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공 휘:종소의 차남이신 諱 이교(以僑) 號는 만취당 或 교리공 이라고도 합니다.
이 집안 선조께서 어떤 사유로 김천 봉계로 이거 하시어 터 를 잡았는지에 대하여 아시는 분의 견해를 듣고자 합니다. 많은 의견을 기다립니다.
*교리공 집안 묘지
*선조님에 대한 자료로서는 그 분의 묘갈문을 살펴 보면 어느정도는 짐작 할수가 있읍니다.
그런데 그 분의 어린시절과 성장하신 부분에 대 하여서는 문헌에 기록된 것은 무척 드문 일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주목사 휘: 호인 께서의 어린 시절에 장난끼와 손선생님 몰래 문 밖에 나가서 놀이 하시던 것 들은,)모당 손선생님께서 서신으로 호수공 고모부에게 전한 편지와 호수공께서 답신한 내용에 보면 목사공과 어봉공,명계공,삼휴공,에 대한 그림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교리공 집안이 왜 봉계마을에 정착 했는지에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던중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에 의문점을 타파하기 위해 문중 여러분의 견해를 살피고자 하오니 많은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첫댓글 교리공 휘 이교의 아버지 사성공 종소 선조는 대전 이보흠의 생질로 대전선생이 순흥부사로 재직시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대전선생께 전달하는 과정이 탄로가 나자 신변이 위태로워 김천의 최한백 절제사 집에 피신하면서 절제사의 딸과 사성공의 아들인 교리공 휘 이교가 결혼을 하여 처가곳인 봉계마을로 이거하면서 봉계입향조가 되신겁니다.
또한 포은선생의 학맥을 이은 점필제 김종직(1431-1492)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은 조의제문을 트집잡아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목을 자르고 그와 관련된 많은 제자 등이 처형당하는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점필제와 교분이 깊은 우리 문중에도 화가 미칠것으로 예견되어 대전동에 있던 우리 문중의 백파 사고공은 사천으로, 중파 화은공은 능계로, 선무랑공은 자양으로, 교리공은 김천 봉계로, 지평공은 선산으로, 판관공은 화산으로, 좌랑공은 도천으로, 훈도공은 녹전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2가지 설이 모두 단종복위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만취당께서 재취한 사유이며 두번째는 우리문헌에 실려있는 모든 선조의 이주하신 사유입니다.그런데 저는 다르게 보고 있으나 올리기가 쉽지않아 부담이 크다보니 미뤄지내요,그리고 우리카페에 만취당후손은 없나요,있으시면 의견을 듣고싶어요? 만취당(교리공)후손은 김천으로 이거하고는 옛날부터 문중행사등에
참여를 잘하지 않았읍니다.그래서 만취당 전취 안동권씨 산소도 실묘 했지요. 내가 알기론 (신유보)발문을 육군참모총장 승화님도 당시 발문을 부인께서 발문을 가지고 대전동 양계정사에 심부름을 왔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