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4 주일설교
광야 길로 가거라
사도행전 8:26~40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과연 이 내용을 설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다가 이 설교는 여러분에게 선포하기보다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메시지이고 함께 말씀 앞에 서 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전도를 잘하고 싶어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여러분은 전도를 많이 하고 싶죠? 그런데 잘 안 되죠? 전도하려고 해도 주위에 마땅한 대상이 없죠? 저나 여러분이나 사정이 비슷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도행전에는 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주변에 전도할 대상도 많았고 또 전도를 잘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했을까요? 사도행전은 성령님과 동행한 초대교회가 어떻게 전도했는지 다양한 전도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도의 원리를 배워봅니다. 우리가 한 가지를 잘 배우면 나머지는 쉬워집니다.
빌립은 원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습니다. 초대교회가 교회의 재정을 맡기려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을 뽑았을 때 일곱 명 가운데 스데반 다음으로 표가 많이 나온 사람이 빌립입니다.
처음에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웠을 때 초대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돌에 맞아 순교했고 유대인들은 신자를 사냥하듯이 체포하여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신자들 잡으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은 살기 위해 살던 집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상당수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박해를 피하여 도망갔으면서도 마치 전도하려고 파송된 사람처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로 가서 전도했는데 수많은 사람이 빌립을 따랐습니다. 그는 사도도 아니고 평신도였지만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빌립을 따르는 사람 가운데는 특히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 마술사는 얼마나 능력이 많았든지 오랫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시몬이 마술을 버리고 빌립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더니 사마리아에 와서 더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이렇게 전도자로 활동하기 전에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쯤 되면 빌립은 전도자로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풀리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사마리아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란 사람이 살지 못하고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는 곳입니다.
본문 26절과 27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 안 보이시나요? 거기에는 행간(space between lines)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행간에 좀 서 보세요. 물론 성령 충만한 빌립은 고민하지 않고 즉각 순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라면 매우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빌립이 예루살렘에 살 때 원래 사업가였는지, 학자였는지 성경이 말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자기 일에 인정받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던 사람이 교회에서도 중직을 맡아 충성했고 교회도 부흥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사마리아로 온 이후에도 전도했더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고 수많은 사람이 따르며 특히 엄청난 능력을 행하던 마술사도 마술을 버리고 빌립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사마리아를 버리고 광야 길로 가라니요? 이것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사는 이유도 목적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다녀오라고도 한 것도 아닙니다. 사마리아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40절을 보면 빌립은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소도와 욥바와 가이사랴까지 지중해 주변 도시를 돌며 계속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잘나가는 전도자에게 한창 부흥하는 교회를 버리고 저 남쪽에 있는 광야 길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더 큰 도시로 가라고 하신 것도 아니라 낙후된 농촌이나 어촌마을로 가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광야 길로 왜 가라고 하셨을까요? 여러분은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저 같으면 천사의 말을 순종해야 하는지 고민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금 당장 순종할 것만 지시하시지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스터플랜을 설명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마스터플랜은 오로지 마지막에 될 일 뿐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이해 안 되는 일과 불합리한 일이 많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최후에 승리한다는 것뿐입니다.
자, 한번 따라 해보세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지금 순종할 과제와/ 최후에 승리한다는 사실 뿐이다.”
빌립은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서 광야 길로 출발했습니다. 27절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여행할 짐을 꾸렸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완전히 떠나기 위해 정들었던 사람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는 것입니다. 목적지도 모르는 광야 길로, 한 마디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난 것입니다.
빌립은 발걸음도 가볍게 갔을까요? 터덜터덜 걸어갔을까요? “주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했을까요? “와, 주님 제게 또 무슨 놀라운 일을 주시렵니까?”라고 하면서 갔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하여간 빌립은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광야 길로 갔습니다. 민가도 없고 행인도 없는 곳에 갔습니다. 맛집도 없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없는 곳에 갔습니다. 누군가 만날 사람도 없는 장소로 갔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는 곳에 갔습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제법 화려한 마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그 마차에 가까이 가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은 마차를 놓칠새라 힘껏 달려서(30절) 마차 곁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마차에 탄 사람은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였습니다.
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에디오피아는 왕을 신성시해서 왕은 세속 정치에 신경 쓰지 않고 왕의 어머니가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어머니가 여왕인 셈인데 그 여왕을 간다게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은 간다게의 모든 재산을 책임지는 내시였습니다.
간다게의 내시는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이었고 수레에서 성경 이사야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성경 두루마리를 소유하고 수레를 타고 가면서도 성경을 읽을 정도이니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죠.
빌립은 그 내시에게 인사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말씀이 잘 이해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수레를 멈추더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성경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수레에 올라앉아서 좀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내시가 읽고 있던 내용은 이사야 53:7~8의 말씀인데 본문 32~33절에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이죠. 이 두 구절만 읽은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를 계속 읽었으니 내시가 보기에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씨였습니다. 뜻을 잘 몰라도 열심히 읽는 그분은 마음 바탕이 좋은 분입니다. 저도 제발 이런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성경을 사모하며 성경을 가르쳐달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빌립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습니다. 사마리아를 떠날 때는 암담했는데 바로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려고 주님이 나를 보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장 잘 예언한 선지자인데 내시가 마침 이사야 두루마리를 소장한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100% 믿던 내시는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리나는 사실, 그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였으나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사실, 지금은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셔서 사도들이 방언도 하고 각종 표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빌립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빌립은 내시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성경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예수 믿기로 약속하면 6개월 동안 학습 기간을 가진 후에 세례를 주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면 바로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세례는 모두 침수세례입니다. 수레가 가는 길에서 마침 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자 내시가 세례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내시의 믿음을 확인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간다게의 모든 재산을 책임지는 내시는 큰 부자입니다. 이쯤 되면 빌립은 내시에게 굉장한 은인입니다. 많은 선물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습니다. 이제 빌립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성령님은 즉시 빌립을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교회 시절에만 있었고 빌립에게 한 번만 있은 현상입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서 전도했고 해변 길을 따라 여러 도시에 전도하면서 저 북쪽의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빌립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시는 너무나 기뻐하면서 자기 나라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설명이 없지만 내시는 틀림없이 에디오피아에 예수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온 나라를 복음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빌립에게 부흥하던 사마리아를 떠나라고 하신 것은 한 나라를 전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발견한 전도의 원리를 정리해봅시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를 전도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천사가 찾아오지도 않고 영음을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이 우리를 전도의 현장으로 보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업무상 가야 가는 길 (출근, 출장)
2) 어떤 사람이 만나자고 부를 때
3) 왠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4) 추진하는 일이 막혀서 돌아가야 할 때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려고 성령님이 막으셨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성령님이 두 팔을 벌리고 막은 것은 아니겠지요. 환경이 열리지 않는 것을 두고 바울은 성령님이 막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길이 열리는 쪽으로 갔습니다. 덕분에 복음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빌립의 전도에서 발견하는 전도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자의 모든 움직임은 성령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성령님이 인도하는 길이며 거기에는 전도 대상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감하지 않으면 대상자를 보고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해 표어처럼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2. 빌립이 발견한 전도 대상자는 하나님께는 열려있으나 예수님은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전도해야 하지만 열려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대화 중에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그리고 잡다한 소리를 다 들어주면 자기 이야기만 하고 헤어지려 할 것입니다. 물론 계속해서 만나는 사람은 말을 들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사람은 잡다한 이야기에 시간을 다 빼앗기기보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격이 있는지 고민한 것은 지난 주간에 이런 생각을 했지만, 간증할만한 성공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립의 전도 원리를 발견한 저와 여러분이 이 원리를 기억하며 내시를 만나기 원합니다.
“주여, 제가 가는 길에서 내시를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