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스토리는 우주로 출발했습니다 (-_-)만..처음부터 약간은 염두에 두었던 방향이고,
지금껏 조금씩 그런 내용을 중간에 집어넣었으니...눈치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쪼록 즐감해주세요.. 아울러 이거 쓰다 은근히 쌓인 스트레스 풀기위해 조금 날카롭게
끄적인 [미니시리즈]도 사랑해주시구(.....책선전 하는 사람같다..)
<메마르고 하얀 목조르기개>의 2부(뒷이야기)를 조금 끄적거린 것을 다음 블로그에 공개한 적이
있는데, http://time24.egloos.com/ 에 올려놓았으니 현정,과 서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들어가서 읽어보셔도 ^^ ......단...연재는 아닙니다....1년 반 전에 입원했을 때 심심해서 썼던 것.
서론이 길어서 죄송합니다(_ _)
* * * *
" ...사이코..뭐라고요? "
정신병, 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내게, 조교는 이해를 못하는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정확한 발음으로 그 단어를 들려주었다.
" 사이코 키네시스. 염력이라고 하면, 들어보셨죠?"
들어봤다. 사이코 드라마, 사이코 메트리스(이건 아닌가?), 텔레파시, 염력.
영화나 소설이나 만화에서, 손을 쓰지 않고 물건을 움직인다든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읽는다든가-.
그런데 궁금한 것은, 내가 왜 난데없이 그런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하고,
그런 것이 잔뜩 쓰여진 보고서를 읽어야 하느냔 말이다.
조교는 내 눈빛에서 이미 그런 것들을 읽었는지, '너무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조교란 사람이, 그다지 쉽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다. 무엇보다 '회사'와 '아이들'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것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그의 프로필- 이과대를 졸업해서, '평범한 수재'의 길을 걸어
연구원에 입학해 조교가 되었다는, 너무나 무난한 경력조차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 ....사실, 본사 측에서는 끝까지 과장님께도 프로젝트를 숨기고 진행하길 원했지만,
이걸 과장님께 알리는 것은 제 독단적인 선택에 의해서입니다. "
" ...? "
" 적어도, '김이선 씨' 께서는, 이 연구의 실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
무슨 소리일까.
나는 아직, 그애들이 하는 프로젝트의 내용이며, 규모조차 알지 못하는데
거기에 더 알아야 할 '실제'가 있다는 것일까.
조교는 안경을 벗고, 가운의 윗주머니에서 작은 천을 꺼내서 안경에 서린
김과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었다.
안경을 벗은 그는,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메마른 인상으로 보였다.
( 보통은, 안경을 쓸 때 차가운 인상이 되는 것과 반대랄까-)
" 저기, 제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그 '애들'의 상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 뿐,
그 이상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하물며 본사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
" -유신희. "
뜬금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그애의 이름에,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
놀란다. 왜, 갑자기 그 애의 이름을 여기서..?
" ...그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어..떤 생각이라니. "
" 뭔가가, 떠오른다거나, 마음에 동요가 있다거나-."
너무나 차분한 조교의 목소리와 달리, 나는 침을 삼키는 것도 잠시 잊을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유신희... 그애를 생각하면. 혹은 그애를 보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더라?
...모르겠다.
그 애와 나의 만나는 상황이, 언제나 너무 돌발적이어서, 첫 만남부터,
그 애가 가진 영향력이 너무 압도적임을 알아채버려서,
단지 당황했을 뿐- 무엇을 생각했는지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왜 그런 걸 물으시죠? "
" 저는 -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아주 오랫동안 지워버렸던...
아니 덮어두었던 기억을 순식간에 떠올렸습니다. "
" ..."
"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 7~80프로의
사람들은 그녀를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지거나, 아니면
어떤 종류의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 ...그게, 그 사이코..뭔가와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요. "
질문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 과학을 연구하는 이
거대한 건물 안에서, 초능력이니, 감정이니,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있는건가.
" 물론 그 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과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인 건 맞습니다. 거기에 대한 투자도 물론이고요. "
조교가 깨끗이 닦인 안경알을 햇빛에 비추어보곤, 다시 코 위에 걸친다.
다시 부드러운 인상으로 돌아오지만, 눈빛엔 여전히 차가운 연구자의
그것이 남아있었다.
" 하지만 .. 우리가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건..."
남자치곤 마른 손가락이, 탁자끝을 가볍게 두들겼다.
" ..유신희,를 비롯한 여섯명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능력>에 대한 겁니다. "
" ..다른 능력? 이요? 그애들은 천재잖아요. 그 외에 다른 능력, 이 필요한가요?"
그는 약간 난처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창턱에 놓인 작은 애플민트 화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식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정성을 들여 돌봐주면
그 만큼 건강한 생명력으로 보답하니까.
" 그 애들의 아이큐지수는 평균을 상당히 윗돌죠. 두뇌의 개발되지 못한 부분과,
초능력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능력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입니다. "
" ...뭐..숫가락을 구부러뜨린다던가.. 순간 이동을 하는 그런?"
" 하하. 물론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건 그런 것과는
좀 달라요. 흔히 ESP라고 하는 것과도, 염력이라하는 것과도.. 본질과는. "
나는 갑자기 초조해지고 짜증이 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연구 대상도 뭣도 아니다.
단지 자연스러운 일을 뿐.
만약 그게 없다면, 사랑도, 연애도, 결혼도, 드라마도, 세상의 모든 사건들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것까지 연구 대상, 이 되어야 할까?
그 애를 비롯한- 여섯명 모두를 대신한 분노가, 갑자기 속에서 부터 울컥
치밀어올랐다.
- 때려치우겠어.
그만두겠다. 다행히도 회계와 감사의 일은 어떤 회사에서나 할 수 있고,
적어도 그 분야는, 내가 좋아하진 않아도 잘 할 수는 있는 일이니까.
내가 막 그렇게 마음 먹었을 때, 얇은 안경유리 너머로, 나를 관찰하는
그의 눈빛에 희미한 웃음이 감도는 것 같았다.
"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이선씨는 우리 일에
깊이 관여한 셈입니다. 그 애들의 존재를 알았고, 이 대학 공학관에서
무언가 중요한 연구가 천재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 들은 것 까지. "
빼도박도 못할 상황에 처한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위는 온통 진창.
평온하던 생활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든다.
" ..여동생과 함께 사시죠? 저번에 한번 뵈었지만 참 착하고, 순진한 동생
같더군요. 사이도 좋아보이고. "
" ....."
" 초고도근시에 녹내장..지금으로선 쉽지 않은 수술이라, 잘못하면 실명에도
이를 수 있지만- "
머리에 피가 거꾸로 몰리는 것 같아 나는 주먹을 꽉 쥔다. 그런 나의 굳어진
표정을 살피며,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표시를 내며, 그가 한층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사실, 본사 중앙팀의 의료관계시설에선 수술 성공 사례가 있지요.
아직 상용화할 단계는 아니지만, 2~3년 쯤, 아니 어쩌면 1년 반 쯤 지나면
일반인에게도 시술이 가능하게 될 겁니다. 물론, 수술 비용은..글쎄요.
저는 그쪽 관계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흔들림없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분명히 드라마같은 상황이지만,
난 불행히- 영화나 드라마의 히어로가 아니라서, 정의를 위해
내 삶과 평온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동생의 시력과 새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해야할 일도. "
조교는 그럴 줄 알았었다는 듯, 화일을 펼치고 내가 처음 읽었던 것과 또다른,
여섯명의 자료를 내게 내민다. 그것은 첫번째 자료에는 없었던,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성격-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
그 아이들의 '숨은 능력'에 대한 가능성과 레벨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찰 일지였다.
" ...현재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면서도, 딱히
초능력이라고 정의하기 힘든 힘을 발휘하는 건 유신희 입니다.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데이터가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
" 유신희의 능력,이랄까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 건 아이들과 만나면서부터고,
아이들도 공명이라도 하듯, 나름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어요.
특히 원래 독특한 면이 많았던 '최한희'와..의외긴 하지만 '박영주' 쪽을
눈여겨 보시면 될 겁니다. "
조교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이들의 새로운 데이터를 훑어본다.
점점, 견디기 힘든 상황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난, 남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모든 것을 모르는 척 그들과
친해지는 것도 질색이다.
마침내 마지막 여섯번째 장의 데이터를 덮고, 그것을 내 화일에 끼운채
탁자위에 그것을 두드려 정리했다.
" - 알겠습니다. 자세한 사연은 나중에 이어서 듣도록 하지요.
지금은 좀 피곤하네요. "
" 그래요. 하지만 아마 이 일은- 적어도 저애들이 하는 프로젝트보단
훨씬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여기,로 직접 느낄 수 있으니까. "
조교가 자신의 이마와, 가슴을 가르킨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다정한 듯 하지만 냉랭한 눈빛을 힐끔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갑자기 머리속에 아까 그가 했던 말이 스쳐갔다.
" ..조교님?"
" 네. "
" 아까- 유신희를 만났을 때, 덮어두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했지요?"
" ....."
" 나중에, 제가 할 일을 설명해주실 때, 그것도 같이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일에 참고가 될 지도 모르니까. "
짙은 침묵을 뒤로 하고, 조교의 사무실을 나온다.
문에 기대에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화일을 옆구리에 낀 채 복도를 걷는다.
1층까지 시원하게 뚫린 중앙의 빈 공간을 통해, 바로 아래층에서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떠들며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 야..그러니까 내가 그때 .."
" 실험이-"
" 영주한테 부탁하라니까..너 그러다가 부교수님과 면담.."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도
이미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다.
나는..불과 얼마 안되는 사이에 이다지도, 아이들에 대해
친근하게 느껴버리게 된 것일까.
이 감정이, 이 흡입력이, 저애들의- 능력때문인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애들은- 언젠가 조교가, 그 입으로 말했듯 '우리보다 머리가 좋을 뿐-
똑같은 사람-' 너무나 생생하고, 너무나 밝고,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천진하기에, 나는 저 애들을 바라보는 일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 그럼, 이번엔 내가 영주 대신 태현이의 대변자가 될까?"
아이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들려오는, 맑고 명명한 한 사람의 목소리.
< ..유신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나는 손을 뻗어, 난간을 잡고 아래층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 속에서 갈색의 긴머리를 핀으로 고정시킨 그애의 모습을 찾았다.
그애는 모래가 목을 껴안고 귓속말하는 것을 듣고,
손을 입으로 막은 채 쿡쿡, 하고 작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애.
자신도 모른 채 많은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거역할 수 없는 흡입력.
'...하지만 저애의 잘못이 아니야. '
설령 겉잡을 수 없이 끌린다해도.
' 저애는.. 오히려..'
관찰되어야 될 대상도, 유리관에 넣어져 분석되어야 할 현상도 아니야.
그냥, 한 명의 여자애일 뿐.
호기심 많고, 똑똑하고, 그냥 그렇게 태어난..
난간을 잡은 손가락에, 흐린 물방울이 떨어져 흩어졌을 때야,
나는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았다.
< ...쉬울 거예요. 여기랑, 여기에서 느낄 수 있으니까. >
조교의 목소리가 스쳐간다. 나는 내 젖은 손가락을 지그시 살펴보고,
그리고 아이들이 사라진 1층의 홀을 내려다본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다.
나는, 다만 본사에서 파견된 (실은 협력 업체지만) 과장.
그들의 감시원.
업무가 무엇이든, 나는 그걸 해내면 그 뿐이고, 만약 내가 그걸 하지 않는다면-
분명 다른 사람이 와서 하겠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닦고, 화장을 고치고, 그리고는
화일을 품은 채 나의 사무실로 돌아간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 * * *
신희야-
누군가 부르고 있다. 멀리서.
굉장히 높고, 가지가 많은 푸른 나무 밑에서.
굵다란 나무 줄기에 손을 얹고, 한 손은 자신을 향해 흔든다.
머리가- 바람에 시원스레 흐트러져 있고, 입가의 미소가 해맑았다.
누굴까?
나는 작은 구멍에서 머리를 내밀고, 멀리서 나를 부르는 음성을 듣는다.
코끝에, 아주 좋은 봄날의 향기가 스쳐간다.
훈훈한, 따끈따끈한 공기.
눈을 뜬다.
나를 부르는 사람, 이 조금 더 다가왔으면 좋겠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멀리 선 채로,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세요?
분명히 아는 얼굴. 무척 낯익은 얼굴.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보다 키가 약간 큰,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
그녀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마치 자신을 부르듯
그 자리에 머물러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내 구멍에서 빠져나가, 그곳에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구멍?
난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왜 나는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나는 내 얼굴과, 머리를 만져본다. 길고, 햇빛을 받으면 약간 갈색빛이 나는 머리.
얼굴 피부의 느낌.
작지만, 손가락이 긴 편인 두 손.
내가 구멍,을 자각하자 마자, 그것은 내게서 사라지고,
나는 어떤 문 앞에 서 있다.
문 앞에는, 작은 여자애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맑은 눈망울로.
....귀여워.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약간 통통하지만 하얀 볼.
몽실몽실한 얼굴형에, 타원형의 두터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곧은 생머리가 귀 밑까지 내려와 있다.
그 생머리 사이로 파고들던,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
' 김 유 선 '
나는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 애는,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인다.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순결한 웃음을.
' 우리 유선이..'
그리고 '그녀'가 그 뒤에서, 그 아이를 껴안고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아까 나무옆에서 나를 부르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자신의 앞에 있는 자그맣고 귀여운 여자애를
감싸고 있을 뿐,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나는 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러보려고 한다.
....
하지만 목소리가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힐끔 보고는, 상냥하게 웃으며 두 팔로
엑스자를 그린다.
'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당신의 이름.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니 처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마음속에 차가운 것이 돋아난다. 봄의 햇살조차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느낌이.
아아, 난 그래서- 구멍 속에 있었던 걸까?
이것 때문에?
아니야...
난.
신희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든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신.희-
매끄러운 플라스틱의 냄새와 분필가루가 가득한 연구실.
" 왠일이야? 이런 곳에서 자게.. 피곤하면 수면실에 가서 자고 와. "
한희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순간, 그녀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고,
눈을 비볐다.
무언가 참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깨어나자마자, 마치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것처럼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나는 한희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시 이십 사분.
오후 세미나 까지는 아직 두시간 정도 남아있으니까, 한시간 반 쯤은
자도 상관없을 것이다.
" 땡큐- 잠깐만 눈붙이고 올께. 자리 보충좀 해줘-"
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전까지 신희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비이커에 노란색의 가루를 붓고 거기에 생수를 타서 유리봉으로
적당히 저은 다음, 한모금 마시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늘 그렇듯 자신이 직접 만든 영양 드링크라든가, 특제 쥬스 같은 거겠지.
한희의 특제 음료수는 대체적으로 맛도 있고, (정말 이상할 때도 있지만)
피로 회복이라든가, 박카스 비슷한 효능도 있는 것 같았지만 항상 비이커 아니면
시험관에 적당히 슥슥 부어 만들기 때문에 별로 마시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플 때마다 그의 덕을 보는 영주는 아무렇지 않게 잘 마셨지만.
모래에게 짖궂게 구는 것과 달리 자신이나 영주한테는 비교적 점잖은 한희는
영주에게 약을 만들어줄 때는 그래도 나름 제대로 된 컵에다 따라주니까...
.....배고프다.
자꾸 음료수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뭔가가 먹고 싶었다.
학생 식당을 들러갈까 생각했지만, 뻔히 알고 있는 학생식당의 메뉴에도
오늘은 그다지 끌리는 것이 없었다.
...뭘까. 뭐가 먹고 싶은 거지?
으음. 뭔가, 밥종류인 것 같은데.
구내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한바퀴 돌며 간식거리를 찾아봐야겠다..
...뭐가 있더라...
김밥. 빵. 소세지. 햄버거. 샌드위치...음음.. 그리고.
머리속으로 먹거리를 떠올리며 편의점에 도착해, 냉장 진열대 쪽을
한바퀴 돌던 나는, 까만 플라스틱 도시락 안에 들어있는 낯익은
음식을 보고, 망설임없이 들어올려 가격표를 확인했다.
유부초밥. 2000원.
....이상해.
우유와 함께 그것을 비닐봉지에 넣고 휴게실로 다시 발길을 돌리면서도,
아직 꿈 속에 있는 것 처럼 조금은 어지러웠다.
유부초밥.
그러고 보니 소풍때... 그녀가 싸왔던 음식이었지.
특별한 맛이 나는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맛있었다.
밖에서 먹는 음식은 맛있으니까-.
예전에도 아이들과 외출했을 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 엘레베이터가 열리자 휴게실이 있는 지하,대신
3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띵.
3층에 도달해 문이 열리자 나는 우유와 유부초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그녀의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사무실은 내가 맨 처음 찾아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디귿자로 되어있는
공학관의 맨 끝, 구석이면서도 동시에 볕이 잘 드는 장소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운 듯한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
복도 맨 끝에 있는 작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사무실 근방을 비추고 있다.
흠흠.
나는 목소리가 잘 나오는 가를 확인하는 듯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고, 손에 든 먹거리를 다시 확인한다.
...뭐, 그때 먹은 보답이라고 하면 되겠지.
그러나 그녀 문 앞에 서는 순간,
<김 이선 과장>
이라고, 임시로 만든 명패가 붙은 그 사무실 앞에 서는 순간
나는 무언가 순식간에 떠올라, 하마트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대체 왜 난 여기에 온 걸까?
...그제야, 내가 아까 꾸었던 꿈의 편린이 떠오른다.
정확하지 않지만, 흩어진채로.
'이선 씨,라고 불러도 되요?'
왜 그렇게 물어봤을까?
' 난 동성한테 이름불리우는 거 싫어해. '
' 유선아..'
' 나 사람 별로 안좋아하거든. '
손에 든 비닐봉지를 다시 되잡는다.
부스럭.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뭐, 나쁜 짓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이번만큼은 제대로- 꼭 닫긴 문에, 두 손가락으로 노크를 한다.
" - 누구세요- "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익숙한, 왠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 * * *
* * * *
" 어서 와."
내 방에 방문한 그애를, 나는 약간 굳어진 얼굴로 맞이했다.
평소처럼 웃고 싶지 않았고, 웃을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이 아이들의 친구도 아니고, 필요이상으로 가까이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내 자신과 그들에게 자각시키기 위해. 나는 조용하고, 그리고 차분한 태도를 옷처럼
몸에 입었다.
내 변한 태도를 깨닫지 못했는지, 그 애는 머뭇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용건이 있으면 말해줄래? - 가능하면 방안에 들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 애 손에 작은 비닐 봉지가 들린 것이 보였다.
" 이거..."
" 응?"
"...간식으로 드셨으면, 해서요."
신희는 내 앞에 부스럭, 소리가 나는 비닐봉지를 내 민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 안에 있는 내용물- 편의점의 유부초밥과 우유,를
확인했다.
"소풍 때 만들어주셨잖아요. 그때..잘 먹었다고, 아이들이-"
갑자기 신희가 말을 멈춘다.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
내가 알기론, 딱히 외출때 불쾌한 동행인이 끼어들어서 만들어준 유부초밥
따위에 보답을 할 사람은 영주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영주는 최근
연구실보다 의료원쪽에 더 자주 머물러있다고 들었다.
이 아이는- 어른스러워보이긴 해도 아마 거짓말에 그닥 소질이 없는 성격이리라-.
어떻게 해야할까,를 망설이는 듯 문앞에서 머뭇거리는 유신희를 보며,
나는 결국 냉정해지기,를 잠깐 포기한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애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들인다. 단 한발짝.
...그리고 그 한발짝이, 내 삶의 모든 영역을 바꿔놓을지는 꿈에도 모른채.
"너도 먹어. 사실 밥 안먹었지?"
"-아니예요. 전 식당 가서 먹을 거예요."
여전히 그애의 얼굴은 희미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뭐가 초능력이고, 뭐가 감정을 환기시킨다,는 걸까.
그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보기만 해도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저렇게
특이한 여섯명의 아이들과, 내 동생보다 고작 네 살 위인 이 여자아이를,
대체 뭘로 생각하는걸까.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 애의 손을 이끌고 쇼파에 앉아, 유부초밥을 꺼내고, 우유를 꺼낸 뒤
냉장고에 이미 들어있던 우유 하나와 내 개인 숫가락 통을 가져왔다.
비닐봉지 속에는 나무 젓가락이 한개 들어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나무 젓가락을 신희에게 건네주고, 유부초밥의 랩을 뜯고,
내 숫가락통을 연다.
" 풋."
"...왜 웃어?"
갑자기 신희가 웃음을 터뜨린다. 처음 보는 것 같은, 환하고 예쁜 웃음.
말 그대로 정말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었다.
" 그거, 과장님 건가요? 그 숟가락 통. "
" 그래. 이게 뭐 어때서."
" -"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신희가 계속 웃었다. (웃을 일이 그렇게 없던 걸까.
하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다보면 지루하기도 하겠지...)
나는 내 숟가락통과 거기 들어있는 한쌍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쳐다본다.
핑크색 키티 숟가락 케이스.
숫가락 끝에는 동글동글한 키티의 하얀 머리가 달려있고, 젓가락에도 헬로키티
의 캐릭터가 그대로 쓰여있고, 무엇보다 맨 끝에는 견출지로 내 이름이 또박또박
써있다.
<김이선>
"...의외로 귀여운 걸 좋아하시나봐요-"
겨우 웃음을 멈춘 신희가 그렇게 말한다. 생각보다 심각하게 웃었는지, 눈가에
약간의 이슬까지 맺혀있다.
아. 그랬지. 여긴 회사가 아니었지. 회사에선 이미 하도 익숙해져서 그다지
놀리는 사람도 없고, 이곳에 온 뒤 늘 식사는 혼자 하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나에겐 너무나 익숙해진 숟가락 통이기에.
"동생이 사준거야."
나는 별로 웃지 않고, 짧은 젓가락으로 익숙하게 유부초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다.
"- 괜찮네. 편의점 것 치고는. 너도 먹어."
"....."
갑자기 그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내 목소리가 너무 경직되었던 걸까.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변명하는 것도 우스워서
나는 그냥 우유를 한모금 마시고, 젓가락 끝을 입술에 덴 채 그 애가
유부초밥을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뭐가? 처음엔 다들 웃었어-나는 익숙해져서 잘 모르겠지만."
"....."
"뭘로 먹든 집어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사실 동생이 이걸 사준 것도."
나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또 너무 방심해버렸다.
왜 이리 나는 마음을 쉽게 놓는 걸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유신희는 동생이
그 숟가락통을 사준 이유를 들으려는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맨날 귀찮다고 음식 손으로 집어먹고..한번은 대학 때 삼겹살 파티인가
하는데 젓가락을 애들이 안챙겨왔거든? 그래서..주변에 있는 나뭇가지 꺾어서
젓가락 대신으로 하다가..불낼 뻔 하고..식중독 걸리고..그래서.."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짝 긁는다.
"보시다시피야. 난 대학 때 정말 너희랑 천지차이로 살았거든. 막살았지..
동생이랑 나이차이는 많지만, 아마 동생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울거야."
신희의 표정이, 희미한 웃음에 물들어있다. 그건, 어디서 본 듯한 느낌.
저녁 무렵에, 막 사라지기 직전의 햇빛과 비슷하게 너무나 아름답고, 어딘가 애달픈 감정.
"부러워요."
"...뭐가."
"그냥. 언니가 있는 것도, 동생이 있는 것도 굉장히..좋은 일일 거 같아요."
"나같은 언니가 있으면 안되지. "
또다시 작은 웃음이 터져나온다.
나는 그만 웃고 먹으라고 젓가락으로 유부초밥 하나를 잡아 그 애의 입술에
가져다댄다.
그애는 약간 망설이다, 또다시 입을 벌려 좀 큰 유부초밥 하나를 간신히 입안에
넣는다.
이거야..저번에도 그렇고.
먹이주는 어미새?
나는 고개를 흔들고, 엉뚱한 생각을 지우며 우유를 다시 한번 들이켰다.
우유와 유부초밥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뒤로는, 그애와 나는 별 말 없이 유부초밥 한 통을 비우고, 각자의 우유를 마셨다.
약간 느끼한 뒷맛에 내가 타 준 녹차를 들고 한모금씩 마시는 그애를 바라보다가,
문득 <보고서> 생각을 했다.
...기억환기.
유신희의 '능력'은 상당히 다양하고 미묘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의 잊었던 기억을 회상하게 한다든가, 감정을
자극해 꿈을 꾸게 만드는 류의 능력이라고 했다.
물론 본인이 자각하고 있지 않으니 그걸 능력,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에 영향을 주고, 사람에 따라선
굉장히 심각할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나.'
처음 보고서를 읽을 때도 대체 뭔 소린지 몰라서 황당했지만, 이렇게 유신희라는
존재를 1m도 안되는 공간 안에서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더더욱 굳어졌다.
물론 자신도 유신희를 처음 봤을 때, '이쁜 애가 똑똑하기까지 하다 이거지.'
라는 감정(?)에 사로잡혔고,
이따금씩 그 애를 보면 막연한- 아쉬움이랄까, 느낌에 사로잡히는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남다르게 예쁘고,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줄 수 있는
느낌이지,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이 안되었다.
무엇보다, 유신희를 보면서 잊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적은 한번도 없다.
이번처럼 잊었던, 내가 왜 키티 숟가락통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는지 억지로
떠올리는 일은 있을망정.
"잘먹었어요."
"응? 아니-내가 잘먹었지."
나는 웃으며 다 마신 녹차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연구는 잘 되어가? 다른 애들도 많이 피곤해할텐데."
"네.뭐랄까.극한이랄까. 그래도 다들 자기 페이스가 있어서 무리하진 않아요."
"으음.."
나는 손가락으로 턱 주변을 만지며 '페이스'라는 말을 생각했다.
나도 비교적 무리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노는 일 빼고) 천재들의 페이스라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부디 평범한 몸을 초과하는 두뇌에 맞춰지진 말아야할텐데.
문득 그때 연구실 앞에서 부딪힌 신희의 눈밑에 드리워졌던, 지금은 지워져있는
다크써클을 생각하며, 나는 서랍을 열어 캔으로 된 저금통의 뚜껑을 열고,
거기에 <특제사탕> 을 한가득 집어넣는다.
" 전에 갖고 가서 먹으라고 했지? 이거 가져다 애들이랑 나눠먹어. "
< 앞으로 김이선 과장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은->
나는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조교의 목소리를 지우며, 팔을 뻗는 신희의 손에
사탕이 담긴 작은 철제 저금통을 건네준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만든 건 내 동생인데."
"...동생분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신희는 내게 고개를 까닥하고, 사탕이 담긴 통을 들고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이게 마지막.
가슴의 미세한 틈으로 아픔이 스며들어온다.
아마도 이게, 저 애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마지막.
조교는 굳이 그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여는 게, 그애들에게 가까이 가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연구를 위한 거라면 진심이 되기 싫다.
그 애들의 웃음에, 특이한 능력에, 천재성에, 밝음에, 개성에 전염되면서,
어느날 문득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에서 격리되었을 때-
한없이 버려진 듯한, 내 자신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싫다.
...물론, 설령 그때라도 내겐, 언제나 내 손을 놓지 않을 소중한 나의.....
단 한사람,이 있을 거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서나마 마음 깊은 곳에,
절대로 손 닿을 수 없는 어떤 사람의 웃음이 파고든다면...
'탕'
나는 문을 닫고 내 자리로 돌아온다.
김 이선.
나는, 더이상 내가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한 꿈을 꾸지 않는다.
어떤 영향력도, 어떤 감상도, 그 벽을 넘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마땅히, 그리고 기쁘게 치르기로 한 '대가'니까.
첫댓글 아련합니다..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