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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공원은 동해 바다 옆 정동진 2리 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모래시계가 있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해안 쪽으로는 휴식터인 의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정동진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모래의 부피에 의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정동진 모래시계공원은 1999년 강릉시와 삼성전자가 새로운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총사업비 12억 8천만 원을 들여 조성했다고 합니다. 모래시계는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톤, 모래무게 8톤으로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입니다. 모래가 모두 아래로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다 떨어지면 다음 해 1월 1일 0시에 반바퀴 돌려 위아래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요. 정동진 모래시계가 둥근 모양의 의미는 시간의 무한성과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고, 평행선의 기차레일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모래시계를 세운 정동진은 서울 광화문 앞에 있는 도로원표석을 깃점으로 정동 쪽에 있는 고을이라 정동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름 열기처럼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5월이란 계절은 상실되어 버렸고 한 여름의 폭염, 30도를 육박하는 날씨를 경험하였습니다.
모래시계 놓고 동쪽과 서쪽을 오고 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향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은 후
정동진 시간 박물관도 다가가 보았으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멀어져 가고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 그 안에서 삶을 엮어 만들어 내는 생애, 시간여행 한가운데를 서성이다 번뇌 속에서 끌어올린 한 줌의 행복을 생각하다 시방의 뜻을 체험하려는 의지에서 해가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떠난 후 추억의 시간으로 잠시 존재하다 그 마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정동진 시간의 문을 나섰습니다.
더위를 식힐 목적으로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행장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습니다.
모래시계 공원을 오고 가는 다리 위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긴 열차와 공원을 조망하는 동문들에게 등을 돌리라 하고 한 컷을 남겨 두었습니다.
빛의 방향에 따라 물의 채색은 다르게 표현됩니다.
서둘러 차에 오른 후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삼척 죽서루로 이동하였습니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죽서루(竹西樓)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란 이름의 절이 있어서 그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라는 뜻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403년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되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 측면 3칸이 증축되었으며 1788년 북쪽 한 칸 측면 2칸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이 팔작지붕형태가 되었습니다 팔작지붕이란 맞배지붕 옆에 삼각형의 합각을 남기고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리는 지붕을 말합니다. 죽서루의 절경을 노래한 정철의 관동별곡과 겸재 정선(鄭敾)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과 김홍도(金弘道) 시문을 통해 빼어난 경관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문화재청은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하였습니다.
모처럼 자연과 일치를 이루며 건축된 한옥에 깃들어 있는 여백의 미학을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니 각자 자신의 존재를 찾은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자연 안에서 한가롭게 거닐다 보면 그제야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현대문명 안에서의 경험들 신기루 같다면 자연 안에서의 경험들은 서로의 존재성에 대한 연관이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발견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셔터를 누루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새들이 강 쪽에서 날아와 오죽숲 가지를 흔들며 앉아 맑은 새소리로 바람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청정과 청아함은 일맥 상통하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바닥에 깔아 놓은 오석사이를 누비며 자라는 연둣빛 자유분방한 잔디도 청정의 기운에 일조하는 듯 보이며 죽서루의 전경을 중심 잡아 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삼척 죽서루는 조선 태조 2년 삼척이 삼척부로 승격되고 태종 13년 삼척도호부로 지명이 변경된 후 고종 32년 삼척군으로 지정될 때까지 삼척 지역의 통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객사와 동헌, 내아 등의 건물터와
건물유적을 확인하였고 2021년 12월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삼척 죽서루는 국보로 지정된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누각입니다.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으며, 관동팔경의 정자 중 가장 규모가 큰 누각입니다.
죽서루 대청마루 흑단칠을 곱게 해 놓아 참 정갈하게 다가왔습니다. 바람이 소슬하고 그늘이 지어 쾌적한 환경으로 방랑자 일행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서 있다 보니 앉고 싶고 이어 눕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노래자랑 경연이 이어졌습니다. 김추자의 봄비를 비롯하여 여러 곡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철의 관동별곡을 추적하고 싶었고 관아의 모습을 챙기려 슬며 시 죽서루를 빠져나와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정철의 가사의 터입니다. 1991년 2월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두 개 세웠는데,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의 죽서루 경내와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적 부근에 세웠습니다.
높이 3m의 팔각 대리석에 둘레는 2.4m로 기단 8각의 각 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 말, 가사창작의 배경 등을 새겨 놓았습니다.
진주관 내부입니다.
삼척 죽서루 내에 있는 진주관은 삼척도호부 관아 안에 있는 객사의 중심건물로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치르던 공간이었습니다. 삼척의 옛 이름이 진주였기에 진주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대나무숲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있어 "객사관" 자가 아닌 "볼 관" 자를 쓴 걸로 추정해 보았습니다.
객사의 모습입니다. 진주관은 1908년부터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삼척군청으로 사용되었는데, 1934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진주관의 목조건물을 헐고 이 자리에 돌과 벽돌, 콘크리트로 만든 삼척군청을 지었다 합니다. 이후 1982년 삼척군청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고, 2010년부터 문화재청의 발굴조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방의 크기가 참 검소합니다. 단출함 느낌에서 문명 안에서 온갖 것들을 수집하듯 모아 놓고 살고 있는 자화상과 견주어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문명의 일그러진 배경이 유감스럽다 한탄하고 서 있었습니다.
죽서루 탐방을 끝내 갈 무렵 캐나다에서 입국한 동문이 찾아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예약한 두레박 식당으로 몰려 갔습니다. 낙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입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오랜 시간 서로들 안부를 챙기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모자 쓴 동문 바로 왼쪽 옆 검정색 백팩을 걸머진 동문이 캐나다에서 귀국한 동문입니다. 신랑께서 바쁜 용무가 있어 참석을 못한다고 곶감을 많이 보내주셔서 요긴하게 행동식으로 사용했답니다. 그리고 시동생이 삼척에 뷰가 좋은 아름다운 전문 카페를 운영 중이라 그곳을 초대받아 방문하며 오랜 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건물 면적이 상당히 컸습니다.
두레박 낙지요리는 명품이었습니다. 무교동 낙지골목에 있던 유정집 이상으로 낙지 맛을 내는 식당입니다. 찬도 그렇고 낙지요리도 정갈하고 맛도 깊이가 있습니다. 다들 만족하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칼칼한 맛이 좋아 나도 모르게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미국에서 오신 동문 사부 한 사람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술을 먹는 사람은 저하고 딱 두 사람이다 보니 한 병이면 아주 족합니다. 점심을 챙긴 후 잠시 쉬며 커피를 마시다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다음 일정으로 잡힌 해신당공원은 삼척에서 한 참 아래에 있어 동선 긴 편입니다. 삼척권역이지만 동선이 길어 오늘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애바위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신남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해초작업을 위해 총각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처녀를 태워주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파도와 심한 강풍이 불어 처녀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맙니다. 이후 이 마을에는 처녀의 원혼 때문에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어부가 고기가 잡히지 않자 바다를 향해 오줌을 쌌더니 풍어를 이루어 돌아옵니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나무로 실물모양의 남근을 깎아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음력 1. 15), 음력 10월 첫 오일에 남근을 깎아 매달아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신당공원은 다음과 같이 해안가 언덕에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도처럼 길쭉하게 이어진 동산 해안 끝자락에 해신당이 있고 언덕을 오르면서 남근공원이 남근 조각과 꽃밭이 함께 계단식으로 펼쳐지고 이후 산정상은 일반 자연숲 공원이며 해안가 절벽 위에 삼척 어촌 민속전시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바다 풍경과 어울려 근사한 곳입니다.
해신당 아래 바위 형상들이 악어 모습을 닮아 잡아 본 사진입니다.
서서히 오르면서 계단식으로 꽃과 조각들이 어울려 공원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계속 정상까지 오르면 주변 아름다운 경치가 파노라마가 되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날씨가 폭염 수준이라 견디기 어려운 날이었습니다.
이곳이 삼척 어촌 민속박물관입니다.
추암 촛대 바위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각종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는 촛대바위, 이 바위에 걸리는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돋이 명소입니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 해안에 위치한 추암은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유명합니다. 한국 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의 가볼 만한 곳 10선"에 선정된 해돋이 명소에는. 거북바위, 부부바위, 형제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온갖 형상을 연출하고 있는 가운데 촛대처럼 기이하고 절묘하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바위를 "촛대바위 "라고 부르며 전국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때 한명회가 이곳의 경관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미인의 걸음걸이를 빗대어 "능파대"라 부루기도 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추암 바닷가에 살고 있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소실을 얻는 바람에 본처와 소실이 투기로 자주 싸움이 불거져 두 여자의 시기와 질투에 하늘이 노하여 벼락으로 징벌하여 남자만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홀로 남은 촛대바위가 남자를 상징하는 형상이며 아주 오랜 과거에는 남자, 본처, 소실 형상의 3개 바위가 있었으나 100여 년 전 벼락이 떨어져 본처와 소실의 바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갈매기 한 마리가 촛대바위 정상 내려 앉아 사진 모텔을 해 주었습니다. 좀 컸더라면 좋아을 텐데 그것이 좀 아쉽습니다.
만물상을 배경으로~~~
이곳이 케나다에서 참석한 동문 시동생이 하는 카페 야외 공간입니다.
이번에 참가하지 못한 독일 동문들이 단체사진을 보내 달라는 요청으로 긴급하게 장소를 마련하여 찍은 단체사진입니다. 위 공간 위로 커다란 공간으로 뷰가 좋은 카페가 세워져 있습니다. 단체사진에 빠진 사람이 파악되어 다른 곳에서 다시 찍어야 했습니다.
오늘 주간 일정은 여기에 매듭을 짓고 석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강릉에서 유명한 한정식 집으로 이동하였습니다. 50여분을 달려 도착한 한정식, 다양한 재료로 만든 돌솥밥 정식은 모든 일행에게 좋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시 스카이베이 호텔로 돌아와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포대 해변 따라 야경 산책을 나섰습니다.
남쪽 방향으로 상당한 시간을 걸어 나갔습니다. 보름달인 만월(滿月)이 야경의 정취를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경포호수에서 인입되는 민물줄기를 건너가는 다리의 야경은 무척 이름다웠습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불빛은 야경을 몽환적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야경 산책을 이어서 진또배기 성황당에서 공연되는 풍어제를 관람 후 역순으로 되밟아 스카이베이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오대산 권역을 살핀 후 귀경하는 것으로 50주년 졸업기념 여행은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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