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동궁과 월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변하여 온 과정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문무왕(文武王)이 서기 674년에 궁전인 경주 월성의 동쪽에 호수를 먼저 만들었습니다. 이후 서기 679년에 같은 위치에 동궁을 별궁으로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고 하지요.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文武王) 19년(서기 679년) 08월」 |
이때는 이른바 삼국통일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흐른 때입니다. 삼국통일 시점만 해도 당나라가 다시 쳐들어올 염려가 있었지요. 하지만 서기 679년 시점에서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공식 철수와 신라 공격 포기로 사실상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나긴 삼국 통일전쟁이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이었지요. 참고로 웅진도독부는 발해에 의해 완전히 문을 닫은 모양입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여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은 감히 구국(舊國: 옛 백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高麗: 여기서는 당나라 지배하의 옛 고구려 땅)에 맡겨 다스리고 있다가 죽었다. (측천)무후 때 또 그(부여륭)의 손자 (부여)경이 (대방군)왕을 물려받았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에게 나누어진 바 되어 백제는 마침내 끊어졌다(망했다). 『신당서(新唐書)』 권220(卷二百二十) 「열전 제145(列傳第一百四十五) 동이(東夷)/백제(百濟)」, P.6201. |
풀어서 말하면 서기 684년~704년 어느 시기에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은 웅진도독 대방군왕의 벼슬을 당나라로부터 제공받았지만, 웅진도독부가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모두 잠식당해 없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발해말갈’은 당나라의 악의적인 표기가 있는 대로 서기 698년에 창업된 그 발해가 맞지요.
결국 건안성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는 고왕 대조영이 통치하던 시기에 발해군에게 공격당해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지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이도학 명예교수의 학설입니다. 이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 시기를 서기 8세기 중반~9세기 초로 봐야한다는 주장을 했지요. 웅진도독부를 백제 부흥의 하나로 본다면 말입니다.
백제 문제야 어떻든 문무왕은 평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궁인 경주 월성의 규모가 협소했던 것을 확장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전의 백제 의자왕도 그렇고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도 그렇고 공연히 건물 특히 궁궐에 대해 확장공사를 한 것이 아니지요. 경주 월성과 구별하여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요.
② 신라 문무왕과 종교 - 용왕전(龍王殿)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도 그런 성향은 있었지만, 문무왕은 김유신의 별세를 전후하여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대책도 잊지 않았지만요. 앞에서 언급한 금동판불(金銅板佛)과 함께 주목할만한 종교시설이나 상징은 바로 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용왕전(龍王殿)이라는 건물입니다.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고 믿어진 문무왕이 만든 곳이라 흥미롭지요.
이 용왕전에 대한 출처는 『못 속에서 찾은 신라』입니다. 아울러 「오마이뉴스」, 22.03.15 11:25 기사도 참고했고요. 경주 형산 왕룡사나 여수 돌산읍 영월사의 용왕전을 보면 여기서도 일종의 무불융합(巫佛融合) 내지 선불융합(仙佛融合)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용왕전(龍王殿)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용왕을 받든 전각이지요.
전각(殿閣)은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을 말합니다. 즉 신을 인간의 으뜸인 왕에 비겨 그 권위를 높인 것이지요. 본래 용왕은 물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따라서 바다에서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속성이 있다보니 용왕은 바람과 물을 관장하는 농업의 신이기도 합니다. 이러던 용왕이 불교와 융합하면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요.
불교에서는 용왕이 불교에 돌아가 몸을 의지하여 부처와 불제자들을 보호하는 호법신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호법신(護法神)은 불법(불교)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라고 하지요. 이 호법신이 무리로 있으면 즉 떼를 지어 나오면 ‘무리 중(衆)’자를 써서 호법신중(護法神衆) 또는 신중(神衆)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왕은 특히 관세음보살을 보좌하는 우보처로서 신앙되고 있다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보살이라지요.이 관세음보살의 측근들을 불교에서는 좌보처(左補處)와 우보처(右輔處)라고 합니다. 제가 거칠게 이해한 바로는 극락세계의 넘버2와 넘버3라고 보면 될 듯하고요. 용왕은 번뇌와 굴레를 벗어난 극락세계의 3인자인 셈입니다.
용왕에 대한 제사는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유물로도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안압지(기러기와 오리의 연못)에서 출토된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와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및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의 명문이 주목을 끌었지요. 자물쇠와 관련해서 보면 『삼국사기』에서는 다소 늦은 시기에 동궁아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9 「신라본기 제9 경덕왕(景德王) 11년(서기 752년) 08월」 |
동궁아는 남북국시대 남국 신라의 관서입니다. 관서(官署)는 관청과 그 부속 기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요. 이 동궁아는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이 동궁아일명 자물쇠의 명문은 월지 지역이 동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요. 한편 세택은 신라의 관서로 어룡성(御龍省)에 소속되어 있던 근시(近侍) 조직의 하나입니다.
어룡성은 신라 때에 내성에 속하던 관아입니다. 내성(內省)은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세 궁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지요. 대궁은 신라시대 왕성(王城)인 월성(月城) 안에 있던 정궁(正宮)입니다. 정궁은 궁중의 의식을 행하던 정전(正殿)이지요. 양궁은 왕도 6부의 하나인 양부(梁部)에 둔 별궁입니다. 별궁은 특별히 따로 지은 궁전이고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