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별의 원리 2
2011. 3. 13. 주일 1부
지난주에 “영분별의 원칙 첫 번째로 그 사람의 동기가, 사랑이냐 아니면 탐욕이냐? 이 문제에 정도 이상으로 걸리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무조건 거짓 선지자다.” 그런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2. 상대에게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느낄 수 있는가?
교회 다닌다고 진짜 형제자매가 아닙니다. 교회에 제일 위험한 위험이 “거짓 형제 중의 위험”(고후11:26)입니다. 거짓 형제들(이단사냥꾼들,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교단, 목사, 신자들)은 바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가 핍박을 받지 않는다면 자기가 거짓 형제이거나 거짓 형제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거짓 형제들의 특징
① 맏형이신 예수님을 닮지 않은 사람(롬8:29)
저는 그동안 데이비드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에게서 마귀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가 남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오만하게 착각하고 한없이 탐욕을 부렸습니다. 이것은 맏형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취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어떤 강사든지 주려고(말씀, 은혜, 기름부음, 치유) 와야지 무엇을 취하기 위해서 온 자는 가짜입니다.(요10:10-15)
②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다 거룩하며 거룩을 추구합니다.(히2:11-12, 행20:32, 26:18, 히12:14) 그러나 거짓 형제는 거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거룩하며, 계속해서 거룩을 추구해 나갑니다.
③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참 형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마12:46-50) 그러나 거짓 형제는 영적인 고아와 같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요일2:15-17, 마7:21)
그런데 형제 사이에는 깊은 유대감, 기본적인 일체감과 사랑이 그 안에 존재합니다.(엡4:3-6) 보통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설교하지만 바울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연상시키는 교단과 교리의 벽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나 됨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느끼고 영으로 지각하고 인식합니다.
바울이 이 근본적인 하나 됨이 성령의 작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 몸 안에 있는 영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면서 일체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 안에 한 영이 있지 않고, 귀신이 들어가면 자해하고 하나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안의 영이 하나인데, 바로 그 영이 성령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의 일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지적이 아닌 영적인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지체의 일부가 됩니다.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와 우리가 하나로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형상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으로 믿는 자들이 서로 신령한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의 비결입니다.
벧전1:18-23, 이 말씀을 보면,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런 것”이 구속과 거듭남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진정으로 구속 받고,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결과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를 거듭나게 한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과 거듭남 안에 형제 사랑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피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고, 서로를 하나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일4:19-5:1, 이 말씀을 보면,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공통된 신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거듭난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거짓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2:5) 교리적으로만 동의하고 모여서 예배만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고전12:13, 요일3:14-15) 어떤 사람에게 형제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영분별의 중요한 기준과 방법이 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강물이니까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이 내게도 흐르고, 내게 있는 성령이 그 사람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3. 함께 있으면 마음이 상쾌한가, 아니면 마음이 괴로워지는가?
“나는 육체로서 지상의 인간이 될 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쓰고 아픈 십자가를 등에 진 것이다. 십자가상의 6시간 뿐 아니라 3년간의 전도기간 뿐 아니라 실로 내가 33년의 생애에서 사람들을 영적 멸망의 비애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다. 청결한 사람은 몇 분간이라도 더러운 가운데 있으면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이 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악인 들 중에서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죄와 악을 피하여 사막과 동굴 속에 거한 것이다. 죄인이었던 사람들도 죄와 그 무리 가운데 항상 함께 하기 싫어 그들을 피하여 다시 그 중에 돌아가기를 싫어한다. 하물며 성결의 근원인 내 자신이 33년 이상 늘 죄 짓는 자들과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십자가일까 생각하여 보라.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요, 천사들도 그것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썬다 싱의 그 발 앞에 엎디어 중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착한 청년이 불량스러운 조폭 가운데 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순결한 처녀가 음탕한 창녀들 가운데 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만물보다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한 자체가 예수님께는 큰 고통이고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정도는 아니지만 영적으로 바른 사람들도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을 만나면 고통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천국입니다.(고후5:8, 계21:1-4) 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런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가 되느냐? 어느 정도는 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대로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경험한 것처럼 악한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는 번뇌하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속에 악령이 들어올 때 괴로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악령이 들어가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우리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행16:16-18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바울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을 때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영이 영분별을 하는 좋은 계기 역할을 합니다. 영의 처음 증거가 중요한 길잡이입니다. 악령이 있으면 그 존재를 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바른 사람과 있으면 사랑과 희락과 평강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마음에 고통이 옵니다. 어떤 영적인 괴로움이 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분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영적으로 혼탁하고 말이 많은 수다쟁이들을 만나면 즉각 마음이 고통스러워집니다. 명예와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그렇습니다. 영성운동을 해도 초점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면 즉각 마음이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끊을 수 없지만 친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끊어야 합니다. 만나면 영이 공허하고 그 사람의 잘못된 것이 점염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평하게 되고, 교만한 사람을 만나면 교만하게 됩니다. 음란한 사람을 만나면 음란하게 됩니다. 그런 친구들은 끊어야 합니다. 악한 친구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고전15:33) 성령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 좋은 사람을 친구 삼아야 합니다. 모든 교제는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 예수님을 닮는 것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의 친구를 닮게 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어떤 사람은 “사람을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교만해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분별을 할 때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거나 집회 참석해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오는가? 아니면 마음이 곤고해지고 괴로움이 생기는가? 이것을 잘 살펴야 놓치지 않고 영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영분별은 영분별입니다. 즉 배후에 있는 영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리고 영인 사람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리고 영분별은 혼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분별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을 바로 하려면 성급하게 혼, 머리로 하지 말고 영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영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집회에 대해서 내 영에 긁히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유심하게 살펴야 합니다.(요일2:20, 27)
영분별은 혼(성경 지식, 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초 신자들도 영분별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속에도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집회에 참석할 때 마음의 고통,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항상 그 집회가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가 잘못됐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자신 속에 귀신이 있거나 자신이 귀신과 일치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을 때도 그런 고통, 괴로움, 두려움, 어지러움, 답답함 등이 느껴집니다.(눅4:31-37, 40-41) 그러므로 제가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영분별은 여러분이 바르다는 가정 하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바른데 고통스러우면 상대방이 잘못된 것이고, 여러분이 영적으로 바르지 못할 때 영적으로 바른 사람을 만나면 여러분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영분별보다 중요한 것은 내 영이 바르게 되는 것, 내 영이 바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집회를 참석할 때, 우리에게 있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해서 형제우애가 느껴지는가? 내 영의 반응을 통해서 이것이 성령께로부터 온 것인지, 이것이 속이는 영으로부터 온 것인지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분별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도 영분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탐욕의 동기로 일하는가, 사랑의 동기로 일하는가? 이 사람의 설교를 들을 때 내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설교를 들을 때 그 시간의 설교, 예언, 기적과 상관없이 내 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리는 전부 다 영분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