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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죄를 사하는 권세
1-17절, 중풍병자를 고치심, 죄인들과 잡수심, 금식에 관한 질문
[1-3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있었다고 증거한다(막 2:1). 마가복음에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네 명이었고, 또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께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의심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고, 끈질긴 열심을 가진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말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4-6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다 아신다. 그는 신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로 예언하였었다. 그러나 성경을 필사하고 연구하던 자들인 서기관들의 생각은 악하고 무지하고 완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쉬운 말은 아니지만,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보다 영혼의 죄를 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쉬운 말 대신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그것은 중풍병뿐 아니라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중풍병은 죄와 관련이 있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신명기 28장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등으로 치실 것이라고 말했다(22, 27-28절). 죄가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므로 죄사함은 그 병의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가 사람의 근본문제이므로 죄사함은 사람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실상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단지 병의 치료나 경제적 안정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 문제에 관한 것이다. 죄인의 구원과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죄사함은 그의 중심적 사역이다.
그는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죄사함만 주지 않으시고 죄의 결과로 온 육신의 병도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과 물질적 부족도 동정하신다. 그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들인지!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9-1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관에 앉아 있던 그에게 주께서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했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다고 비난하였다.
[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16)(눅 5:32) 왔노라 하시니라.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돌이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 일을 위해서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은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면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격리된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려면 죄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죄인들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대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이라도 구원하려고 힘써야 한다.
[14-15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그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때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6-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께서는 금식을 폐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율법 규정이나 관습대로 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비유된 복음은 율법 형식에 얽매일 수 없고 새 형식을 필요로 했다. 금식도 복음의 자유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하였다(갈 5:1). 야고보는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했다(약 1:25).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죄는 세상과 인류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었고 그러므로 죄사함은 세상과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류는 불행과 사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13:38-39,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미 믿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신약 성도는 복음의 자유와 참된 평안과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하고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의와 선만 행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죄의 공포와 형벌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갈 5:1).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했다(약 1:25).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 은혜 안에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멍에 아래서가 아니고 의와 자유 안에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18-38절, 소녀를 살리심, 혈루증, 소경, 벙어리를 고치심
[18-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회당장 야이로이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열두 살 난 외동딸이었다. 본문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라고 말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에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는 그 딸이 아파서 죽어가려고 할 때이었고 예수께서 고쳐주려 가시다가 다시 집에서 통지가 오기를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내용을 마태는 간략히 증거하였다. 이 직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다. 자기 딸이 죽으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그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다. 믿는 자는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20-21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출혈병이다. 이 병을 열두 해나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지! 마가복음에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되어 있다(막 5:26).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22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여기에 ‘구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치를 보인다(행 16:31).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23-26절]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잔다’는 말씀은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고 부활의 때에 깨어날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27-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 속에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시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많은 건강한 자들이 교만하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았을 때, 이 소경들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이 있었고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고 간청하였다. 주님께 구하는 자가 무엇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9-3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종종 병자들을 만지시면서 고쳐주셨다(눅 4:40). 그것은 병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긍휼과 사랑을 나타낸다. 그는 또 그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이 있다. 참으로 그는, 문제가 많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신 것은 사람들이 단지 그를 병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2-34절]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그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겠는가? 그러나 그는 주 예수께 와서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려 말을 하였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특별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모든 종류의 병들을, 즉각적으로, 또 완전하게 치료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바로 아는 지식을 주셨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앞에서는 못 고칠 병이 없었다. 나병도, 중풍병도, 열병도, 소경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다 고침을 받았다. 귀신 들린 것도 고침 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어려운 문제들을 낱낱이 그에게 아뢰어야 한다.
[35-3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사도 마태는 4:23에 이어 본문에서 다시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했다. 첫째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셋째는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함을 보시고 동정하시며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영혼 구원의 전도는 추수와 같다(요 4:35). 주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많은 것 같으나, 열심 있는 성도들과 헌신한 전도자들은 많지 않고(빌 2:21-22) 바른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일꾼들은 더욱 더 적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추수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는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일으키시고 세우신다.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또 전도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려주셨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고 두 소경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고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런 기적의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다.
둘째로, 사람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본문은 혈루병 여인이나 두 소경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구원의 이치를 보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즉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속죄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강해와 전도와 심방의 일을 힘써야 한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일들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병약한 자들을 심방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목사들은 성경에 정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병약한 자들을 심방해야 한다. 교인들도 그 일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참하고 협력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 구원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가감 없이 전하고 가르칠 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일이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 헌신자들을 후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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