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
이두(吏讀,吏頭,螭頭)의 사전 정의는 신라 때부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차자 표기법,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긴 형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두에는 이서(吏書)·이두(吏頭)·이토(吏吐)·이투(吏套)·이도(吏道)·이도(吏刀)´이찰(吏札)·이문(吏文) 등 다른 이름
으로 불러지기도 하엿습니다. 이 중 문헌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이서로,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
기(帝王韻紀)'에 처음 언급됩니다. 이로 미루어 이러한 계통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서리(胥吏) 계층이 형성되어 점차
공문서나 관용문에 쓰입니다.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원리는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습니다.
‘天’이라는 한자를 우리는 ‘하늘 천’자라고 합니다. 즉 ‘하늘’은 뜻[훈(訓), 석(釋)]이고, ‘천’은 소리[음(音)]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 ‘돌쇠’라는 이름을 ‘石金’이라고 적었다면, 두 글자 모두 한자의 뜻을 빌려 쓴 것이고, ‘돌이’라는
이름을 ‘石伊’라고 적었다면 ‘石’은 뜻을 ‘伊’는 음을 빌려 적은 것이 됩니다. 이렇게 차자표기로써 처음에는 人名,
地名, 官職名 등 고유명사를 적다가, 좀 더 발전하여 문장까지 적는 여러 방법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두, 구결, 향찰’ 입니다.
이와 같이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전체를 가리키며 향찰(鄕札)·구결(口訣) 및 삼국
시대의 고유명사 표기 등을 총칭하여 향찰식 이두 또는 구결식 이두 등의 말로 쓰이기도 하나, 좁은 의미로의 이두는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구성법에 따라 고치고(이를 통칭 誓記體表記라고 합니다) 이에 토를 붙인 것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두는 신라 초기부터 발달(유리왕 때의 辛熱樂, 탈해왕 때의 突阿樂 등)한 것으로추측됩니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만 검증할 만한 증거는 없고 오히려 설총이 당시의 표기법을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중국의 한자도 우리의 삼국시대 초기에 제대로된 한자로 갖춰지게 되어 고구려나 백제,신라로
들어오기에 이릅니다. 그전에는 중국 한자도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체 중국에서 써 왔고, 우리는 삼국 전후 시기에
우리 고유의 신지신획이나 가림토를 써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초 체계가 정립된 한자가 우리 전래의 글보다
사용하기에 편하였던 관계로 한자를 삼국이 모두 받아 들이게 되었으며, 이 한자를 읽거나 쓰기 위하여 이두와 같은
표기법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 어순에 따라 적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
壬申年 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都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임신서기석)
-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이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위의 글은 한문과는 어순이 다릅니다. 한문이라면 ‘誓前天, 自今’ 등의 순서대로 해 야 맞는 것입니다.
本國乙 背叛爲遣 他國乙 潛通謀叛爲行臥乎事 (대명률직해)
- 본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를 몰래 상통하여 모반을 꾀하는 일.
위의 예는 우리말 어순에 따라 한자를 배열하고, 문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우리말 문법요소도 덧붙였다. ‘乙, 遣’은
한자의 음을 빌린 것이다.
이렇게 ‘이두’라는 명칭은 관청의 아전[서리(胥吏)]계층에서 이 표기법을 많이 사용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한자란 본래 우리의 금문이란 신지의 글을 보고 중국 최초 통일국인 진나라에서 금문이나 갑골문을 보고 한자인
대전, 소전을 만들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계속해서 이 한자를 만들고 다듬은 끝에 우리 삼국 초에야 겨우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여서 본래 부터 우리에게 글이 없어서 한자를 들여와 사용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더구나 이 한자는 우리의 글로 부터 파생된 문자로서 비록 중국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갈고 다듬었으나 우리가
들여와 사용하기에는 그만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오거나 쓸 수 있었습니다.
향찰 (鄕札)
향찰의 사전 정의는 신라와 고려 시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글, 주로 향가의 표기에 이용되었으며,
앞부분은 실질적 의미인 뜻을, 뒷부분은 문법적 요소인 조사와 어미 등을 나타냈다.라 나타납니다.
이러한 향찰은 나중 이두가 아전 吏屬들이 공무를 처결하는 공문서인 吏書와 혼용되어 원래 우리나라의 말을 기록
한다는 향찰(鄕札)의 본래의 뜻이 희석되고 말았습니다.
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의 뜻은 사뇌가(詞腦歌) 도솔가(兜率歌) 또는 국풍(國風) 자국지가(自國之歌)란 국가(國歌)로
신라시대 고유의 노래, 동방 고유의 노래이며, 좁은 뜻으로는 신라의 가요 또는 고향의 노래 등 국문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의 사뇌격(詞腦格), 삼국유사 권2의 사뇌가, 균여전(均如傳)의 사뇌 ·
사뇌자(詞腦者) 등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이설이 있으나, 이를 모두를 ‘사뇌’의 차자(借字)로 보고, ‘새내’는
동방(東方)이라는 뜻이므로 사뇌가는‘동방의 가요’라는 뜻으로 향가와 동의어(同義語)로 봅니다.
향가는 신라 진평왕 때 서동요(薯童謠)에서 고려 광종 때 균여의 보현 십원가(普賢十願歌)11수에 이르기까지 약
370여 년 동안 성행한 듯하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입니다.
우리 향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일본의 소장학자 오꾸라 신뻬이(小倉進平)가 시작하여 향가와 "이두의
연구"로 박사가 되었는데, 이런 우리글 연구를 일본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 청년 梁柱東이
육당 崔南善선생으로부터 귀중한 자료를 한보따리 넘겨받고 몇해를 걸려 연구결과를 "고가연구"라는 방대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 연구는 기존의 일본학자들의 학설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하는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이후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향가와 향찰연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향찰은 향가(鄕歌)의 표기에 사용된 차자표기법으로 한자로 우리말을 적는 방법 중 가장 완결된 모습입니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처용가)
신라 향가인 이 노래에 대하여 해독 방법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밤새도록) 노니다가”
정도의 해석으로 우리말에서 실질적 의미를 가진 부분(어간)은 한자의 뜻을 빌리고, 문법적 요소는 음을 빌려 적는
방법으로서 향가의 표기 원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결 (口訣)
구결이린 한문 원전(漢文原典)을 읽을 때 그 뜻 및 독송(讀誦)의 편의를 위하여 각 구절 아래 달아 쓰는 문법적
요소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현토(懸吐) ·토(吐) ·석의(釋義)라고도 한다. 구결(口訣)이란‘입겿’또는‘입겾’ 이라는 순 국어의 차자(借字)인데,‘겿
또는‘겾’의 어원(語源)은 어떤 사물의 중요한 성질에 곁따르는 부차적인 성질의 뜻을 지닙니다. 구결이란 용어는
조선 세조 때의 문헌에 비로소 보이나 세종실록에도 세종 10년(1428) 윤(閏) 4월 기해조(己亥條)에 권근(權近)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마지못하여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 등의 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주(註)에 한문을 읽을 때 국어를 구절에 달아 읽는 것을 토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문헌촬요(文獻撮要)에는 구결
또는 석의가 정몽주(鄭夢周)와 권근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아마도 우리 민족이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고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그것이 확립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 설총(薛聰)이 이두(吏讀)를 지었다는 통설과 함께 “방언으로 구경(九經)을 읽었다
(以方言讀九經).”또는“속문(屬文)에 능하였다(能屬文)."“설총이 비명을 지었다(聰所製碑銘).”고 하는 기록은 그가
한문 해독과 작문에 능하고 또 당시 이두 또는 구결을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신라 때에도 구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결은 隱(은, 는) · 伊(이) ·乙奴(으로) ·乙(을) ·厓(애, 에) ·是面(이면) ·里五(리요) ·是於焉(이거든)
등과 같이 쓰이기도 하였지만 이를 약체화(略體化)하여 殳(은, 는:隱字의 좌변) ·厼(며:旀字의 우변) ·
?(야:也字의 가로획) ·?(:飛字의 윗부분) ·人(이:是字의 아래획) ·(면:面字의 윗획) ·?(나:那字의 좌변) ·亽(라:羅字의
半字 罖의 아랫부분) ·厂(애:厓字의 윗변) 등과 같이 한자의 한 부분을 떼어 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구결은 한문문장을 그대로 둔채 주로 한자의 음(音)을 이용하여 문장의 토나 문장의 단락을 종결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말법에 맞춘 한자어순을 따르는 이두와는 그 사용 목적 및 내용에 있어서 이두와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이 구결은 훈민정음이 창제 ·사용되면서부터는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결의 예는
天地之間 萬物之衆涯 唯人伊 最貴爲尼 所貴乎人者隱 以其有五倫也羅 (동몽선습)
위의 한문 문장 중의 ‘涯, 伊, 爲尼, 隱, 羅’자는 우리말 ‘-애, -이, -니, -은, -라’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한 것
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예문으로 든 구결문에서 구결을 빼면 원래의 한문이 됩니다. 반면에 이두의 경우에는 우리말
문법 요소를 빼더라도 원래의 한문으로 복원되지 않는 점이 구결과 다른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