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저녁기도회 - 2
주제; 룻기를 통한 믿음의 재발견 (2-2)
날짜 : 2012. 8. 22. 수
본문 : 룻2:17-23
제목 :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빛에서 바라보십시오!
1. 룻과 나오미의 대화
본문은 룻기 2장의 세 단락 중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룻2:17-23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앞에 나오는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생기가 돌고 희망이 엿보입니다.
룻이 처음 이삭을 주우러 나갈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온 이후 이방 여인이 유대인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사정을 룻2:2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룻2;2)라고 했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대화가 매우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명료한 대화 속에는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겪어온 한숨과 탄식이 배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삭줍기는 그 당시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알려진 고아나 과부 그리고 떠돌이들에게 돌아갈 몫으로 정해진 권리였습니다(레19:10, 신24:19).
이삭을 주우러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굶어죽느냐,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느냐 하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2:2)라고 한 것은 룻 스스로도 이삭을 줍는 일이 얼마나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룻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모압여인입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큰 딸이 자신의 아버지와의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 이름을 모압이라 함으로서 생겨난 족속입니다.(창19:37).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모압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는 반목이 심했습니다(삿11:17).
신23:3절을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고 할 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들 역시 모압을 하나님 나라 대적의 모형으로 비난할 정도였습니다.(사25:10, 렘9:26, 겔8:8-11).
룻은 이토록 모압 여인이라는 조건 외에도 사내하나 남지 않은 여인들만 사는 과부댁의 젊은 과부라는 또 하나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룻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따라 이방인을 배척하는 이스라엘 땅에 와서 이삭을 줍는 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개역)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율법에 엄연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 레19:9-10절에 의하면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 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라"(레19:9-10)고 했습니다.
- 신24:19-21절에도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 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 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 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 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 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 하여 남겨두라"(신24:19-21)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렇게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되었든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종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신24:2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되자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을 취했습니다.
율법의 엄연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도록 냉대하고 멸시했으며, 심지어 이삭 줍는 일조차 금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개역)라고 한 것은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일조차도 주인의 허락과 동정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보아스가 룻에게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룻2:9)고 한 당부에서도 이삭줍기의 어려움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룻의 제안에 대해 나오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 딸아 갈지어다”
이 대목은 너무 의외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떻게 이방 여자로서 베들레헴까지 따라온 며느리가 모처럼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하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만 짤막히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방 여자로서 이삭을 줍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오미라면 염려가 담긴 말 한마디라도 건네거나, 간단한 기도라도 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 말한 것이 고작이라니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짧은 대답 속에서 나오미의 눈물과 회한을 읽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는 상황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나오미로서는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그 방법이라도 선택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여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시집온 며느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삭을 주우러 나가겠다고 하는 그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는 나오미의 짤막한 대답 속에는 나오미의 체념과 한숨과 눈물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룻기 2장 서두의 내용은 매우 안타깝고 처절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17절 이하의 내용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이삭줍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룻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2:2)라고 하던 때의 룻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는 한 에바 쯤 되는 보리가 들려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희망이 넘쳐 흘렸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나오미 역시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 한숨짓는 나오미가 아니라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룻2:19)고 축복하는 나오미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이렇게 연속적으로 물었다는 것은 나오미의 궁금증이 어떠한가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나오미의 생각에는 룻이 하루 동안에 보리 이삭을 한 에바나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준비해 가지도 않는 점심을 남겨 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의 호의를 입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였기에 룻의 신변이 염려가 되기도 하여 호의를 베푼 사람을 알고 싶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질문에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룻2:19)라고 대답합니다.
룻으로부터 보아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밭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나오미는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보아스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한 사람”(룻2:20)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룻이 보아스가 자신에게 한 말을 나오미에게 전합니다.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룻2:21).
나오미는 당부합니다.
“너는 그의 소년들이 아닌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겠다”(룻2:22).
룻은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보리 추수를 마치기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소녀들과 가까이 하면서 이삭을 주웠다”는 것으로 본문은 끝납니다.
2. 찾아오시는 하나님
우리는 나오미가 룻에게 한 말속에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부인 룻에게 은혜를 베푼 보아스를 축복한 후에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도다”(룻2:20)라고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참으로 궁금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율법에 보장된 그 이상의 선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룻에게 한 것이지 이미 죽은 가족들에게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는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나오미의 가족이 모압으로 떠나기 이전부터 보아스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든 사실을 기억하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호의를 베푸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사정은 그런 해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오히려 본문의 내용은 “산자”인 자신과 룻에게 선을 베풀어준 그 일이야말로 결국은 이미 “죽은 자”(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론)들에게도 선을 베푸는 일이 된다는 뜻으로 감격하여 전하고 있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창24;2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베필을 구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으로 갔을 때의 일과 매우 흡사합니다.
나홀의 성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하기를 “성중의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 물을 좀 달라고 할 텐데 그때 그 여인이 나로 마시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나는 그 여인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 정하신 여인이라 알겠습니다”(창24:13-14)라고 합니다.
그때 마침 리브가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종이 생각했던 그대로 행하자 하나님을 찬미하며 이르기를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다”(창24:27)고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종의 고백은 나오미의 고백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라고 한 것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준 선행이 죽은 자들에게도 베풀어준 선행이라는 것을 표현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찬미였든 것입니다.
우리가 룻기를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룻기 1장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 룻1:20-21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 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 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 말속에서 나오미는 하나님을 벌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룻1“21)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선대에 대한 나오미의 찬사는 전혀 다릅니다.
- 룻2:20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벌주시고, 괴롭게 하시는 분으로만 알았던 나오미가, 자신의 가족을 한 번도 버리신 적이 없는 하나님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것도 하나님의 간섭이지만 하나님은 또한 보아스를 통해 자신의 집안에 끊어진 혈통을 잇게 하실 분이시라는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룻2:2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룻2:20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왜 “기업 무를 자”가 나옵니까?
보아스가 룻을 긍휼히 여겨 율법에 정한 그 이상의 선행을 베풀었다면 보아스에 대한 감사와 축복으로 족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나오미가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룻2:20)고 한 것은 그의 기대와 희망을 나타낸 것으로서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신앙의 빛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룻2장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룻2:3)라는 표현이 그렇고, “은혜”(2:2,13,20)라는 표현이 그렇고, 그들의 대화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그렇습니다.
룻기 전체에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의 진행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암시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나오미가 느낀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오.
시어머니의 흥분에 찬 말을 듣고 룻이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룻2:21)라고 하자 나오미는 오히려 당부하기를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2:22)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나오미의 기대와 희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이는 이러한 당부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혹시라도 룻이 소년들 사이에서 일하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기업 무를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기에 룻에게 충고한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에 대한 룻의 앞날을 염두에 두고 내린 조치였을 것입니다.
3. 믿음의 눈
이와 같은 룻과 나오미의 행동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룻기 2장이 우리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흔히들 룻기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효행을 가리키는 책이라고들 말합니다.
룻의 지극한 효성과 희생적인 헌신이 결국은 다윗의 계보를 잇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고들 말합니다.
이러한 룻의 효성과 희생정신을 높이기 위해 그의 손위동서였든 오르바에 대해서는 형편없이 깎아내리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룻기 어느 구절에서도 오르바를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오르바가 나오미의 곁을 떠난 것을 두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비난할만한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나오미는 오르바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선대했다고 말합니다(룻1:8).
오르바는 자신이 먼저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나오미가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룻1:8)고 했을 때 소리 높여 울며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룻1:10)라고 한사코 매달렸든 인물입니다.
이런 오르바를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나오미는 이방 땅인 모압에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이 아니었습니까?
오르바가 나오미를 따라간다는 것은 이방 땅에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오미가 이방 땅에서 과부로 살아가기가 힘들어 모압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도중이라면 오르바 역시 이방 땅에서 과부로 살기가 싫어 모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르바는 며느리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인으로서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룻이 상식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든 오르바에 비해 훨씬 특별한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오르바나 룻은 그들 모두가 꼭 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둘 다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 둘 다 아이를 낳지 못한 과부였고, 둘 다 시어머니께 최선 껏 충성했던 인물입니다.
시어머니가 두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두 사람 모두 꼭 같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고,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룻1:10)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긴 설득 끝에 오르바는 자기 민족과 자기 신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 곁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 이 두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까?
룻기의 저자는 보아스를 통해 그 해답을 줍니다.
룻2:11-12절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룻2:11)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받으러 온 네게”(룻2:12)란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오 르바의 선택은 자기 민족과 자기 신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고, 룻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과 결단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룻2:12)이며, 하나님의 상을 받기에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이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나오미가 주는 교훈 역시 신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나 오미는 자신에게 불어 닥친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기를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룻1:20-21)고 한 이 말속에 나오미의 신앙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겪은 고난과 역경을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의 눈길로 바라 본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나오미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속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이유가 기대와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믿음입니다.
절망에도 감사하고, 축복에도 감사하는 나오미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사정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자신의 삶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분이 계시다면 나오미의 믿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행복을 따라 떠났다가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은 채 과부가 되어 돌아온 나오미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셨다는 또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셨다면 기쁨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욥5:17-19절에서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 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 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7-1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고치십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재앙이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절망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저와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