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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각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2-3장에 이어지는 일련기사 곧 이미 십자가 구속 수난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선서 하늘에 계시던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당시 A.D. 1
세기 말의 초대 교회 시대에, 소아시아(Assignor)지역에 위치했던 7교회에게 각각 주신 메시지를 기록한 일련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계시록은 묵시 문학서로서 각 숫자의 고유한 상징적 의미를 의미 전달의 중요한 매체로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책이다. 한편 '7'이란 숫자는 태초의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완성 기간과 관련된 숫자로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과 성며 및 그로 인한 안식과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으로 성취된 그 모든 전체를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숫자이며, 본 계시록의 묵시 전개를 위한 기본 숫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묵시 문학서인 계시록에서 당시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준 이제 2-3장의 일련의 메시지와 그에 이어지는 세상 종말에 대한 묵시의 말씀들은 그 7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교회는 물론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 2-3장의 일련기사를 통해서 전개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각각에게 그들이 처한 형편과 모습에 따라 보낸 칭찬과 책망 및 격려와 경고의 메시지들은 결국 이제 주님에 의하여 주의 재림 이후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구속사의 도정에서 택한 성도들의 지상 신앙 공동체(地上 信仰 共同體)로서 세워진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敎會)가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기사에 바로 이어서 계시록의 주요 내용으로서 세상 종말에 대한 묵시의 말씀을 이 7교회를 그 형식적 수신자로 하여서 주신 것도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가 각 교회가 처한 구속사의 도정에서 무엇보다도 구속사의 종점인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에 대한 확고하고도 첨예한 인식을 가짐으로써 당장 닥쳐오는 세상의 핍박과 미혹의 시련을 극복하고 교회의 참 모습을 이세상에서 역동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마침내 구속사의 종점인 종말에 대한 계시까지 받음으로써 성도가 전구속사의 지평에 대한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을 갖고 이 세상에서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같은 전반적 의의를 가진 문맥하에서 진행되는 제 2-3장의 일련기사의 종결 부분인 본장의 각 기사는 각 교회별 메시지 자체가 직설적으로 그 의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각 교회별 메시지는 개별적으로 뿐만 아니라 필히 전체적으로 파악해야만 그 일련기사가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바람직한 교회 상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얻을 수 있
다. 이에 본장의 각 세부 문단 구분 및 각 문단별 의의는 해당 문단 강해에서, 그리고 제 2-3장의 일련 기사 전체의 종합 정리는 제 2장 연구자료에서 다루기로 한다.
외울 말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사데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7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야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14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3:1-22 계시록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계 2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3:3 재림과 종말
벧후 3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3:1 성경에 나타난 주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용례
계 14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3:1 계시록에 나타난 '7'
계 4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3:3,16 회개치 않는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
제 2,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는 각 교회들의 잘못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함께 그러한 잘못들을 시정하여 회개치 않을 때 주어질 징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실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현대 교회에 대해 준엄한 경고가 되는바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네 촛대를 옮기리라(2:5)
2. 내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2:16)
3. 큰 환난 가운데 던지리라(2:22)
4. 사망으로 자녀를 죽이리라(2:23)
5. 너희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3)
6. 부지불식간 재림해 심판하리라(3:3)
7.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3:16)
보감-3:3 회개치 않는 자들의 특징
계 9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3:6,13,22 성령의 주요 사역들
행 8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3:10 시험을 이긴 자의 7대 결과
대하 9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3:10 성도가 인내로 얻을 수 있는 것
1. 신앙의 성장(욥 23:10)
2. 화평(잠 15:18)
3. 구원(마 10:22)
4. 영생(롬 2:7)
5. 소망(롬 5:3,4)
6. 선한 행위의 결실(갈 6:9)
7. 고난을 이기는 힘(살후 1:5)
8. 경건(딤전 4:7,8)
9. 그리스도의 영장에 동참(딤후 2:17)
10. 약속의 기업(히 6:12; 10:36)
11. 하나님이 주실 상급(히 11:6-12)
12. 온전함(약 1:4)
13. 생명의 면류관(약 1:12)
14. 하나님의 칭찬(벧전 2:19,20)
15. 큰 환난에서의 보호(계 3:10)
신학용어-3:12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계 21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3:4,18 성도의 흰 옷의 상징적 의미
1. 존귀와 영광(에 8:15,16)
2. 의로움(계 3:4,18)
3. 거룩함(계 4:4)
4. 승리(계 7:13,14)
5. 순결함(계 19:8)
보감-3:5,12 주께 칭찬받을 자들
고후 10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3:7-13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1. 죄악에 물들지 않은 교회(2:2)
2. 인내하는 교회(2:3)
3. 게으르지 않은 교회(2:3)
4. 고난을 이겨내는 교회(2:9)
5. 충성된 교회(2:10)
6.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교회(2:13)
7. 사랑과 붕사가 있는 교회(2:19)
8. 모든 면에서 성장하는 교회(2:19)
9.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교회(3:8)
10. 주의 말씀을 잘 지키는 교회(3:8,10)
원어연구-3:19, 징계하다
이에 해당하는 켈라어는 '파이듀오'( )이다. 이 단어는 '자녀'(요 4:51), '어린이'(마 2:16)라는 뜻의 '파이스'( )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그 기본 의미는 '자녀를 교육하다', '양육하다', '훈계하다'이다.
여기서 그 의미가 파생되어 '징계하다', '견책하다'. '때리다'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단어의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① 교회 지도자가 어떤 사람의 인격을 바로 잡기 위해 말로서 견책과 징계를 하는 것(딤후 2:25)
② 하나님께서 환난과 재난을 가하여 그 신앙을 연단하시기 위해 징계하는 것(고전 11:32; 고후 6:9)
③ 아버지가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기 위하여 매질을 하는 것(히 12:7) 등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파이듀오'는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영적 아비와 스승으로서 자녀된 사랑하는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고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도록, 즉 그들의 신앙의 연단을 위하여 고난을 주사 징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징계하는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 잘못된 길에서 자신을 바르게 세우시며 신앙을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매'임을 알고 고난을 겸손하게 인내로 받는 자세가 절대 요구되는 것이다.
신학용어-3:14, 아멘
대상 16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3:14-22 영적으로 빈곤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호 물자
1. 연단한 금: 고난을 인내하면서 얻게 되는 흠 없고 순전한 믿음(18절)
2. 흰 옷: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로 주어지는 의의 옷(18절)
3. 안약: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18절)
보감-3:17-21 하나님의 양자 된 자들의 12대 특권
갈 4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3:19, 하나님의 징계
히 12장 자료노트 참조
3:1-13 사데교회에 보내는 편지
요한 당시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소망하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보여 주는 본서의 본론 제 1부인 2:1-3:22 안에서 다섯 번째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본 단락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아시아 주(洲) 내에 있는 일곱 교회 중 다섯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사데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데는 서머나(2:8)가 옛 리디아 지방의 수도가 되기 전까지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을 만큼 정치적 ․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도시였으며, 무역이 발달하고 일찍부터 양털 가공업과 염색 공업이 시작되어 경제적으로도 큰 부를 축적한 도시였다. 게다가 지형적으로 난공 불락의 요새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적은 노력으로도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할 수 있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사치와 향락을 일삼기로 유명하였다.
특히 이들은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안정성 때문에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교만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데의 풍조(風潔)는 사데 교회(the Church in sardis)의 구성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쳐 그들로 하여금 명목상(名目上)의 신자가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1절). 한 마디로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있었을 활 경건의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은 (딤후 3:5) 사실상 죽어 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에 주님은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남은 신앙의 불씨를 살려 참되고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이루라고 권면하시는 동시에(2,3a절), 끝까지 죽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 돌연히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신다(3b절).
한편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꾸중만 듣고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였으나 그 가운데에도 아주 소수의 의인이 있었다고 본문은 밝혀 주고 있으며(4절), 그처럼 신앙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노라고 주님은 약속하신다(5절).
한편 사데 교회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을 믿노라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일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물질적 부와 물리적 안정에 만족하여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영적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면, 그는 명목상으로는 신자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고, 그것은 결국 오시는 주님을 예비하지 못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마 25:1-13).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는 자들은 지금 자신이 과연 생명력이 충만한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여 그러한 상태에 있다면 더욱 주님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노력하고(엡 4:13). 그렇지 않다면 자기 영을 억누르는 세상의 것들에서 떠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며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전 14:1,12; 벧전 2:2).
② 아무리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죽은 교회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의인이 얼마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사면 초가에 자신이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절망하지 말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 결국에는 하늘의 생명과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 때가 올 것임을 기억하고 외롭고 힘들지라도 말씀을 따라 굳세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롬 8:17; 고후 4:16-18; 딤후 4:7,8.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 - 사데(Sardis)는 두아디라(2:18)에서 남쪽으로 약 48km지점에 있던 성읍이다. 에게해 주변 무역의 요충지로 헤르무스(Hermus) 강과 트몰루스(Tmolus) 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계곡으로 지나는 도로를 끼고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무역과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양털 가공업과 염색업이 시작되어 공업적으로도 크게 번성하였다(Pliny). 이러한 사데는 B.C. 700년경부터 B.C. 546년까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존재하였으나 B.C. 545년부터 로마에게 점령 당하기 전까지는 서머나에 그 영광을 넘겨 주었다. 계 2:8 주석 참조. 그리고 서머나에게 수도의 영광을 넘겨준 후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그리스령이 되었다가 B.C. 214 안디오쿠스(Antiochus)의 공격으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일찍부터 상업과 공업이 번성하여 그 부에 따른 사치와 부도덕이 심했던 이곳은 지형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외적으로부터 쉽게 성읍을 방어할 수 있었다. 사데의 사람들은 여신 시벨레(Cybele)를 주신으로 섬겼는데 그 신전은 에베소의 아테미 신전과 규모가 맞먹었다. 그러나 A.D. 2세기경 이 도시는 그 도덕적 퇴폐와 함께 몰락하여 오늘날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다. 한편 이곳 사데에 세워진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A.D. 2세기경의 이곳 교회 감독이었던 멜리토(Melito)가 뛰어난 주경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다는 사실만이 역사적으로 증거되고 있을 뿐이다.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 '일곱 영'은 성령을 의미하며(계 1:4 주석 참조) '일곱 별'은 일곱 교회, 즉 우주적 교회를 지키는 천사들을 의미한다. 계 1:16 주석 참조, 외견상으로만 교회의 형태를 갖춘 사데 교회에 교회의 내적 주관자이신 성령을 주관하시는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그 교회가 끝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할 때 우주적 교회를 주관하시는 주님은 교회를 지키는 영을 그 교회에서 철수시키실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아노니. - 여기서 '알다'(오이다)는 말은 인간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아시는 신적 통찰력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계 2:2의 주석을 참조하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 사데 교회를 향한 칭찬은 소수의 성도들에게만 주어졌다(4절). 대신 주님은 전체 회중(會衆)에 대하여 이처럼 책망의 말씀을 하신다. 이름만 살아 있고 실상은 죽었다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즉 이 상태는 외 형상으로는 교회 건물을 세우고 형식상 예배는 드리나 실제로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상태를 말한다(딤후 3:5). 이처럼 사데교회가 생명력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은 아마도 지리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만을 믿고 안일과 부도덕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일깨워.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그레고론'( )은 계속적인 동작의 진행을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한순간의 일깨움이 아니라 계속적인 일깨움을 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 낱말은 어원적으로는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려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또한 이 낱말은 영적으로 항상 각성해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를 나타내는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막 13:35; 벧전 5:8).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본문의 명령은 죽어 있거나 자고 있는 영혼을 깨워 죽은 행실을 다시 살리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이 말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즉 '사데 교회는 실상은 죽었으나 그 중 죽지 않은 자 몇이 남아 있으니 그 남은 자들마저 죽지 않도록 지켜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 중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remnant)를 보존하시어 당신의 구속사(救贖史)를 이끌어 가신다. 한편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는 이미 계 2:24 주석에서 살펴보았으니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온전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나( )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즐겨 사용하던 용어이다(엡 1:23; 3:19; 4:10,13; 5:18). 요한도 이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는데(요한복음에 13회, 본서에 6회) 이는 요한의 기록이 바울 서신, 특히 에베소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한편 이 단어는 본래 '충만한 것'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로 성도의 온전한 신앙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수준에 다다르는 절대 완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John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2:19)와는 대조되게 이러한 수준에 있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즉 하나님은 사데 교인들에게 사랑과 믿음과 충성과 인내의 씨앗을 주셨으나 사데 교인들은 그것들을 잘 지키고 키워나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까지 나아가기는 커녕(엡 4:13) 받은 바 그대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는 죽은 교회의 전형적인 표본이라고 불리운 것이다.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 여기서 '받고 들은 것'은 사도들과 복음 증거자들이 전하고 가르친 복음의 진리를 뜻한다(Johnson). 그러므로 본절은 사데 교회가 처음 복음 전파를 받았을 때 그 받고 들은 것을 상기하여 즉시 회개하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굳게 간직하라는 권고이다. 이러한 본절은 그 교훈이 계 2:5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 이는 예수 재림의 임박성보다는 돌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다(Ladd). 즉 주께서 도적같이 임하겠다는 표현은 곧 임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제 임하실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도적은 예고도 없이 잠든 사이에 오며 와서 해를 입힌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는 도둑을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깨어 있어 도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깨어 준비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마치 급작스럽게 오신 것처럼 느껴질 것이며. 그 가운데서 그는 창졸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자는 전혀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 교인들에게 주님이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씀은 결국 사데 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지금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벗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 웃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더럽혔다'는 것은 죄로 물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곧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사데라는 도시의 지리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에 따른 무사 안일과 나태, 도덕적 부패의 풍조에 휘말려(1절 주석 참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음행 따위의 윤리적 패륜을 행하며 그 신앙을 더럽혀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2절). 그러나 본절은 그런 와중에서도 소수의 신실한 자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약으로부터 자신들을 보존했음을 증거해 준다. 즉 비록 소수이지만 몇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윤리적 패륜 행위로 더럽히지 않아 사데 교회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Moffatt, Zahn).
흰 웃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 '흰 옷'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성도가 받는 옷으로 정결과 승리의 상징이다(Plummer, Alford). 즉 '흰 옷'은 성도가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결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성화(堅化)의 영광과 영생을 가리킨다. 계 2:17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주와 함께 다닌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 곧 주님과 동거하는 삶을 의미한다(21절).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및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21:3).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 '이기는 자'에 관해서는 계 2:7의 주석을 참조하라. 전절과 본절을 통해 주님은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잃지 않는 자들에게는 세 가지의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세 가지 선물의 내용은 '흰 옷'과 '생명책에 그의 이름을 분명히 기록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하는 것'이다.
흰 옷. - 4절 주석 참조.
생명책에서‥‥흐리지 아니하고. - '생명책'이란 말은 구약 시대때부터 나타난 개념이다(출 32:32; 시 69:28; 사 4:3).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신약 시대 때의 개념처럼 종말적 개념은 아니었고 지상에 있는 신정 국가(神政 國家)의 시민권을 뜻했다(Lightfoot). 이것이 선지 시대부터 종말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여(단 12:1) 신약 시대에는 완전한 종말적 개념으로 확정되었다. 즉 회복된 이스라엘의 시민됨을 의미하던 구약적 개념의 '생명책'은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아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된 것이다(13:18; 17:8; 20:12,15; 21:27). 그러므로 그 책에 기록된 자의 이름을 흐리지 않겠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정하신 자를 중도에 버리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자의 구원은 결코 변개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해 준다(Ladd). 성도가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시인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는 '엑소몰로게오'( )로 '고백하다', '인정하다', '찬양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 의미들의 공통점은 '공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주님은 신앙의 수호자를 위하여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모든 천사들이 있는 천국의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하고(마 10:32; 눅 12:8), 천국에 합당한 자라고 공표하여 번복할 수 없도록 확증해 주시며, 또 그렇게 공표함으로써 공표된 자를 자랑스럽고 영광되게 만들어 주신다(Johnson).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들을지어다. - 이는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모든 교회, 즉 우주적 교회(Catholic Church)가 당연히 귀를 기울여야 함을 뜻한다. 또한 이는 듣되 단순히 육신의 귀로써만 들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그 뜻을 분명히 깨닫고 깨달은 대로 행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계 2:7의 주석을 참조하라.
3:7-13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요한 당시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보여 주는 본서의 본론 제 1부인 2:1-3:22 안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본단락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아시아 주 내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여섯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빌라델비아는 주변의 여러 도시들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었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잦은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게다가 직물 ․ 피혁 공업의 발달 및 양질의 포도주 수출로 비교적 부요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다. 따라서 이 도시 역시 당시 부요했던 부근의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우상 숭배와 사치, 도덕적 문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포도주가 주요 산물이어서 이 도시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를 주신(主神)으로 섬겼고, 그 결과 방탕과 향락 풍조가 도시 분위기를 지배하였다. 게다가 이 도시에는 서머나의 경우처럼 예루살렘에서 도피해 온 유대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빌라델비아 교회(the Church in Philadelphia)의 구성원들은 서머나 교회처럼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박해 속에서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사회적 ․ 경제적 ․ 재능적 측면에서 밀려오는 그러한 박해를 능히 극복할 만한 조건을 부여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그러한 열악한 조건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충실히 지키고 행하였다(8절). 이것이 주님께 열납되어 그들은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을 듣지 아니한 영광된 신앙인의 대열에 놓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장차 자기들을 핍박하던 자들을 굴복시키고(9절), 마지막 심판의 고통을 면제받으며(10절), 하나님의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었다(12절). 이로써 이제 그들이 해야할 일은 자신들이 가진 바 믿음을 굳게 지킴으로 그들이 받은 축복을 잃지 않게 하는 일 뿐이었다(11절).
한편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유익한 몇 가지 교훈들을 제시해 준다.
①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은 그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받은 능력의 범위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시사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적게 준 자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하신다(눅 12:48).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위대한 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모든 것에 성실한 일꾼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에 큰 일도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능력이 모자라 큰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칭찬을 해 주실 것이다(마 25:14-30). ② 충성된 신자는 구원의 확실성 가운데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상상하지도 못한 크고 영광된 상급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작고 허황된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를 섬기고 주께 충성함으로 확실하고 영광된 미래를 예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자.
③ 성도는 아무리 확고히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한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끝까지 겸손하고 충성함으로 받은 구원을 지켜야 한다(빌 2:7; 3: 12-16).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빌라델비아 교회. -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사데(1절)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헤르무스(Hermus) 강과 인접한 코가미스(Cogamis) 계곡의 고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알라세히르'(Alasehir, 하나님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터어키의 한 성음으로 남아 있다(Robertson). 이 도시는 서머나(2:8)와 서북 아시아, 브루기아(행 16:6)를 잇는 도로를 끼고 있어 동과 서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크게 번성하였다. B.C. 2세기경 버가모 왕조의 앗탈루스 2세(Attalus n, B.C. 159-138)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형제 사랑'이라는 뜻의 '필라델푸스'(Philadelphus)를 이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A.D. 17년 이 지방 전체에 걸천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에 그의 선심(善心)을 기리어 이 도시 사람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네오가이사랴'(Neocaesarea, 새 황제)라고 하였는데 후에 '플라비아'(Flavia)로 변경되었다. 그 뒤 황제 숭배가 이 도시에 정착되자 이 도시는 '네오코로스'(Neokoros, 신전 관리자)라는 명칭을 다시 얻게 되었다. 이 도시는 직물과 피혁 산업이 번성하였으며, 동시에 동북쪽에 큰 포도 재배 단지가 있어 포도주도 이 도시의 주요 산물 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 도시는 '술의 신' 또는 '식물의 신'으로 불리는 디오니수스(Dionysus)를 주신(主神)으로 숭배하였다. 한편 사데 교회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도 알려진 자료가 하나도 없다. 단지 A.D. 100-160년에 암미아(Ammia)라는 여 선지자의 탁월한 사역으로 인해 교회가 크게 번성하였으며(Eusebius), 주변의 모든 국가와 도시들이 터어키가 몰고 온 회교에 굴복했음에도 이 교회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932년까지 기독교 도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Ramsay).
거룩하고 진실하사. - '거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하기오스'( )를 직역하면 '그 거룩하신 자'이다. 이 '거룩하신 자'는 하나님의 대명사이다(레 20:8; 시 68:5; 사 1:4; 5:19,24; 10:7,20; 12:6; 렘 1:29; 51:5; 겔 39:7; 호 11:9; 합 3:3). 그러므로 이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에 사용한 것은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실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호 알레디노스) 역시 직역하면 '그 진실한 자'이다. 여기서 '알레디노스'( )는 '거짓'에 대한 '참'을 나타내는 '알레데스'( )와는 달리 '불완전'에 대해 '완전'을 나타내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진실하사'는 '완전하사'와 같은 말이다(Ladd).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본문 속에는 함축되어 있다(Plummer).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구약 성경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며(렘 30:9; 겔 34:23; 37:24)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여기서 '열쇠'란 '통치된' 또는 '주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주장하는 주권(主權)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사실 본질상 하나님 자신이시면서 성부와 및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스도(창 1;26)께서는 천지(마 28:18)와 만물(엡 1:22)과 교회(마 16:18)와 음부(1:18)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종말의 최후의 심판 뒤에 온전히
구현될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권까지도 지니고 계신다. 그리고 그 주권에 대해 그 어떤 피조물도 방해하거나 도전할 수 없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그이. - 이는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절대적 권세를 지니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Ladd). 한편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남겨 이미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보장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에게(11절) 주님이 이처럼 천국의 열쇠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열린 문. - 이 문을 선교(宣敎)의 문으로 보는 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비슷한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고전 16:6; 고후 2:2; 골 4:3). 또한 빌라델비아가 동서를 잇는 중요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amsay).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문이라고 비유하셨고(요 10:7), 바로 전절에서도 하나님의 왕국의 열쇠를 가지신 모습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본문의 문은 '천국의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MofFatt, Rist). 특히 12절에 신앙의 승리자는 천국의 기둥이 되어 다시 나가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의 문이 천국의 문임을 나타내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책망할 것이 없는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회를 흡족히 여기신 주님은 저들 앞에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아노니. - 계 2:2 주석 참조.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배반치 아니하였도다. - '적은 능력'은 마 25:14-30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적은 달란트'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이나 은사(고전 12:4-11)가 그다지 크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세상적으로 볼 때 신분이나 지위가 보잘 것 없으며 재산도 그리 많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다방면에서 사회적 부를 축적하여 당시대의 그 어떤 부요한 도시 못지 않게 부를 누리고 살던 빌라델비아의 시민이었던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왜 자기 사회의 부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의 정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은 우상 숭배와 비인간적인 경제 행위로 부를 획득하고 누리는 빌라델비아의 세속적 삶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 사회의 부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빌라델비아의 교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고, 가난은 아마도 그들을 빌라델비아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도록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기에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며(요 14:21,24) 세상 명예와 재물의 유혹과 무력(武力)에 의한 핍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빵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신앙의 정조를 유보한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이나(계 2:20 주석 참조)신앙의 정조를 버린 사데 교회 교인들(1절 주석 참조)과 같이 하여 이 땅에서의 안락을 취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예수를 위하여 초개같이 버리고 참된 부와 안락을 취한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의 지혜롭고 의로운 삶을 보게 된다.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의 모습은 황금 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이라 아니할 수 없다.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탄의 회 곧 자칭 유대인. - 본문이 말하는 유대인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자랑하면서 실상은 사탄의 종노릇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와 관련하여 언급되었던 이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와 관련해서 다시금 언급되고 있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핍박받는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 2:9 주석 참조.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알게 하리라. -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던 점은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가 마찬가지였으나 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즉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는 서머나 교회의 형제 몇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환난을 입게 하겠다고 하셨으나(2:10) 본문에서는 그 반대로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 몇 명을 도리어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무릎 꿇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는 서머나 교회에는 아직 신앙의 연단이 더 필요했으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지극히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남겼기에(8절) 더 이상의 연단이 필요없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천국의 문이 열려 있고(8절) 시험의 때도 면제되었으며(10절) 면류관도 이미 주어졌다(11절)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정황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유대인 중 몇이 교회 앞에 절하게 되리라는 말에 대하여 혹자는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날(20:11-15)에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및 그분과 함께 한 성도들의 발 앞에 굴복당하게 되는 것(마 22:44)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Moffatt).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믿지 않던 유대인 중에서 일부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로 들어올 자들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Greijdanus). 두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네가‥‥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 이는 2:23의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이 말은 성도와 그리스도 간의 상호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성도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은 그러한 성도를 지키심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관계를 본문은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측면에서 성도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성도된 우리는 믿음을 지켰으므로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오해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 보호, 구원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나의 인내의 말씀. - 이것은 성도들에게 인내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으로도 (Plummer), 또는 인내하면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으로도(Vincent, Lohmeyer)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타당한 해석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인내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본받아 세상 환난 중에 참고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Moffatt, Charles). 즉 성도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자들이니(마 10:38)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처럼 최후 승리의 그 날까지 신앙의 인내를 해야 하는 것이다(빌 3:10-14).
나도 시험의 때에 너를 지키리니. - 이 말에 대해 학자들 간에는 두 개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이것을 시험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며(Moffatt, Rist, voord), 다른 하나는 시험은 거치되 끝까지 보호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Chaes, Johnson). 일반적으로 성도가 칠 년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자를, 통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취하고 있다. 한편 후자 안에서도 또 다시 두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든 시험 속에서 주님이 보호하신다는 것이고(Charles), 다른 하나는 최후의 심판 때에 보호하신다는 것이다(Johnson). 본절 후반부의 내용이 마지막 환난의 때를 지칭하므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므로 본문을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값주고 산 바 된 성도들의 구원은 확고 불변하므로 소위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비록 순교의 고난에까지 이를지라도 배교(背敎)의 자리에 빠지도록 주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며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롬 8:31-39).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 - '온 세상'은 문자 그대로 모든 세상을 지칭하며, '땅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과 영적(靈的)인 일에 무관심하며 땅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자, 곧 불신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시험의 때는 빌라델비아 교회에만 국한되는 환난이나, 성도가 일상적인 의미에서 고난을 겪는 현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온 세계에 임하는 큰 환난기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Ladd).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 이 말은 경고의 측면에서 주어지기도 하며(2:15,16) 위로의 측면에서 주어지 기도하는데 본문은 위로의 측면에서 주어진 경우이다. 즉 이 말 속에는 주님께서 곧 재림하시므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속히'란 하나님의 편에서 이해 되어야 하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리라는 뜻이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혹하게'란 뜻은 아니다(Lenski). 그러나 이를 잘못 이해한 자들은 '주께서 속히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아직도 성취되고 있지 않음은 어쩐 일인가'라고 의아해 하기도 한다(벧후 3:8,9).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음으로 이미 그에 해당하는 상급을 받았다(8절). 그러므로 이미 받은 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더 받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받은 것을 끝까지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마귀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을 미혹하고 핍박하여 넘어지게 하려 한다(벧전 5:8).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가운데서도 전사(戰士)처럼 항상 깨어 최후의 승리가 확정되는 그날까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고(엡 6:17) 신앙의 대적자와 싸워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굳게 지켜야 한다.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 계 2:7의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과거에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의 현관에는 두 기둥이 서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야킨), 다른 하나는 '보아스'(보아츠)라고 하였다(대하 3:15-17). 이 두 기둥은 모두 굳건함과 영구성을 의미했는데 본절은 이러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Plummer). 기둥이란 항상 중요하고도 굳세고 의연하며 영구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 즉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체(總體)인 교회에서 그 만큼 확고 부동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 사용된 '성전'은 성전 건물 전체를 지칭하는 '히에론'( )이 아니라 성소(Holy Place)를 지칭하는 '나오스'( )이다. 따라서 이것은 구원의 확실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차 누릴 중요한 지위 곧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클 것임을 시사해 준다(롬 8:18).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성전의 기둥이 움직여 이탈하게 되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둥이 된 자는 성전에서 나갈 수도 없고 나가서도 안된다. 이와 같이 본절은 성도가 장차 누리게 될 온전한 구원과 상급의 확실성을 명확히 확증해 주고 있다. 한편 당시 격렬한 지진으로 인해 많은 건물의 기둥이 무너져 내린 경험을 한 빌라델비아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7절 주석 참조) 이러한 확증의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매우 실제적이고 고무적인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다(Robertson).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의 승리자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소유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임을 천명하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성도에게 새겨지는 것은 분명히 그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다(7:3,4; 9:4).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그 이름이 새겨지는 성도가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것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새예루살렘'이란 이 땅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그 공동체의 새로운 처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21:1,2,10-2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은 독특한 표현으로 아마도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절대적 주권자되시는 주님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름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2:17;19:2). 하여튼 그러한 그리스도의 새 이름까지도 신앙의 승리자에게 기록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을 나타내 주는 상징적 표현이다.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들을지어다. - 6절 주석 참조.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요한 당시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할지를 보여 주는 본서의 본론 제 1부인 2:1-3:22 안에서 일곱 번째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본 단락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아시아 주 내에 있는 일곱 교회 중 마지막 일곱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내륙과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인 에베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무역이 성행한데다가, 양질의 양모를 생산하고 금융업이 발달하여 모든 시민들은 매우 부유하게 살았다. 게다가 이 도시는 자유 분방한 사회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라오디게아 교회(The Church in Laodicea) 교인들은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지도 않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은 한 마디로 매우 좋은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최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오히려 본서가 수신자로 삼고 있는 일곱 교회 중 가장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가장 저급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은 사데 교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가진 부와 자유를 영성 성장의 발판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향락을 위한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며, 육신의 즐거움과 부요함을 영적 충만과 부요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실하신 창조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께(14절) 책망만을 듣는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주님께 책망받은 점을 다시 요약하면 ①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어정정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과(15절), ②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므로 영적으로도 부유하다고 착각하고 교만한 것이었다(17절).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사데 교회 교인들이 지은 잘못 위에 기회주의적이고 교만한 죄를 더한 것이었다. 주님은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착각과 오류에 대하여 시정 명령을 내렸으며(18,19절), 시정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셨다(16절). 한편 사랑의 주님은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자조차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간절한 사랑의 호소를 하시며, 호소하는 그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동행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주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신다(20,21절).
이상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을 섬기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어정정한 신앙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마 6:24). 따라서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 다리를 걸쳐 놓고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의 일락을 다 맛보고, 결정적인 때가 오면 하나님께 붙어 구원도 얻겠다는 얄팍한 꾀를 피우다가 마지막 때에 주께 버림받음으로써 후회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잠시 고난을 당하고 의률 위해 수고하다 영생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 22:37,38). ② 하나님은 끝까지 인내하시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벧후 3:9). 따라서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몇 번 사랑을 베풀거나, 복음을 전하다가 저 사람은 안 되겠어 하며 스스로 판단하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는. 죽기까지 참으신 그리스도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자(마 18:22,35). ③ 정신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는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에게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그것들이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미친 영향과 같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중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마 19:21,22).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이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하나님께 묻고 판단하여 자기가 가질 만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언제나 자족하는 자세를 길러야 할 것이다(빌 4:11).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진 것도 내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아울러 가지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마 5:29,30).
한편 이상과 같이 살펴본 일곱 교회 중 나는 어떤 유형의 교회에 속해 있으며 어떠한 유형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잘된 점이 있으면 그것을 끝까지 지켜 승리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즉시 시정하여 오실 주님을 담대히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참으로 칭찬받은 모범적인 교회, 모범적인 성도가 되도록 하자.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오디게아 교회. - '라오디게아'(Laodicea)는 빌라델비아(7절)에서 동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도시이다. 리쿠스(Lycus)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같은 계곡 위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골로새(Colossae)와 히에라볼리(Hierapoli)가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 이곳의 지명은 터어키의 '에스키힛살'(Eskihiscar)인데 옛 영화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에베소 해안으로부터 아시아 내륙으로 연결되는 로마의 도로가 이 도시 중앙을 관통하고 있어 라오디게아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모(羊毛)는 질이 상당히 좋아서 라오디게아는 큰 부를 축적하였다(Walvoord). 게다가 금융업이 발달하여 이 도시의 부는 다른 여타의 도시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래서 A.D. 60년의 대지진 때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나 로마 황제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재력과 힘으로 재건하는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발달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전체에는 큰 특색이 없었고, 물사정도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amsay). 그리고 이 도시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에선 안질(限疾)에 잘 듣는 약을 조제해 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적으로는 제우스(Zeus)와 치료의 신 '멘 카루'(Men Karou)를 섬겼다. 이러한 라오디게아는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Ⅱ)에 의해 주전 3세기 중엽에 건설되었으며 그의 왕비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한편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일찍부터 이 도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골 4:12,13) 골로새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고 감독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 - '아멘'( )이란 낱말은 '진실한', '견고한', '확실한'이란 뜻으로 대개 문장 끝에서 '그대로 될지어다'는 말로 쓰인다. 계 1:6 주석 참조.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낱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한 충성된 분이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빌 2:8). 또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진실성을 강조해 준다. 사 65:16의 '진리의 하나님' 역시 히브리어로 '아멘의 하나님'인데 그 뜻은 진실의 하나님이다. 한편 '충성되고 참된 증인'에 대해서는 계 1:5의 주석을 참조하라.
창조의 근본이신 이.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로 '창조의 시초'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본문은 골 1:15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물 중 첫 피조물이란 뉘앙스를 풍겨 준다. 그래서 아리우스(Arius)는 이것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被造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르케'( )는 '근본'으로 번역된 적이 있으며(골 1:18), 또한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태초 이전에 계셨고(요 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함으로써(요 1:2)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創造主)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한편 주님이 배금주의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만유의 창조주요 진실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적절하고도 당연한 결과이다.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아노니. - 1절 주석 참조.
차지도‥‥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 혹자는 이 표현이 라오디게아 북쪽 11km 지점의 히에라볼리에 있던 뜨거운 온천수와 16km 지점의 골로새에 있던 우물의 냉수를 배경으로 해서 언급된 교훈이라고 한다(Johnson). 여기서 차다는 것은 전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든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상징하며, 덥다는 것은 신앙의 열정으로 뜨거운 상태를 상징한다(눅 24:32). 그런데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것은 완전히 세상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영적이지도 않은, 즉 하나님을 싫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어정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를 따라 이해하면 한마디로 말해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세상의 향락을 다 누리면서 아울러 천국에도 가고자 하는 무사 안일주의 및 신앙적 기회주의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비한 태도를 용인하지 않는 주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신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는(마 6:24; 눅 16:13)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악만큼이나 가증스러운 태도이다. 신앙의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하여. - 15절의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이는 차가운 것 보다는 나으므로 적어도 악한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가증스러운 상태를 날카롭게 꼬집는 풍자적 표현이다. 미지근한 상태가 악한 상태인 이유에 대해서는 15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토하여 내치리라. - 맛이 없거나 역겨운 것을 먹으면 인간은 대개 토해 버린다. 저자는 그러한 것을 비유로 하여 불신앙만큼이나 가증스러운 미지근한 신앙은 주께서 가차없이 정죄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은 세상을 떠나지 못한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돌이켜 세상을 떠나 온전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결국 내침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내침을 당한다고 할 때 이 말은 구원에 들어왔던 자가 구원 밖으로 내쳐진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그가 교인일지라도 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면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므로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천국 구원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 라오디게아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 14절 주석 참조. 그러한 배경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상당한 부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교인들 역시 전반적으로 부유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부(富)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고서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큰 것을 바쳤다고 생각하며 영적으로도 부요한 신자라고 착각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들은 황금 제일주의에 젖어 있어 물질적 부요를 영적 부요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Ladd). 아무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는 것으로 경건의 생활을 대체하려 했으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것만 취하려 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부족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그처럼 부요한 상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매우 궁핍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네 곤고한 것과‥‥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곤고한'에 해당하는 '탈라이포로스'는 '비참한', '불행한'이란 뜻으로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했기 때문에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Johnson). 이처럼 하나님의 판단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판단과 정반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으나 실상은 인생의 짐으로 곤고했으며, 영혼과 인격적인 면에서 빈곤했으며,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장님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련한 인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련했던 것은 자신들의 그러한 실상을 그들이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상태는 서머나의 교인들과 극하게 대조되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부요하나 실상은 가난했고 서머나의 교인들은 궁핍 하나 실상은 부요했다(2:7). 그것은 눈에 보이나 일순간에 없어져 버릴 수 있는 재물을 신뢰하는 이들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원하시며 만유(萬有)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이들의 차이였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순도 높은 금을 사라는 말인데 이 말은 그와 같은 문자적인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앙의 연단을 통해 영적으로 순결하고 부요하게 되라는 상징적인 말이다. 여기서 불은 시련을, 연단은 그 시련을 통과하는 것을, 불로 연단되어 얻어진 순금은 거룩과 풍요를 상징한다(벧전 1:7).
흰 옷을 사서 입어‥‥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본절은 라오디게아가 모직물의 명산지였음을 배경으로 한 교훈이다(Johnson). 본서에서 '흰 옷'은 대개 의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데(4절 주석 참조)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져 속죄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죄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몸은 질좋은 양모로 가리고 다녔으나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 곧 죄의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다녔다. 이에 주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로 말마암는 칭의(構義)의 옷과 선하고 의로운 행실의 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롬 5:8-11).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달하였으며(14절 주석 참조) 그중 특히 안약과 고약으로 유명하였다(Ramsay). 이러한 이유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신의 눈은 밝게 했을지 모르나 영적인 것, 영적인 것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는 것, 육신의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육신의 눈만 위하지 말고 성령의 영적인 은사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풍자적으로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고전 2:10-16).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 본문에서 사용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필레오( )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가파오'( )가 사용되기 때문이다(1:5). '아가파오'는 대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며 '필레오'는 친구애와 같은 인간애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요일 3장 자료노트, '주요 원어로 살펴본 사랑의 개념'을 참조하라. 따라서 주님이 '필레오'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때로 성경은 '필레오'를 '아가파오'와 구별하지 않고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한다(요 5:20; 16:27; 20:22). 그러므로 본문은 이 경우를 적용하여 본문이 말하는 주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내쳐 버릴만큼 역겨운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16절)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사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책망하고 징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책망과 징계는 사랑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책망도 징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며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히 12:5-11, Hendriksen).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정상적인 순서를 취한다면 회개하라, 그리고 열심을 내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죄 가운데 머무르는 자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그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를 받는 일이다(마 3:2).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이란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으며,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열심을 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16절의 '더웁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스토스'( )와 같은 말이다. 즉 이 말은 직역하면 '뜨거워지라'는 말이다.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본문의 '문'은 8절의 문과는 다른 문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을 지칭한다. 신실하고 충성되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선 주님께서 계속 찾아가실 필요 없이 하늘의 문만 여시면 되었으나(8절), 영적으로 죽어 있어 자신들이 계속적으로 짓고 있는 죄에 대하여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친히 찾아가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셔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절은 영적인 신자와 신령치 못한 신자 간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대비시켜 보이고 있다.
한편 주께서 문밖에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궁국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니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종말에 다가올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부끄럼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주님은 당신이 택하신 죄인을 찾아 오시며(마 9:13; 막 2:17; 눅 5:32) 지금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여기서 '서서'와 '두드린다'는 표현의 원어는 각각 '헤스테카'( )와 '크루오'( )로 전자는 현재 완료형이고 후자는 현재형이다. 그러므로 이 시제에 따르면 주님은 오래 전부터 서 계셔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다. 결국 주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아직 회개치 아니한 자기 백성들의 마음 문에 인내하는 자세로 서서 문을 열 때까지 죄인을 위해 끈질기게 두드리신다는 것을 본문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사랑과 인내로 강권하시는 주님을 밖에 세워두는 결례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 과정이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 마음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가 문을 열면 주와 동행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만드신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움직여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의 문앞에서 서서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주님을 맞아 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죄인이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매우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하신다(눅 15:10). 본문의 '더불어 먹는다'는 표현은 그러한 때의 기쁨의 잔치(눅 15:23,32)를 염두에 둔 것으로 그리스도와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연 성도간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궁극적으로 장차 죄사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21:1-27).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그. -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로 인해 당하는 각종 환난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는 자를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계 2:7의 주석을 참조하라.
내 보좌에 함께 않게‥‥하리라. -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사 죄와 사망을 이기셨으며 이기신 뒤에 승천(昇天)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막 16:19). 즉 그리스도께선 자신의 구속(救贖) 사역을 성취하신 후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사 다시금 성부와 함께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빌 2:5-11).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마치 죄와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고 돌아온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 우편에 앉히신 것처럼, 믿음의 승리자들을 자기의 보좌에 합께 앉히시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여기서 보좌는 통치권의 상징으로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2:26). 인간은 그가 비록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더라도(15-17절) 진실로 회개하고 돌아서면 이처럼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수 있는 것이다.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들을지어다. - 계 2:7의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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