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슭에 얼어 붙었던 지하수가 다시 흘러나오는 등 최근 며칠 사이에 날씨가 많이 풀려서 머지 않아 봄이 올것 같은 암시를 언뜻언뜻 받지만 마음은 만년설처럼 꽁꽁 얼어붙고 납덩어리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기나 한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기막힌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말없이 그저 조용히 넘어갈려고 지난 며칠간 무진 애를 썼지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법 없어도 살 것 같은 선배님의 선하고 천진한 웃음 뛴 모습 때문에 스스로의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는 의미에서도 졸필이나마 뭔가 쓰야 될 것 같아서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한대장님 때도 그랬던 것처럼 고인(故人)에 대한 언급은 혹시라도 의도하지 않았던 누(累)가 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재작년 가을 설악산 전람회능선을 갔을 때, 또 형제폭포 상단에서 대원들이 눈에 띄는 산행을 할 때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환상적인 경관을 마주 할 때마다 절벽에서 셔터를 누르느라 여념이 없던 선배님의 모습에서 속세를 벗어난 초연함과 달관의 경지를 보았습니다.
큰 카메라를 어깨에 메시고 미소 띈 얼굴로 한 컷 한 컷 카메라에 담아 주시던 일은 이제 누가 합니까. 포털에 '외할아버지가 쓰는 손주일기' 연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산행중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가 있었어도 연배가 훨씬 많은 선배님이 백발을 휘날리며 비탈길을 박차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산지기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하며 마음 든든하게 여겼던 것은 저뿐만아니라 모든 회원들이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수 년전 남설악에 갔을 때 연배가 한 참 어린 저에게 뙤약볕 아래에서 막걸리로 잔을 가득 채우고 권하시던 모습이 어제 같은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발딛고 있는 지구촌이라는 행성이 반대로 돌고 있지는 않는지, 서(西)에서 해가 뜨고 동(東)으로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죽박죽 엉망진창 헷갈리는 날들입니다.
가족들은 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오랜 세월, 그 수많은 산행길을 평소처럼 집을 나섰을텐데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다니 ... 얼마나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운명의 그날도 평소처럼 큰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해 주셨는데 불과 10여분 후에 이런 변고를 당하셨다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 일을 어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며 그것이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부당하고 뜬금없으며 어처구니없고 모순된 논리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에 그 '하늘'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하고 배격하고 싶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서 그런지, 시쳇말로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승길이 그토록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세상만사 절차와 순서, 단계와 소요 시간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동네 뒷산을 오르더라도 하산 후 산행을 마무리 하는 뒤풀이가 있으며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것들이 없다 해도 최소한 헤어지기 전에 작별인사라도 하지 않습니까.
전쟁에도 선전포고가 있고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장사치들의 세계에도 상도덕이 있는데 한평생 인생 여정을 마무리하는데 있어서 한마디 작별인사를 할 말미도, 그 어떤 시그널도 주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여행의 마침표를 찍게 하다니 어찌 이것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개망나니도 못 할 짓이라고 소리높여 욕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한평생 여정이 애들 장난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승사자가 오더라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절차과 규범, 예의범절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대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지금의 심정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모두가 가는 길. 갈 수 밖에 없는 정해진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못 가겠다고 떼를 쓰고 버티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고 매몰차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도 무심하고 삼라만상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가슴을 치게 했던 한대장님의 사고 이후 불과 한 달 열흘 남짓 밖에 안되었는데, 그 상처가 아물기는 커녕 마음을 추스릴 여유도 없이, 또 이렇게 선배님의 비보를 접하다니 그 상실감과 비통함, 충격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달 초에 예정된 한대장님 추모비 제막때는 선배님을 만나 뵐 수 있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 깨어진 유리 그릇이요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여느때처럼 선배님과 함께라면, 가장 멋진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주시던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가고 또 가고 몇 번이라고 다시 가고 싶은 명산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데 저승길 가는 것이 그렇게도 급했다 말입니까.
인생무상(人生無常)이요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갔다가 돌아 온 사람 본적 없는 외통수 길이기에, 한 번 떠나가신 선배님을 두 번 다시 뵐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또렷이 깨닫게 될 것이기에, 선배님이 생각날 때마다, 못 견디게 그리워 질 때마다 카페와 포털에 남아 있는 선배님의 흔적을 뒤적여 볼까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 후배들과 같이 걸었던 산행이 삶의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라는데 기꺼이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이제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더 아름답고 소중한 사진들을 많이 담을 수 있는 황홀한 산행이 계속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구엽초님의 수락산막걸리 선배님 글에 가슴이 미어지네요 생전에 산지기 산행시 종군기자처럼 멋진사진 남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신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무건 카메라 내려놓고 편하게 쉬시길 바래봅니다.
선배님께서 종군기자 같은 마음으로 산지기 사진들을 남기시고 떠나셨군요. 그러고보니 더 가슴이 아픕니다.
수려한 문장에 감탄합니다.
막걸리님에 대한 그리움이 구구절절 묻어 나옵니다.
그리울 때 마다 꺼내서 읽어 보고 싶은 글 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산님, 과분한 말씀에 부끄럽습니다. 과찬인 줄 잘 알지만 아무튼 고맙습니다.
형님
마음이
이곳 아프리카에서
제
마음 입니다.
공감하는 글에
감탄 합니다ᆢ🙏🙏🙏
지금
이 시간 수락산막걸리 전연천형님이
너무 보고싶습니다.
가을 설악을
끝까지 함께하시고
네팔 35일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너무 마음 아픈 시간 입니다ᆢ🙏🙏🙏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ᆢ🙏🙏🙏
설악봉정님,
별말씀을요. 공감해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몸은 멀리 떠나계셔도 애통한 마음은 같은 가 봅니다.
저역시 마음이 아프고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산지기의 정신적지주이자 큰형님이신 수락산막걸리님이 떠나신지 얼마되지 않지만 꽤 오래전 일인듯 허전하기 그지없습니다.
해맑은 웃음과 남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의 선배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인간사 모든게 도리대로 순서대로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을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잠시 여행을 떠날때도 서로 인사나누고 떠나는데 가족분들이 제일 허망하실꺼라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 힘 냅시다! 선배님도 그걸 바랄꺼라 믿습니다.
얼마전 눈덮인 설악에 가고싶다고 하셨는데.
폰토스님, 옳은 말씀이네요.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서 산행을 잘하는 것이 선배님이 바라는 것 중 하나일 것이라 저도 생각합니다.
구구절절 슬픔과 그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선배님의 유지대로 산사랑을 늦추지 않도록 다짐하며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