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타인을 참으로 만났을 때 ‘진정한 나’가 된다”
박성준 길담서원 대표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마뉘엘 레비나스 지음
그가 문제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 관계’다. 이 독특한 사상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사람이 되는가? 인간성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만나며 타자와 관계 맺게 되는가? 이런 윤리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며 우리 가까이 다가온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죽음은 타자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것이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나의 가능성, 능력, 능동성을 저 멀리 넘어선 그 무엇이다. 이 점에서 죽음은 타자와 같은 존재다. 죽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타자인 그 무엇과 만나는 것이다. 신(신앙)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시 숙고하려는 사람, 그걸 하지 않고서는 일상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레비나스를 읽고 레비나스의 생각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현대인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면 무엇일까? 그의 1946~1947년 강연집 ‘시간과 타자’의 첫 문장, “이 강연의 목적은, 시간은 고립한 단독의 주체에 관한 사실이 아니고, 시간은 실로 주체와 타자의 관계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로부터도 유추되는 바, “사람은 나 아닌 타인을 참으로 만났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나(=주체)가 된다”쯤이 아닐지. ‘시간과 타자’의 첫 부분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Miteinandersein(상호공동존재, 서로 더불어 함께 있음)을 비판한다. 전치사 mit(함께, 더불어)로 표현되는 관계는 ‘어깨를 나란히’(cote a cote) 하는 관계일 뿐,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face a face) 관계야말로 인간과 인간의 본원적(本源的) 관계라고 말한다.
평행선 기유빅
우린 간다, 공간은 넓다,/어깨를 나란히 하고서/때론 말을 나누고 싶어진다.//그러나 서로 이야기 할 것을/상대는 이미 알고 있지,//지워지고 잊혀진/출발점부터/우린 같은 운명이니까.//꿈속에서나 서로 만나고/사랑하고 서로를 채워주지./한데 우리는 더 멀리 가지 못하리/마주보는 상대 보다는.
욕망이란 관계의 산물이다. 닫힌 공간에선 사랑조차 닫혀 버린다. 거꾸로 사랑이 닫히면 삶을 바꾸는 혁명적 파토스 또한 침묵, 봉쇄된다.
인생은 몸으로 깨우치는 거 아니야? 동서 고금의 지성인들이 다 그렇게 말했잖아.
사랑 최진석
이 세계의 바깥에는 어떠한 합리성도, 이념도, 권력도, 도덕적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여기에만 존재하며, 인간이 그것을 구성한다. 우리는 매일의 우연적인 만남을 통해 모든 것을 구성하며, 따라서 우리의 삶은 구성의 능력에 다름 아니다. 그런 능력의 공동체에서 우리가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초경험적이거나 신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용의 관계이고, 지식의 공동 구성이며, 열려짐이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인터뷰’〉
삶의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를 의존적이게 한다. 우리가 미신과 세상살이의 관습에 의지하는 이유는 삶의 확고한 지주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 열망의 배후에는 우리의 나약함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이 진정 믿음과 확신, 긍정의 힘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긍정해야 한다.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하며,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
차이로서의 생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주류 학문이 추구해 온 것은 동일자였다. 고대의 철학자, 중세의 신학자, 근대의 과학자들은 모두 현실 세계가 변화무쌍한 다양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며 현실 세계 외부에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어 이것이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시대와 사상가에 따라 이데아, 보편자, 제1원인, 로고스 등으로 불렸지만 사실 동일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변수를, 존재(-임)being가 아니라 생성(-됨)becoming을 사유하려고 하며 변화의 원인이 사물 자체에 있다는 내재성을 취한다. 당신이 인생에서 발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 문제성 있는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당신의 삶이 삶의 형태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꿔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 형태에 들어맞게 되면, 그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라진다. 올바로 사는 사람은 문제를 비애로, 그러니까 문제로 느끼지를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느낀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불행이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행복은 그 반대다. 행복은 베란다에 있는 작고 예쁜 꽃이다. 또는 한 쌍의 카나리아다. 눈앞에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무라카미 류,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