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문학강좌
신경림 시인 초청
주제 : 시는 왜 存在하는가
일시 :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시흥시청소년수련관 한울림관
주관 : 사)한국문인협회 시흥지부
후원 : 시흥시
작가 프로필
1935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졸업
1956년 문화예술 “갈대” 등 추천
저서 : 시집-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 엣. 뿔. 신경림 시선집1,2.
장시집-남한강
산문집-민요기행1,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2. 바람의 풍경. 등
평론-농촌현실과 농민문학.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우리 시의 이해
수요 수상-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시카다 상. 등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
시는 왜 存在하는가
신 경 림
시를 쓰면서 내가 제일 먼저 부닥친 고민이 어떻게 시가 현실을 수용할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휴전으로 얼버무려지고 바로 2,3년 뒤였다. 전국에 전쟁의 상흔은 그대로 남아 폭격 또는 포격에 허물어진 건물과 다리가 버려진 채 있었고, 서울이고 지방이고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과 부모를 잃은 고아로 넘쳤으며, 거리와 골목은 거지와 창녀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어떤 통계를 보니 내가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오던 해의 우리나라 소득이 50달러였고 북한이 160달러, 필리핀이 300달러로 나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일뿐더러 무능한 독재자가 부패한 경찰을 앞장세워 통치하는 세계에서 가장 희망 없는 나라였다. 이렇게 극심한 가난과 압제 속에서 헤어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시는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방법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시는 깊은 피해의식 탓으로 사회적 상상력이나 역사적 상상력은 외면하게 마련이었으니 나로서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차츰 절망에 빠졌으며 시를 쓰는 일이 도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를 쓰는 일이 신명이 나지 않았고 신명이 나지 않으니까 시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10년 가까이 방황을 하게 된다. 많은 곳을 다녔으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은 사연들을 들었다. 그렇게 방황하는 사이 내가 하나 생각한 것은 가령 내게 다시 시를 쓸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다닌 곳, 내가 만난 사람, 보고 들은 사연들을 시 속에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이 빠진 시가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현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시란 오늘을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도 하고 꿈을 주기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도 했다. 시가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할 때 그 존재의 의미도 있고 감동을 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이후 시를 다시 쓰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썼으며, 나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부패 무능과 경찰통치의 상징인 이승만 독재에 대체하면서 유신으로 극단화된 개발 군사독재와의 투쟁을 주요한 요소로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나는 시가 하는 일의 전부가 이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는 어차피 자기의 탐구라는 성격을 버릴 수가 없으며, 시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시를 쓰는 일을 얼마나 신명나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를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터였다. 또 시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유혹에서 나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반유신체제, 통일문제, 노동문제 등 내 상상력을 압박하는 문제들에 시달리면서 또 한 번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어려워졌고, 그 탈출구를 찾으려는 것이 민요에 대한 천착이었다. 우리의 정서, 우리말의 보고라 할 민요를 시에 수용하면 내 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여겼으며, 한편 민요의 흥겨움이 덜 순화된 사회적 상상력의 경직성을 완화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요는 결국 지나간 시대의 말이요 지나간 시대의 정서였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으며, 깨달았을 때는 민요를 원용한 나의 시는 이미 생동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민요를 통한 방황은 내 시로 하여금 많은 중압에서 빠져 나오게 해주었다. 나는 시가 그 시대의 질문이요 대답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승복하면서도 그것만이 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으며, 시는 사회적인 성격과 함께 개인적인 성격도 강하게 띈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는 우리의 노래이기도 하며 나의 노래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마침내 나는 시 쓰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쓰여진 나의 시를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본다. 우선 나의 시는 나에 대한 탐구다. 내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길 찾기이며, 다른 존재와 어떠한 관계 속에 있으며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이고 모색이다. 또한 나는 시를 통해서 사물과 접촉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며, 그것들을 시 속에 수용한다. 나는 결코 시가 가진 사회적 성격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혼자 독립된 존재이지만,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떠나 있는 존재는 못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상력과 개인적 상상력의 조화가 있을 수 있다면 나의 시는 그것을 지향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나의 시는 발견이어야 한다. 이미 남이 보고 찾아낸 것을 뒤 따라다니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이 보고 찾아내고 만진 것을 아직 그것을 찾아내고 만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만지게 하는 역할이 나의 시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다. 알려주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 시는 소통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나의 시도 이 부분에 소홀할 수가 없다. 여기서 다시 나의 시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일 수밖에 없다. 길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 어쩌면 이것이 나의 시가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는, 많은 독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으면서도 왜 존재하는가. 그 대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요, 그 아름다움은 시만이 가진 색채와 향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것은 존재하며 나의 시는 바로 그것을 찾고 지키는 데도 힘을 기울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또는 이 세상을 사는 많은 불행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꿈이 되고 별이 되는 것,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바로 시만이 가진 색채요 향기로서 시의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터이다.
작품선(作品選)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허공
하얀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빨갛고 가녀린 발이 뿅뿅뿅 밟고 갔으리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
발자국은 끝나고
새파란 허공에
새 한 마리 해맑은 실루엣으로 찍혀 있다
내 발자국 끝나는 곳에서 나도 저처럼
둥실 떠올라
허공에 그림자로 찍힐 수 있을까
해맑기는커녕 검고 칙칙한 얼룩이 되어
누더기로 허공에 남을까
그것이 두렵지만
매화를 찾아서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용서
성당 앞 골목에서 아이들이 개미떼를 짓밟고 있다.
어떤 놈은 몸이 두 동강이 나고 어떤 놈은 머리가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몽땅 떨어져나간 몸통만을 가지고 땅바닥을 허우적
거리는 놈도 있다.
아이들은 더 신명이 난다. 조각조각 찢다 못해 가루가 되도 록 짓이기는 녀석도 있다.
개미굴은 아예 까뭉개져 자취도 없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내가 개미가 되어 거대한 존재한테 짓이겨지는.
내가 사는 도시가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큰 건물들이
종이집처럼 맥없이 주저앉는.
나와 내 이웃들이 흔들리는 골목을 고래의 뱃속에서처럼
서로 부딪치고 박치기를 하며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의 존재와도
우리의 생각과도 우리의 증오와도 우리의 사랑과도
그밖에 우리의 아무것과도 상관이 없는 그 거대한
존재를 향해, 오오 주여, 용서하소서, 끊임없이 울부짖 는.
천년을 만년을 그렇게 울부짖기만 하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무엇 때문에 용서하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메데진에서*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움막집들은 빈 굴 껍데기처럼 달라붙어 있다.
지붕을 스칠 듯 케이블카는 위태롭게 기어오른다.
가끔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추어서는
승객들을 토해내기도 하고 또
주워담기도 하면서, 한 삼십년 전쯤 우리
산동네에서 만났던 아저씨들처럼
모두들 눈이 퀭하고 얼굴이 꺼칠하다.
골목에서 공을 차거나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의
터진 맨발이 하늘에서도 보인다.
머리에 난 기계총도 보인다.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는 늘 맨발이었다.
밤이면 그 터진 곳이 쓰려서
잠을 설쳤다. 그때도
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메데진은 콜롬비아 제2의 도시로 인구 약 2백만, 그중 백만이 산동네 주민이다. 그들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전철이 끝나는 데서부터 산중턱까지 케이블카가 놓인 곳이 있다.
보르도에서 만난 부처님
고풍스러운 술집 벽에 부처님 초상이 걸려 있다.
아니 저건 석굴암 부처님이 아니신가.
나는 반가워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데
부처님 냅다 내 마빡을 갈기며 일갈한다.
에끼, 이 소갈머리 없는 놈, 절은 무슨 절이냐!
나 여기서 돈 많이 벌 거다. 뉴욕도 가고
런던도 가고 마드리드도 가서, 돈 잔뜩 벌어다
극락을 정말 극락답게 꾸밀 게다.
부시도 코이즈미도 부러워하고 블레어도
탐이 나서 마침내 투자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화려하고 멋진 극락을 만들 게다
너 같이 땡전 한푼 없는 놈
절 받아 내 무엇하랴
나는 머쓱하니 물러나 구석에 가 나앉는다.
아무래도 나는 세계화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돌아가 동네 키 작은 부처님이나 찾아갈까보다.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내가 시를 쓰는 일에 처음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였다. 추천을 받은 작품은 “낫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격으로 허물어진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며 먹고살 길을 찾아 거리에 나선 부녀자들로 넘쳤다.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었지만, 내 시는 절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서정시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못되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회의 속에서 서서히 시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이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의 헌책방이었다. 복개되기 전 청계천은 속칭 “나이아가라” 라는 술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동대문이 가까워지면서 술집들은 헌책방으로 바뀌었고, 책방마다 깊은 서재에 숨어 있다가 먹을 것과 바꾸어 쏟아져 나온 책들로 넘쳤다.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종일 이들 헌책방을 빈둥대는 것이 내 일과였다. 나는 여기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보아왔던 백석, 임화, 이용악 같은 시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 백남운, 전석담 같은 사화과학자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나처럼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는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책을 뒤지고 차와 술을 마시고 밤늦도록 떠들어댔다. 외국 사람들 흉내 내 독서회 비슷한 것도 만들었으며, 금방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라도 할 듯 설쳐댔다. 나는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다. 시 따위 쓰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조차 하게 되면서 시에는 더욱 게을러졌다. 이때 어울려 다니던 한 선배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겁이 많은 나는 일단 시골로 귀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여 년 시골살이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미 자식들 학비와 사업의 실패로 농토를 거의 팔아 없애 농삿거리도 제대로 없을 때였다. 봄이면 안마당에서 작약 뿌리를 캐어 팔아 양도(糧道)를 마련할 정도였다. 게다가 월급쟁이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갑자기 닥친 이런 가난에 당차게 맞설 위인이 되지 못했다. 시골집도 내가 마음 편히 지낼 곳이 못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하는 일 없이 부자가 마주앉아 밥만 한 사발씩 축내는 것에 짜증을 냈으며, 아버지는 할머니의 괄시를 내 탓으로 돌렸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무언가 큰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였다. 나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려면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시도도 해보았으나 단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자연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댐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따라가 보름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행상을 하는 친구를 좇아 여러 날 장을 떠돌기도 했다. 실제로 공사장에서 며칠 동안 짐을 져보기도 하고 광산에서 서기 노릇도 했으며 장사를 해보겠다고 신발 따위 물건을 떼어 돌아다녀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일이 너무 힘들어 내 밥벌이는 단명으로 끝났고, 이 무렵 내가 한 일 중 그래도 제법 일다운 일은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개인교습을 해서 잔돈푼을 버는 것 정도였다. 십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하는 일 없이 건달로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어 ‘또라이’ 소리도 예사로 들었다. 이때 나는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이 땅이 참으로 살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절감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세상을 다시 공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에 산다고는 하나 농촌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가령 봄이면 굶고 여름에도 점심은 건너뛰고 아침저녁을 죽으로 견디는 이웃들의 사정이 바로 내 사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바로 이웃 동네에는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은 되었으니, 그 동네는 온통 과부 천지였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한 사람이 여럿이고 또 그 보복으로 똑같이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평생 서로 얼굴도 안보고 사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그 무렵 내게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글을 쓸 기회가 온다면 남이 아닌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그래도 그 십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같은데 몇 편의 시를 끼적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쓴 시들이 “눈길” “그날” 등이다. 친구와 막 영어 학원을 벌이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故) 김관식 시인한테서 함께 서울 올라가 다시 시를 써보자는 제의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도 내가 시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좌다. 그의 말에 별로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경하여 십여 년 만에 시를 썼으니 그것이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졌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접하지 않아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라는 투로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몇 해 동안 “시골 큰집” “원격지” 같은, 시골에 있으면서 언젠가 꼭 쓰겠다고 생각한 시들을 써나갔으니,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시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대화인 만큼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농무(農舞)”(1973) 시들이 이때 쓴 것들이다. 이 무렵 나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개념에도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시에서 제목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문에서 한자는 철저하게 배제했으며 외래어도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한글 전용이나 순수 우리말을 지키자는 논지의 잡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라는 명제에 나는 한 동안 충실했다. 또 시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작으나마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내 시는 반유신, 반군사독재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시는 그 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것이 드러나면 후배나 동료들은 나를 문학주의자로 비판하고 매도했다. 나는 이 비판과 매도에 항시 약했다. 결국 내 시는 경직 될 수밖에 없었고, 언제부턴가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지루하고 싫어졌다. 적어도 신명이 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었는데, 시 쓰는 일에 나는 전혀 신명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 아닌가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해서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 민요를 좋아하던 나는 열심히 민요를 찾아다녔고 민요와 관계 되는 일도 했으며, 민요적 성격의 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한 시대 이전의 정서요, 그 말을 오늘 살아 있는 말로 되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이 아니었는가 싶다.
“길”(1990)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감에서 헤어났다. ‘민요는 우리 것’ 이라는 고지식한 논리에서 벗어나 배울 것은 배우되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 배운 또 한 가지는 시 쓰기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행위라는 점이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고 만지기 위해 찾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시 쓰기란 점을 민요를 찾아다니는 마지막 단계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분명하고 힘 있게 얘기할 때 남도 다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고 나만의 목소리를 내게 되며, 그것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시는 그 시대의 질문이요 대답이란 명제도 그랬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었고, 오늘의 내 삶에 충실한 시르 쓰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통일이나 노동 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오늘의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라는, 강풍처럼 몰아치던 일부 과격한 질타를 차단하니 시 쓰는 일에 비로소 신명이 났고, 시에 활기도 생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뿔”(2002)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명확하게 나의 길을 잡게 되었다. 결국 남이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지기 위해, 생각 속에서 현실 속에서 힘껏 내달려, 그것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내 시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시가 오늘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을 제약하는 여러 조건과 맞서는 일에도 등한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다. 민족이니 민중이니 민요니 하는 것들이 더 이상은 내 시의 족쇄가 되지 않고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 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 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이 글은 신경림 시집 “낙타”에 실려 있는 산문을 원문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