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 당제의 아침 빛
나는 장도를 모른다. 구십 삼년인가 장좌리 유물 발굴 현장에서 깨진 역사의 파편을 보기 위해 장도를 처음 둘러보았을 뿐 이번 당제 답사가 그 두 번째 발걸음이다. 그래서인지 발걸음도 낯설다. 거기에 이름이 장도라. 그러면 장도는 어떤 장자 장도일까? 장(張)씨 성의 장도(?), 아니면 장군(將軍)이 살았던 장도(?). 그러면 장군섬 또는 장군도 이여야지 왜 장도일까? 요즈음의 지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 한자 투로 변하고 있어서 어쩌면 장도라는 지명도 본래 가지고 있던 우리말 이름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본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장도에 가는 길은 춥다. 신새벽 4시에 졸린 눈 비비고 껴입은 겉옷 사이로 들어오는 갯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가니 안개처럼 산과 들을 감싸고 있는 어둠이 흔들린다. 개 짖는 소리 들리고 음력 정월 초사흘 당제 지낼 당주에 정해진 다음부터 구시골 맑은 물에 부부가 함께 목욕하던 정성으로 준비한 제물을 이고 지고 들어가는 장도목은 정월 보름달에 빛난다. 그런데 이들의 정성은 화장실에 가고 오는 동안이라도 신발을 바꿔 신고 가야한다는 점에서 볼 때 참으로 지극하다 할 수 있는데 오늘과 같은 과학 시대에 있어서 이들의 행위는 진정 어디에 보내는 정성이며, 무엇을 의미할까?
뒤에서 따라오던 군고패-풍물패가 아니라며 굳이 군고패라 정정해 주는-가 연신 울려대는 굿물들의 길굿은 갈길을 재촉한다. 길은 이윽고 갈지자로 바뀌고 군고패의 전진 형태는 새을(乙)자를 그리며 문열어 굿으로 잠든 장도의 남들을 흔들고 이미 초나흘 밤부터 켜 두었던 참기름 등불이 아득히 보이면 굿을 멈춘다.
갑자기 찾아든 침묵이 상차리기를 기다린다. 지난해의 정성이 끝남으로 인한 새로운 시작이 아침을 맞으려 한다. 정월 보름달이 제 빛을 잃어 가면 이윽고 동녘이 물들고 일출은 바다에 닿아서만 살아난다. 그 옛날 신라시대에도 있었을 미명이 살아난다. 땅은 땅이었으되 궁복의 이름으로만 진(鎭)이 되었을 땅에 이미 신(神)이 되어 있는 그와 그 권속들에게 바쳐지는 제사가 차려지고 나팔이 울리니 가락에 흥이 붙기 시작한다.
잠시 흥이 붙었던 가락은 다시 느린 삼차굿으로 변하여 군중을 숙연하게 하고 제관은 들었던 칼을 쇠머리에 꽂는다. 초헌이 시작되고 제관의 재배가 끝나면 군중의 삼배로 절을 더하고 빠른 삼차굿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축을 고하기 위하여 굿을 끊고 모두 제자리에 앉는다.
어느 제사나 그렇득 축은 늘 “유세차.......”로 시작하고 “.......상향”으로 끝나는데 여기서도 만찬가지이다. 초헌이 끝나고 올려다 본 제상에는 지방이 사위(四位)가 모셔져 있다. 맨 좌측은 정년이고, 그 우로는 송징, 그 우로 장보고, 맨 우측은 혜일의 순이다.
장도 당제는 궁복을 주신으로 하는 제사이니 먼저 그를 생각해야 한다. 궁복은 장보고이다. 그리고 그는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은 그가 중국에서 활약할 때 제 이름의 첫 자인 궁의 한자말 궁(弓)을 변으로 하는 성씨를 얻어서 성은 장(張)이고 보고라는 이름은 제 이름의 두 번째 자인 복의 중국식 발음에 가까운 보고(保皐)였을 것이니 본명은 궁복이다. 다만 그가 귀국하여 진을 세우고자 했을 때 경주의 귀족에 내세울 이름이 어쩌면 필요했을까?
그 때 경주 땅은 이미 어지러워서 신라 혜공왕(765년)부터 진성왕조(897)까지 중앙 귀족에 의한 반란만도 23회에 이르렀으며 기근이 심해 자식을 팔아 연명한 사례까지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보인다. 그러니 그 시대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잡혀가고 팔려가고 전장에서 죽고는 했으리라. 그러나 귀족들의 생활은 점점 사치가 극에 달하여 더 많은 물품과 자원이 필요했으리니 그런 것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당시 필요한 무역로의 중심 위치가 행여 청해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궁복은 청해 지방의 세력가의 아들이니 당연히 청해 지방의 호족이었으리라. 나아가 동남아 무역의 패자가 되고 바닷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 당시로는 새로운 종파인 선종과 관련한 선불교 사상을 받아들여 신앙으로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 결집된 힘으로 왕권을 뒤흔들고 중앙 정권을 교체시켰고 신라 귀족들에게 위협을 하므로 두려움을 느낀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니 청해 사람들이 꿈꾸었던 낙원은 이후 유배지로만 남았다. 그리고 역사에는 언제나 역신의 땅으로만 자리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어이다. 언어는 흘러가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날이 한번 지고나면 다시 날이 밝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역사에서도 이미 민중의 의식에서 신이 되어 있는 것처럼 역신에서 비역신의 땅으로 편입 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간은 흘러 청해 사람들은 머나먼 땅으로 흩어지고 상황봉 아래 새 시대에 걸맞는 선종의 한 터전이었을 법화암이 쇠락해졌을 때 유배온 정인 이영을 따라서 그의 숙부 혜일 스님이 사지골에 중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살면서 아래와 같은 상왕봉(象王峰)시를 남겼다.
“푸른 나무 우거졌는데 구름과 노을은 몇 해나 지났나.
달뜨니 불호가 밝고 탑을 도니 코끼리 머리도 돈다.
시냇물은 진게를 외우고 바위꽃은 자리를 꾸몄다.
아름다운 이름은 스스로 원묘라. 부질없이 전함을 말하지 말라.“
달리 전해지는 전적이 없으니 혜일을 밝혀 알 수는 없다. 다만 민속이라 할 만한 당제에 그의 지방이 보임은 어떤 이유일까? 민속과 불교라. 물론 우리나라의 불교가 민속과 결합을 하고 있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당제에 지방을 써가면서까지 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을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혜일과 장도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줄 사람도 없고 읽을 책도 없으니 단지 추정해 본다면 청해진 시대를 목마르게 기대하던 민중들의 생각이 점차로 포기되면서 혜일이 그들의 넋을 달래주었으리라 믿는 사람들의 심성이 이루어 놓은 행복한 결합이 아닐까?
정년은 궁복의 친구이자 동료였고 나중 궁복의 아래에서 그를 도와 청해진의 흥성에 이바지했던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송징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 지금껏 알려져 오는 것은 고려시대 사람으로 항몽 대열의 선두에 선 삼별초의 장수라 했다. 그런데 현대의 사가들이 면밀히 살펴 본 결과 삼별초의 장수중에 송징은 없다 한다. 완도에서 송징을 모신 당은 사후도, 대야리, 정도리, 장좌리 장도, 완도읍 등 줄잡아도 예닐곱은 되는데 그렇다면 그동안 모두 실체가 없는 당을 모셨다는 말이 된다. 당이라는 게 실체가 없는 당할미를 모시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장도처럼 지방을 모시고 정식으로 제를 올리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면 송징이라는 이름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 송징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말하는 이름으로 대신 사용된 것은 아닐까? 궁복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시대에 궁복을 알리는 행위로 선택되었던 이름. 개별화 된 사건을 드러냄으로 보편성을 얻고자 했던 행위,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들의 가슴속에 궁복을 간직시키는 불안정한 작업이면서 사실은 안정된 일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만약 살아 있었고 실체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논의는 다시 해야 하리라.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에 기록되고 인정 되어진 사람이 아닌 민중이 세운 사람이고, 민중을 위하여 쓰인 사람이라는 점이다. 주위에 부면 역사에 기록되어지지 않았음에도 구전되어오는 영웅들이 얼마나 많던가? 역신이라는 이름으로,...................
종헌까지 마침으로 제사는 실질적으로 끝났다. 다만 군중들과 굿패들이 음식을 나누고 한데 어우러져 잘 노는 일만 남았다. 제가 끝난 음식으로 산천초목의 신들에게까지 골고루 나누고 나면 사람들의 차지이고 이어 떠나는 굿을 한다.
사당 안을 세 바퀴, 사당 밖을 세 바퀴 돌면서 당산을 나가는데 이 가락에 이르러서야 축제가 시작됨이 보인다. 길굿으로 굿이 시작되고 오는 길에서도 모두 일자의 전진 형태였지 지금처럼 원을 그리지는 않았다. 원은 영원성을 상징하며 완결성을 추구한다. 안에서 도는 작은 원은 밖에서 도는 큰 원으로 확산되고 큰 원은 다시 장도를 감싸고도는 바닷물과 이어진다. 바닷물은 끊임없이 순환 되고 생명의 지속성을 바라며 돈다. 그리고 그 바램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기만 하다. 물이 충분히 들어 배가 들어오면 원을 풀고 새을(乙)자를 그리며 평평한 장소로 내려가 노는 벅구놀음이 당에서보다 큰 원으로 퍼진다. 원이 퍼지면 더 이상 원은 아니니 그것은 장도에서의 의식이 모두 끝났음을 의미한다.
선창에 도착한 굿패는 샘으로 향하여 샘굿, 사장나무 아래서 한바탕 놀고 나니 바람이 분다. 장좌리 사람들의 바램을 담은 바람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일을 쉰 사람들의 손등은 당제 구경 온 낯선 사람들의 흰 손에 비추어 더욱 까맣다. 구경 온 사람들의 당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직은 그 것을 박제화, 화석화 시키려는 기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쇠를 치던 상쇠의 손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장좌리 사람들이 나이가 더 들고 사람들의 수효가 줄어 당주 지낼 사람을 고르는 게 어렵고 군고패가 한패가 되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그 때에도 당제가 남아 있을까? 농사짓는 사람 다 떠나고 갯일 하는 사람 없으면 그 때에도 당제가 남아 있을까? 그 때는 다른 민속놀이처럼 극장으로 구경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부락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지내던 실질적인 연희가 삶 속에서 살아 있었던 생것에서 소금 뿌리고 말려 냉장 되어버린 가공품으로 변질된 추억 속의 당제로 남을 것이니,.........
하루 종일 지신밟기를 하고 저녁에 당목에서 갯제를 지낸다는 말을 듣고서도 돌아오는 발길은 추웠다.
첫댓글 장좌리 정월 보름날 당제는 지금도 유래 되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올해에도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