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6.25
사회학과 2010101255
3학년 손세호
1.들어가며
1950년 6월 25일,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을 통해 북한 공산군이 불법적인 남침을 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 전까지 3년여 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사람들에게나 모든 면에서 다방면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 휴전 후에도 지속적인 남침과 이산가족, 참전용사들에 대한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쟁점들이 많이 남아있는 남북전쟁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이번 Report를 통해 남북전쟁에 대하여 알아보고 나아가 남북전쟁과 제주의 연관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본론
1)6.25전쟁의 발발
1943년 제 1차 카이로회담에서 특별조항으로 일본에게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킨다는 사항이 결정되었다. 1945년에 독립을 맞은 대한민국은 미국은 남한, 소련은 북한에 분할 진주함으로서 완전 독립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별다른 사항 없이 결렬되고 말았고, 1948년에 UN의 감시 하에 전국적인 자유 총선거를 남한이 북한에 제의하지만, 소련이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남한에서는 제한적 지역 안에서의 자유 총선거, 북한에서는 흑백선거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한 반도 안에 두 나라가 들어서게 되었고, 하나의 나라로서의 독립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 상황 속에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속에 전쟁을 준비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9년 주한미군 철수로 하게 되었다. 그 후, 1950년 애치슨라인 발표로 더 이상 남한은 미국의 보호 안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국군의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육군의 대다수가 외출, 외박을 나가버려 남은 인원수는 약 3분의 1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북한으로서는 이 시점이 전쟁을 일으키기에 가장 좋은 적기였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군사분계선인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강행했다. 남북전쟁의 발발이었다.
북한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고 순식간에 포항과 부산, 대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빼앗겼고, 패전의 기색이 짙었다. 하지만 유엔군이 6월 27일부로 참전하게 되어 16개국에서 병력을 지원하였고 다양한 국가에서 의료지원과 물자지원이 이루어졌다. 약 3개월 후인 9월 15일, 맥아더 장군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게 된다. 그 후 지속적으로 북으로 전진한 남한과 UN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9일에 평양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11월, 한반도의 끝인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 남한과 UN군은 11월 27일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점차 뒤로 밀리게 되었고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며 비극적인 1·4후퇴를 맞게 된다. 그 후 2월, UN총회에서 중공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7월부터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이후 지속적인 전투가 계속 진행되었고, 그 희생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시체를 이용하여 벽을 쌓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2)휴전과 그 이후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UN군 사령관과 공산군 사령관 간 휴전이 조인되면서 남북전쟁을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북한에서는 지속적인 도발을 강행하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 땅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제 1·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등 북한에 의한 도발은 현재진행형이며 휴전상태가 종결되지 않는 한, 이는 끊이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3)6.25 전쟁의 인명피해와 UN군 참전
남북전쟁 동안의 인명피해는 매우 컸다. 국방백서의 부록을 통해 남한의 피해를 살펴보면 전사/사망이 137,899명, 부상이 450,742명, 실종 24,495명, 포로 8,342명으로 합하면 621,479명이 된다. 이는 군인의 피해일 뿐, 민간인 피해는 990,968명이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약 100만 여명의 민간인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북한의 피해를 살펴보면 사망/ 부상이 52,0000명, 실종/포로가 12,0000명, 비전투손실이 177,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민간인 피해는 남한의 두 배인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중공군의 피해도 약 100만 여명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남북전쟁은 실로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남한이 순식간에 밀렸던 전세를 다시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UN군의 힘이 매우 컸다. 총 16개국이 병력을 지원했는데, 그 중 미국이 180만 정도에 해당하는 병력을 지원해주었고, 영국이 5만여 명, 캐나다가 2만5천여 명 정도를 지원했다. 의료지원은 총 다섯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었는데, 덴마크와 노르웨이, 인도가 600여 명 씩을 지원했다. 물자지원국은 39개국에 달했으며, 이들에 의한 지원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은 없었을 것이다.
있다.‘
4)6.25와 제주
남북전쟁 당시 제주도는 4.3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는 제대로 복구도 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 당시 서해안과 동해안을 비롯해 제주와 같은 섬들은 피해를 덜 입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 제주는 전투원을 양성하는 훈련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대정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 근처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는데, 바로 지금 해병대의 부대로 사용되고 있는 논산 육군훈련소의 전신, 대정 육군훈련소가 이를 증명해준다.
제주의 해병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 1950년 6.25일 한림중학교 오송진 교장은 아침조회 시 떨리는 목소리로 북한공산 집단들이 기습남침으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감행하였다는 훈화가 있었다. 4.3사건의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진리탐구에 전념하던 순간의 훈시는 날벼락이었다. 당시 김수림 교사는 고지선(학도호국단 3중대장)을 부르고 “학도 호국단 간부들과 구국방법에 대한 협의가 없었냐” 고 물었다. ‘나라가 있어야 배움터가 있고 진리·탐구하는 학도도 있다.’ 는 판단, 더 이상 망설임 없이 ‘38선으로 보내주세요' 란 혈서를 교장에게 제출하였고, 따라서 김수림 교사도 혈서 지원함으로써 사제 간이 3기생으로 입대하는 여파로 125명이 지원입대 하였고 따라서(성산초등학교) 제2세 초등교육에 전념하던 김영환, 강동휘, 이응봉, 이기선 교사가 판잣집 관사에 모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한 협의, 국민이 있어야 학생이 있고 학생이 있어야 학교가 있기 때문에 ‘분필대신 총'으로 바꿔 입대하자고 결의 혈서하자고하여 태극기의 사방에 한사람씩 ‘화랑정신으로 이기자'등 승리표어와 흐르는 피로 이름을 썼다. 혈서를 쓴 태극기를 강경욱 교장에게 제출하여 교무실에서 교사집단 3기로 혈서지원 입대하였다. 이로 해 학도들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함성은 제주 전역에 메아리 쳤다.
한림중학교에서 사제가 동시에 125명의 어린학생이 집단으로 해병4기로 입대하였고, 4살위 형과 서한종(4기)은 같이 입대하는가 하면 제주시내 학교 돌격대 학생들도 일제히 자원입대하였다. 제주농고, 오현중, 제주중, 서귀중, 대정중학생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병3기로 입대코자 응집한 젊은 학도들이 1950년 8월 30일 출정하기위하여 입고식을 거행, 1950년 9월 1일 출정하기위하여 해병대 3.4기 3000여명이 서부두에 모였으며, 또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앉아서 지켜보는 것보다 죽음으로 구국의 대도를 지향하는 민족의 등불이 되겠다'는 3학년 이상의 여학생과 여교사들의 외침이 있었다. 조국수호의 대열 앞에서는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비장한 결의와 각오였다.
1950년 8월 28일 제주북교에 126명이 집결, 곱게 단장한 긴 머리를 단발머리형으로 자르는 순간 흐느껴 울면서도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것이 1950년 8월 31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해병대 4기 여군으로 탄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연약한 여자지만 나라에 바치겠다고 지원한 것이다. 현세대의 여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겠다는 마음이 유관순 언니에 뒤떨어지지 않는 구국정신의 발로였다.
사단법인 해병대전우회 제주도연합회 회 장 양 정 보 -
이 글을 보면, 어떻게 제주의 사람들이 해병대에 입대했는지를 알 수 있고, 특히 여군이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해병대 전우회 소속 최초의 여군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원입대한 3000여 명의 해병대 3, 4기는 1950년 9월 1일 제주시 산지항에서 미 해군 수송함에 몸을 싣고 참전했다. 이들은 보름 뒤 상륙주정에 나눠 타고 4회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등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해병대 3, 4기는 서울 수복과 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5)6.25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
(1)이산가족
약 3년간 엄청난 피해를 준 전쟁을 마친 휴전협정 후, 남북의 분단으로 인해 1000만 명 정도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남북 적십자사 간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으나 실행되지 못해 왔다. 그러다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루어졌다.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만이 가족을 만났다. 제1차 고향방문단 교환 후 2차 방문단에 대한 협의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첫 상봉 이후 15년이 지난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6ㆍ15 남북공동선언'에서 이산가족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생사ㆍ주소 확인, 서신교환 등 시범적 사업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2000년 8월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2005년 8월 15일에는 분단 후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 그리고 평양과 인천ㆍ수원ㆍ대전ㆍ대구ㆍ광주ㆍ부산 등 남쪽 도시를 서로 연결한 화상상봉이 이루어졌다. 남쪽에서 상봉자 20명과 그 동반가족 57명이 북쪽 가족 50명을, 북쪽에서는 상봉자 20명이 남쪽 가족 79명을 각각 화상으로 상봉해, 모두 226명이 참여했다.
2013년까지 총 18회에 걸친 상봉이 이루어졌고, 2010년 제18차 방문상봉 1차 행사 때는 북측의 상봉 신청자 97명과 남측 가족 436명, 총 533명의 이산가족이 재회하였고, 제18차 방문상봉 2차 행사 때는 남측의 상봉 신청자 96명이 북측 가족 207명을 만났다. 그리고 화상상봉은 총 7차까지 이루어졌다. 2007년 11월에 열린 제7차 화상상봉 행사에는 남ㆍ북 39가족씩 모두 78가족 500여 명이 참가해 남북을 광전용망으로 연결한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만남을 가졌다. 이산가족 상봉은 2010년 말 터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잠시 중단된 적이 있다.
이번 년도에도 행사가 이루어졌는데, 행사는 2014년 2월 20∼22일 남측 신청자가 북측 가족을 만나는 1차 상봉과 23∼25일 북측 신청자가 남측 가족을 만나는 2차 상봉으로 나뉘어 5박 6일 동안 금강산에서 진행됐다. 1차 상봉에선 우리 측 방문단 82명이 동반가족 58명과 함께 북측 가족 178명을 만났고, 2차상봉은 북측 신청자 88명과 남측 가족 357명이 만났다. 이산가족 상봉 1 · 2차를 합쳐 만난 남북 이산가족은 모두 763명으로 남북 가족들은 상봉기간 중 첫날 단체상봉과 환영만찬, 둘째 날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실내상봉, 마지막 날 작별상봉까지 각각 6차례씩 11시간 동안 짧은 만남을 가졌다.
지속적으로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산가족들도 많은 수가 존재하고 있으며 나이가 들어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나오고 있다. 상봉 횟수를 늘리거나 기간을 늘리는 등 어떤 해결방안을 찾아 이들에게 가족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2)휴전상태
한반도는 전쟁이 멈췄다. 이는 끝난 것이 아닌 잠시 휴전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휴전 직후부터 지속되어 온 북한의 도발이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아직 휴전상태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게 된다. 6.25와 관련된 행사나 사람들이 보게 되는 6.25관련 영상이나 자료를 보면 무조건 나오는 것이 아직 휴전상태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현실이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들을 때마다 가슴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3)6.25 참전용사
위에서 말했듯이, 남북전쟁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여기에 참여한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다. 이들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준 분들이기에 우리가 잊어서도 안 되고, 이들에 대한 올바른 예우를 다해야 한다.
6.25 참전용사 분들은 국가유공자로서 참전 명예수당 매달 170,000원, 보훈 휴양원 및 협약콘도 이용, 증명발급 수수료 무료(주민등록 열람 및 교부 수수료 / 주민등록증 재발급 수수료 / 가족관계증명서 등), 보훈병원 진료 시 본인 부담금 60% 감면(단, 치아보철, 성형 등은 제외), 만 75세 이상인 경우 위탁병원 진료 가능(건강보험 비급여항목 제외)의 60%를 감면해주는 혜택을 받고 있다.(약제비 제외) 더불어 아파트 특별공급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이는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 혜택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이 그들에게 정당한 예우를 다하는 대우인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분들이다. 그 상황 속에서 장애를 얻은 분, 가족을 잃은 분, 삶을 잃어버린 분들도 계시다. 작년 현충일, 언론을 통해 공개된 한 6.25참전용사의 삶을 보면, 매일 폐지를 주우러 다니시며 병원비와 살림을 위한 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참전 명예수당을 합쳐도 매우 모자란 수준이라고 한다. 그분들께서 하시는 말들은 거의 비슷하다. ‘말로만 우리를 존경한다, 기억한다고 할 뿐,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분들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참전용사 분들을 어떻게 예우할까? 미국을 보면, 우리나라와 확연히 다른 예우를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퇴역 군인의 집’을 보면, 오락과 여흥, 의료시설 등 참전용사들이 원하는, 필요한 시설은 모두 들어가 있으며, 이곳을 이용하는 참전용사들은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공무원 채용 시에도 가점 혜택을 주며, 미국 제대군인부가 국무부와 국방부에 이어 부처 서열 3위라고 한다. 이쯤 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전용사에게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높은 예우를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전용사 행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경우, 참전용사 행사를 할 때에는 대형 퍼레이드식의 행사를 진행한다. 차량도 아주 큰 대형으로 준비하며 기타 여러 가지 모두 성대한 행사 형식으로 진행을 한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매우 비참하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2.5톤 트럭에 참전용사 분들을 앉히고 변변치 않은 현수막을 하나 달아두고 길거리를 달린다. 이건 행사라고도 볼 수 없는 차림새다. 차라리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몇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맞는 대우를 해주고, 그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멋지게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3.나가며
지금까지 6.25전쟁의 전반적 흐름과 제주와의 관계,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들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당시 어떤 마음가짐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이다. 만약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참전용사들처럼 전쟁에 참여할 수 있을까? 참여는 하겠지만, 그때처럼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제로 데려가기는 하겠지만,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는데, 이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휴전상태인 나라에서,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6.25전쟁이 무엇인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희생을, 이산가족의 아픔을, 전쟁의 피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