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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도_#1003(요 06:01-71)_240223
[단락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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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그 후에:
‘그 후에’로 번역된 ‘메타 타우타’를 정확히 번역하면 ‘이 일들 후에 (NASB, after these things)’가 된다.
이로 보건대 5장의 사건과 본장의 사건들 사이에는 1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 (눅7:11-17)등 위대한 기적도 있었고, 12제자를 파송하신 것(마 9:35-11:1 ;막 6:6-13 ;눅 9:1-6)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이 모든 일들의 기록을 생략한 것은 이미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져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던 공관복음을 염두에 두고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바다의 명칭을 밝히지 않았으나 요한은 그 명칭을 이중적으로 밝혔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팔레스틴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배를 타고 출발하신 곳은 가버나움이고 도착하신 곳,곧 바다 건너편은 뱃새다인데(눅 9:10) 이 곳은 베드로와 안드레,빌립의 고향이기도 하다.
‘건너편으로’라고 번역된 ‘페란’은 장소의 부사로서 ‘건너 편’혹은 ‘저 편(NASB, to the other side)’ 을 가리 킨다.
가버나움에서 뱃새다까지는 약 6.4km의 거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표적을 봄이러라:
‘큰 무리’라는 표현이 나타내듯이 예수를 따라온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수였다. 여자와 아이를 수에 치지 않더라도 오천이나 되는 대군중이었던 것이다(마 14:21) 그들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시고자 가버나움을 떠나시는 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따라갔다. 이러한 사실은 ‘따르니’로 번역된 ‘에콜루데이’가 ‘아콜루데오’의 미완료 과거 시제로 묘사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막 6:33에서는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란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수를 따라다녔는지를 잘 보여 준다.
‘보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데오룬’은 데오레오’의 미완료 과거 시제로 그들이 계속해서 보았거나 경험한 것을 지시한다. 이 동사는 감각적인 지각을 가리켜 쓰이지만 ‘알다’ 혹은 ‘경험하다’라는 의미로도 나타나며 (요 8:51; 17:24), 주의해서 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 27:55).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한 표현을 보아 예수께서 사람들 앞에서 계속하여 표적을 행하였고 또한 사람들은 이에 열광하였음을 알 수 있다.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오르사’로 번역된 ‘아넬멘’은 ‘아네르코마이'의 부정과거 시제 이며,산이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go up)’는 뜻으로 히브리어 ‘알라’와 비슷하다. 이는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산이 고지(高地)였음을 암시한다. 이 산을 갈릴리 바다 북서쪽의 팔복산이라고 하기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그러나 요한은 이 모든 내용을 생략하고 단지 ‘앉으시니(에카데토)’란 표현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 가운데 그 내용들이 함축되어 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라인에게 있어서 가르치는 자세가 바로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5:1 ;막 4:1 ;눅4:20). 즉 랍비들은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따라서 앉았다는 표현 가운데는 예수께서 가르침을 베푸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마침 ...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마침’으로 번역된 ‘데’는 헬라어 불변사들 가운데 ‘그리고’란 뜻을 지니는 ‘카이’와 더불어 제일 흔하게 쓰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이 단어는 ‘그러나(but)’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대조의 뜻이 없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건의 변천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NIV는 이 단어를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지만, NASB는 이러한 의미를 살려 now(이윽고,곧,그런데)’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가까운지라’로 번역된 ‘엔…앵귀스’는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나타낸다. (NASB, was at hand). ‘파스카’,즉 유월절에 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절기 가운데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절기가 유월절이다. 여기에 언급된 유월절은,본서에서는 2:13에 이어 두번째로 언급되는 것이나 5:1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도 유월절로 볼 수 있으므로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세번째로 맞으신 유월절로 보아야 한다. 그분이 사역하시는 동안 유일하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시지 않은 유월절이 이때였다.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눈을 들어…보시고:
내용 전달만을 위해서는 굳이 ‘눈을 들어’란 표현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단지 ‘보시고(데아사메노스)’란 단어만으로도 의미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실제 성경 가운데서 번 사용된 ‘눈을 들어’란 표현은 보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강조할 때 쓰였다 (마 17:8 ;눅 6:20; 16:23 ;18:13 ;요 4:35 ;6:5 ;17:1)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제자인 빌립에게 던진 이 질문에서 ‘어디서’로 번역된 포덴’은 ‘어디서’, ‘무엇으로부터’를 뜻하는 의문 부사이나 원인,이유 등을 나타내어 사용되면 ‘어떻게 (how)’혹은 ‘어떻게 하여 (in what way)’라는 의미를 가진다. 대부분의 역본들이 단어를 기본적인 의미인 ‘어디서 (where)’로 번역했으나 빌립의 대답을 고려할 때 ‘어떻게’로 고쳐 읽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시험코자 하심이라’로 번역된 ‘페이라존’의 원형 ‘페이라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첫째는 일반적인 뜻에서의 시험이고(고후 13:5), 둘째는 좋은 의미에서의 시험(히 11:17), 셋째는 ‘유혹하다 (tempt)’는 뜻을 지니는 나쁜 의미의 시험이고(갈 6:1), 넷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고전 10:9) 등이다. 여기에서는 두번째 용법에 해당한다. 즉 예수님은 빌립의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해 시험해 보셨던 것이다.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부족하리이다:
이 부분을 먼저 원문에 충실하게 고쳐서 읽으면 ‘그것들이 각 사람이 소량만취하게 하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충분치가 못합니다’가 된다.
‘조금씩’이란 말 ‘브라퀴’는 양에 대해서 ‘약간’,‘조금’이라는 뜻으로 ‘최소량’ (NASB, a little)을 가리킨다. NIV는 이것을 ‘한 (a bite)’이란 말로 번역하여 보다 더 실감나게 전해 주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각 사람이 한 입씩만 먹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먹이 충분하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부족하리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르쿠신’이 ‘충분하지 못하다’, ‘넉넉하지 못하다 (NASB, is no sufficient)’는 뜻이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백 데나리온으로 식사를 준비하면 대략 육천 명 정도가 먹을 수 있었다고 하니까 (Wycliffe) 성인 남자들의 수만 오천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설령 이 돈이 있다고 하더라
도 그 많은 음식을 구입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여기서 아이로 번역된 ‘파이다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단지 1회만 나오는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혼히 쓰이며 성경에 61회 나오는 유사어 ‘파이디온’을 쓰지 않고 요한이 이 단어를 쓴 것은 의도적이다. ‘파이디온’은 매우 어린 아이를 포함하여 사용되는(눅 2:21 ;요 16:21 ;히 11:23) 포괄적 용어인 반면,‘파이다리온’은 소년 (NIV,boy)’, ‘젊은이 (KJV, lad)'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본절에 등장하는 이 아이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10대 소년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 (아르투스 크리디누)’은 모든 빵 중에서도 가장 값싼 것으로서 천히 여기던 음식이었다. 그리고 물고기’로 번역된 옵사리아'의 원형 옵사리온’은 작은 물고기 (KJV,small fish)'를 의미한다. 이는 공관복음에서 일반적인 물고기를 나타내는 ‘익뒤스’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아마 이는 소금에 절인 정어리보다 작은 물고기로서 인근 갈릴리 바다에서 혼하게 잡히는 어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나 이것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되겠습니까’ 라고 말씀드렸다. 이 말 속에는 일면 준비된 음식이 너무 적다는 안드레의 절망감과 더불어 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머지는 그분에게 맡기는 신뢰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에게 신뢰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이를 예수께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여기서 ‘앉게’로 번역된 ‘아나페세인’의 원형 ‘아나핍토’는 눕거나 기대는 것,특히 식사하기 위해서 비스듬히 기대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원어로 볼 때 예수의 이 지시는 단순히 앉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식사를 시작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이면적 의미를 지닌다. 먹을 사람의 수는 엄청난 데 비해 준비된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로,봄이 되어 새로 돋아난 잔디 위에 앉아 식사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게 하도록 지시 하신 것이다.
요한이 취한 어휘인 ‘안드레스’는 ‘아네르’의 복수형이다. 헬라어 ‘아네르’는 여자의 반대인 남자(man),그것도 소년과 대립되는 어른(adult)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계수할 때에 수에 치는 대상이다. 반면에 ‘안드로푸스’의 원형 ‘안드로포스’는 인간 (human being)을 지칭하며 여기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 복수로 쓰일 때에는 성이나 나이의 관계없이 ‘사람들’, ‘무리’,‘백성’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투스 안드로푸스’는 광야의 식사에 참예한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고,‘호이 안드레스’는 유대인의 관례대로 계수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수에 든 오천 명 이외에도 광야에 었던 모든 사람이 이 식사에 참예했음을 알게 한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그분은 먼저 한 아이로부터 가지고 온 그 떡들을 손에 드셨다. ‘가져’로 번
역된 ‘엘라벤’은 ‘람바노’의 부정 과거 시제로 예수께서 거리낌없이 즉시 취하신 행동을 나타낸다.
여기서 ‘떡을’에 해당하는 ‘투스 아르투스’는 복수형으로서 안드레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를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손에 들고 나서 축사하셨다.
‘축사하신 후에’로 번역된 ‘유카리스테사스’는 ‘유카리스테오’의 부정 과거 분사로 기본적인 의미는 ‘감사한 마음을 가진 것’ 혹은 ‘감사를 돌린 것’이다.
이는 식사 전에 행하던 통상적인 감사 기도를 가리킨다. 그분이 어떤 내용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지만 유대인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되는 내용의 것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W. Barclay).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남은 조각을 거두고…없게 하라:
우선 원문에 충실하게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얼마라도 잃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남은 조각들을 너희가 모아들여라’이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말이 원어 성경에서 서두에 나오는 ‘너희가 모아들여라’로 번역해야 하는 ‘쉬
나가게테’이다. 주께서 이것을 거두게 하신 것은 종들을 위해서 잔치의 음식들 중 일부를 남겨 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비롯되었을 것라는 주장이 있으며 (W. Barclay),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하나라도 낭비치 말아야 한다는 교훈 또한 배제할 수 없다.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에 거두니…열두 바구니에 쳤더라:
먼저 원문대로 고쳐서 읽으면 ‘그래서 그들이 모아들였으며 열두 바구니들을 가득 채웠다’가 된다. 주의 말씀을 쫓아 제자들이 부스러기를 모았는데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였다. ‘찼더라’로 번역된 ‘에게미산’은 ‘게미조’의 부정 과거 시제이며 ‘채우다’,‘가득하게 하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이다. 배고픈 사람이 배를 채우는 것(눅 15:16) 이나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요 2:7) 등을 나타낼 때에도 이 동사가 쓰였다. ‘바구니에’란 말 ‘코피누스’는 ‘광주리’를 가리키는 ‘코피노스’의 목적격 복수로 ‘광주리들을’이 정확한 번역이다. 아마 이것은 제자들이 각기 하나씩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여행할 때에는 이것을 휴대하고 다녔다.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
이렇게 여기에서의 ‘선지자’가 ‘메시야’를 가리킴에도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어서 그들이 고백한 메시야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놀라운 이적을 통해 그분이 자신들의 원하는 것 즉 세속적 바램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분이라고 판단했으므로 대대적인 환영의 뜻을 표했던 것이다.
한편 ‘오실’로 번역된 ‘에르코메노스’는 ‘에르코마이’의 현재 분사로 ‘오시는 자’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 선지자(호 프로페테스)’를 수식하는 한정적 용어로 쓰인다. 또한 현재분사에는 현재 진행의 뜻이 드러나기 때문에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오실 그 선지자’라기보다는 ‘오시고 있는 그 선지자’로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오시는 자’의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분인 여호와와 관련하여 발견되는 히브리어 동사로는 ‘뽀’가 있는데(신 33:2 ;대상 16:33 ;합 3:3) 이 단어가 나타내는 ‘오는 것’에는 약속의 현재 성취라는 사상이 담겨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 선지자(신 18:15-18)를 미래의 막연한 어떤 때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 오시고 있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해하여 예수께 적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아시고 다시 흔자 산으로 떠나가시 니라:
‘아시고’로 번역된 ‘그누스’는 ‘기노스코’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이 동사의 특징은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나타낸다는 점인데 주의 눈에 비친 그들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혼자서’산으로 떠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이는 제자들을 버려두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둘러 그들을 먼저 배에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마 14:22 ;막 6:45) 자신은 산으로 가신 것을 말한다.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저물매:
이 부분을 직역하면 ‘곧 저녁이 왔을 때에 (NASB,now when evening came)’ 가 된다. 여기서 ‘옵시아’는 ‘늦은 (late)’이란 뜻의 형용사이나 대부분 본절에서 처럼 명사로 사용된다. 요한이 기술한 이 시간은 오후 중간의 이른 ‘저녁’ (마 14:15)이 아니라 황혼 때와 어둠이 내릴 그 사이 시간인 ‘둘째 저녁’, 즉 늦은 저녁이었다.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미 어두웠고…아직…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미 어두웠고’에 해당하는 ‘스코티아 에데 에게고네이’에서 ‘에게고네이’는 ‘기노마이’의 과거 완료 시제로 제자들이 바다로 나가는 동안 이미 어두워져서 지척을 분별하기가 어렵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미 캄캄하게 된 상태가 지속된 한밤중이었음이 ‘이미(에데’)란 부사와 더불어 매우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오신 시점이 밤 4경, 즉 새벽 3-6시 사이임을 밝히는 반면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캄캄하게 되었다는 이 묘사만을 한것은 상당히 암시적인 표현이다. ‘우포’는 시간에 관한 부사로 ‘아직 ~아니 (not yet)’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들이 지금 바다를 건너는 중이었고 주변은 캄캄한데 예수께서는 아직 오시지 않았음을 묘사함으로 그들의 불안한 상태를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파도가 일어나더라:
원문의 늬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그리고 그 잔잔하던 바다가 요동하고 있었다’이다. ‘파도’로 번역된 ‘달닷사’는 ‘바다 (NASB. sea )'나 호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일어나더라 고 번역된 디에게이레토’는 ‘디에게이로’의 미완료 시제 수동태로 잔잔하던 바다가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NASB. began to be stirred up).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께서…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우리는 ‘예수께서…오심을’부분에서 그들로 소스라쳐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 해야 한다. 모두가 현재 분사여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라파툰다’이고 또 하나는 ‘오심을’로 번역된 ‘기노메논’ 이다. ‘페라파툰다’는 ‘페리파테오’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 (walk around)’이다. 예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분이 걸어서 다니시는 곳이 인간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바다,곧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파도가 높게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 제자들 가운데 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 에서 ‘십여 리쯤’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호스 스타디우스 에이코시 펜태 에트리아콘타’는 직역하면 ‘이십오 혹은 삼십 스타디온쯤’이며 이를 오늘날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하였던 코스의 갈릴리 바다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원문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러므로 그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영접하기를 기뻐했다 (NASB,They were willing therefore to receive Him into the boat)’가 된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와 동사는 ‘델로’의 미완료 과거 시제 3인칭 복수인 ‘에텔론’ 이며 이 동사는 ‘바라다’ ,‘원하다’ ,‘기꺼이~하다’라는 뜻이다.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여기서 ‘바다 건너편’은 25절에 나오는 ‘바다 건너편(가버나움)’의 반대쪽으로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었던 뱃새다를 가리킨다. 본문은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음을 시사한다.
‘에파우리온’은 ‘내일’이란 뜻의 부사이며 ‘테’와 함께 쓰이면 ‘이튿날(NASB, the next day)’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얼마 동안 서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섰는 무리가’로 번역된 ‘호 오클로스 호 헤스테묘스’에서 ‘섰는’에 해당하는 ‘헤스테코스’가 완료형이란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이곳에 서 있던 무리와 5절의 ‘큰 무리 (a great multitude)’사이에는 수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 중에는 이미 집으로 돌아간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곳에서 밤을 지낸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
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가까이 왔더라:
UBS판 원문에는 괄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개역 성경이 괄호를 사용한 것은 후대에 삽입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원래 원문에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따라서 ‘다른 작은 배들이 디베랴로부터 가까이 왔다’가 본문의 정확한 번역이다.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루터(Luther)도 ‘알라 플로이아리아’를 ‘다른 배들 (andere schiffe)’로 정확히 번역하였다. Living Bible은 ‘알라 플로이아리아’를 ‘몇 척의 작은 배들(several small boats)’로 묘사했는데,‘플로 이아리아’가 모든 종류의 배 (ship)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리가 ‘보트’라고 부르는 작은 배나 소형 어선들을 가리키는데 주로 쓰였기 때문이다 (마 4:21).
6: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예수를 찾으러:
여기에서 ‘배들을’로 번역된 ‘타 플로이아리아’는 ‘작은 배들 (NASB,the small boats)’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급히 서두른 흔적이 역력하다. 그 분에게 거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찾으러’로 번역된 ‘제툰테스’가 그들의 이와 같은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집요하게 찾다’는 의미가 있는 ‘제테오’의 현재 분사이며 여기서는 ‘찾아 헤매다’ ,‘수색하다’ ,‘얻으려 하다’등 여러 의미들로 번역될 수 있다. 현재 분사가 쓰인 것은 그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찾기 시작한 것,
즉 수색을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만나’로 번역된 ‘카이 휴론테스’에서 ‘휴론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이므로 이를 보다 정확히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발견하였을 때 (NASB,and when they found)’이다.
그들이 가버나움 어느 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버나움은 세관 ·시장 ·회당 등을 갖춘 상당히 규모가 큰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59절에 나오는 표현으로 보아 당시 예수께서 회당에 계신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무리들은 예수를 ‘랍비’라고 정중하게 호칭하므로써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었다. 한편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에서 ‘어느 때에’로 번역된 ‘포테’는 시간에 대한 의문 부사로 ‘언제 (when)’라는 뜻이다.
그리고 ‘오셨나이까’고 번역된 ‘게고나스’는 기노마이 (ylvoμat) ’의 완료 시제로 ‘여기’를 뜻하는 부사 ‘호데’와 함께 쓰여 ‘당신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의미가 된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본 까닭이 아니요…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예수를 열심히 찾은 이유가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신성을 지니셨으며,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목격한 표적의 의미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먹고서 포만감을 느꼈던 떡들에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여기서 배부른으로 번역된 ‘에코르타스데테’는 ‘코르타조’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배부르게 되는 (NASB,were filled)’을 나타낸다. 이는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썩을 양식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이 부분을 원문에 충실하게 고치면 ‘왜냐하면 아버지 곧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인치셨기 때문이다’가 된다.
한편 ‘인치신 자니라’에 해당하는 ‘에스프라기센’은 ‘인치다’,‘봉인하다’를 의미하는 ‘스프라기조’의 부정 과거 시제이므로 ‘인치셨다’로 번역해야지 ‘인치신 자’라는 어휘는 적절치 못하다,70인역 (LXX)에서는 히브리어 ‘하탐’을 번역할 때 이 동사를 사용했는데 구약시대에 인장을 찍는 것,곧 인치는 것은 왕의 교서(에 3:2 ;단 17:18)라든지 토지 구매 문서 (렘 32:10), 책(사 29:11), 그밖의 문서들(느 10:1)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하였다. 신약에서도 이 동사는 비준하거나 확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이 문장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하여야’로 번역된 ‘포이오’은 ‘포이에오’의 현재 가정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 가정법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므로 ‘티 포이오멘’은 ‘우리가 매일 매순간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하오리이까’로 번역된 ‘에르가조메다’는 ‘일하다’,‘행하다’,‘성취하다’,‘실천하다’등을 의미하는 ‘에르가조마이’의 현재 가정법이며 동일하게 계속해서 행하거나 실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6: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러면…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이는 예수께서 이러한 이적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전능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단순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만을 주목함을 질책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하고 보다 분명한 하늘로서부터 오는 다른 표적들을 또 행하여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 번역된 ‘세메이온’은 히브리어 ‘오트’의 대응어이다. 헬라어 구약 성경인 70인역 (LXX)에서는 ‘오트’사용의 5분의 4정도를 ‘세메이온’으로 번역하였다. ‘세메이온’의 일반적인 의미는 눈으로 보고서 지각하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확증이다. 본절에서 제기되고 있는 두 가지 질문의 요지인 ‘행하시는 표적’과 ‘하시는 일’은 결국은 하나의 일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들은 만나를 하나님의 떡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인정받고자 하면 적어도 이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한 모세와 같거나 그 이상일 것을 요구 하고 있는 셈이다.
유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예수께 모세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이는 그분은 모세에 비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모르기 때문이었다(사 9:6 ;히 3:3-6).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하늘에서 내린 그 떡을 너희에게 준 것은 모세가 아니다’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부정어 ‘우’의 위치이다. 이것은 주어든,목적어든,동사든,문장의 어떤 요소든간에 그 부정하는 낱말의 앞에 오는 전접어 (Proclitic)이다. 본절에서 ‘우’는 모세를 부정하고 있다.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로 번역된 ‘호 카타바이논’에서 ‘카타바이논’은 ‘내려오다’는 뜻의 ‘카타바이노’의 현재 분사이므로 ‘내려온 (NIV,he who comes down)' 과 ‘내려온 (NASB,that which comes down)'둘 다를 의미할 수 있다. 문법적으로는 후자가 정확하지만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루터는 NASB와 같이 비인칭적 의미를 취했다 (das vom Himmel Kommt). ‘하나님의 떡’이 비인칭적 성격을 지닌다고 해도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므로 이 단어는 인칭적 의미를 살려 번역해도 무방하다.
한편 본절을 원문의 의미를 잘 살려 번역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의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세상에게 생명을 계속적으로 준다’가 된다.
본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32절의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의 의미를 보충한다. 그것은 만나를 가리키지 않고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지칭한 것인데 유대인들의 인식 능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6: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주여(퀴리에)’라는 호청은 25절의 ‘랍비여’대신에 사용된 존칭어이다. 이 용어를 통해 그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했다든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떡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히브리어 ‘아돈’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퀴리오스’도 종교적인 용법으로만 쓰이지 않고 일반적인 용법도 가지는데,이 경우에는 소유자 (owner)라든지(마 20:8), 남편(벧전 3 :6), 아버지(마 21:29), 관리(마 27:63),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 (12:21)등을 지칭할 때 쓰인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주’라 칭한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주소서’로 번역된 ‘도스’는 ‘디도미’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이 떡을 단번에 소유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간청이다. 굶주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에게 떡이 가지는 의미가 남다른 것은 당연하다.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게 오는 자는…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목마르지’에 해당되는 ‘답세세이’는 ‘답사오’의 미래 시제이며,이것은 육체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애타게 바라다’는 뜻으로도 쓰였다(마 5:6). 예수님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이 참된 만족을 얻게 됨을 알게 하는 말씀이다.
6: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한편,‘보다’는 의미로 번역된 ‘헤오라카테’는 ‘호라오’의 완료 시제이며 감각적인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는 (to see)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경험하였음에도 믿지 못하는 영적 마비 증세를 보이는 중증 환자들이었다. 이는 보지 못하고서도 믿는 순수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믿지 아니하는도다’에 해당하는 ‘우 피스튜에테’는 현재 시제로서,이는 그들이 계속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완고한 상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주시는 자는 다’에 해당하는 ‘판 호 디도신 모이’속에는 신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들어 있으며,‘판 호’라는 중성 단수의 집합적 용법이 쓰인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는 남녀의 차별이 전혀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올 것이요’라고 번역된 ‘헥세이’는 ‘헤코’의 미래 시제이며 인격적 존재가 오는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시간 혹은 사건과 같은 무인격자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종교적 술어로서 예배자가 신 앞에 나아오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게 오는 자’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들을 결코 거부하지 아니하신다.
‘내어쫓지’로 번역된 ‘에크발로’는 ‘에크발로’의 부정 과거 가정법으로서 ‘우 메’와 함께 미래의 사건을 결정적으로 부정한다. 이 동사의 기본의미는 ‘몰아내다’ ,‘쫓아내다’인데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 ‘엑소’와 함께 쓰여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자들을 그분이 조금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환영하실 것임을 부정적 의미의 말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강조하는 말씀이다.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이것이니라: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메 아폴레소 엑스 아우투’를 ‘나는 그중에 아무 것도 잃어서는 안된다’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이러한 십자가의 공로로 택하심을 입은 성도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된다. ‘마지막 날’이란 개념은 구약에 나타나는 ‘주의 날’ (사 13:6)에 그 뿌리를 두며 이 날은 주의 구원과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다시 살리는’에 해당하는 ‘아나 스테소’는 형태상으로는 가정법 부정 과거와 직설법 미래 시제 다 가능하나 문맥상 ‘아니스테미’의 미래 시제로 보는 것이 적합하므로,이는 미래에 반드시 오게 될 그날에 있게 될 필연적인 부활에 대한 예고를 나타낸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여기서 ‘보고’에 해당하는 ‘호 데오론’은 ‘보는 자’를 가리키는데,아무 의미 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요 12:45), ‘데오론’의 원형인 ‘데오레오’는 단순히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호라오‘와 달리,지각하거나 인식하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이 동사의 현재 분사인 ‘호 데오론’은 인간 예수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호기심으로 단순히 구경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정확히 인식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믿는 자’로 번역된 ‘피스튜온’은 ‘피스튜오’의 현재 분사로 동작의 계속 및 반복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하는 시제이다. 그것은 과거의 믿음이나 단절되는 믿음이 아니라 계속적인 신뢰와 끊임없는 순종의 삶을 말한다. 의식에 따라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 고백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생활이라는 언어로 예수께 대한 신뢰와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6: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는 이 부분을 직역하면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투덜거리기 시작하였다’가 된다.
‘수군거려’로 번역된 ‘에공귀존’은 ‘공귀조’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며 예수의 주장에 그들이 즉각 보인 반응의 성격을 나타낸다. 특히 ‘공귀조’는 비둘기의 구구거림이나 꿀벌의 붕붕거림과 같은 표현을 나타내는 데도 쓰였다. 이 단어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군중이 마치 비둘기가 구구거리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술렁이기 시작한 모습을 회화적으로 보여 준다.
6: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여기서 ‘아는데’로 번역된 ‘오이다멘’은 ‘오이다’의 1인칭 복수로 ‘알다’ ,‘사귀어 알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단어 속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다(stand in a close relation)’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오이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는 그분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가 된다 (살후 1:8 ;딛 1: 16). 따라서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그분의 부모를 알고 있는 것도 간접적으로 어떤 자료나 혹은 제보를 통해서 아는 것과는 달리 사귐을 통해 아는 것을 나타낸다.
6: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메공귀제테’는 현재 명령형 앞에 부정어 ‘메’를 붙임으로써 ‘불평하지 말라’,‘투덜거리지 말라’는 뜻으로 강력한 금지를 나타내는 단호한 명령이다. 이는 군중이 서로 토론할 뿐 아니라 예수께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음을 짐작게 한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본절에서 ‘아무라도…없으니’로 번역된 ‘우데이스’는 영어의 ‘no one,혹은 ‘nobody’에 해당하며 ‘아무도 ~없다’는 철저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는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예수께로 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한편 성부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구원 행동을 보여 주는 ‘이끌지’로 번역된 ‘헬퀴세 아우톤’은 정확히 번역하면 ‘그를 잡아끌지 (NASB,draws him)’이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아우톤’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번역하는 것이 문맥을 파악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3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란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이나 단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헬퀴세’는 ‘헬 퀴오’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잡아 끌다’,‘이끌다’이다. 이 단어 가운데는 ‘강요하다’는 뜻이 들어 있으므로 본문에서도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하나님께서 성자 되신 예수님에게로 끌어 당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 1:4; 렘 29:26).
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한편 ‘사람마다’로 번역된 ‘파스’는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 ‘누구든지 (whoever) ’,‘~하는 사람은 모두(every one who)라는 뜻이 된다.
본절의 ‘파스’에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자와 배운 자가 포함된다.
또한 ‘듣고’란 말 ‘아쿠사스’는 ‘아쿠오’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진행의 개념이 없이 단순한 발생의 의미만을 나타낸다.
따라서 ‘들었던 사람 (NASB, who has heard)’이 정확한 번역이다. 듣는 것은 음성이나 말씀과 관련되는데 예수께서는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못하다고 지적하신다. 들은 자들은 반드시 배워 습득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배운’으로 번역된 ‘마돈’은 ‘만다노’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이 동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배우다’, ‘알아내다’이며,이 외에도 경험이라든지 연습에 의해 습득하거나 아는 것을 나타낸다.
주석 학자 바클레이 (W. Barclay)의 지적처럼 청취에는 비판적 청취,분노의 청취,무관심의 청취,우월감을 가진 청취,들은 뒤에 습득하는 청취 등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청취에는 ‘듣고 습득하는 것’이 빠져 있었다. 그들이 예수에게로 오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다.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보았느니라:
본절은 성부 하나님께 듣고 배운다는 것이 하나님을 본다는 개념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본절에서 굳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45절에 나오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다는 표현이 본서가 쓰여질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으
로 유포된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주장하는 신지학 (神智學. theosophy)과 확실히 구분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저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그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신지학의 주장과는 구분됨을 명확히 하였다.
본문 서두에 나오는 ‘에이메’는 ‘만일 아니라면(if not)’ ,‘~이외에는 (except) ’이란 뜻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본다는 의미는 단순히 눈으로 목격한다는 의미 이상의 뜻을 지닌다. ‘보았느니라’로 번역된 ‘헤오라켄’은 ‘호라’의 완료 시제이며 ‘보다’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경험하다 (experience)’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보셨다는 주장은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의미,곧 경험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므로 이것은 감각적인 지각보다는 경험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에서 ‘피스튜옹’은 ‘피스튜오’의 현재 분사로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영생을 얻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고 하셨는데 이 ‘보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며 단지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죽었거니와’로 번역된 ‘아페다논’은 ‘아포드네스코’의 부정 과거 시제인데 자구적으로는 사람이나 동,식물의 자연적인 죽음을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 쓰여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롬 8:13 ;계 3:2).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페다논’이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제한할 이유는 없다.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특히 본절과 51절에는 ‘하늘로서 내려 오는 떡’을 먹어야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신학적 용어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의 주로 영접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인 먹는 것과 관련시켜 보다 실감나게 전달하는 것이다.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다투어’로 번역된 ‘에마콘토’는 ‘마코마이’의 미완료 시제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이 동사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실제적인 싸움을 가리켜서 쓰이기도 하지만 무기가 없이 싸우는 것,즉 ‘다투다’,‘논쟁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나 본절처럼 후자의 의미로 쓰일 때에는 격렬한 논쟁을 의미한다.
루터 (Luther)는 이 동사를 ‘zankten’으로 번역했는데,이는 말다툼 뿐 아니라 욕설을 한다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없느니라’로 번역된 ‘우크 에케테’는 현재 시제로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의 살을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 시대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살과 피에 대하여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먼저 ‘살과 피’는 히브리적인 어법에 따르면 ‘전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 혹은 합일을 의미하며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자체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참된 양식이요…참된 음료로다:
본절에서 거듭 사용된 ‘참된’으로 번역된 ‘알레데스’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형용사는 ‘숨김 없는’, ‘나타난’,‘실제의’라는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진정한 (true)’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알레데스’는 변치 않으며 확실한 근거가 있음을 전제한다(벤전 5:12). 또한 ‘알레데스’는 실제적인 것을 나타낸다(행 12:9). 숨김이나 거짓이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알레데스’로 나타내지 못한다.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한글 개역 성경에 ‘거하고’로 번역된 ‘메네이’는 ‘메노’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머물러 있다’ ,‘거주하다’는 뜻인데 현재 시제이므로 동작의 계속을 나타낸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분 안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이다.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도 원문의 의미는 반영하고 있으나 보다 원문에 더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찬가지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가 된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접속사라든지 전치사 등의 번역을 소홀히 한 경우가 허다한데 문맥의 전후 관계라든지 강조점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것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살려서 번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먹는’으로 번역된 ‘호 트로곤’에서 ‘트로곤’은 ‘트로고’의 현재 분사이다. 이 단어는 ‘먹다’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에스디오’, 마 6:25 ; 막 1:6 ;눅 5:33 ;요 6:5)를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요한은 ‘트로고’를 선호했는데, 본절에서는 성례전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만나와 관련해서는 ‘하늘에서 내린 떡’(32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바 있다. 32절에서 ‘하늘에서 내린’으로 번역된 ‘에크 투 우라누’는 ‘하늘로 부터 (from heaven)’ ,‘하늘에서 밖으로 (out of heaven)’라는 뜻으로 만나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게 한다. 참된 만나이신 예수께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32절과 달리 ‘내려온’으로 번역된 떡을 수식하는 분사 ‘카타바스’가 추가되었다. ‘카타바스’는 ‘카타바이노’의 부정 과거 분사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 이 동사는 물건이나(행 10:11) 새 예루살렘(계 21 :2), 성령(막 1:10) 등이 내려오는 것을 가리켜 쓰이기도 하나 대다수의 용례들은 인격적인 존재와 관련하여 쓰였다. 본절에서도 예수께서는 비인격적 물질인 만나와 달리 자신이 인격체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한편 Living Bible은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호 아르토스’를 다른 역본들처럼 ‘the Bread'라 하지 않고 ‘참된 떡’을 나타내는 ‘the true Bread'로 번역하였다.
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하셨느니라’는 ‘타우타 에이펜’을 번역한 것인데 ‘이 일들을 예수께서..말씀하셨다 (NASB, These things He said)’가 보다 정확한 번역이다. ‘타우타’는 지시대명사 ‘후토스’,의 중성 목적격 복수이므로 ‘이것(Nl v,this)’이 아니라 ‘이 일들’이다. Living Bible은 이것을 ‘이 설교 (this sermon)’로 번역하였다. 독자들 중에는 여기에서 ‘타우타’가 목적격인데 문장의 맨 앞에 온 것에 대해 이상히 여기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가장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일반적으로 문장의 맨 앞에 두므로 본절에서도 요한은 독자들의 관심을 생명의 떡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한편 본절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일차적 반응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 ‘어렵다’는 의미로 번역된 ‘스클레로스’는 ‘마르게 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스켈로’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기본적인 의미는 ‘굳은 (hard)',‘거칠은 (rough)’등인데 통상적 의미로 사용될 때에 ‘어렵다’는 의미를 지닌다,Living Bible은 이것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very hard to understand)’으로 번역하였다.
이 ‘제자들의 무리’에 열두 사도가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도 들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한편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는 번역에서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그것을’로 번역될 수 있는 ‘아우투’를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으나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들을’에 해당하는 ‘아쿠에인'으 원형 ‘아쿠오’는 목적어로 소유격을 취하기도 하고 목적격을 취할수도 있으므로 본문에서 ‘아우투’가 소유격이라 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아우투’는 인칭대명사 ‘아우토스’의 소유격이며 여기서는 예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에서 ‘아쿠오’는 경청하다(NASB,listen to)’는 의미보다는 받아들이다(NIV,accept)’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절하다.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원문은 ‘이것이 너희를 노하게 하느냐?’ 혹은 ‘이것이 너희를 넘어지게 하느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NASB(to stumble)를 제외한 대개의 주요 영역본들이 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NIV,offend), ‘걸림이 되느냐’로 번역된 ‘스칸달리제이’는 ‘스칸달리조’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로 ‘걸리게 하다’,‘넘어지게 하다’,‘죄를 짓게 하다’는 의미 뿐 아니라 ‘~을 성나게 하다’,‘노하게 하다’,‘분개시키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일부 제자들을 포함한 군중이 성나서 거칠게 불평을 터뜨리며 항의하고 있었음을 ‘스칸달리제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6: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전 있던 곳으로:
따라서 이 부분을 원문의 늬앙스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그(예수)가 이전에 계속해서 있던 곳으로’가 된다. 그곳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께서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시던 ‘하늘(Living Bible, heaven)’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은 십자가 고난 이후에 부활하여 승천하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실제로 이 예언은 부활과 승천이라는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기상천외한 사건을 통해 사실로 나타났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은 무익하니라:
‘육’,즉 ‘사록스’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다. 육신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였다. 그것은 언제든지 죄에게 굴복하므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사룩스’는 영적 측면에 있어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한편 ‘오펠레이’는 ‘오펠레오’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기본적으로는 ‘돕다’,‘유익을 주다’,‘소용이 되다’는 뜻이며 본절에서 처럼 사물에 대해서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 (it is of value)’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록스’의 무익함을 우리는 이와 같이 죄된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인생이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주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이’로 번역된 ‘레마타’는 ‘레마’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예언들’, ‘명령들’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즉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을 의미함을 유념해야 하겠다.
‘내가 이른’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는 ‘랄레오’의 완료 시제로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예수의 말씀이 바로 영이요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리킨다. 그분이 설교하신 내용들을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는데,이 불신의 무리에는 가롯 유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도들의 수에 들어 있기는 했어도 처음부터 믿지 아니하는 자였으며 예수께서는 이미 이것을 알고 계셨다.
6: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37절과 44절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召命.calling)이 절대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오게 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데도메논’은 ‘디도미’의 현재 완료 분사로서 완료된 동작의 현재적 결과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특히 완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허락하신 그 결과로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믿음의 동인이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임을 알게 하는 말씀이다 (엡 1:4,5),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에크 투투’는 제자들 중에 다수가 예수를 떠나게 된 이유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말씀을 하신 결과로 (NASB,as a result of this)’라는 번역이 참고할 만하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투투’가 지시하는 것은 22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의 설교와 무리 가운데서 일어난 논쟁 및 그들이 예수께 행한 거친 항의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제자 중에’란 말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의 제자들 중에 (NASB,of His disciples)’이다. ‘마데톤’은 ‘마데테스’의 소유격 복수인데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도(pupil),견습생 (apprentice)을 가리키기도 하지만(마 10:24.25), 성경에서의 대개의 용례들은 요한의 제자(마 9:14), 모세의 제자(요 9:28), 바리새인의 제자(마 22:16) 특히 예수의 제자(마 10:1 ; 눅 6:17)를 가리키는 전문적인 의미로 쓰였다. 예수의 제자를 가리키는 경우도 그 대상이 셋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열두 제자 곧 사도들을 지칭하는 경우이고(눅 8:9), 둘째는 예수의 일반적인 제자(눅 19:37), 셋째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도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행 9:1,10). 여기에 언급된 제자들은 두번째 경우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허다 한 무리’로 일컬어질 만큼 그 수가 많았으며 단순히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도 얻고자 찾아오는 백성들과 구별되었다(눅 6:17). 즉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던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중에서 상당수가 예수를 버리고 떠나게 된 것이다.
‘물러가고’로 번역된 ‘아펠돈 에이스 타 오피소’는 ‘그 뒤로 물러갔다’ 혹은 ‘버리고 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한 변절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세속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떠났을 것이다.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가려느냐:
‘가다’는 의미로 번역된 ‘휘파게인’ 은 휘파고’의 현재 부정사이며 기본적으로 ‘가 버리다 (NASB, to go away)’ ,‘물러가다 (withthrow)’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NIV, to leave). ’메’의 사용으로 보아 주의 이 질문은 부정적 답을 기대하는 질문처럼 보이지만,실제는 ‘너희 까지 가버리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그렇지? (NASB,You do not want to go away also. do you?)’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이는 가롯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신뢰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이 자기를 떠나지 않을 줄 믿고 이 질문을 하신 것이었다.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보다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답변한 것으로 보는 게 좋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언제든지 제자들의 대표자 역할을 자임한 것으로 복음서에 그려져 있다. 우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갈 수 있으리이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가 된다. 즉 원문으로 볼 때 전반부는 반의적인 질문으로써 스승이신 예수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후반부는 그 이유를 밝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한편 ‘마귀’로 번역된 ‘디아볼로스’는 추상 명사로서 불만이나 비방을 지칭하는 것이 주된 용법이므로 일반명사로 쓰일 때에는 ‘비방자’나 ‘고자질쟁이’를 가리킨다. 이는 히브리어 ‘사단’과 동의어로 신약에 나타나며 ‘사타나스’로도 쓰인다. 요한의 문헌에서는 이 두 명칭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반면,
바울은 ‘디아볼로스’보다는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였다.
우리는 이 두 용어가 서로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특히 ‘디아볼로스’는 ‘마귀’를 가리킬 때 언제든지 단수로 나타난다는 점 (딤전 3:6 ; 벧전 5:8)도 이 용어가 귀신의 왕 사단과 동의어임을 알게 한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귀신’을 뜻하는 ‘다이모니온’이 단수와 복수로 번갈아 쓰이는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다이모니온’은 ‘귀신’,‘악령’등을 뜻하는 말로 사단,혹은 마귀의 졸개들을 지칭한다. 루터 (Luther)는 ‘디아볼로스’를 ‘악마’로 번역하였다. 유다는 겉모양은 그리스도의 사도였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저는...예수를 팔 자러라:
당시 가롯 유다의 상태를 본서 저자 요한이 해설자의 입장에서 피력한 것이다. 그때 당시에는 요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먼저 원문의 늬앙스를 살려서 본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면 ‘왜냐하면 바로 그 사람은 예수를 넘겨주기로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가 된다.
‘이 일’이란 예수를 그 대적들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팔다’는 의미로 번역된 ‘파라디도나이’는 넘겨주다’는 뜻의 동사인 ‘파라디도미’의 현재 부정사로서 유다가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던 일의 내용을 나타낸다.
한편 요한이 예수를 팔 자의 명세를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로 상세하게 풀어서 말하는 것은 당시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았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상세한 표현을 통하여 그를 보다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배신한 그의 행동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가롯’이란 단어를 당시 칼을 품고 다니는 자객을 가리키는 ‘시카리오스’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자들도 있으나 유다의 출신 지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마 유다 지역의 ‘그리욧’ (렘 48:24)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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