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공채 시인을 그리워함
나는 정공채(鄭孔采) 시인을 만나서 많은 담론을 가진 바는 없었다. 문협 쪽에 어떤 볼일이 있어서 방문했을 때 몇 번 만나서 문학과 문단 이야기를 이유식 평론가와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한승욱 『서울문학』발행인과 미모의 편집장 최실장과 함께 인사동 <순풍에 돛을 달고>라는 주점에서 가끔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사회 현실과 인생에 관한 훈시를 엄숙하게 경청해야 했다. 또한 피맛골 ‘소문난 집’에서도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술꾼이라고 자처하는 문사들이 모여 담소를 하거나 기고만장한 열변을 토하는 토론의 장이 되어 한승욱, 이창년, 이수화 시인과 박춘근 수필가, 오인문 소설가, 신동한 평론가 등의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항상 그를 대하면 작품「美 八軍의 車」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것은 그가 1963년 12월호『현대문학』에 장시「美 八軍의 車」를 발표하여 우리 문단뿐만 아니라, 세간에 비상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1,500행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도 당시의 상황으로는 주목의 대상이었지만,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그 내용이 반미주의 혹은 반정부주의라는 정치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신원조사를 당하고 결국 중앙정보부에 출두해서 곤욕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百年의 列車를 타야 할 / 그 女子는 / 그 사람이 運轉하는 / 美 八軍의 車를 탔다 // 바퀴는 나의 맨발이 못따르는 / 揮發油를 타고 / 바퀴는 / 굴러갔다. // 버드나무에 말을 / 맨 駐屯 / 資本이 / 땅 위에서 黃昏 때의 꽃밭같이 / 꽃으로 피었다 / 公主들은 / 主로 그 꽃만 좋아했다. // 그리고 / 달리는 바퀴 위의 美 八軍의 / 車 안은 / 이러한 꽃으로 가득차 / 資本은 빛나도록 달리고 있다.
이처럼「美 八軍의 車 <24>」는 우리와 백년가약을 맺어야 할 처녀들이 양공주가 되어 한반도를 석권한 미군과 자본 등에 변태적 유혹으로 우리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환유(換喩)로 처리했으나 당국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조지훈, 조연현, 김현승, 김용호 등 당시 시인과 평론가들이 반미성이 아니라,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시라는 평가로 감옥행은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는데도 자유롭지 못한 한생을 보내야 했다. 인사동에서 혹은 피맛골에서 호탕한 웃음과 때로는 후배들에게 작품과 인품을 질책하면서 호음(豪飮)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1934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58년『현대문학』에 작품「종(鐘)이 운다」,「여진(女眞)」등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시단’, ‘현실’, ‘목마시대’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해점(海店』,『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와 수필집『지금 청춘』,『비에 젖습니다』등을 상재하여 현대문학상과 시문학상 그리고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그가 일산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창년 형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병명은 무슨 암이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모님의 전언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알아보고 쾌차를 빈다고 큰소리로 말하면 알아들었는지 큰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세상 떠나면서 운다 / 그 때 태어날 때와 지금 운다 / 눈물 소리 못 내고 한두 방울 / 이 빗방울에 말도 없이 고별사를 안긴다 / 잘 있거라 내 사랑아
이 작품은 『월간문학』2008년 3월호에 수록된 정공채 시인의 시 「고별사(告別辭)」전문인데 그는 이미 이 ‘세상 떠’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러한 순박한 서정적 언어를 조용하게 띄우고 있었다.
그는 2008년 4월 30일 오랜 투병으로 한생을 마감했다. 병원 영안실에는 신세훈 시인 등이 모여 문상을 하고 그의 업적과 평소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례절차와 장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장지는 고향인 하동으로 하고 장례는 현대시인협회장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주농림고등학교 임학과 재학 때「눈내리는 밤에」라는 작품으로 학원문학상(1950년대부터 문학 지망생들은 학원문단에 매료된 적이 있음) 최우수상을 받아서 문학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적이 있고 연세대학교 재학중에는 본격적으로 시재(詩才)를 보여「귀거래」로 제1회 연세문학상도 수상하였다.
다시 그는 대학신문 ‘연세춘추’의 문화부장과 연세문우회 회장 등으로 학내에서 일약 문학 스타로 드날리면서 시작활동을 전개하다가 1957년 11월부터 박두진 시인(추천사에서 ‘정공채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이라고 찬사를 받았음)에게 『현대문학』에 3회 추천을 받아 화려하게 문단에 나왔다.
그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美 八軍의 車」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어느 글에서 대답하고 있었다.
시의 헌팅에 있어서의 나의 경우의 일례를 본인의「美 八軍의 車」에서 들어본다. 이 시는 백 오십매에 걸친 시다. 실로 이 작품 하나를 두고 나는 약 4-5년간의 詩作 헌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한 2년간은 족히 내 서럽 속에서 잠재웠다. 이윽고 63년『현대문학」에 게재하였다. 이 작품의 ‘타이틀 . 네이밍’이 가리키듯 전후의 기지촌이며 전후의 풍물을 위해 나는 역시 이 전후 속에 즐겨 잠겨 있어야 했다.
이처럼 그는 정치적 발언에 관한 충동이나 작의적으로 어떤 목적에 접근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과 오직 시의 미학에 충실하고 싶어서 시인의 체험을 육화하는데 비중을 두었다고 당시 부산수산대 교수였던 강남주 교수는 그의 견해를 평론집『反應의 詩論』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사건 이후 번듯한 직장 하나 잡지 못했다고 했다. 그를 반미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정치적 메시지나 표현하는 시인으로 매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시집『海店』 서문에 보면 시인의 정감적 언어의 절규가 몸에 배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나는 겸허를 다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나와 모국어의 시를 있게 한 지엄지애(至嚴至愛)하신 하늘과 사랑하는 내 나라 韓國에--
그는 이제 그토록 좋아하는 술 한 잔 함께 마실 수가 없다. 그의 통쾌한 화법이나 올곧은 선비풍의 어조는 우리 후학들이 동시에 어떤 마력을 느끼는 신사였음을 잊지 못한다. 그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후에 돌아간 고향 경남 하동에서 그를 환대해서 묘지 조성과 시비를 건립해서 고향 시인을 기린다는 낭보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맘놓고 사회이야기 정치 풍자를 포함해서 시의 묘미를 발휘할 수 있겠다. 명복을 빈다.(20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