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雲의 境地 고창에 다다르다
2011.11.26. 토요일 잠실종합운동장역 7시30분 출발
역사답사회팀에 부부동반 답사나들이
어디: 전북고창
고인돌유적지➡중식(청보릿골보리밥정식)➡고창읍성➡선운사➡도솔암
1편: 고인돌 유적지, 고창읍성
2편: 선운사, 도솔암
1편:고창 고인돌 유적지와 고창읍성(모양성)을 찾아가다.
일행 60명이 관광버스 두대로 떠나는 답사기행이다.
홀로 둘이 몇몇이.. 그리고 이처럼 단체로 떠나는 여행등
다양한 여행을 즐기게 되는데 반려자의 팀에 이번엔 함께 한다.
어둠과 함께 집을 나선다
지하철을 3번 갈아타고 만남장소에 도착하니 날이 밝아 있었다.
반려자님 따라 더러 다녔기에
이미 구면이 된 지인님들관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이번엔 꼭 함께 해 달란다.
하모연주까지 부탁 받은터라
작은 은빛악기도 챙기며 답사길에 오른다.
2호차에 오른다.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출발 중간에 교통정체로 시간이 좀 딜레이 되었다.
구름낀 흐린날, 햇님은 구름속에서 하얀 박꽃처럼 떠 있었다.
해가 우릴 따라 가는건지 구름이 흘러가는건지 자동차가 달리니까
모두가 같이 흐른다. 하늘이 하나의 문학으로 흐르는 답사길이었다.
어느사이 백제부여 휴게소에 이르게 된다.
달리는 중간에 교통사고차들로 지체가 되어 1시간이 지연된
4시간만에 고창 고인돌유적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고창고인돌유적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일대
고인돌이란
일반적으로 판석이나 지석을 이용해 상석을 받치고 있는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로 불리고 중국에서는 석붕 또는 대석개묘라 하며,
유럽 등지에서는 Dolmen이라 불리고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접할 수 있는 곳이며 고인돌 분포가 조밀하고
거석화된 고인돌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는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의 삶을 조명하고 묘제 양식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며 축조기법을 통해 기초 물리학, 역학 또는
건축술과 같은 현대기술의 토대를 이해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또한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는
고인돌 시대의 생활방식을 포함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고인돌의 축조시기를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8세기 이전에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창고인돌유적은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고창고인돌유적지|작성자 고갯마루블루베리
바로 유적지 초입에 있는 계산리 지석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초대형급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고창고인돌유적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르모르 열차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움집·가축우리 등과
목교·해자 등으로 꾸민 면적 1,231.96㎡의 선사마을 재현공간
가죽가공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흙으로 만든 방추차가 출토되고 있어
직조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직조제품 외에
사냥해서 얻은 짐승의 가죽을 이용하여 의복, 신발 등 생활용품을
일부 제작하여 쓰기도 하였다.
사냥을 하거나 기르던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다듬는 것은
마을 구성원 동동의 작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행을 놓쳐 급히 뒤 따르느라 여기까지만..나올때 다시 들리기로 한다.
이동중 예향천리 마실길 종합안내도를 만난다.
자연석으로 만든 의자
조교수님께서 명 해설중
유골을 굄돌 사이에 놓고 판석으로 막아 놓은 밑부분
고인돌공원에서 회원들의 진지한 여러 모습들..
고인돌교를 건너서 다시 입구로 나가다가 야외 선사마을을 둘러 본다.
움집 안엔..
고창 고인돌 박물관
고인돌 유적지관광을 마치고 중식 해결차 고창군 신림저수지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고창 청보릿골 보리밥집으로 이동이다.
중식시간이 조금 지연되어 속이 출출하다.
청보릿골 예약폰 063 - 564 - 5200
이집의 대표 메뉴인 보리밥을 맛있게 먹었다.
찰보리를 압력솥으로 밥을 지어 촉촉하고 쫄깃한 밥맛이 일품..6천냥
고창읍성(모양성)으로 이동
고창읍성인 모양성
사적 제145호..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고창읍성(모양산성)
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높이 3.6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과, 1453년(단종 1)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벽에 "濟州始", "和順始", "羅州始", "癸酉所築宋芝政"이라고
새겨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계유년에 전라도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으로 짐작된다.
동쪽으로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門)과 6치(雉),
2군데의 수구문(水口門)과 옹성(甕城) 등이 있다. 1976년 발굴에서
서문터의 기둥 주춧돌과 문짝 달던 위치, 동문터의 기둥 주춧돌을 확인했다.
성벽은 제법 잘 남아 있는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을 쓰거나 초석·당간지주를
깨어서 쓴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읍성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
고창에서는 여자들의 성벽밟기 풍습이 전해내려오는데,
이는 한 해의 재앙·질병을 막는 의식으로 여겨진다.
답성놀이 시작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
는 전설이 있습니다.
모양성 위에서 내려다 본 고창시내 전경..
성 위에서..
위 글을 옮김
그때 관청에서는...
때는 조선시대 후기, 어느날 고창현 내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벌어진다.
나라님이 관내의 한 과부에게 연로한 시부모를 잘 모시고 모범이
되었다는 이유로 상을 내리고 열녀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고 치하하기 위해
현감은 그 열녀와 유지를 모시고 잔치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관청의 이방과 노비들은 물품을 조달하랴 잔치를 준비하랴
몹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선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성된 연못
가을이 화려한 차림으로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쁜 가을의 영접을 받는다.
성의 서쪽에 있는 척화비
(북문인 공북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다. 그위에는 향청이 있다)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碑石)이다. 1871년(고종 8) 건립한, 화강석을 재료로
길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이 되게 만들었다.
1863년 조선 고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집권할 당시
국제 정세는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미국,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며,
때에 따라 무력 도발 및 시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년; 고종 3년)의 발생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년) 이후
‘수교통상반대’로 정책 기조를 급선회했다.
특히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수교와 통상을
금하였고,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음력 4월에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다.
그 후 1882년(고종 19년 :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조선이 각국과 교통하게 됨에 모두 철수되었다. 그 중 서울에 세웠던 것은
1882년 음력 8월 15일에 종로 보신각(普信閣) 부근에 파묻었다.
이것이 1915년 양력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다.
이 밖에 경기도 강화도, 경상도 동래군·함양군·부산진·경주 등지에서
서울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것들이 1925년경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척화비에는 주문(主文)으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그 다음 작은 글자로 비의 옆면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라
적혀있다.
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당시 조선의 불안정했던 대외 관계를 보여 준다.
판소리 여섯마당을 집대성한 '신재효 고택'
한국 고전 음악의 산실인 고창 신재효 고택..
신재효는 판소리의 창극화와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하는 등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고창에 위치한 이 건물은 동리 신재효선생(1812~1884)의 고택으로
고창읍성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동리선생은 종래 계통없이 불려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박타령, 토끼타령,적벽가등 여섯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으로 판소리 사설문학을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춘향가,토끼타령,심청전 등을 창극화한 판소리 사상 뛰어난 공적을
이룩한 분이다. 현재 남아있는 현존건물은
원래 사랑채였던 것으로 보이며, 정면 5칸, 측면2칸으로 되어 있다.
굴뚝..
후학을 가르치는 신재효선생의 모습과 그 제자들..
신재효
본관 평산(平山).호 동리(桐里)·호장(戶長).본명 백원(百源).전북 고창(高敞)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워《사서삼경(四書三經)》《제자백가어(諸子百家語)》에
능통하였으며, 1850년까지 치산(治産)에 솜씨를 보여 많은 가산을 모았고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1876년(고종 13) 기민(飢民)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중추부동지사(中樞芬知事)를 겸직하였다.
그는 종래 계통없이 불러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춘향가》《심청가》
《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6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과 어구를 실감나게 고쳐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하였다.
특히《박타령》《토끼타령》 등은 창극화까지 하였으며, 《광대가(廣大歌)》
《도리화가(桃李花歌)》 등의 판소리단가와 판소리 가집(歌集)인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문하에서 김세종(金世宗) ·전해종(全海宗) ·진채선(陳彩仙) ·허금파(許錦波)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출처] 신재효 고택_전북 고창|작성자 엽토51
참 멋스럽고 예쁜데..
이름을 묻질 못했다..
이름을 불러 주고 싶은데..
고창 판소리 박물관이 저기에..
고창 선운산 진흥굴앞에서 필자
고창 고인돌유적지를 거쳐 고창읍성인 모양성과
판소리 신재효 고택을 탐방하고 선운산 도솔암으로 이동이다.
도솔암과 선운사는 2편에 이어집니다.
感謝합니다
글ㆍ사진: 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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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진순의 妻 "하모니카의 여인" 김영희 입니다.
남편과 별도로 제작된 여행기록문으로 그날의 감흥에 젖으며
함께 한 회원님들께 안부와 감사를 드립니다.
멋지고 알차고 아름다운 답사길이 오래도록 기억속에 남을 것입니다.
매끄러운 답사길로 안내하고
기획해 주신 회장님이하 운영자님 그리고 애써주신
관계자님께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 날을 다시 되뇌이며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려답사회 홧팅!!!
* 제가 자리잡고 올리는
어느대형 한국대표 문학 사이트 여행지안내방에 올리기 위해
제작된 게시물이어서 회원님 정면 인물사진은 피한 게시물입니다.
고창답사, 한 편의 그 장엄한 서사가 여기에 펼쳐지는군요...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계시니 고려답사회의 한없는 영광입니다...
김영희님과 권진순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회원 가입이 안되어 남편닉으로 입장입니다.
김영희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곳으로 안내해 주셔서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남편따라 가길 참 잘했단 생각이 지금도 지워질 줄 모릅니다.
고운정으로 반겨주셔서 고마움은 헤아릴 수가 없네요.
고답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며...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