사실들을 모아서 비교하다', '증명하다', '가르치다' 등의 의미가 파생되었다(고전 2:16; 엡 4:16; 골 2:2,19).
본문에서 이 단어는 사울이 구약의 말씀들을 비롯한 다른 분명한 자료들을 모아서 비교함으로써,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입증하였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와 같이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여러 증거들을 미리 준비하여 복음을 더욱 확신있게 전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한편 본문에서 '굴복하다'에 해당하는 '슁퀴노'는 '붓다'라는 뜻의 '케오'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함께 붓다' 즉 '혼합하다'이고, 여기 에서 '뒤죽박죽하게 하다'. '교란하다'(행 19:32). 또는 '소동을 일으키다'(행 2:6)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미완료 능동태로 쓰여 '계속해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뜻이 된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굴복시키니라'로 의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유대인들이 사울의 증명으로 인해 아무말도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리둥절하게 되어 우왕좌왕하다' 또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소동을 일으키다'라는 의미이다. 즉 그들은 사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에 대해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면서 겸손하게 자복하고, 복음을 수납하기는 커녕 오히려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때때로 우리도 본문의 유대인들 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굴복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 자신의 완악함 때문에 그 말씀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기꺼이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겸손함을 더욱 배워야 할 것이다.
난제해설-9:1-19 바울의 세 회심 기사의 차이
행 26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9:31 초대 교회의 선교사
행 서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9:30-42 성경에 언급된 과부들의 10대 실례
특 징
1. 다말: 시아버지 유다를속여 동침함으로 자손을 이음(창 38:6-30)
2. 나오미: 자신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들의 재혼을 배려함(룻 1:3; 3장)
3. 오르바: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라는 시모의 권유를 수락(룻 1:4-14)
4. 룻: 끝까지 시모를 봉양하고 계대 결혼으로 자손을 이음(룻 1-4장)
5. 사르밧 과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선지자 엘리야를 공궤험(왕상 17: 10-24)
6. 선지자 생도의 처: 엘리사의 기름 이적으로 빚을 갚음(왕하 4: 1-7)
7. 안나: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다 아기 예수를 만남(눅 2:36-38)
8. 나인성 과부: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살려주심(눅 7:11-15)
9. 가난한 과부: 가난한 중에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눅 21:1-4)
10. 도르가: 선행과 구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을 섬김(행 9:36-42)
지도-9:32-10:24 베드로의 사역 여정
9:1-9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
앞장(행 8장)에서는 복음이 애루살렘과 유대라고 하는 지역적 민족적인 틀에서 벗어나 이방 세계에로 확장되는 전환기의 사건으로 빌립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사마리아와 팔레스틴 근경까지 확장되어 나간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장에서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직접 사역할 바울의 소명과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 점차 이방 지역으로 팍대되어가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한 실례로서 팔레스틴 서부 지역에서의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본문은 이방인의 사도(15절; 갈 1:16)로 부름을 받은 사울의 회심 사건을 소개한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산혜드린 공회의 공문을 얻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1,2절).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3-7절). 이후 사울은 3일 동안을 앞을 보지 못한 채 식음을 전폐하게 되는데(8,9절) 주께서 보내신 아나니아의 안수로 비로소 다시 보게 된다(17절).
한편 본문에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이방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퉁하여 부분적으로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시고(행 8:1-3). 이제 이방 선교에 가장 적합한 사울을 준비해 놓으심으로 구원의 계획을 펼쳐 보이신다. 사울은 헬라 철학의 본거지인 다소 출신으로 이미 헬라 문화에 익숙해 있었으며, 또한 유대인의 존경받는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아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행 22:25). 이는 당시 근동과 유럽 지역이 모두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음을 감안할 때 여행이나 선교에 용이하였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롬 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환경적으로 이 방 선교의 여건을 조성하시고 사울을 이방의 사도로 임명하신 것이다.
둘째는 사울의 회심(回心)이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주의 제자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친히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을 받게 된다. 물론 사울의 이러한 회심은 스데반이 흘린 순교의 피가 밑거름이 되었고(행 7:54-60),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여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좇아 복음의 증인이 된 사울의 변화는 장차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는 사역을 수행하여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엄청난 사건이 된 것이다. 한편 사울에게 예수림께서 직접 현현하신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했으므고 사울도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기 위함이었다. 누가는 이런 사울의 회심 사건을 두 번이나(22,26장) 더 기록함으로 바울의 사도권을 확인시켜 주고 그의 회심이 기독코의 이방 선교 역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부각시킨다.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각 사람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자신의 전적 부패와 부능을 인시할 수 있으며 참된 변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교훈받게 된다(고전 3:7; 고후 5:17; 딤전 1:15).
9:1 사울이‥‥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현장에 있던 사람이며(행 7:58),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다(행 8:3).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멀리 다메섹에까지 가서 주의 제자들을 박해하려 하고 있다(2절). 여기서 '주의 제자들'은 12사도만을 지칭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다(13절; 행 6:1). 한편 '위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일레'는 '살의를 가지고 협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등등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네온'은 전치사 '엔'과 '가득하다'는 뜻의 '프넨'의 합성어로 '~으로 가득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는 '살의에찬 협박으로 가득하여'라는 뜻이다. 원문에선 이러한 의미가 현재 분사형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욱 위협적인 분위기가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울의 회심(18-22절)이 A.D. 34년 내지 35년에 일어났다고 볼 경우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다. 행 4:6 주석 참조. 그러나 사울의 회심 연대가 확실치 않으니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의 후임자인 안나스의 아들 데오필로(A.D. 37-41년)였을 가능성도 있다(Hervey, Bruce). 하여튼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이유는 공문(公丈)을 받기 위해서였다(2절). 여기서 공문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체포 영장과 같은 것이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 - 다메섹(Damascus)은 창 14:15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예루살렘 동북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리아의 고대 도시이다. 다윗은 이 도시를 점령하여 수비대를 두었으며(삼하 8:6) 분열 왕국 시대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이 도시를 놓고 분쟁하였다(왕상 15:18 이하). 이곳은 옛부터 고급 목재로 알려진 사이프러스 나무와 종려나무가 풍성하였으며, 아름다운 아마나 강이 흐르고(왕하 5:12) 토지가 비옥해 농산물의 집산지였다(겔 27:18). 또한 메소보다미아와 팔레스틴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B.C. 732년에 앗수르에게 점령당했으며, B.C. 64년에는 로마에게 지배권이 이양되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유대인이 세운 회당도 많았다. 이 사건 당시 다메섹에는 30-40개의 회당이 있었으며, 약 4만 명의 유대인이 정착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다메섹에 전도를 하여 많은 결실을 맺었는데, A.D. 66년에 네로가 이 도시의 기독교도 1만여 명을 학살하였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Josephus). 오늘날에는 세계 3대 종교인 회교, 유대교, 기독교의 교도(敎徒)가 혼재되어 생활하고 있다. 사울은 이러한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회에 재가와 권한을 요청하였다. 한편 유다 예배처이자 공동 집회 장소, 재판소, 율법을 가르치는 곳 등으로 널리 사용된 '회당'에 대하여선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 도를 좇는 사람. - 즉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을 가리킨다. 사울 당시 다메섹에 있던 기독교도들은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한 기독교도들과(행 8:1) 이들로부터 전도받아 개종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기독교도들을 전멸시키려는 사울의 심중이 엿보이는 표현이다. 그는 모든 기독교인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호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에 이들을 제소, 처형하기 위함에서였다. 행 4:5 주석 참조.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예루살렘중앙 산지 길이다. 둘째는 예루살렘에서 에그론 → 아벡→ 므깃도 → 하솔→ 다메섹으로 가는 평지 길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랍바 → 라못 길르앗 → 아스다롯 → 다메섹으로 가는 왕의 대로이다. 역사서 개론 특별자료, '가나안의 생활 지리' 참조. 사울은 이 가운데서 가장 지름길인 '중앙 산지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사울의 다메섹 여행 경로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아무튼 사울은 대제사장에게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다가 돌릴 기독교도 체포령이 담긴 공문을 받아 들고(2절) 다메섹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다메섹에 도달할 즈음 그의 일생을 바꾼 놀라운 일을 겪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이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난 시각은 정오였으며, 사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이때의 빛은 태양 빛보다 더 밝았다(행 22:6; 26:13). 정오라면 태양이 가장 밝게 내리쬐는 때이니 사울은 그 태양 빛과 구분하기 위하여 '큰 빛', 즉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한 것 같다. 사실 이 빛은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현시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빛이시니(요일 1:5) 그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밝을 수는 없다. 한편이 빛은 사울 자신만이 경험한 사울의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울의 주위 사람들도 같이 경험한 객관적 현상이다(행 26:13). 그는 이 강한 빛으로 인해 얼마 동안 눈이 멀었고(8절)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18절).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행 26:13에는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다'고 하여 사울을 수행했던 동행자들에게도 주의 빛이 비추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울에게만 비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아마도 본문에서는 사울의 회심을 중점으로 하고 있어 사울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진 탓으로 보여진다. 즉 저자 누가는 다른 목격자들을 생략하고 사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본 사건을 기록했던 것이다.
9:4 땅에 엎드러져. -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감히 서있을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모세는 광야에서 주의 사자가 가시 떨기나무 불꽃을 통해 나타나셨을 때 얼굴을 가렸으며(출 3:6) 감히 보지 못하였다(행 7:32). 실제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란 아무도 없다(출 33:20). 그러기에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땅에 엎드러져 죽은 것같이 되었다(겔 1:28; 단 8:17). 따라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타나심에 땅에 엎드린 것은 그가 아무리 기독교에 대해 적의를 품고 기독교도들을 소탕하려고 살기등등하였다 하여도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빛이 보여진 후에 이처럼 하늘로부터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매우 정감어리면서도 호소력 있는 소리였다. 그것은 주께서 사울을 두 번 부른 것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상대방을 두 번 부른 경우는 대개 정감이나 긴박성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창 22:11; 출 3:4; 삼상 3:10; 눅 10:41; 22:31), 한편 사울이 핍박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인데(행 8:1,3)그리스도께선 이를 사울이 자신을 핍박하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긴밀한 관계를 증거해 준다. 즉 그리스도께선 교회의 머리이시며(골 1:18) 성도는 그 몸인 것이다(고전 12:27).
9:5 주여 뉘시오니이까.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나(요 12:21), 하나님께 사용되는 호칭이다(골 3:24). 사울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추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놀라 땅에 엎드려(3,4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여쭈었다.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기가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 존재가 초자연적인 분이라고는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땅에 엎드린 자세를 취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4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헬라어의 표현에서는 동사만을 가지고도 주어의 인칭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어가 생략된다. 그러나 본문과 같이 주어가 쓰여지면 강조용법이 된다. 본문에 사용된 강조 용법 '에고 에이미'( )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시던 용법이다(요 6:35; 8:12; 10:7,11; 11:25; 14:6). 또한 '네가 핍박하는'의 '네가'에 해당하는 '쉬'( )도 생략되지 않고 있어 그것도 강조 용법이다. 따라서 본문에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사울이라는 대상이 모두 강조되어 있다. 이에는 화자(話者)를 강조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강하게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9:6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 여기서 '성'은 다메섹 성을 말한다(8절). 기독교도들을 괴멸시키기 위해 다메섹으로 들어가려던 사울은 이제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어 정반대의 차원에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주의 강권적 역사에 의해 다메섹 성안으로 인도된 그는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18절) 도리어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이 된 것이다(20-22절).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이미 예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이전의 사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울, 즉 바울로서의 인생을 가게 하시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경건한 당신의 제자를 준비해 놓으셨으며, 그에게 사울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를 일러 놓으셨다(10-16절). 이제 사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철저히 회개를 하여야 하며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한(15절) 준비의 과정을 마쳐야 할 것이었다. 한편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간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 소명이 주어질 것으로 묘사한 본절과 달리 행 26:16-18에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 직접 소명을 받은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본문의 상황을 행 26:16-18에서 간략히 묘사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9:7 소리만 듣고…보지 못하여. - 본 구절의 내용과 행 22:9의 내용이 상치되고 있다. 행 22:9에는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로 되어 있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견해들이 있다. ① 같이 가던 사람들은 사울의 소리만 듣고(5절) 예수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Bruce, Beza). ② 요 12:29의 경우처럼 무슨 소리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행자들은 몰랐다(Bengel). 아마도 추측하건대 사울과 동행자들은 모두 빛이 홀연히 나타날 때(3절) 처음에는 그 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너무 강렬해 (행 26:13) 곧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8절). 그리고 동행자들은 사울과 같이 어떤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의 내용은 사울에게만 명확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는 대상만이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같이 있던 주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하였음에도 같이 떨며 숨었던 경우가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다(단 10:7).
9:8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은 빛이 너무나도 강렬하여(행 22:13) 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빛이 사라진 후 눈을 떴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제까지 처형한 모든 것이 암흑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제 사울의 과거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눈이 어두워짐으로 해서 그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앞을 보게됨으로써(18절), 자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앞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실로 육체의 눈이 어두운 동안 마음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의 손에 끌려…들어가서. - 사울이 같이 동행했던 동행자들(7절)의 인도를 받아 다메섹 성안으로 들어간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곧 다메섹 성안에 들어가라고 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6절).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 사람이 큰 충격을 받고 깊은 고뇌와 뉘우침에 빠지면 이처럼 식음을 전폐하곤 한다. 그 동안 사울은 마치 제길로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처럼(욘 1:17)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을 헛되이 섬겨 온 유대교의 미망(迷妄)에서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그러는 동안 사울에겐 자신의 어리석고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핍박받은 주의 성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 특별히 의로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회한이 밀려왔을 것이다. 이는 실로 그를 거듭나게 하기 위한 큰 아픔과 진통이었다고 하겠다.
9:10-18 사울의 회복
앞 단락(1-9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산헤드린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을 경험한 사실을 통해 이방 선교의 신호탄이 올랐음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주께서 그의 현현을 경험할 때 눈이 어두워진 사울을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보내 치유하시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크게 다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아나니아가 주의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이다(10-16절).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도록 지시하신다. 이때 아나니아는 처음에는 주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사울의 회심을 믿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은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그동안 핍박자 사울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케 한다. 하여튼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악명높았던 핍박자 사울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바울로 변화시켜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함으로써 자신이 예수의 제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예수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자로 만드셨다.
둘째는 사울의 회복과 세례이다(17,18절).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경험한 후 초자연적인 능력에 쌓여 앞을 못보게 되고 사흘 동안 음식을 전폐하는 중에 복음에 대해 깨닫게 된 사울은 주께서 보내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됨은 물론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육적인 시력을 회복했음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도 새롭게 눈을 떴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본격적인 이방 선교를 위한 전도자 바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주의 지시를 받았는데, 이는 사울이 핍박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위대한 전도자 바울을 탄생시키는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식이나 판단을 초월하여 임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엡 6:6: 약 4:15).
9:10 아나니아. -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다'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다. 행 5:1 주석 참조. 이 아나니아는 유대인답게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었다(행 22:12). 그러나 이외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즉 그가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알고 주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알만한 기록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 특별히 사울을 위해 인도자로 선택하신 것으로 보아 그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뵙고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성령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에게 전도되어 충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 같다.
환상 중에. - '환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라마'( )는 영어의 '비젼'(Vision)과 같은 말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 이러한 환상으로 종종 나타나시곤 하셨다(겔 1:1; 행 10:3,17; 11:5; 16:9; 18:9). 삼상 3:1 주석 참조.
아나니아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하나님께서 부르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응답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구약에서도 가끔 보여지고 있는 형태로 이때 중대한 계시가 주어졌거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곤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러했고(창 22:1),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러했다(삼상 3:4). 이제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려는 순간 이러한 구약적 형식이 아나니아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9:11 직가라 하는 거리. - 다메섹의 동문에서 서문을 잇는 주요 간선 도로로 좁으나 곧게 뻗어 있어 이처럼 직가(直街)라 불리웠다. 이 거리 양 옆으로 주랑(柱廊)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록 그 거리의 위치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직가', 즉 '다르브 엘 무스타킹'(Darb-el-Mustagim)이라는 이름만은 남아 있다.
유다 집. - 본절의 유다(Judas)에 대하여선 달리 알려진 사항이 없다. 다만 추측컨대 그는 유다 지파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 유다의 집은 직가로부터 멀지 않은 노변에 있으며 서문으로부터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빈터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있는데 집 옆에 아나니아의 무덤도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다소. - 로마의 속주인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아시아의 아테네라고도 불리웠다. 사울은 이곳 출신이었으므로 본문에서 다소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 가르 프로슈케타이'( )는 현재형으로 쓰여 사울이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앞이 안보이는 어둠 속에서도 식음을 전폐하고(9절) 자신의 과거의 죄와 어리석음을 뉘우치면서 계속적으로 주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죄 사함을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의 앞길을 주께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러한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12절).
9:12 저가…보았느니라. -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로 인하여 자신이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될 것을 보여 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깊은 고뇌 가운데서 회개하는 사울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이처럼 돌보사 위로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셨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울은 더욱더 주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며, 그 사랑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더욱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연단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9:13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 아나니아는 자신이 안수하여 기독교도들을 핍박하던 우두머리의 앞을 보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12절)으로 인해 크나큰 근심에 쌓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는 사울로부터 직접 핍박을 받지는 않았지만(행 8:1) 그 핍박으로부터 피해 온 기독교도들로부터 사울의 잔인한 행각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기독교도들의 적에게 가서 안수하라는 말씀에 아나니아는 적지 않게 놀랐던 것이다. 이렇듯 가혹한 핍박자로서의 사울의 명성은 주의 사도로서 받아들여지는데 가장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다.
9:14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누가는 앞절에서 '주의 성도'로, 본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로 기독교인들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본래 '성도'란 '구별된 자'란 뜻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에 참여된 자,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자들을 지칭한다(롬 10:13).
결박할 권세를…받았나이다. - 본절로 보아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보낼 기독교도 소탕에 관한 공문을 청하여(1, 2절), 기독교도들을 괴멸시킬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아 이제 다메섹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의 동료 신도들로부터 전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식은 다메섹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긴장시켰을 것이며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주께서 그 사울을 오히려 찾아가라고 하시니(11절) 아나니아에게는 분명히 근심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15 가라. - 근심과 걱정으로 반문하는 아나니아에게 예수께서는 이 '가라'는 명령어로 먼저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신다. 이는 사울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영원 전부터 준비된 것으로 변개될 수 없다는 확고성을 시사해 준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 사울에게 부여될 선교 대상이 나열되고 있다. 첫째는 이방인들이며 둘째는 임금들이며 셋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다. 이는 유대를 먼저 선교 대상으로하고 그 다음 이방을 언급한 행 1:8의 내용과 반대의 순서이다. 이와 같이 사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방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도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롬 1:14; 갈 2:8) 그 부르심대로 이방 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 또 그는 유대 왕 아그립바(행 26장), 로마 황제 가이사(딤후 4:16,17)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유대 총독 벨릭스(행 24:10-23), 베스도(행 25장)에게도 주의 도를 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 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끊을 수 없는 동족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행 28:17-28; 롬 9:3-5).
택한 나의 그릇. - '천한 그릇'(렘 22:28), '빈 그릇'(렘 51:34) 등과 같은 표현으로'선택된 그릇', 즉 '선택된 사람'을 가리키는 히브리식 표현법이다. 구약에서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했으나, 본문에서는 사울 개인을 가리키고 있다. 사울은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자각하였고 이를 자주 언급하였다(롬 1:1; 갈 1:15).
9:16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 - 이전에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부터는 도리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될 것임을 가리키는 말이다(23-25절). 사실 복음의 증거자가 된 이래 사울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무수히 겪었다(고후 11:22-33). 그리고 최후에는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며,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마 16:24; 막 8:34). 하나님은 고난을 이긴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위대한 사도가 된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담대히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난은 주의 제자들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이 된다. 본문에서 주님이 사울에게고난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도 사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ㄷ 그런즉 고난은 도리어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설적 방편이라 하겠다.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이는 환상을 통해서 추상적으로 사울에게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사울이 선교 활동을 할 때에 실제로 고난을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사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누렸던 것과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로서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감내해야 할 형극(荊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 신실한 종 아나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지체 없이 순종하여 사울이 있다는 곳(11절)으로 향했다. 그는 사울에 대한 의혹과 불안한 마음을 있었으나(13,14절)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의심을 버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
안수하여. - 행 8:17 주석 참조.
형제 사울아. - 주의 분부를 좇아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며 그를 형제라고 호칭했다. 이는 지금까지 기독교도들의 적대자로 있던 사울이 '형제'(아델포스), 즉 같은 동료 내지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사울, 즉 사도 바울은 드디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다.
주 곧…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 이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왔으나 참으로 오신 분은 아나니아 자신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라는 의미이다. 즉 아나니아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요 능력을 행하시는 주님의 심부름꾼 뿐이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은 그의 참회가 진실된 것이었으며(11절 주석 참조), 그가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이제 사울이 성령의 강건케 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선교의 사명을 감당케 될 것임을 나타내 준다.
9:18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의사인 누가는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건을 의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Lumby). 아마도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던 빛의 충격으로 인해 (3절) 어떤 물리적 현상이 그의 눈에 일어났던 것 같다. 그 장애가 이제 아나니아의 안수로 인해 제거된 것이다. 여기서 '비늘 같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와관련 외경 토비트서 3:17을 연상한다. 거기에는 토비트가 아버지의 눈에서 '흰막'을 벗겨내었다는 언급이있다(Bruce, Hervey, Longeneker). 우리는 이와 관련 하여 '백내장' 증세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이것을 사울의 주관적인 환상이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enski). 그러나 이는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눈을 밝게하신 기사처럼(마 9:27-20) 실제적인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Calvin).
세례를 받고.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니(17절) 그가물 세례를 받지 아니할 이유가 없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고 하셨거니와(요 3:5) 이제 장차 사도 바울이 될 사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음을 공표한 것이다. 사도행전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 참조.
9:19-25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사역
본문은 주께서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아 육의 시력이 회복됨은 물론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울(10-18절)이 다메섹에서 지체없이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사울의 복음 전파이다 (19-22절). 사울은 건강이 회복된 후 다메섹에 며칠을 머물며 복음을 증거하는데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파하자 많은 사람이 놀라게 되었다. 즉 성도들은 박해자 사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고 기쁨으로 놀랐으며, 유대인들은 자기편인줄 알았던 사울의 돌변한 모습에 당혹감과 분노로 놀랐다. 그러나 사울은 이런 모습들에 개의하지 않고 예수님의 메시야됨에 대하여 증거한다.
둘째 유대인들의 사울 살해 음모이다(23-25절). 사울의 배교를 보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 기회를 찾고 있었다. 즉 유대인들은 사울의 배교와 배신에 대하여 커다란 분노를 느끼고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사울은 성도들의 도움으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에서 피신하였다. 한편 본문에는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간 머물렀던 사실이 생략되어 있는데(23절 주석 참조), 그는 이방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기도와 능력의 충만함을 입도록 그곳에서 내적인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상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사울은 변화를 받은 즉시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는 성도들의 최우선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는 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② 사울의 배교를 본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는 성도들의 삶이 필연적으로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삶임을 시사한다.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과의 상면이 있은 후(3-7절),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9절), 그런 그가 이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 새롭게 태어나 다시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었다. 즉 이제 사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것이다(갈 2:20).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눈이 다시 보이게 되고 점차 기력을 회복한 사울은 이처럼 다메섹에 머물러 성도들과 함께 하였다. 이는 곧 이전에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이제 기독교도들의 친구요 형제가 되었음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17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며칠'은 23절의 '여러 날'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갈 1:16,17에 비추어 볼 때 사울은 이 기간 동안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와 그곳에 머문 것 같다. 이에 관하여서는 23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 사울의 회심은 이처럼 전격적이었다. 그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 곧바로 다메섹의 각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그가 전도한 장소는 아이러니컬(ironical)하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바로 그 회당들이었다(2절). 즉 핍박의 장소가 이제 복음을 증거하는 은총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 -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된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았고(마 26:63-66) 더욱이 그 예수께서 메시야되심도 믿지 않았다. 사울도 이전에는 그런 믿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던 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이 믿을 뿐아니라 그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분명 사울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9절), 회개하고 묵상하는 동안(11절) 주님으로부터 확실한 계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나니아로부터도 그리스도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믿고 시인하였으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9: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 여기서 '듣는 사람'이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를 전파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사울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까지 사울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서 기독교도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그곳 다메섹에까지 온 자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울이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였기 때문이었다.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유대인들은 사울이 예수의 도를 전파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해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혼란에 빠졌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울이 더욱 힘을 얻어 주의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의 도에 굴복시켰기 때문이다(22절).
9:22 힘을 더 얻어.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무토'는 본서에서는 본문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종종 보이는 용어로(롬 4:20; 엡 6:10)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영적인 힘을 나타낼 때 이를 사용하였다. 한편 사울은 자신의 회심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다메섹의 유대교도들을 쉽게 전도하였으며 그로 인해 더욱 힘을 얻었을 것이다(21절). 그러나 사울이 힘을 얻은 것은 그러한 외적인 요인과 아울러 내적인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사울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므로(17절) 더욱 힘을 얻어 담대하게 복음 전파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시라는 사실은 바울이 일생 동안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고전 2:2). 이러한 사실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한 그의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사울은 박식한 식자답게(행 22:3)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전파하되 논리적으로 증명하여 상대를 굴복시켰다. 본문의 '증명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비바손'은 '하나로 모은다'는 뜻으로 흐트러진 것을 하나로 정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구약 성경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메시야 예언 뿐 아니라 항간에 유포되어있던 예수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 등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 이로써 논증을 펼쳐 나간 것이다.
굴복시키니라. - 사울은 논리 정연한 이론으로 유대인들을 하나 하나 굴복시켰다. 이 '굴복시키다'에 해당하는 '슁케오'( )는 '함께' 하는 이란 뜻의 '쉰'과 '붓다'라는 뜻의 '케오'의 합성어로 '함께 붓다', 즉 '섞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혼란시키다', '교란시키다'는 뜻이 파생되었다. 여기서는 사울이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력으로 유대인들을 당황케 한 것을 가리킨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사울에 의해 하나씩 예수의 제자가 되자 보다 더 당황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9:23 여러 날이 지나매. - 본절은 사울이 회심한 이후의 그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본서는 사울이 회심한 후 즉시 각 회당에서 전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19,20절) 사도 바울 자신은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6,17)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에 가기전인 26절 이전에 아라비아로 갔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아라비아 행은 19절부터 25절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절 후반 이전, 즉 다메섹의 제자들과 있기 전의 일이다(Pearson). ② 19절후반과 20절의 중간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Lewin). ③ 21절과 22절의 중간에 일어난 일이다(Alford). ④ 23절, 즉 본문의 '여러 날이 지나매'에 해당하는 시기이다(Neander, Meyer). ⑤ 25절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OIshauen). 이 중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는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여러 날이 지나매'의 이 시기가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Hervey).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 반드시 이때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던 때가 19절에서 26절 사이 어느 한 시기라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하겠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 사울의 전격적인 회심을 목격하고 또 그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는 소리를 듣고(20절) 유대인들은 잠시 당황한다(21절). 그러나 사울이 더욱 힘을 얻어(22절)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는 것을보고 유대인들은 사울이 더 이상 유대교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죽이기를 꾀하였다. 그것은 곧 사울이 유대교를 저버린 배신 행위에 대한 응징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비책에서였다.
9:24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 본 사건에 관한 바울의 증언인 고후 11:32의 내용에 의하면 이때 아레다 왕의 방백이 다메섹 성문을 지켰다고 하고 있다. 아레다(Aretas)는 B.C.9-A.D.40년 동안 홍해에서 유브라데스에 이르는 나바테아(Nabataea)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문제가 야기된다. 당시 다메섹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어떻게 아레다 왕이 자신의 방백을 파견하여 다메섹을관할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 역사가들은 당시 다메섹에 많은 아랍인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나바테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아레다 왕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Longeneker, Young).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하여 다메섹 성내를 물샐틈 없이 지켰으며 또한 이전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빌라도를 매수했던 것처럼(마 28:14 주석참조) 성문을 지키던 아레다 왕의 방백을 매수했을 것이다.
9:25 그의 제자들. - 이는 19절에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즉 다메섹에서 사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었던 제자들이 아니라 사울의 제자들을 지칭한다. 즉 회심 이후 사울은 그의 언변과 열심히 많은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으니(22절) 이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이들 중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과 함께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한 동행자들도(7절)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현상을 경험하였던 사울의 수행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 고후 11:33에 의하면 '들창문'으로 달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과 종합하여 보면 사울의 제자들은 사울을 광주리에 담고 긴 끈을 그 광주리에 묶어 성벽에 뚫려 있는 창문이나, 성벽 위에 붙여 지은 집의 창문을 통해 사울을 성 아래로 달아 내린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구약 시대에 기생 라합이 성벽 위에 지어진 자신의 집의 창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리고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경우를 들 수 있다(수 2:15).
9:26-31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과 교회의 인준
지난 단락(19-25절)에서는 복음으로 변화된 직후 다메섹에서 복음을 증거하던 사울이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를 피해 다메섹을 탈출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다메섹을 탈출한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의 행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은 두 가지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첫째는 제자들의 불신이다(26,27절). 즉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자였던 사울의 회심을 믿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변호해주신 주께서 이제는 경건했던 바나바(행 4:36,37)를 통하여 사울의 회심을 변호하고 확신케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회심에서부터 그가 교회의 큰 기둥이 될 때까지 후원하고 보호하였으며 바울은 이런 체험을 통해서 담대한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었다.
둘째는 유대인들의 핍박이다(28-30절). 즉 바나바의 변호로 예루살렘 교회의 인준을 받게 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데 이전에 그가 핍박하던 모습으로 이제 그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를 다소로 피신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피신시킨 것은 다시 교회가 커다란 박해를 입지 않고 교회를 유지하려는 것이었고, 사울로 하여금 원래 사명인 이방 선교를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셨다고 볼 수 있다(행 22:17-21). 사울은 다소로 피신하기까지 약 15일을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다(갈 1:18). 하여튼 이런 박해를 통하여 사울은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복음을 전함으로 핍박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후 12:10). 한편 이 사건 후 교회는 평안을 얻어 부흥하게 되었는데 (31절),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칼리굴라(Caligula) 황제(A.D. 37-41)가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자신의 초상화를 두려고 하였기에 자신들의 고유 신앙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의 부흥과 평안을 위해서 일어난 구원의 섭리이다.
이상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하나님은 사울의 모든 길을 예비하고 주장하시며 보호하셨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은 성도들의 길도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② 사울은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갖고 복음으로 핍박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성도들 역시 핍박을 고난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시민이 이땅에 거하는 동안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것임을 깨달아 핍박을 보다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오히려 믿음의 연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 다메섹 성을 탈출한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였다. 이 예루살렘 방문은 사울이 회심한 뒤 처음으로 가는 것이요, 예루살렘을 떠나(1-3절) 3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때가 A.D. 35-37년 어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갈 2:1에 의하면 바울은 1차 예루살렘 방문 후 14년 후에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행 15:1-29)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예루살렘에서 할례 문제로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그 때가 A.D. 49년 이었기 때문이다. 본서 1권 성경 총론 '성경 역사연대표' 참조. 한편 바울은 이 예루살렘 방문에서 15일간 머물렀다(갈 1:18). 이러한 사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12제자와 그 밖의 성도들을 사귀기 위함이었다.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 이미 3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아직도 사울의 회심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는 그만큼 예루살렘에서 행한 사울의 핍박 행각(행 8:3)이 극도에 달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분명히 바울의 회심(17-22절)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 핍박의 소식을 들었다면(13,14절) 다메섹에서 일어난 일들도 예루살렘에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메섹에서 사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험에까지 처했다면(23-25절) 사울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여전히 사울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고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추측컨대 그들은 사울이 교회를 뿌리째 박멸하려는 술책에서 거짓 회심을 하지 않았나 하고 의심했던 것 같다.
9:27 바나바. - 이 사람의 본명은 요셉으로 레위 지파의 후손이며, 그 이름의 뜻은 '권위자'이다. 그는 충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행 4:37), 후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광범위한 전도 활동을 하였다(행 11:24-30;13:2-4). 그는 이러한 신실된 행동으로 인하여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을 것이다. 행 15장 자료노트 '바나바' 참조.
사도들에게 가서. - 사울 본인의 말에 의하면 이때 사울은 야고보만 보았고 다른 열한 사도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갈 1:19). 그러나 본절에서는 '사도들'에게 갔다고 복수로 명기되어 있다. 이는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 야고보와 성도들에게 데리고 간 것에 대하여 본서 저자인 누가가 그냥 사도들에게 데리고 간 것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누가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닌 바나바도 사도라고 하고 있는데(행 14:4,5,14), 이로 보아 예루살렘의 신실한 주의 종들을 야고보와 함께 사도들이라고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그가…말하니라. -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내용에 대하여 바나바가 어떻게 알았고, 또 어떻게 사울을 사도들에게 안내할 정도로 사울과 가까워졌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바나바와 사울은 오래전부터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혹자는 바나바가 사울과 함께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한(행 22:3) 동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Lenski). 아무튼 사울은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와 교제를 나눌수 있었으며(28절) 그로 인해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인정받고 그의 위대한 전도 사역의 행보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9:28 함께 있어…출입하며. - 바나바의 주선과 노력으로 사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같이 하게 되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기독교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사울은 과거에는 박해자로서 예루살렘 성문을 드나들었으나 이제는 사도들의 동역자로 예루살렘 성문을 드나들게 되었다.
9:29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 사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한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한 것도 아니요, 자신이 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실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것 처럼 자기를 버리고 오직 주를 위해 살았다(갈 2:20). 한편 '담대히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아조메노스'( )는 '자기의 의사를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행 14:3; 19:8), 즉 사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 - 이들은 주로 본토 유대 지방을 떠나 타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유대인들로 히브리어가 아닌 당시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행 6:1의 주석을 참조하라.
말하며 변론하니. -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고 그들의 반론에 대해 변론하였다. 본래 헬라파 유대인들은 변론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인 다소에서 태어나고 자란(행 22:3) 사울은 희랍 철학에 있어서나, 율법에 있어서나 그들을 능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과 변론하여 이기지 못하자 분개한 저들은 사울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스데반의 경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행 6:9-15).
9:30 형제들이 알고. - 여기서 형제들은 환난 중에도 끝까지 남아 있던 일부 예루살렘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행 8:1-3).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과 변론하여 이기지 못하자 사울을 죽이려고 계획하는 것을 사전에 눈치챘다. 그래서 미리 사울을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가이사랴. - 혹자는 이를 가이사랴 빌립보로 보기도 하지만(Olhausen)이 가이사라는 행 8:40에 나타나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이다(Hervey, Lenski). 행 10장 자료노트 '가이사랴' 참조. 사울은 이곳을 거쳐서 다소로 갔는데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육로를(Lenski), 그곳에서 다소까지는 해로를 이용했을 것이다(Hervey).
다소. -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다. 11절 주석 참조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사울을 그의 고향으로 보내는 것이 안전하리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이처럼 자신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향하였으며 그곳에서 앞으로 있을 자신의 전도 활동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 후에 바울은 자신이 꼭 헬라파 유대인들의 위협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피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이신 환상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다(행 22:17-19), 주님은 사울에게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선교의 원대한 뜻을 품고 계셨던 것이다(15절).
9:31 교회가 평안하여. - 본성은 이제까지의 초대 교회의 상황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라는 팔레스틴 지역의 교회가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안정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고, 그럼으로써 32절부터 시작되는 베드로의 순회 전도를 기술하려는 의의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갈릴리 교회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채롭다. 이는 곧 각지에 흩어진 성도들 (행 8:4)에 의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안드레 등의 고향이었던 갈릴리(마 5:18,21)에도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이처럼 초대 교회가 잠시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표면적으로 유대교도와 사울 간의 적대 관계가 사울의 피신으로 인해 해소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Toussaint).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곧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칼리굴라(Caligula, A.D. 37-41)가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자신의 초상화를 두려하자 자신들의 고유 신앙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게 된 것이다(Josephus).
성령의 위로로…수가 더 많아지니라. - 초대 교회의 성장 원인이 근본적으로 사도와 성도들의 전도 활동 때문이 아니라 배후에서 인도하시는 성령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행 1:8). 한편 여기서 '위로'에 해당하는 '파라클레시스'( )는 '권면'이나 '칭찬' 또는 '격려의 말'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곧 성령께서 핍박받던 성도들을 낙심하지 않게끔 돌보고 붙들어 주신 것을 의미한다.
9:32-43베드로의 순회 전도
앞부분(1-31절)에서는 주로 사울의 회심과 그의 초기 사역을 중점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제 본문은 행 8:25에 이어 다시금 베드로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본문은 앞부분과 그 맥이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실상 앞부분과 본문은 상호 연관성이 있는데, 그것은 앞부분과 본문이 다같이 이방 선교의 기초 작업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앞 부분이 사울의 회심(心)으로 이방인 선교의 중심 인물이 선정되었음을 보여 주었다면, 본문은 복음이 유대 지경을 넘어 점차 이방 지역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틴 서부 지역을 복음화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는데 베드로는 룻다를 거쳐(32-35절) 욥바(36-43절)와 가이사랴(행 10장)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의 순회 사역 여정에 대해서는 본질 자료노트의 지도를 보다 창조하라.
한편 본문에는 베드로가 순회 복음 전도 사역 중에 행한 두 가지 이적이 나타나매 첫째는 붓다에서 애니아라 하는 중풍병자를 고친 이적이다(32-35절). 애니아는 팔 년 동안 중풍을 앓아 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드로에게 고침을 받았다. 즉 예수님께서 치유의 이적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신 것처럼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고 복음 전파를 한 것이다. 이런 치유의 능력은 룻다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확신시켜 복음을 영접하도륵 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욥바에서 다비다라 하는 한 여제자를 살린 이적이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힘쓴 신실한 성도인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다비다를 소생시켰다. 이것은 베드로가 야이로의 딸(막 5:41,42)과 나사로(요 11:43,44)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므로 동일한 소생의 이적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욥바에 살던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이적을 보고 복음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처럼 베드로가 순회 전도 사역을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가 핍박을 받아 흩어진 유대인들을 찾아 권고하고 복음을 계속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회 전도를 하던 중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모습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펄 인하여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될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별히 베드로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부정한 직업으로 취급받던 피혁 제조업자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은(43절)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므로(눅 19:5-10) 천민과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이 주의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선포하여 유대인의 배타적인 선민 의식(選民意識)을 깨뜨리는 모습이라 하겠다. 결국 베드로의 이번 순회 전도 사역은 다음 장에 언급된 고넬료 가정의 복음화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복음은 민족, 인종, 사회적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전파되어야 하며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② 진실한 신앙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뭇사람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열매 맺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9:32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 예루살렘을 주축으로 하는 교회들이 평안하고 든든해지며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자(31절) 베드로는 주의 명령을 따라(행 1:8) 순회 전도를 위해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선교하던 중 룻다에 도착하였다.
룻다. -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중도에 위치한 도시로 예루살렘 북서쪽 40km 지점, 욥바 남동쪽 18km 지점에 위치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롯'(Lod)므로 불리웠는데(대상 8:12) 로마 통치하에서는 '디아스폴리스'( ) 또는 '쥬피터의 도시'(the City of jupites)라고 불리웠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촌락을 '큰 도시에 비견할 만한 촌락'이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그곳이 당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베드로의 사역 여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9:33 애니아라 하는 사람. - '애니아'(아이네안)는 헬라식 이름으로 '찬양하다' 또는 '칭찬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 사람이 '룻다에 사는 성도들' 중에 포함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이름으로 볼 때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 년. - 의사였던 누가의 기록의 특징 중 하나로 중풍병이라는 병명과 앓던 햇수가 소상히 밝혀져 있다(눅 4:38; 8:43; 13:11; 행 3:2; 4:22). 한편 여기서 '누운 지 팔 년'에 해당하는 '엘스 에톤 오크토'( )는 '8세부터 누웠다'(Bruce), 또는 '누운지 8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9:34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 예수께서 믿는 자는 무릇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으리라고(막 16:17,18) 약속하셨듯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힘입어 애니아를 고치고 있다. 이러한 이적은 이미 앉은뱅이 치유 사건에서도 보았던 바이니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기 바란다(행 3:6).
네 자리를 정돈하라. - 8년 동안 병자가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돈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애니아가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9:35 사론. - 욥바와 가이사랴 사이에 위치한 길이가 약 80km, 폭이 약 15km에 이르는 비옥한 평야이다. 때문에 '사론의 수선화'(아 2:1),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사 65:10) 등의 표현이 구약에 나올 정도였다.
주께로 돌아가니라. - 중풍병으로 8년 동안 앓아 누웠던 애니아가 병고침을 받자 그것을 보고 많은 룻다와 사론 사람들이 '주님을 믿기로 하였다'는 말이다(Knowling).
9:36 욥바. -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5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대하 2:16). 지금은 텔 아비브(Tel Aviv) 외곽지대에 '얍바'(Jaffa)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 - '다비다'( )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식 이름으로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이다. 이 이름의 뜻은 영양(羚羊)이다. 당시 욥바는 수리아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 이름은 수리아 지방에 흔한 여자의 이름이었다. 본문에서 '다비다'가 '여제자'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주를 영접하고서 주의 일을 한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재산의 여유가 있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이 행하였는데 39절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과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여제자'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다비다'는 여인으로서 아주 신실하고 충성되게 주의 일에 힘써 욥바의 성도들과 다른 지역의 제자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처럼 불리운 것으로 추측된다. '도르가'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9:37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 시체를 씻었다는 것은 장례 절차를 준비하였다는 말이다(Bruce). 그런데 그 시체를 다락에 뉘운 이유는 아마도 조용한 곳에 시체를 두기 위함이었을 것이다(Hervey). 한편 사람들이 다비다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둔 것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려고 하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왕상 17:17-24; 왕하 4:32-37, Longeneker).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시체를 물로 씻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9:38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 이때에 베드로는 이곳 욥바에서 18km 떨어진 룻다에 있었다. 32절 주석 참조. 18km이면 어른의 걸음걸이로 대개 4~5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왕복하여 하루가 지체되는 거리인데 무슨 이유로 욥바의 성도들이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급히 청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즉 다비다를 다시 살려내기 위함이었는지(37절 주석 참조), 아니면 베드로에게 장례식의 집례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 베드로를 청한 결과 욥바에서도 크나큰 이적이 일어났으니 곧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다(40,41절). 이는 곧 다비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애틋한 심정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셨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려 한(42절)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9:39 베드로가 일어나‥‥가서. - 룻다에 있던 베드로는 (32,38절) 욥바에 있는 제자들이 보낸 두 사람의 전언을 듣고 욥바로 갔다 그리고 욥바에 도착하여 바로 다비다의 시체를 안치해 둔 다락으로 안내받고 올라갔다. 이로 보아 욥바의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다비다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해주기를 바랬던 것만은 분명하다.
모든 과부. - 이 과부들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상당히 열심이었던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로 추정된다(36절). 그렇지 않으면 다비다도 과부였다는 추정이 옳을 경우(36절 주석 참조)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도르가가‥‥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 속옷은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통으로 짠 직물이며, 겉옷은 낮에는 입고 밤에는 이불대신 덮기도 하도록 풍성하게 만든 통넓은 사각형의 옷이다. 룻 3:15 주석 참조. 아마도 다비다는 이러한 옷을 만들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Lenski). 그리고 같이 통곡하던 과부들이 그러한 도움을 다비다로부터 받았다면 그것을 회상하면서 다비다의 선행을 추모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그녀가 만든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9:40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 베드로는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때의 일을 상기했을 것이다(막 5:37-42). 그때에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물리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소녀의 부모만을 동행시키셨다(막 5:37,40). 구경하고 비웃는 자들의 시선에 방해받지 않고 거룩한 권능을 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도 오직 그러한 주의 권능만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주의 능력만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 베드로는 홀로 남아 주께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달라고 간구하였다. 아무리 신앙이 위대한 사람도 주께 간구하지 않고는 주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다. 실로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류의 능력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왕상 17:21, 22).
다비다야 일어나라. - 주의 권능을 믿어 의심지 않는 자에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마 17:20). 그러기에 주의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선포한 '일어나라'는 한 마디 말에 죽었던 다비다가 부활하여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게 되었다. 한편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베드로의 말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달리다굼', 즉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과 흡사하다(막 5:41). 곧 이 두 경우 모두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는 식의 희망 사항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줄로 믿고 '일어나라'고 명령한 믿음의 선포였던 것이다.
9:41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 베드로는 부활하여 자기를 보고 일어나 앉은 다비다를 향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아마도 다비다가 소생한 것을 보고 가장 먼저 기뻐한 장본인은 바로 사도 베드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이적과 기사(奇參)를 행하였지만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드러남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더욱 경외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산 것을 보이니. - 베드로는 다비다의 일로 크게 기뻐함과 아울러 욥바의 성도들과 다비다의 친구들에게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다비다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성도들과 과부들은 다비다의 부활을 직접 보고 기뻐하며, 다른 한편으로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감사하였다. 그처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늘 성도들과 함께 하시니 우리들에게 어떠한 환난과 고난이 닥퍽오고 무거운 십자가가 지워진다 해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외로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9:42 온 욥바사람이 알고. -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린 이 놀라운 소식은 욥바라는 도시에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더욱이 막 5:43의 경우처럼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지 말라는 당부가 없었으므로 이 소식은 자연스럽게 온 욥바에 들려졌을 것이다.
많이 주를 믿더라. - 이처럼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린 이적은 많은 욥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35절과 같은 결과인데 이와 같이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게 된 경우는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나 초대 교회의 시기에는 보편적이었으며(요 11:45) 또 그것이 이적을 행하는 진정한 목적이었다(요 20:30.31). 즉 아직 성경이 다 기록되지 못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꺼이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들을 일으키심으로 보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행 8:6 주석 참조.
9:43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 - 사도 베드로의 이름도 시몬(Simon)인데(마 4:18) 본문에 언급되는 사람도 시몬이다. 이에 누가는 이 욥바의 시몬의 직업을 밝히고 있다. 한편 '피장'(皮匠)이라는 직업은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하고 가공하는 직업으로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직업이었다(Hervey, Bruce). 그래서 유대인들의 유전(遺傳)인 미쉬나에 의하면 이 피장이 남편을 둔 여자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Mishna. Khethuboth 7:10).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편견을 무시하고 그의 집에 묵었다. 이는 예수께서 평소에 행하시고 가르치시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눅 7:36-50; 15:1-7; 19:1-10; 요 4:7-10).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유대인의 전통적 의식법(儀式法)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자유롭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행 10:14). 어쨌든 베드로는 욥바에서 여러 날 동안 머물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주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 번째 방문지인 가이사랴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행 10장). 한편 이러한 베드로의 사역 여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연구자료
도르가-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여제자
1. 인적 사항
① 도르가는 '영양'(羚羊) 또는 '사슴'이라는 뜻의 헬라명이고, 아람어 이름은 '다비다'임.
② 항구도시 욥바 출신의 신실한 여성도(행 9:36).
③ 과부로 추정됨.
④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행 9:41).
2. 시대적 배경
A.D. 30-40년경에 주로 활동함. 이 시기는 오순절 사건과 함께 태동한 교회가 이제 막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껸로 확장되던 때였으며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때였다. 이러한 때에 도르가는 집사 빌립의 복음 전파로 세워진 욥바 교회의 성도로서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돕는 일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3. 주요 생애
1. 소생 이전
1) 출생 - -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 - -
3) 구제와 선행에 힘씀 - 행 9:36
4) 병들어 죽음 AD. 37년 경 행 9:36
2. 소생 이후
1) 베드로의 기도로 소생함 AD. 37년 경 행 9:38-41
2)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산 증인이 됨 AD. 37년 경 행 9:42
3) 죽음 - -
4. 성품
① 선행과 구제에 전념한 나머지 병들어 죽게될 정도로 헌신적인 봉사자(행 9:36).
② 재봉으로 손수 옷을 만들어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등 여러 가지 재능을 갖춘 자(행 9:39).
③ 풍족한 생활이 아니었으나 어려운 이웃을 몸소 돌아본 것으로 보아 실천적 사랑을 소유한 자(행 9:39).
5. 구속사적 지위
① 선행과 구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자(행 9:36).
② 성령의 능력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산증인이 된 자(행 9:41,42).
6. 평가 및 교훈
①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한 도르가의 삶은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행 9:36-39). 이처럼 참다운 믿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이 어느 정도로 나타나고 있는가? 진정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성경은 말씀한다(약 2:26).
② 도르가가 하나님께 헌신하였던 방법은 뛰어나고 값진 물건이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재봉에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통해서였다(행 9:39). 이와 같은 모습은 하나님께 귀한 재능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편과 처지를 내세우며 선행과 구제하는 데 인색한 현대의 이기적인 성도들에게 귀한 귀감이 된다 하겠다.
③ 도르가의 죽음에 대한 동료 과부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 사락이 얼마나 뜨거웠으며, 도르가의 생전 선행이 지극히도 감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뜨거운 사랑의 교제와 헌신의 모습은, 교회의 외적 성장에만 치우쳐 점차 의례적인 성도간의 교제가 이뤄지는 경향에 처한 현대 교회 공동체에 다시금 살아 움직여야 하겠다(벧전 4:7-11).
④ 희생적인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 도르가는 죽은 후 베드로의 기도로 다시 살아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했다(행 9:41,42). 이렇듯 신실한 성도는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존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힘쓸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신앙의 승리를 위해 늘 기도에 힘써야 하겠다(마 5:16).
7. 핵심 성구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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