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병
정동식
아홉 남매 중에 복병이 한 사람 있었다. 둘째 처남이 요지부동이다. 그는 장모님의 치매 발병 전까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직장을 다녔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다. 장모님의 치매 발병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고 누나인 아내에게도 가장 가깝고 든든한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장인어른의 국립묘지 이장문제에 대해 아내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이장을 원치 않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강한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 벽창호 같은 생각이 들어 순탄한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분위기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지난해부터 장인어른의 국립묘지 이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벌써 한 해가 훌쩍 지나 1년이 다 되어간다. 참전유공자 등록은 무사히 끝났으나 국립묘지 이장 절차는 쉽지 않았다. 우선 적용되는 법률이 달랐다. 참전유공자라고 모두 국립묘지에 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보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더 엄격했다. 호국원에서 자체적으로 심의한 결과 미흡한 사항이 있다고 한다. 보완해야 할 자료는 아내와 큰처남의 기억을 토대로 탄원서를 제출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인 중앙심의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해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비대상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는 담당자의 끝말이 마음에 걸려 우리는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국립호국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러나 괜히 받고 싶지 않았다. 기분 좋지 않은 소식 같아서였다. 지난번에도 아침에 달갑지 않은 소식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망설이다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받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국립호국원 이장 담당자입니다. OOO님께서 신청하신 이장이 승인되었습니다. 가족과 상의해서 언제든지 절차를 밟고 오시면 됩니다.” 기뻐해야 할 순간임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있어서 그런 걸까? 자세한 내용은 잠시 뒤 안내 문자로 전달되었다.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코가 시큰해졌다. 눈물도 핑 돌았다. 그동안 처가에 특별히 잘한 일이 없었는데 이것으로 사람 노릇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추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마음같이 쉽지 않았다. 둘째 처남은 그동안 추진사항에 대해 별말이 없다가 이장 승인이 났다고 하자 반대의사를 명확하게 표시했다.
조용히 돌이켜 보니 그의 이런 행동에는 전조현상이 있었던 것 같다. 올 초 국가유공자 등록증이 시골에 도착했는데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우리는 눈이 빠지게 병무청 그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자초지종을 캐물었더니 쓸데없이 그런 거 왜 신청해서 골치 아프게 하느냐, 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처남의 생각은 너무나 판이했다. 그의 생각과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우리는 온힘을 다해 추진하는 일인데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일로 여기고 있었다. 우리 내외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으나 지켜보고 있다가 결정적 한 방을 날린 셈이다. 복병과의 첫 번째 만남은 이렇게 진행 사실을 알려주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접시꽃이 한창 필 무렵 장모님 문안 인사차 그가 왔다. 자정 무렵 아내가 얘기를 먼저 꺼냈다. 밤이 깊어진 만큼 토론도 깊어졌다. 점점 극과 극으로 치닫는다. 나는 할 수 없이 연합군처럼 개입했다.
처남의 얘기를 들어보니 대체적인 주장은 이랬다. 국가에서 관리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며 화산재 날리는 땅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것이다. 어차피 영원히 관리해 주지 않고 육지에서도 자주 찾아뵙지 않는데 섬으로 가면 더 찾아뵙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 주장도 있었다. 무언가 숨어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처남의 의견을 존중한다며 속에 있는 다른 얘기가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산소를 옮기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예전에 친구가 시골집 화장실을 옮겼는데 멀쩡하던 귀가 들리지 않는다더라. 괜히 잘 있는 산소 손댔다가 가족에게 화가 미칠 수 있으니 걱정된다.’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처남의 걱정을 누그러뜨릴 묘책이 필요했다. 만일 행사를 진행하더라도 전문가의 조언을 받고 좋은 날을 택일하여 결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니 처남도 다른 사람과 폭넓게 얘기를 나누어 보라고 권유했다.
처남의 얘기에 한편으로 수긍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불안과 기우일 수 있다. 복병은 본진을 치는 게 상례인데 첨병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세다. 좀처럼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증조부모 이상 조상 묘지’를 돌보지 않는 국민이 열에 여덟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국가의 호국 영령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구태여 마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동안 정성과 시간을 많이 들였다. 어렵게 이루어 낸 결실을 그냥 두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복병과 슬기로운 협상을 이끌 수 있는 지혜는 어디 없을까?
조선의 낭자
정동식
어느 남자의 장모님이 세 명이다. 한 명이던 장모님이 최근 그가 결혼함으로써 졸지에 두 분이 더 생겼다. 오늘 종영한 모 방송 일일연속극의 마지막 편 결말이다. 이런 일이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현실이라면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듯하다.
장모가 여러 명이 된 사연은 이렇다. 주인공 ‘강산’은 아내가 행방불명된 지 십여 년이 넘었고 딸과 함께 처가에서 장모와 같이 생활한다. 같이 사는 이 장모가 강산의 첫 번째 장모다.
오로지 딸을 위해 열심히 살던 그에게 사랑의 기회가 찾아온다. 길거리에서 기업 회장 한 분의 위급상황을 도와주어 그 집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 집에 어릴 때부터 입양된 여자애가 있었으니 이름은 ‘미래’다. 강산은 그녀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싹터 연속극 말미에 화촉을 밝혀 부부가 된다. 미래의 양어머니가 혼인으로 맺어진 강산의 두 번째 장모인 셈이다.
미래는 우연한 기회에 얼굴도 모르는 친아버지와 상봉한다. 미래의 친아버지는 홀로 살다가 느지막하게 좋은 여자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니 이 여자가 강산의 세 번째 장모가 되었다. 이 극에서 여주인공 미래의 친어머니는 등장하지 않는다. 만일 작가가 극 중에 출연시켰다면 장모가 네 명이 되지만 너무 스토리가 복잡하니 등장인물에서 배제한 듯하다.
연속극은 여성들이 좋아하고 즐겨 본다. 일일연속극 뿐 아니라 월화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연속극 등 요일마다 연속극이 판을 친다. 예전에 최수종이 주연한 ‘첫사랑’을 방영할 때쯤이면 술집이 텅 빌 정도였고 버스나 전철에서도 승객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무려 시청률이 65.8%였다니 안방극장의 인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나만 빼고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당시 지인들의 모임에 가면 연속극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는 여성들이 가끔 있었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 줄거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건성으로 들으면서 속으로는 얘깃거리가 얼마나 없으면 바보상자를 소재로 삼을까 싶었다. 남자들이라면 거나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치국평천하를 논하거나 노래방이나 가요주점에서 음주 가무를 즐겨야 잘 나가는 사내로 생각했다.
설령 TV를 보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알기 위해 저녁 뉴스는 놓치지 않았다. 스포츠를 좋아하니 국가대표 축구경기는 열렬히 응원했고 프리미어리그를 관람하며 유명 선수들의 환상적 플레이에 환호하기도 했다.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바보상자를 대하는 진정한 남자의 모습이라고 여겼다.
언젠가 어느 지인에게 들은 얘기다. 자고로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고, 비빔밥도 버무리지 말라는 훈육을 어릴 때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자들의 전유물에 가까운 연속극에 흠뻑 빠져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싶다
조선의 남자가 매일 연속극을 보는 일이 보편적 일상은 아니다. 더더구나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도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쩌다 백부 작이 넘는 일일연속극을 거의 다 보게 되었다. 혹여 못 보는 날이 있으면 재방 시간을 기억했다가 몰아보기를 할 만큼 연속극 마니아가 되었으니 참 아이로니컬하다.
과거와 달리 요즘 연속극은 우리가 우려할 만큼 허무맹랑하지는 않다. 간혹 막장 프로도 있지만, 가족 드라마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하다. 조손이 서로 친근하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나 입양아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 주는 연기에서 선한 영향력을 받기도 한다. 그만큼 순기능도 많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가끔 약속도 없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저녁에 방영될 연속극을 떠올린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어제의 결말이 궁금해지며 일말의 기대감에 빙그레 미소가 머금어지기까지 한다.
연속극을 시청할 때만큼은 독서 할 때처럼 일상의 근심을 잊는다. 오로지 한곳에 집중할 수 있으니 그런 것 같다. 드라마 세계로 깊숙하게 빠져 출연 배우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 나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오늘 마지막 편이 끝난 TV 앞에서 어느덧 조선의 낭자娘子가 된 나를 발견하며 볼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조선의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