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1-17 출애굽기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우리는 지난 여름수양회 때 박재용집사님을 통해 내적치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치유 받아야 할 내적인 요소가 많지만,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열등감’이 있습니다. 여러분, 열등감이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정의로는 이렇습니다. “자신을 남보다 못한 무가치한 사람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이나 삶의 태도”입니다. 열등감은 주로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 형성됩니다. 특히 어릴 때에 부모나 가족들의 무시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어릴 때부터 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욕을 해도 꼭 개자를 넣어서 욕을 했습니다. 이런 그는 신앙생활하면서도 자신이 개처럼 못난이 같았습니다. 꿈을 꾸어도 개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요즈음 어떤 생각이 자주 드나요?” “제가 진짜 개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래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강아지 때부터요.”
남을 미워하고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살던 한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뭔가 모를 분노가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심한 심장의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병원에 가보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신경증이라는 진단만 받았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남자처럼 행동했습니다. 남자를 이기기 위해 억척스럽게 공부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늘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도 남편조차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적대감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다 남편이 “여자, 아내” 라는 말을 하면 주먹이 날아가고 헤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어느 날 치유집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이 어릴 때부터 줄곧 거절을 당해왔음을 알았습니다. 즉, 남자를 기다리던 집에서 딸로 태어나면서 거절감을 쌓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뿌리 깊은 열등감을 치유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모세의 변명이 나옵니다. 모세의 변명 속에는 열등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해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출애굽의 리더로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반응은 영 시원찮습니다. 3장 11절에 보면 모세는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내가 누구관데?” 이 말은 모세의 겸손이 아니고 열등감이 숨겨진 대답입니다. 이런 모세의 대답에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하고 아주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도 본문에 보면 모세는 계속해서 변명합니다. 이런 모세를 두고 하나님은 반복하여 그에게 믿음을 심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를 양육하듯이, 권면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엄하게 책망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을 치유하시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무엇보다 모세의 열등감의 상징인 지팡이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열등감을 어떻게 치유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변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거나,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몰아세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절부터 9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믿음을 심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자 지팡이는 뱀에 되어서 꿈틀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손을 품속에다가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내보니 손에 문둥병이 발해 허옇게 변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손을 도로 품속에다가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다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손은 도로 말짱하게 나아 있었습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던가, 문둥병이 걸린 손을 품속에 넣으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믿음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실습교육을 통해 모세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뱀의 꼬리를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징그럽고 위험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 훈련을 통해 바로도 바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애굽의 주 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뱀 신입니다. 그래서 파라오의 왕관에는 뱀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뱀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바로를 비롯해 애굽의 신들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심으셨습니다. 모세도 믿음으로 그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을 행하실 때, 모세가 가진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가 능력 없다고 변명할 때 하나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자기가 가진 것을 볼 때 사실 지팡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라고 대답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로 능력을 행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가진 지팡이를 통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세는 그 지팡이를 통해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도 이 지팡이를 내 밀었습니다. 광야 길을 갈 때도 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에게 있어서 지팡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물론, 외적으로 보면 단지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당시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어서 양들이 대열을 이탈하면 목을 끌어당겨 양 무리 속에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허리가 아플 때, 길을 갈 때 지팡이도 되고 버팀목도 되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나무를 대충 다듬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바로 모세의 열등감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에서 40년 동안 처가에서 양치기로 살았습니다. 매일 매일 양을 몰고, 풀을 찾아다녔습니다. 광야에서 양치기로 산 모세는 철저히 깨지고 잊혀 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40년 동안 얼마나 말 못하는 양들과 지내다 보니, 자신은 말을 잘 할 줄 모른다고 했을까요? 모세는 아마 지팡이에 의지해 한숨과 눈물과 탄식을 쏟아 놓았을 것입니다. 즉, 양치기에 불과한 자기는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고사하고 자기 한 몸 추스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모세의 실존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별 것 아닌 나무 막대기에 하나님이 능력이 임할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반석을 치니까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이는 모세의 지팡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마른 나무를 능력의 지팡이로 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보실 때, 마치 모세의 지팡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때로 너무 작고 초라합니다. 약점도 많습니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모세의 지팡이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모세처럼 하나님께 변명합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잘 하는 것도 없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솔직히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제가 보아도 저는 잘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탁월한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사역자로 훈련받을 때는 머리 회전이 느려 항상 뒷북을 잘 쳤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열등의식을 자주 느꼈습니다. 이런 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열등감의 사람에서 자존감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는 말 그대로 별 볼일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 우리의 재능, 우리의 물질, 우리의 모습은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우리는 장차 큰일을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모세에게 바로와 맞설 만한 군대가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애굽 어를 잘 하느냐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 우리 각자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빈손입니까? 물론 빈손이죠? 하지만, 비록 빈손이라도 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자기에게 없는 것으로 인해 불평합니다. 자기에게는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있다고 실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젊음이 있고,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할 수 있는 입이 있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지성이 있습니다. 여기다 가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굶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능력을 행하십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에 불과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문수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예배당도 공간이 좁습니다. 환경이 열악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역자들도 소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교회와 비교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주를 향한 젊음의 열정과 패기가 있습니다. 문수교회 역시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드려질 때 주님은 문수교회를 통해서도 큰 능력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장차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없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거나 실망치 맙시다. 대신에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교회와 가정과 삶을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번 주 빌립전도 훈련은 기관장 전도입니다. 초, 중, 고등학교의 교장들을 비롯해, 동장, 경찰서장, 구청장, 기업체의 사장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간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부산의 금정구 세무서장을 만나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월계초등학교와 옥현중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편지도 정성스럽게 쓰고, 고가는 아니지만,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이지만, 세무서장이나 교장선생님도 선물을 주니까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선물로 일단 마음을 녹이니까 비교적 복음에 대해서 잘 들어주었습니다. 이분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높이셨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교우들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언제 경찰서장이나, 세무서장, 교장선생님에게 복음을 전해보겠습니까? 사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이런 저가 이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교우들도 우리의 삶이 주님께 드려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아론을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10절을 보면 모세는 다시 변명합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입이 뻣뻣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는 지금도 말을 잘 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말도 느립니다.” 광야에서 오랫동안 양을 치면서 말 없는 양들만 상대하다 보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또 다시 달랩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자를 만드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만드시고, 언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십시오. 이번에는 결정타를 날립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자꾸만 변명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요?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아버지가 자식에게 “너는 등록금 걱정 말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 내가 등록금을 책임지마.” 하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 말인데 믿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에게 무슨 돈이 있습니까? 아버지도 사람 아닙니까? 아버지가 은행장입니까?” 이렇게 따지면, 이런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정신 차리도록 맞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인데, 얼마나 자손심이 상합니까?
하나님도 그러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자꾸 변명하니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때리시지는 않습니다. 대신 아주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다. 그가 네 입을 대신할 것이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하나님은 모세의 대언자로 아론을 세우셨습니다. 즉, 아론이 모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보면 아론이 금송아지 숭배의 장본인 역할을 합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아론은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는 동역자로 세움을 입습니다. 하나님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모세의 열등감을 아론을 통해 만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늘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같은 믿음의 길을 가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교우 여러분, 그래서 저는 저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 동역자들이 있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저에게는 모든 분들이 소중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 뒤 좌우를 보면서 함께 인사해 봅시다. “저의 동역자가 되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셨습니까? 자유게시판에 보면 김경호집사님이 올린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사실 시기적으로 보면 경호집사님은 서울에 있는 본사에 근무할 때입니다. 11월에 감사원 근무가 끝나기 때문에, 이 때 본사에 가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승진이나, 업무를 처리하는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호집사님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곰곰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수양회를 통해 한 알의 썩는 밀알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한 가지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본사에 근무할 수도 있지만, 문수교회의 부흥을 위해 자신이 직접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삶을 살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경호집사님은 본사에 들러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총무팀장은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보될 것은 확실하나, 울산으로 오는 것은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타협안으로 울산TMS가 소속되어 있는 대기 관제처 관제관리팀으로 전보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인사명령 결과를 보니 대기 관제처 관제관리팀으로의 전보발령을 확인하였습니다. 아직 울산으로 올 수 있는 100%의 보장은 아니나 경호집사님의 바램대로 울산으로 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경호집사님이 울산으로 발령이 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는 한 명의 동역자가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는 경호집사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형편을 잘 아시므로, 경호집사님을 울산으로 발령 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올해 여름 수련회의 큰 열매 중의 하나는 경호집사님의 믿음의 결단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께 드려짐으로 능력의 지팡이로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