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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6월에 마카오에 도착한 세 소년, 마카오에 있는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 조선신학교에 머물며 서양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당시 경리부 직원들은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이었다. 경리부 부장 리봐(Libois) 신부, 르그레좌(Legregois)신부, 메스트로(Maistre) 신부, 칼레리(Callery) 신부, 드룰레스(Desflecches) 신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세 소년은 칼레리 신부, 드플레스 신부 지도하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생은 최 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년이었다. 그러나 최 방제 소년은 열병에 걸려 1838년 12월 20일 현지에서 죽는다. 최 양업과 김 대건만 남아 학업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아편전쟁의 여파로 민란이 일어나 두 신학생은 두 스승 신부와 함께 필리핀 마닐라 피신하여 도미니크 회 별장에서 6개월 지내면서 라틴어 과정을 이수한 후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다. 1840년부터 앞으로 조선에 입국할 베르뇌(Berneus. 장경일(張敬一) 신부,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 지도하에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즈음 아편전쟁 결과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남경조약(南京條約) 맺어진다. 프랑스는 이 기회에 군함 두척을 보내 이권을 얻어내고 조선과 화친조약을 맺으려 한다. 프랑스 해군제독 세실(Ce ile)은 군함 에리코(Erigone)호와 피보리트 (Favorite)호를 거느리고 1841년 9월 7일 마카오에 정박 후 경리부장 리봐 신부에게 조선의 두 신학생을 통역과 길 안내자로 데려갈 것을 교섭해 온다.
이에 따라 김대건 신학생은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함께 1842년 2월 15일에 먼저 에리코느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난다. 그리고 마닐라, 대만을 거쳐 7월 초에 상해에 도착 8월 29일 남경조약이 맺어지는 장소에 참석하고 최 양업 신학생도 브루니에르(Bruniere)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를 타고 4월 25일 마카오를 떠나 8월 23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남경 조약은 끝나고 있었다. 프랑스 군함대는 두 신학생을 내려놓고 남방으로 향하였다. 두 신학생은 두 달 동안 상해에서 머물다가 그 당시 10월 11일 목선을 타고 떠나 10월 25일 만주 요동지방의 대장하(大莊河)에 상륙하여 요동 전교회장 도(都) 요셉의 안내를 받아 요동 서남 끝에 있는 교우마을 백가점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최 양업과 브루니에르 신부는 개평을 거쳐 조선교구의 제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Perreol. 高) 주교가 머물고 있던 내몽고 소 팔 가자로 가게 된다, 김 대건과 메스트로 신부는 11월 7일 청국인 교우로부터 기해교난 이야기를 듣고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하여 1843년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만주교구 베롤르(Verolles) 주교의 충고를 받아들여 김 대건만 조선 입국을 하기로 한다. 이 결정에 따라 청국인 교우와 함께 1842년 11월 23일 백가점을 떠나 26일에는 봉황성 변문 20리 남긴 곳에 이르렀다. 동지사 일행에 끼어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교난 이야기를 청취한 후 앵베르 주교의 서한을 받고 김 대건은 변문에 이르러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29일 새벽 1시에 변문을 떠나 의주 성문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김 대건은 소 무리에 끼어 성문을 통과하여 30일 도착하여 주막집으로 들어갔으나 신고 있는 중국 신발 때문에 의심을 살 것 같아 다시 북으로 걸음을 돌려 백가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었다. 이처럼 첫 입국에 실패한 김 대건은 1844년 1월 24일 동지사를 따라온 김 프란치스코를 봉천에서 다시 만났다. 교우로부터 의주로 입국은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나라 사람과 조선사람 사이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 함경도 경원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발걸음을 옮겨 염탐을 하였으나 이곳 또한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4월에 소 팔 가자로 돌아가게 된다. 소 팔 가자에서 최 양업과 더불어 메스트로 신부에게 신학을 배우고 12월 중순에 페레올 주교의 주례사제로 6품인 부제 자격을 얻은 후 다시 조선입국에 올랐다. 1845년 1월 1일 페레올 주교와 함께 변문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등 세 교우를 만나 서양인 입국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홀로 영접인을 따라 2일 새벽 1시 즈음 변문을 떠나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3일 밤, 샛길을 이용하여 의주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다시 평양으로 내려 가 현 석문을 만나 15일 한양도착 교우들이 만들어 놓은 석정동(현 을지로 1가) 집에 짐을 풀었다. 어머니에게 조차 귀국을 알리지 못하고 성무를 처리하는 한편 상해로 가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용인 은이 성지에 복원해 놓은 상해 김기항 성당
그 사이 2월에 김대건 부제는 중병에 걸려 15일 동안 아무 일도 못하다가 회복이 되어 3월부터 신학생 2명을 가르치고 목선을 하나 사 두었다. 그리고 이 배의 이름은 라파엘호라 불렀다. 이 배를 현 석문 등과 11명이 교우와 함께 타고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항해를 시작하였지만 표류를 하다 구사일생으로 중국배에 이끌리어 5월 28일 오송에 도착하고 영국인 선원들에 도움을 받아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예수회 신부 고델랑(Gtteland) 신부의 도움으로 배를 수리하고 머물렀다. 이때 마카오로 돌아갔던 페레올 주교가 김 대건 부제의 서신을 받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8월 중순 상해로 돌아와 김 대건부제는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교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맞이한 주일에 만당소신학교(滿堂 小神學校)에서 첫 미사를 드린다. 비로소 조선의 첫 사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이가 24세였다. 15살 때 부모의 품을 떠나 9년 만에 받은 신품성사였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동안의 기억들은 환희와 은총의 나비가 되어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마음속 깊이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마음속 깊이 그리움에 맺힌 사람은 바로 은이골 어머니였다.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신품성사를 받은 상해 교우촌에 있던 김기항 성당은 도시계획에 밀려 철거되어 사라진다. 그 부근에 새로 터를 준비하여 신축봉헌 하고 당시 철거된 자재를 국내로 들여와 용인 은이골에 김 가항 성당을 복원하여 봉헌해 두었다. 위의 사진이 김 가항 성당 원형을 살려 봉헌한 성당이다.
나바위 산 정상에 세워 놓은 성 김 대건 안드레아 기념탑
김 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라파엘 목선에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떠나 귀국 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요동지방으로 뱃머리를 돌렸으나 거친 파도를 만나 동남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류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첫 미사를 드린 후 배를 수리하고 다시 떠나 42일 후 10월 12일이 되어서야 금강유역 강경포 부근 황산포 교우 마을에 닺을 내리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너른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나바위라 불렀다. 현재 그곳에 신앙 후손 교우들은 기념탑을 세우고 회당을 짓고 그날의 감격을 기념하고 있다. 도착 후 패리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은 상복으로 변복을 하고 교우들에 영접을 받으며 상륙하여 교우들 움막에 2개월 머물다 다블뤼 신부는 이곳으로부터 90리 떨어진 교우 집으로 가 조선말을 배웠다. 이때 김 대건 신부는 한양으로 올라와 용인 은이 골배마실에 살던 모친을 뵙고 다시 교우 집으로 돌아 가 페레올 주교를 말에 태워 한양 석정동으로 모셔왔다.
나바위 성지 성당 전경
이때부터 페레올 주교는 이 승훈의 손자이며 앵베르 주교의 복사였던 늙은 신학생 이 재용 도마에게 조선말을 배우고 전교에 나서서 50여 일 동안 충청도 내포지방 여러 교우마을을 찾아다니며 칠백 여명의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김 대건 신부는 서을, 양지, 용인 지방의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어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기 전 해마다 300여 명씩 증가하던 신자 수보다 더 늘어났다.
병오교난(丙午敎難)
성직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조선교회가 세 명의 성직자를 맞이하자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발전할 기미가 역력하자 페레올 주교는 청나라에서 입국할 때를 기다리던 매스트로 신부와 최 양업 부제를 맞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에 앞서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로 신부와 최 양업 부제에게 서신을 보내 의주로 입국은 어려우니 두만강 부근 경원에서 길을 열어 보라고 지시한 바가 있었다. 두 사람은 1846년 1월 경 청국인 교우의 안내를 받아 경원시장 개시 10일 전에 훈춘에 이르러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개시 1일 전 청나라 관헌에게 붙잡혀 2일 동안 투옥되었다가 요동지방으로 송환되어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페레올 주교는 김 대건 신부에게 명하여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한다. 김 대건 신부는 그들에게 편지와 바닷길을 알리는 지도를 보내는 방법을 구상하다 해마다 음력 3월에서 5월까지 황해도 연안에서 많이 잡히는 조기 때를 어획하기 위하여 그 해역에 출어하는 청나라 교우배를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 대건 신부는 모친을 모시고 두 달 동안 전교하던 은이골 생활을 정리하고 4월 8일 마지막 미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와 준비를 끝낸 다음 이 재용 등 7명의 교우와 함께 임 성룡의 배를 빌려 타고 5월 14일 마포를 떠나 강화도를 거쳐 5월 25일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뱃사공들이 조기를 구매한 후 순위도 갯가에서 팔려고 하였으나 사는 사람이 없어 섬에 내려 소금에 절여 말리도록 하였다. 그동안 김 대건 신부는 갯가를 떠나 5월 28일 마함도(麻唅島), 터전목, 소청도(小靑島), 대청도(大靑島)를 지나 다음날 백령도 해역에 다 달았다. 이곳 해역에서 그물을 치던 청국인 교우를 찾아 배 주인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펠레오 주교, 만주 베르뇌 신부, 마카오에 리봐 신부외 중국인 두 명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선해상을 자세하게 그린 침투 지도 2매를 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일이 잘된 것을 즐거워하며 순위도로 돌아왔다. 조기가 잘 마르지 않아 순위도에서 더 머물러야 하였다. 일설에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에 살고 있는 교우들의 생활상을 알고 있는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께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조기를 순위도에서 저리고 말리려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러한 사이에 6월 5일 낮에 조선관리가 포졸들과 함께 찾아왔다. 무단으로 조기를 잡고 있는 청나라 배를 몰아내기 위하여 김 대간 신부의 배를 징발하겠다는 것이어서 김 대건 신부는 거절하게 된다. 포졸이 화를 내며 욕을 퍼붓고 배 주인을 잡아가고 뱃사공 엄수(嚴秀)를 잡아가 문초를 끝에 김 대건 신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날밤 등산첨사(登山僉使) 정 기호(鄭基鎬)가 30여 명의 포졸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김 신부를 잡아 묶으며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이러한 소란 속에 뱃 사람들은 종선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김 대건 신부는 옹진 옥으로 잡혀 가 형문을 받은 후 6월 9일 해주 옥으로 이첩되어 황해도 감사 김 정집의 신문을 받고 신분을 사실대로 고백하게 된다. 고백한 이유는 이미 먼저 잡힌 뱃사람들의 입에서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한양 집 주소와 주교 복사 이 재용 형제 및 다른 교우들의 주소와 청나라 어선에 편지를 전한 사실 등 속속들이 고변해 버려 방법이 없었다. 황해도 감사는 포졸들을 청나라 어선에 보내 모든 편지를 압수한 후 모든 사실을 적어 임금에게 올렸다.
국왕 헌종(憲宗)은 6월 14일 중신회의(重臣會議)를 열고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 3인을 압송하게 하고 연루자들을 잡이들이게 하였다.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은 6월 21일 한양 포도청으로 끌려와 한 달 동안 40여 차례 형문을 받게 되고 현 석문 등 20여 명이 체포된다. 이 당시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제독이 8척의 군함을 이끌고 8월 초순 홍주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앞서 기해박해 때에 프랑스 선교사 세 명을 죽인 책임을 묻는 서한을 섬사람에게 주면서 영의정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프랑스의 항의 서한을 받은 영의정 권 돈인(權敦仁)은 크게 놀라 9월 5일 국왕에게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을 군문효수형을 처형 것을 상소하여 9월 15일 윤허(允許) 되어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9월 19일에는 현 석문이 같은 장소에서 참수를 당하고 20일에는 임 성룔(林成龍)의 부친 임 치백(林致百)이 교살되고 남 경문 등 여섯 명은 남녀가 장살 당한다. 잡혔다가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된 교인은 이 승훈의 아들 이 기원(李基元)외 5명이 있었으며 뱃 사람 임 성룡과 엄 수의 처형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순교한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이하 9명은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福者位)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어렵게 신부가 된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중국에 남아 있던 메스트로 신부와 최 양업 부제의 입국 루트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다가 순교하게 되어 조선의 많은 신자들은 충격에 빠진다. 조선교회 입장에서 보았을 때 너무나 아쉽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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