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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기독교
성서의 이해
의료경영학과 20131993
신예슬
내가 먼저 만난 종교는 천주교 이었다. 어렸을 때 잠시 고모 댁 에서 지낼 때 주말마다 사촌언니와 사촌오빠와 함께 성당에 나간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당과 교회는 분의기가 많이 다른 것 같다. 한번은 성당에서 점심밥을 먹다 콘센트에 젓가락 꼽고 정전된 이후로 성당, 종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한 후 친구와 함께 교회를 다닌 기억이 있다. 처음에 교회를 가게 된 이유도 친구와 함께 토요일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가는 길이면 교회 전도사 분들이 교회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자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며 동네언니와 친구와 함께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8시에 교회를 가면 12시에 끝나는 예배였었고 찬송가도 부르면서 친구들과 다닌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 이사를 다니며 초6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좋은 목사님과 전도사 분들도 만나면서 교회생활을 했었다. 그 이후로 교회는 안다녀도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안 좋은 길로 빠진 친구도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면서 친구가 착해지는 것도 보았다. 그거 보면서 교회에 대해도 신기하게 생각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대해 안 좋은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길거리에 나와 가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설명을 하며 같이 기도를 한다 던지, 찬송가를 크게 틀어 놓는 경우 등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선교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종교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생활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과한 선교활동으로 오히려 종교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경우의 사람들도 있을 것 이다. 그렇다고 너무 나쁘게 생각 하지는 않는다. 종교 단체에서 기부하는 기부금이나, 해외 봉사활동, 국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며 먼저 앞장서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종교라는 건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나는 대학교 와서 방송국 생활을 하면서 아침마다 CCM 을 준비 하면서 많은 CCM 을 들었다. 들으면서 CCM 의 종류는 많고 다양하다는걸 알았다. 수업을 통해 성서의 이해를 들으면서, 또 채플을 들으면서 기독교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과제를 하면서도 기독교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예수님 또한 인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걸 알게 되었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심신으로 지쳐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외국인 근로자나 한국에 와서 적응을 못하는 타국 여성들이 한국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목사님들이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라는 것은 종교란 이유로 다른 민족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걸 보았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목적을 악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에 인식이 나빠지는 일도 많다. 매스컴에 올라온 글만해도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목사, 헌금을 빼돌리는 목사, 헌금을 모아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목사 등 일어나면 안 될 곳에서 범죄가 일어나서 사회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다. 목사라는 명분을 갖고 전도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이런 문제들로 기독교의 인식이 안 좋아지는걸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기독교에 대해 이런 저런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 과제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걸 알게 되고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되었다. 최근에 뽑히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으로 많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짧은 설교 끝에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가 그 예다. 그는 가장 귀한 분이셨으나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겼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설파하셨다. 높은 자리의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낮춰서 몸소 실천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웠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성서의 이해
의료경영학과 20131993
신예슬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하고 생각 하는 이도 없지 않고 있을 것 이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롤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 전 세계 인류의 참화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한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잡을 세력과 사람들을 바로 잡기위해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오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다. 또 사람은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 가야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우리사람에게 가장 중요한건 “의, 식, 주”가 큰 문제이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연 이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참된 사람일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 해도, 독재 아래에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는가?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다.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는 게 존재한다. 다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영적 만족이 없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낄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도 같이 보는 견해이다. 사람은 짐승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이상의 무엇을 탐구한다. 사람이 그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만다. 여기서 종교문제가 들어온다. 독일에 쇼펜하워 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다. 그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한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들어 공원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공원 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을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한다. 그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 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갈까? 흔히 생로병사 즉 사고(四苦)를 말한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은 없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과학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하다.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란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예수교’, 혹은 교파를 따라 ‘장로교’, ‘감리교’ 이렇게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부른다.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무엇이라 불렀는지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성경 가운데 구악과 신약 두 부분이 있다.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을 뜻한다.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는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의미를 뜻한다. 그런대 이것을 현대말로 하면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 다시 말해 지금말로 ‘좋은 뉴스’라고 표현한다.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고 부른다.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니다.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를 말해본다면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이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설비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 주재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런 우주적 뉴스가 가장 큰 뉴스이다.
“이 세상”은 세계란 말을 뜻한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르킨 말이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는 세계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세계를 사랑했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만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셨단 말씀이다. 하나님께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주기를 좋아한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다.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큰 뉴스이다.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 사랑의 종교,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 믿음의 종교, 영생의 종교이다. 기독교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이다.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이다.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곧, 하나님이 안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 우주와 전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다음에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행성 중에서도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그러기 전에 무신론의 논증이 되지 아니해야 한다. 무신론은 혹은 유신론의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이 이론, 부정적 이론이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이다. 거짓이란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이다.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밖에 없다. 1956년 1월 10일호 타임(TIME)잡지 종교란 에 미국의 여론 조사로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96%, 100명중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이유로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대답이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믿는다. 라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를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좋은 뉴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있기에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게 되며 또한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 우주를 바라 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된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고,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다. 어떤 사회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 데는 도무지 없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믿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할 때 하나님을 찾는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기에 본능이 생겼다.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다.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이다.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가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 라고 말하셨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된다.
다음으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상에 대한 유명한말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 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 준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 된다. 언제나 어느 한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야 한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잘못 할 때는 책망을 해준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다. 이 도덕적 법칙은 성경에서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 살기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이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 법칙을 준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 사람과 도덕적 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르다. 우리 사람은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 되었으므로 관계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된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 볼 때,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된다.
로마서 1장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중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이면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보면 첫째는, ‘인과 법칙’으로 우주를 보게 되면 우리가 다 인과법칙을 믿는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되고, 인과법칙대로 안 되면 과학이 성립이 못된다. 그래서 인과법칙은 꼭 옳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을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우주가 생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이렇게 주장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연령을 대략 33억 5천만년 쯤 되었다고 한다.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 있다. 지구에 영원한 것은 없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 시라”라는 말이 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존재를 말할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무한절대의 신이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이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한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모두 무한대로 같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된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보면 우주에는 태양계의 조직,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 등 이런 많은 것들이 모여 대우주가 형성되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다.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다. 원자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하여 빙빙 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큰데 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다. 동물과식물의 조화,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비가 내리는 작용 하나님은 작은 생물을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한다. 하나님은 계시고, 전능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였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쓰셨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 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다. 또 그의 실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시며,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였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다.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갚았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 하셨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 않는 까닭으로써 결국 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 이다. 모든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이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다.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크게 열려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 전체는 아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하며,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한다. 그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e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곧, 새로운 사람, 새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다. 또는 ‘중생’, ‘거듭 난다.’ 는 말로 표현한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 마치 곤충세계를 관찰 해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온전한 변화가 있다.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다. 전에는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징이 된다. 요한1서 5장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출생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렇게 출생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장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된다. 사도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만물이 우리의 것이 된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된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생명이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다.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다. 신학도 있다. 그리고 신조도 있고, 여러 가지 의식과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다. 그러나 그자체가 기독교는 아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이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다. 하물며 한두 시간에 이기쁜 뉴스 또한 다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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