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원작가들> 이예경
새해 들어 목요일마다 오후에 일이 생겼다. 주간보호센터에 오시는 어르신들에게 두 달 간10쪽~16쪽 정도의 병풍자서전 만들기를 코치하는 일이다.
흔히 ‘노치원’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에 간 날, 강의실에 앉아있는 참가자 이십여명을 둘러보니 겉보기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주로 80대 어르신들인데 건강보험공단에서 장애 3급, 4급, 5급을 받은 분들로 낙상, 뇌졸중 후유증으로 편마비, 파킨슨병으로 보행 동결, 치매 등으로 심신 장애가 있단다.
강의 첫날, 마이크를 잡고 기세 좋게 시작했다. 자서전을 왜 쓰나, 어떻게 쓰나 자서전의 종류 등 일반적 내용으로 말을 꺼냈다. 시작한 지 10여 분이 지났을까, 좀 쉽고 간단하게 해달라는 쪽지를 주임 복지사가 건네준다. 나는 준비한 내용을 뚝 잘라서 쉽게 풀면서 좋아하는 사람 이름을 쓰고, 왜 좋아하는가 써보게 하였다. 그런 사람 없다는 분도 있었고,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도 등장하고 집안 식구들도 나왔다. 원장선생님이라 쓰기도 했다.
20여 분 강의 후, 30여 분간 강사가 책상을 돌며 개인 코치를 하게 되는데, 그때 하시는 말씀들이 의외였다. 귀가 어두워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손에 힘이 없어 글씨를 못 쓴다, 과거를 다 잊어 쓸 거리가 없다, 그저 숨만 쉬고 살 뿐이다, 문맹이라 글을 모른다, 하시며 손을 내젓거나 도리도리하는 어르신이 절반 가깝다. 대부분이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있다. 어떻게 하나. 내 생전에 이런 집단은 처음이다.
계획을 바꾸어 자기소개 글, 취미생활, 가족 얘기, 엄마 생각, 아버지 추억, 한창때 무슨 일했나, 30년 젊어진다면 어떻게 뭐하며 살까~~ 등으로 하루에 한 주제씩 주고 글을 쓰게 했다. 그렇게 1개월이 지났다.
여기 센터에는 학력이 천차만별, 성격이나 건강 상태도 그렇고 오색찬란하게 다양하다. 전직이 교장선생님, 건물주, 대기업 임원, 농업, 사업가, 건설업, 주부, 그리고 문맹에서 국졸 고졸 대졸에 박사 까지 모두가 어울려 좋은 결과를 내려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추억의 사진을 가져오라 했다. 지면의 절반을 차지할 테니 글은 서너 줄만 써도 된다.
그러나 세상일이 쉽기만 한 건 없다. 더러는 작년에 사진을 정리하며 전부 태워버렸다하고,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자화상,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그려보라 했더니 피카소의 그림 못지않은 개성이 드러나기도 해서 의외였다. 어차피 자서전은 자기 고유영역이니 그럴싸하게 어울릴 것이다. 수업의 마무리는 써낸 글 중에서 좋은 글을 익명으로 읽어주었더니 자기 글은 언제 읽어주려나 기다리시나 보다. 조용한 가운데 그들의 추억이 김치가 익어가듯 발효되는 중이다.
이 시간이 너무 싫다던 남자 어르신이 기억에 남는다. 딱 두 줄 이상은 쓰지 않았다. 세상을 포기한 듯, 원한에 사모친 듯 절망적인 표정, 지난날이 너무나 불행해서 해도해도 너무했던 과거사는 잊고싶기만 한데 아무것도 기억하기 싫고 한숨뿐인 얘기를 왜 써야 하느냐고 눈을 치뜨고 흘기며 대들었다. 옆자리 분에게 물으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절망에 절은 불쌍한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귀가 후에도 내내 가슴이 저려서 다른 일에 집중이 어려웠다.
내 마음이라도 추스르려고 기도하면서, 그에게도 기도가 필요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주에 센터에 가보니 그의 자리가 비어있다. 결석인 줄 알았더니 끝날 무렵에야 나타났는데, 휴게실에서 쉬다 왔다고 했다. 어쨋든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의 등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코앞만 보지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찾아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랐다. 몸의 컨디션이 돼서 주간보호센터에 온 것, 따뜻한 봄 날씨, 현재 살아있다는 것, 가족이 있다는 것, 걸을 수가 있다는 것, 등 감사한 건 얼마든지 널려있으니까... 말없이 퉁명스러운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를 볼 때마다 기도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느새 두 달이 다가온다. 센터장이 내게 인생노트 작성에 두 달은 너무 짧지 않겠는가 한다. 노인들에게 젊은 날을 회상하며 글을 쓰게 하다니 이렇게 수준 높은 프로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호응도까지 높아서 고맙다고 했다. 일 년 계약서에 싸인을 해달라는데 나는 앞이 아득했다. 두 달 완성 교안을 갑자기 일 년 치 교안으로 어떻게 늘이나. 뭘 더하나. 고민에 빠졌다.
어르신들에게 시바다 도요, 노시인의 시를 낭송해 주었다. 어르신들이 너무나 집중을 잘해서 들어주셨다. 늦깎이로 시작한 시인의 일생을 알려주며 베스트셀러로 돈도 벌었다고 했다. “여기 100세 넘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네요. 지금 시작하는 게 절대로 늦은 게 아닙니다. 살아가는 얘기, 기쁨, 슬픔, 희망, 잘한 것, 잘못한 것..,등 떠오른 생각을 적어 보는 겁니다.” 조용하게 집중해서 경청하는 어르신들의 진지한 모습에 내 마음이 감동했다.
어제는 봄비가 종일토록 왔다. 나는 부리나케 봄비에 대한 시를 모조리 찾아내어 15편을 프린트에 담았다. 어르신들이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을 상상하며 내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목소리가 제일 크신 분이 누구신가요” 묻고 그분부터 낭독을 부탁했다. 낭독자가 다음 차레를 지명하도록 했다. 노래시키면 사양하듯 핑계를 대는 어르신도 있었지만, 시 낭독은 난생처음이라며 살짝 흥분스런 표정도 보였다. 물론 보란 듯이 자신만만 큰 목소리로 감정까지 넣고 잘하는 분도 있었다. 백번을 읽으면 저절로 외워진다고 집에 가져가서 해보시라고 시 묶음을 선물로 드렸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귀가했다.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드니 어르신들이 써낸 글들이 천정에 쓰여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세파를 헤치고 맹렬하게 80여년간 하루하루 버티어 오신 한분 한분 모두가 대단해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이제 솔직히 토로해야겠다. 내가 ‘자서전 코치’는커녕 그분들 모두가 나를 코치해 주고 계신다고. (202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