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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데이빗 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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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바울이 쓴 ‘빌립보서’를 보겠는데, 이것은 로마에 쓴 또 다른 하나의 옥중서신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는데, 사실 응당 연금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먼저 지도상의 빌립보 지리 위치를 보겠습니다. 바울 세운 첫번째 교회가 바로 빌립보이고, 그는 여기를 천국의 식민지라고 하였는데, 이는 빌립보 이 도시를 하는 말이며, 의의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 도시가 바로 로마 제국를 건립한 동서 교통 요도에 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네압볼리 항구에서 상륙하였는데,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도시를 방문할 기획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책략은 현지 주요 도시만 방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우리는 빌립보가 왜서 중요한 도시인지를 논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먼저 지도를 보겠는데, 헬라 북쪽 여기에 한 줄의 산맥이 있고, 동서 방향으로 된 전체 산맥 중에서 하나의 좁은 입구만 있는데, 바로 빌립보입니다. 그래서 이 도로는 산맥을 찔러 남쪽으로 행했는데, 하지만 빌립보에 하나의 도로가 있는데 이 산맥을 찔러 유럽 각 곳으로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지난 역사상에서 계속하여 하나의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났었는데, 바로 유럽 북쪽과 헬라 사이의 이 좁은 입구를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폐허가 된 이 도시를 보겠습니다. 현재 비록 현대 도시를 건축하였지만 원래의 옛 도시와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고, 그 산맥이 바로 멀리인 여기에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고고학자가 여기에서 능묘 하나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금은보화들이 담겨져 있고, 그 가치는 애굽 투탕카멘 바로 왕 능묘의 보물 다음에 갔습니다. 투탕카멘 바로 왕의 능묘를 여러분은 아마도 들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 능묘는 아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 바로 왕의 능묘 발견은 기세를 꺾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의 이 능묘의 보물 가치가 두번째로 갔고, 그것은 국왕의 능묘였으며, 빌립보 왕의 능묘였고, 빌립보 도시는 바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왕이었고, 마게도냐는 헬라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빌립보 왕이 아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알렉산더 대제입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31 세 때 당시의 세계를 정복했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빌립보 왕의 능묘이고, 그는 알렉산더 대제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산 언덕에는 풍부한 금광과 은광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합장한 그 금은보화들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2000년 전 여기는 하나의 번영한 대 도시였고, 풍경이 아름다웠으며, 빌립보 왕이 여기에 도시를 건축했습니다. 역사상 몇 차례의 중요한 전쟁 모두가 이 좁은 입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전 168년에 로마가 침략해서 이 도시를 정복했습니다. 주전 42년에 안토니안이 여기에서 브루테스와 카세우스를 격퇴했고, 그 후 주전 31년에 안토니안과 클레오페트라가 여기에서 전패하여 사망했습니다. 모두 빌립보에서 일어났고, 여기는 하나의 전쟁터입니다. 후에 여기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도 그에 과장된 이름을 하나 지었는데, 줄리아 아우구스투스 빌립보 식민지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빌립보 이름 모두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도시를 빌립보라고 간략해 불렀습니다. 그는 소형 도시였고, 도시 사람들은 로마인과 똑같이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은 이로 말미암아 로마인들더러 로마 제국의 문화를 가져와 여기에 와서 거주하려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 로마와 똑 같은 시민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보다 지위가 더 높은 지존자가 이 도시를 탐냈는데,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시를 천국 식민지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지리 환경이 아름답고, 유럽으로 통하는 대문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종 바울을 데리고, 여기에 그의 식민지를 세웠고, 천국의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이 로마의 식민지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갈라디아에서부터 여기에 데려왔고, 바울은 서쪽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속도가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보다도 더욱 급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금했고, 그를 서쪽으로 인도했습니다. 후에 바울에 꿈에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아서 그에게 힘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이 지역에 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를 바로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천국의 식민지라고 불렀는데, 그가 식민지라고 강조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로마 제국이 찍어 놓은 식민지였고, 복음이 바로 여기에서 유럽으로 전해 들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처음에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남자 한 명도 찾지 못했고, 거기에는 유대 회당이 근본상 없었으며, 단 여인 기도 팀 하나만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텐데 유대교의 규칙에 근거하면 반드시 남자 10명은 있어야 회당이 설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랍비라고 불리웠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12명 제자가 있었고, 그 중 제자 한 명이 배반하여 11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라고 불리웠던 것은 그에게 회당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은 건축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남자 10명이 랍비를 따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에서 남자 10명을 찾지 못했는데, 하지만 먼저 기도 팀이거나 혹은 가족 소그룹 모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 기도 팀은 바로 강가에서 진행했고, 리더는 빌립보 사람이 아니라 아시아 여자였고, 아시아 사람이었는데, 그는 장사꾼이었고, 자주색 천을 전문으로 팔았습니다. 그에게는 노예가 있었고, 그리고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온 가족은 가족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그리고 친척도 포함됩니다. 이는 현대 가족보다 훨씬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예입니다. 이 온 가족은 함께 주를 믿고 또한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바로 루디아 온 가족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수 있는데, 유럽에서 첫번째로 주를 믿은 남자는 옥졸이었습니다. 그도 노예였고, 당시 간수들을 지키는 책임을 했는데, 이는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관례에 따라 먼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강가에서 이 여인 소그룹을 발견했고, 바로 여기서부터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은 바로 이렇게 유럽으로 전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항력이 아주 빠르게 도착했고, 뿐만 아니라 아주 심상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거리에서 전도를 할 때 어떤 여자아이가 그를 계속해서 따르며 소리치기를 ‘너희들 이 사람 말을 들어 보라. 그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 너희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진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면 전도에 도움이 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바울은 문제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이 여자아이에게 악령이 붙었다는 것을 보았고, 그는 눈치가 빨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인은 이 여자아이를 돈줄로 만들었고, 그는 점을 칠 줄 알았고, 아주 재미있는 것은 악력이 뜻밖에도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사람이 만약 틀리면 복음 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악령을 여자에게서 쫓아내었고, 그는 더는 그들의 모임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의 주인이 돈을 벌 수 없게 되어서 번거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했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가 장사에 영향을 주어 미워했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그 은장인데, 지금은 또 이 여자아이의 주인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곧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고소 당하는 죄명은 ‘그는 유대인이다’입니다. 그들은 그가 남을 꼬드겨 로마 법령을 어겼다는 것인데, 사실 근본상 그런 일이 없었고, 이것은 반 유대인의 태도였습니다. 이왕 유대인인데, 그들은 바울이 아니라고 고소했고, 이제는 이방인이 그가 유대인이고, 로마 법령을 어기고 있다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날조된 죄명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래도 감옥에 갇혔는데, 결국 그들은 감옥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큰 소리로 찬양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몸은 감옥에 있고, 캄캄한 한 밤중인데,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는데, 바로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했고, 결국은 땅이 크게 진동하였고, 벽이 무너졌으며, 감옥 문 전체가 열려서 모든 죄수가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죄수 모두 도망하면 옥졸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고 겁을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큰 소리로 웨치기를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가?무슨 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부로부터 처형되는 형벌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당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바로 대답하기를 ‘당신은 예수가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이야기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 날 밤에 바울이 몇 시간으로 그의 온 가족에게, 그 가족의 모든 노예도 포함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옥졸이 결혼을 했는지 모르고, 루디아가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 한 가족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고, 그래서 응당 결혼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그날 밤 바울이 그의 가족, 모든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모두가 준비되니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세례를 했으며, 그래서 교회는 이로써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의 로마 시민 신분으로 했는데, 이 방법이 빌립보에서는 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로마 시민 신분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죄도 없는 나를 감옥에 집어 넣은 것은 로마의 법령을 어기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더러 도시를 떠나라고 청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이 우리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가면 우리가 가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도시의 장관들이 그들을 보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기에서 얼마 머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몇 일일 것이고, 많아야 몇 주였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첫번째인 천국 식민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복음을 대하는 반응이 다른 곳보다 좋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건립 중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가 가장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유일하게 돈으로 바울의 교회를 지지했었으며, 바울은 그들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돈으로 지지했고, 이로써 계속하여 바울을 지지했습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가 돈을 로마에 보내어 바울을 도와 주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몇 년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혔으며, 가이사에게 항소했습니다. 몸은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보내졌고, 재판 받는데 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2년 사이에 누가 의사가 두 권의 책을 써서 그를 위해 변호했는데, 바울이 무죄 석방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 빌립보에서 보내온 두가지 물건을 받았는데, 그 중의 한가지가 돈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연금되었기 때문에 수입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는 매임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임’은 사실 한가지 사슬인데, 대략 1m 길이 뿐이고, 사슬의 다른 한 끝에는 병사가 차고 있고, 8시간마다 한번씩 교대합니다. 바울이 한 방언은 고린도 사람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욱 많았는데, 그와 함께 8시간 묶여있는 사람은 그다지 재미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선택이 없었으며, 결국한 한 명 또 한 명의 병사들이 이렇게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심지어 가이사의 집에까지 전해 들어갔다는데, 그러나 이것은 주제 밖의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매임 중에 있고, 나는 매임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연금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유스럽게 손님들이 오고 가고 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먼 빌립보에서 돈을 한 포대 가져왔습니다. 그더러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돈으로 음식을 사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돈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빌립보 사람들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밥을 해 주라고 했고, 또한 청소도 도와서 하고, 당신을 도와 집을 관리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이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도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현재 바울은 수입이 없으니 우리가 그에게 돈을 보냅시다. 그가 혼자 거기에 거주하고 있고, 아마도 밥도 제대로 해서 드시지 못할 것 같고, 집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것 같으니 우리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돌봅시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로마로 보내져 바울을 돌보았습니다. 이러면 사도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라는 이 단어의 뜻은 매우 광범위하고, 또한 매우 탄력성이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서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를 가리키고,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이며, 갑이라는 곳에서 을이라는 곳으로 임무 집행을 간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다섯가지 사도가 있는데, 예수님에게 사도라는 칭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머리이신 사도이고, 그것은 그의 직함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하늘에서부터 땅에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보내어져서 가입되기를 항상 기다렸고, 그래야 그가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사도는 두 사람 두 사람씩 함께 사역했는데, 에바브로디도까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보내짐까지 기다렸다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매번 제자들을 보낼 때 두사람 한 팀씩 했는데, 아주 재미있지요. 단독으로 다니는 사도들 조심하세요. 사도는 응당 두사람 한 팀이어야 합니다.
두번째 사도는 12명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그들입니다. 그리고 세계 각 곳으로 보냄을 받아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이 필히 가추어야 하는 조건은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고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알고 있으며, 법정에서 이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활을 위해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도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세번째 사도입니다.
오늘날에는 12명 사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증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의 특례였고,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지금은 이런 사도가 이미 없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이고, 오늘날에는 성경을 위해 편폭을 증가할 사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세가지 사도는 이미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네번쩨 사도 신분도 있었는데, 바로 선봉자인 선교사입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신약성경에 이런 사도가 매우 많았고, 오늘날에도 매우 많습니다. 교회에서 그들을 교회가 없는 곳으로 파견하여 교회를 건립하게 하였는데, 적어도 두사람 함께 갔고, 일반적으로 남녀로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하지만 사도 팀들은 두 남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도 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보내다’라는 단어의 라틴어는 오늘날의 ‘선교사’와 ‘유도탄’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선교사와 유도탄, 선교사는 유도탄처럼 안에 복음의 화약이 가득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도탄’이라는 단어는 ‘발사하다’라는 뜻이며, 그리고 ‘사도’는 바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네번째 종류의 사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고, 그들은 바로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이며, 이런 사도들은 성경을 기록하지 않지만 교회는 세웁니다. 바울은 두가지를 겸했고, 계시를 받아 성경을 쓰는 사도이며, 또한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입니다.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는 매우 많습니다. 바나다, 실라, 그리고 많은 무명 사도들 처럼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사도들이 있었는데, 다만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파견하여 교회를 건립했고, 복음은 이로써 전해졌습니다.
다음은 다섯번째 종류 사도인데, 마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튼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는 사람 모두는 사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돈을 헌금하고 또한 에바브로디도 사도를 보내어 그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길복 교회에 책임 있는 총책임자 한 분이 계셨는데, 제가 기억하기로 그의 이름은 돈 마틴이었습니다. 그는 기술이 매우 좋은 목수였고, 그는 못이나 접착제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목건을 만들었고, 또한 매우 탄탄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나사렛으로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당신은 목수이어서 단신을 나사렛으로 보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으로 가서 어느 병원의 빌딩을 증축하는 일을 도왔는데, 거기서 6 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는 비행기 타고 출국했던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큰 일이었습니다. 그가 나사렛으로 보냄을 받아 그의 목수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도’라는 이 단어인데, 이는 특별하게 높은 곳에 있다는 말이 아니며,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기만 하면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다섯번째 사도는 빌립보에서 로마로 보내어져서 거기서 집사로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이 단어는 무슨 특별한 말이 아니고,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면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는 기본상 바울이 기록한 한통의 감사 편지입니다. 바울은 두가지 일로 빌립보 교회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헌금해서 그더러 밥을 먹을 수 있게 했고, 또한 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돌보고 삼시세때 요리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와서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쓰러졌는데, 그의 병이 매우 중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중병으로 살 수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주 재미있는데, 신약성경의 치유 중점은 크리스찬이 치유 받은 것이 아니고 항상 복음 전하는 이 방면에 놓았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몇 명 모두는 몸에 병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들의 병은 치유를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술로 위병을 치료해 보라고 분부했는데, 그는 술로 위를 마사지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가 병에 걸리면 그더러 대오에서 떨어져 남아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치유 권능은 크리스찬더러 건강을 지켜라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현명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라는 것으로 생각할까 무섭습니다. 사실 비크리스찬을 치유하는 것이 오히려 쉽습니다. 여러분은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진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치료하지 못했고, 에바브로디도는 위급했습니다. 이 소식이 빌립보에 전해졌고, 빌립보 교회는 그들이 보낸 동역자가 위급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좋기는 에바브로디도의 상황이 좋아졌을 때 빌립보로 보내서 그의 고향 사람들더러 걱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테니 그에게 이 편지를 가져가게 하겠노라. 너희들이 돈을 헌금하여 감사하느니라. 나는 그를 보내야 하는 것이 매우 유감스러우니라. 그는 좋은 형제이고 또한 매우 도움이 되었느니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을 아느니라. 그래서 내가 그를 보내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기본상 하나의 감사 편지였고, 바울이 남긴 유일한 한 통의 감사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또 다른 감사의 편지가 있는지 모르고, 또한 다른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 사이에는 매우 특별한 감정이 있고, 빌립보 사람들은 그가 바울을 도와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우리가 이 서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서신의 중점은 매우 다르게 더는 문제 해결을 하지 않고, 위기나 혹은 필요도 하지 않고,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더러 그들 사이의 관계에 조금 이해하게 했고, 편지에는 부정적인 정서가 없었고, 슬픔이 없었고, 분노도 없었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느낌인 따뜻함, 온유, 친밀, 우호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편지에서 본 바울은 전도인이나 혹은 선교사 뿐만 아니라 친구였고, 그는 그가 인솔하여 주를 믿게 한 자들과도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항상 기도했는데, 일반 사람들은 편지에 축복으로 시작하는데,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기도하겠는지를 말했고, 또한 그들의 아낌없이 베푼것에 감사했습니다.
이 서신에서 한가지가 아주 재미있는데, 그는 어떻게 끝내면 좋겠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항상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라고 했습니다. 어떤 전도인들은 이처럼 그가 마지막으로라고 하면서, 적어도 25분 되어서야 끝납니다. 이 서신에서 ‘마지막으로’라는 말은 여러 번 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편지를 쓸 때 자주 보는 현상이며, 무엇을 또 말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편지를 썼던 경험이 있습니까? 또 다른 일을 말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맞아 또 한 가지 일이 있지 …라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마지막으로’라고 했고, 무엇을 또 말해야 할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한가지 단어를 언급했는데, 바로 koinonia 입니다. 단체라는 뜻이며, 교통 혹은 나눔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이 단어의 뜻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koinonia 라는 이 단어는 깊은 관계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하기를 ‘회의 후에 차가 있으니 모두가 모이세요’라고 합니다. 마치 차를 마시면 단체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인데, 차를 마시면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체의 관계는 세우지 못합니다. koinionia 라는 이 단어는 사업 동업자는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업자의 관계인데, 만약 사업이 실패하면 모든 동업자가 손해보게 될 것입니다. 동업자는 사업에서 단체의 관계가 있으며, 모두가 동고동락하며 예외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단체의 관계입니다.
제가 더욱 놀라운 예를 설명하겠는데, 전에 가끔은 샴쌍둥이가 출생했는데, 오늘날과 같습니다. 전에는 분할 수술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현대 의술까지도 분할 수술을 성공할지 모르겠습니다. 샴쌍둥이가 출생할 때 만약 측면으로 연결되었으면 혈관이 같을 것이고, 혈관이 만약 두 사람 몸에서 함께 통하면 분할이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에 이런 샴쌍둥이의 혈액에 koinonia 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두 사람의 생사가 연결되어 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하여 똑 같은 조우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모임이 끝나면 함께 즐겁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친밀함입니다. 서로의 조우가 완전히 똑같고, 한 사람이 기쁘면 모두가 기쁘고, 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면 모두 함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어떻게 되면 모두가 그와 똑같게 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우리 서로 사이의 koinonia 를 논했습니다. 당신이 어떠면 나도 어떻고, 내가 어떠면 당신도 어떻고, 내가 영향을 받으면 당신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이 매우 강렬한데, 바울은 그들에게 있어서 항상 영적인 부모였는데, 하지만 그가 여기에서는 동업자로 자칭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편지에서 어떤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 중에 두 자매가 문제가 조금 있었는데, 한 명은 유오디아이고, 다른 한 명은 순두게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이름에 인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 두 자매가 문제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바울의 동역자였고, 바울에게 항상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교회에 문제를 가져왔고,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몇 마디를 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로마로 보내어졌을 때 바울에게 그들 교회 가장 큰 문제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드시 말씀 드렸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각자 서로 다른 전도인을 따랐던 것처럼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하나가 되지 못했던 상황은 교만에서 일어났으며,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상태가 스스로 잘난 체하여졌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 돌보고 다른 사람은 돌보지 않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성도가 만약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관계가 팽팽해집니다. 우리 교회에 한 연로한 여사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한번은 그가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너무 실망됩니다’라고 하여 제가 ‘왜요?’라고 물으니 그가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성령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저는 이 은사를 몇 년동안 구했는데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당신은 이미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언제요?’라고 하여 제가 ‘바로 그들이 받을 때입니다’라고 하니 그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들이 받을 때 당신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기쁘면 모두가 기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어떻게 되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은사를 받았다면 당신도 받았고, 우리 모두가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당신은 이미 이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집에 가서 주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집에 가서 기도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이 은사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언으로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은 있고 나는 없다’는 마음 태도가 그를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한 지체가 받으셨다면 당신도 받으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만약 당신 자신이 독립적인 개체라고 여기고 몸의 한 지체가 아니라고 여기면 그럼 점차적으로 하나가 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심오한 진리입니다. 몸에 어떤 물건을 받으면 전체가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것에 기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외의 수확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복을 받으면 몸 전체가 이외의 복을 받게 되는데, 이런 생각이 우리더러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있고 나는 없다’라는 생각은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상황은 바로 이렇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욱 관심하면 바로 하나가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너희들이 나보다 자신들을 더욱 관심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를 관심하는 것이 모임할 때 당신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관심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소수 몇 명만 아니고 모든 지체와 함께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요. 이 서신에 단어 하나가 있는데, 여러분에게 왼쪽에 있는 이 그림을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분은 아마도 이것은 누구일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사진인데, 하지만 그는 사도 바울이 아니고 바울 스나이더입니다. 그는 제 마음속의 영웅인데, 여러분에게 그를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왜서 그의 사진을 보시려고 할까요? 우리가 돌아가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를 보겠습니다. 바울 몸은 옥에 있고, 그를 돌보던 에바브로디도 또한 곧 떠나게 되었고, 그는 홀로 미래를 대면해야 했고, 심판을 대면해야 했으며, 아마도 처형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편지에서 가장 말하기 좋아했던 것은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나는 정말로 기쁘고, 정말로 감사하느니라. 아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번은 제가 친구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문안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네’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옥중에서 편지를 했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이 사진은 바울 스나이더입니다. 그는 1930년 베를린 한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제가 전에 그 교회를 가 보았는데, 그의 홀어머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성도였고, 그 곳은 베를린 남쪽에 있습니다. 1930년대 바울 스나이더가 설교할 때 사악을 반대하는 파시즘이 히틀러를 따랐다고 하니 회중들이 그더러 이런 강의를 하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목사님을 잃을까 무서웠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시장님까지 와서 그더러 이 주제를 강의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강의했습니다. 어느날 새벽 3시, 게슈타포들은 이런 시간에 사람을 잡는데, 그들이 와서 그를 잡아갔고, 그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며 고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아내와 두살된 아들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배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웃음을 지고 가족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를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저 여기에 문장 한편이 있는데, 그의 처지를 묘사했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를 채찍으로 때리고, 손목을 묶어 그를 매달았고, 그리고 그를 굶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관속에 넣고, 그의 아내와 그리고 가족들더러 그의 시체를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는 전 수용소에서 모범 죄수였다고 했습니다. 폐염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거짓말이었고, 이것이 바울 스나디어의 처지였습니다. 제가 바울 스나이더가 당시 수용소에서 그의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제가 그의 편지를 읽을 때 두 마지 말이 계속하여 나타났습니다. 즉 ‘나는 매우 기쁘다’와 그리고 ‘나는 주님께 너무 감사한다’였습니다. 여러분, 이는 현대의 바울이고, 영에는 똑 같은 기쁨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더욱 가까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대’잡지에서 이란 디바지의 안건을 보대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디바지는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고 감옥에 9년동안 갇혀있었고, 전체 안건이 서방 나라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버나리븐은 이로써 ‘시대’ 잡지에 감격적인 문장을 한편을 썼습니다. 디바지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사람더러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1993 년 12월 3일, 그는 드디어 재판받을 기회가 있었고, 디바지는 재판관에서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겸손하게 고백하기를 ‘제가 이 보귀한 기회로 인해 우주에서 가장 큰 재판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회교 율법을 배반했다고 고소 당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선지자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 세가지 모두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믿습니다. 그들이 제가 회교도를 배반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항상 신앙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가 태어나서부터 바로 회교도였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태초부터 크리스찬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회교도들은 저더러 돌아서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만약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품을 떠나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다니엘의 하나님이 그의 친구들을 불 속에서 지키고 건져주셨고, 9 년동안 저의 감옥 생활도 지켜주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디바지가 고백 중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었고, 그래서 저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런 하나의 예였습니다. 여러분, 크리스찬이 감옥에서 죽음을 대면하면서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심정은 완전히 성경 ‘빌립보서’의 묘사이며, 이는 한 성령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는 왜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대면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손해되는 것이 없습니다. 디바지가 말하기를 ‘나더러 살아서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가 있게 하였고, 죽음은 나에게 주와 함께 있게 하는 더욱 좋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거룩한 이름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나더러 만족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주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조금 일찍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재판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과 치유가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하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이고, 죽으면 이익이며, 소득이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했고, 그러나 남아 있기를 ‘바랬고’, 그는 빌립보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걱정하는데,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걱정되고, 나 자신은 아예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석방되기를 바라고, 석방되면 다시 새롭게 주를 섬길 수 있으며, 하지만 나는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데이빗 왓슨이 그가 암 말기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제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그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이 책에서 이 편을 인용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 남으려는 ‘갈망’이 이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것보다 못하느니라. 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저의 이 말에 감동이 되어 이런 기도를 그가 진심으로 떠나는 것을 ‘갈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했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입장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저의 사역이 아직 필요하다면 저는 남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태도는 정말로 좋고 매우 멋집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면 죽어서 이익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짧은 서신에서 예수님을 38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38 번이나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했던 말을 응당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지언정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라는 말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48 번이나 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34 번 했고, ‘내가 주 안에서’라는 말은 50 번 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에서 총 132 번 ‘그의 안에서’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그의 주소였습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빌립보서’를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다음에 계속 강의하겠는데, 하지만 먼저 돈에 관한 것을 논하겠습니다.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들이 돈을 보내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헌금이 나더러 감동하게 하는구나.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니라. 왜냐하면 이는 너희들더러 더욱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헌금에 감사하는 것이 매우 특별하지요? 그는 그들이 돈을 헌금하여 축하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말 한 마디를 했는데, 제가 전도인들을 훈련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사용하여 그들이 단장취의를 하는지를 테스트합니다. 오늘날 전도인들은 쉽게 단장취의를 합니다. 특히 컴퓨터 색인의 기능이 정말로 사람을 해칩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어떤 주제를 겨냥하여 설교하기를 좋아하는데, 본문을 선택할 때 앞뒤 문장을 근본상 보지를 않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와 같은 것인데, 이 구절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결국 많은 사람들이 치유, 복음전파, 기도 등 각양각색의 답이 있는데, 돈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장으로 보면 이 말은 돈을 말하고 있고, 이 메시지가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울은 ‘수입이 많든 적든 나는 견딜 수 있느니라. 만약 나의 수입이 높으면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살 수 있고, 만약 나의 수입이 낮으면 나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지낼 수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절대로 빚을 지지 않게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이 범죄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빚 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돈을 가져가는 것이고, 그것은 도독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빚 지는 것은 범죄라고 명확하게 가리켰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 빚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는데, 결국 삼분의 이가 되는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울로 말하자면 빚 진다는 것은 범죄였습니다. 도독질과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수입이 얼마든지 절대로 빚 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출은 빚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갚아야 할 돈을 갚지 않으면 그야말로 빚 지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자족하는 것을 이미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두가지 상반되는 마음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자족입니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경건에 자족을 더하는 마음은 큰 이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의 간증을 나누면서 말하기를 십계명 중에서 그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제 10계명인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전형적인 바리새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약점은 바로 돈 벌기를 좋아하는 것이며, 그들은 돈이 있는 종교 인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경건과 부유를 함께 얻을 수 없느니라. 돈을 위해 살고 또한 하나님도 위해 살 수는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정곡을 찔렀습니다. 바울 이 바리새인이 전에는 돈을 탐냈었고, 돈 벌기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가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교적 쉽게 자족할 수 있을까요? 돈이 많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돈이 적은 사람일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가장 자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도 항상 자족하지 못하고, 더욱 많은 돈을 갖고 싶어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돈을 헌금해서 너무 기쁘니라. 너희들은 이로써 부유하게 될 것이며, 하지만 나는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 왜냐하면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인 각도에서 이 구절을 보는데, 사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돈이며,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말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현황에 만족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좋아요. 우리가 먼저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여 ‘빌립보서’를 강의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빌립보서’의 매우 심상치 않는 구절 하나를 보겠는데, 현대 성경은 이 구절을 대부분 산문체가 아니고 시체로 인쇄했는데, 매 구절마다 모두 짧습니다. 이 여섯 구절이 마치 시처럼 보이고, 영어 번역으로 읽어도 시 같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빌립보서’에 대해 가장 익숙한 구절이고, 교회에서 자주 낭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많은 논쟁과 토론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물음은 당연히 이 구절을 왜서 여기에 넣었느냐입니다. 다른 구절과 그렇게 다른데? 여기에는 두가지 주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즉 낮아짐과 높아짐, 아래로와 위로입니다. 시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강림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고 또 높은 곳으로 올리웠다는 것을 생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니 하나님이 그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왜서 여기에 놓여있고, 도대체 무슨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예배 중 낭독하는 문구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초대 교회의 자주 불렀던 시가를 인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모르겠고, 혹시 이것은 바울이 기록한 시가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동을 받았을 때 자주 시를 썼고, 그가 마음의 감동을 받았을 때 바로 시를 써서 표달하였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문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해주고, 그리고 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시로 감정을 표달합니다. 매년 2월 14일이면 많은 시들이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이 날이 발렌타인데이기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날에 시를 써서 표달하고 싶은 심정이지요? 왜 생일 엽서에 항상 시를 인쇄했을까요? 왜냐하면 당신이 마음의 감정을 표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마음이 감동을 받았을 때 바로 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바로 시체이고, 아마도 ‘빌립보서’ 이 구절은 바울이 시를 인용한 것이거나 혹은 그가 감동에서 나와서 쓴 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가장 큰 논쟁은 바로 그를 심오한 신학으로 보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를 비우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이 점을 언급하겠는데, 왜냐하면 모든 주석책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비우다’라는 이 단어는 이 시의 ‘헛됨’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헬라 원어는 kenosis, kenosis 입니다. 그는 자신을 비웠고, 이로써 학자들은 계속해서 변론하기를 예수님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그가 인간 세상에 오셨을 때 ‘신성’을 도대체 얼마나 비웠고, 그는 어떤 ‘본성’을 비웠을까요? 이 변론은 매우 위험한 신학 인정을 일으켰고, 예수님이 세상이 계실 때 100% 신이 아니었다고 인정했는데, 이유는 그가 일부분 신성만 비우고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일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확실히 그의 영화를 내려놓았고, ‘그는 그의 영광을 버리고 강생하여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느니라’ 성탄절이면 모두 이 찬양을 부릅니다. 그는 ‘무소부재’한 본성도 내려놓았는데, 이 방면에서는 확실히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소부재’를 나태내지도 못했고, 그는 어떤 일은 그가 모른다고 승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느 때에 다시 오시는지를 모른다고 하였고, 다만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은 그의 예상 밖의 일이었으며, 이런 일이 방생하리라고는 그가 몰랐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을 아시고 있습니다. 그는 ‘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본성도 내려놓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었기에 그가 기적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하지 않았고, 사람의 신분으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을 의지하여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했으면 우리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원래의 많은 특권, 그리고 능력들을 확실히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의 중점은 그는 여전히 100%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절반 하나님이거나 혹은 사분의 삼 하나님으로 변한 것이 아니고, 그가 반신 혹은 반인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렇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100%하나님이시고, 그리고 100% 사람이며,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또한 완전하신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본성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권을 비웠습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구절은 자주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가져옵니다. 저는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었는데, 인간 세상에 올 때 100%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비로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저의 집, 차와 많은 저에게 속한 권리들을 포기한다면 이는 더는 제가 아니라는 표시가 아니고, 저는 단지 저의 특권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여전히 100%의 데이빗 팟슨입니다.
그가 비록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는 특권을 비웠지만 자신의 신성은 비우지 않았고, 그가 비록 자신의 지위, 그리고 특권을 비웠지만 자신의 신성은 비우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오해가 항상 많은 상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잘못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예배에서의 낭독 구절이 아니고, 이 구절은 하나의 시가 아니고 또한 신학 원칙도 아니고, 이 구절, 이 구절은 도덕적 구절에 관련되어 있고, 도덕적 구절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태도와 그의 선택을 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사람의 선택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많은 케이크를 가지고 가서 한 사람더러 선택하라고 하면, 그의 선택에서 그의 성품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조부가 하나의 예인데, 만약 누군가 그에게 과일 한 광주리를 주시면 그는 반드시 보기 좋지 않은 것이나 혹은 상처가 있거나 혹은 상한 것을 고릅니다. 매번마다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부에게 왜서 항상 상한 것만 고르십니까라고 물었어요. 조부가 대답하기를 만약 제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조부의 이런 방법으로 그의 성품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볼 수 있지요? 여러분은 항상 상한것만 고르십니까? 여러분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의 선택으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더러 예수님의 선택으로 그의 성품을 보게 하였고, 그의 첫번째 선택은 일반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아이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저 어항의 고기를 보라. 만약 네가 저 고기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그들이 대방을 물어 죽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만약 고기로 변하여 어항에 들어간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마도 너를 물어 죽일 수 있는데,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리가 때가 되면 너의 시체를 어항에서 건져줄 것이다. 그리고 너더러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로 이렇게 한다할지라도 한가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너를 원래 상태대로 회복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네가 이로써 항상 고기로 살아야 한다는 표시니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아마도 웃길 것인데,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원래는 하나님과 동등되고, 그는 성자이고, 하늘의 영광을 누렸는데, 하지만 일반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세상에 와서 우리를 도우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신분을 영원히 유지했고, 영원히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모두 인간의 신분이었고, 일반인이 되었는데, 이 선택의 대가는 정말로 컸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정말로 이렇게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또 두번째 선택을 했습니다. 가정해서 여러분이 부모를 선택한다고 하면, 여러분이 어떠한 가정이나 혹은 어떠한 사회 지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집을 선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종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했고, 가장 낮은 계급을 선택하여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선택은 33 세 때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가장 창피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2-7 일이면 죽는데, 그는 33 세까지만 살기로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정인데, 그의 이지적인 생각이 아니고 그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심정이 그의 행위를 결정했는데, 이는 그의 심정이고 이지적인 생각이 그의 행위를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이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하난미이 모든 권능과 능력을 그에게 주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을 주어도 안실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권력, 직위 그리고 돈을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만 믿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비록 부유하지만 가난을 선택했고, 이로써 우리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하였기에 우리가 살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일반인을 선택했기에 하나님이 천지의 모든 권능 그리고 능력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고, 또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하나님이 안심하고 그에게 우주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이익은 아랑곳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뜻입니다. 이 구절은 모두에게 어떠하든지 반드시 전체를 봐야하고 자신의 이익만 보지 말고, 먼저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져야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낮아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래야 하나님이 권능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신학이 아니고 예배 중의 낭독사거나 혹은 찬양도 아니고 이 짧은 시는 성품과 하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단체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복음을 위해 견고히 서 있다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느리라. 교회가 만약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 영향을 줄 방법이 없느니라. 교회가 만약 하나가 되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증명할 능력이 있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뜻은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반드시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라는 것이며, 이것은 너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래서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너희 서로 관계에 표현되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만 본받는 것이 아니며, 너희들은 이미 그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지만 너희들은 그의 마음이 너희 사이의 관계를 통치하지 않게 하였고, 이미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너희 관계에서 표현하여 내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어서 말하기를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좋아요 여러분, 이어서 우리가 나눌 것은 ‘빌립보서’에서의 중요한 가르침 몇 가지인데, 제가 여기에서 대강 몇 개를 정했으니 우리 보겠습니다. 제 3장 이후부터 …아니에요. 방금 얘기했던 예수님의 그 시가 후부터 바울은 그들에게 삶에서 어떻게 인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빠르게 한번 강의해 보겠는데, 우선 그가 경험이 있으면 생명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과 승천을 이미 경험했고,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이미 일을 했으며,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했으면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식은 공의를 구하는 것인데, 하지만 의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자신의 의이고, 다른 한가지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한가지 일을 이해하기가 어려워하는데, 바로 악행을 위해 회개하는 것 외에 선행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한 나쁜 일을 위해 회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자기의 득의양양한 선행을 위해 회개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더러 주를 믿게 하는 것이 좋은 사람더러 주를 믿게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은 충분히 나쁘지 않고, 자신의 선행을 위해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나 자신의 의를 생각하면, 그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직접 말하기를 나 자신이 방금 대변을 보고 난 아이와 같이 손에 요강통을 들고 하나님께 ‘이것 보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매우 매우 평이하고 소박한 단어인데, 번역하면 바로 배설물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내가 한 좋은 일은 사실 하나님 눈에는 배설물 같고,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가 헬라 원어에서는 바로 인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은 배설물이고, 그 악취가 비할 바 없으며, 나의 좋은 행위까지 모두 더러우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의이고 나 자신의 의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공덕을 쌓는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려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쫓아야 할 목표이고, 사람이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의이며, 가정, 생활 그리고 배경, 또한 교양 등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이룬 의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했고, 우리가 만약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의 부활과 몫이 있다면 그의 의를 가질 수 있으며, 늙어서 죽을 수 있고,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노력할 책임이 있고, 크리스찬은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갈까지 찬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배후를 잊고, 과거에 있었던 실패나 혹은 성공은 잊고, 지나간 모든 것은 잊고 앞으로 주시하여 전진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위에서 내려오는 상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 종점까지 가지 못했는데, 하지만 나는 앞으로 향해 끊임없이 달리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한 태도이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한 상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배후를 노력하여 잊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즉 배후를 잊고 앞으로 향해 노력해야 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배우려는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서재에 거룩에 대해 논한 책이 많이 있는데, 하지만 제가 그 책에서 거룩을 배운 것이 아니라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이 주와 동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사람의 모범으로부터 배운 것이 책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조부모거나 혹은 친구로부터,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만 있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고, 그들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훈련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당신이 그들과 사귀기만 하면, 그들의 모범을 닮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예수님께서 본 것이 가장 높은 거룩의 모범입니다. 무슨 말을 더 할 필요 없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십시오’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땅에 둔 사람을 닮지 말고, 마음을 하늘에 둔 사람을 닮아 가십시오.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에는 이 두가지 사람이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배가 바로 그의 하나님이고, 손에 든 칼로 자신의 무덤을 파느나데, 그들을 배우지 말라. 마음을 하늘에 둔 사람을 닮아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모범이 당신의 생명에 큰 의미가 있게 될 것이며, 멀리 영향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더러 배워야 할 모범을 택해야 된다고 하였고,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을 택해야 하고, 그들을 닮아가고, 그들에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갈망을 논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와 함께 부활하려고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서일까요? 나도 죽음에서 부활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 원어에서 ‘나오다’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더러 부활하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해석이 있는데, 말세가 올 때면 두번의 부활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의인의 부활이고, 두번째는 다른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 것인데, 두 번 부활 사이에는 오랜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죽은 의인의 부활이고, 두번째는 다른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첫번째 부활은 나의 목표이기를 바라는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부활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여전히 노력하는 목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천국의 티켓을 받았으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노력하고 있느니라. 나는 첫번째 부활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의 부정적인 작은 경고인데, 여러분이 만약 소홀이 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부활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의인과 함께 부활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이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좋아요. 제가 가능한 ‘빌립보서’를 빨리 끝내겠습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서’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 성경에 많은 약속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약속에는 사실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약속 잡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포장된 쵸콜렛이 있었는데, 그 안에 축복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매일 축복 편지 한 장씩 꺼내어 열어 보았는데, 안에는 약속이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들에는 조건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반드시 너와 동행하리라’ 같은 것들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약속이지요? 하지만 이 약속의 조건은 만민더러 제자를 삼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며, 그들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두는 약속만 받고 싶어하고 복음은 전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러면 그 영광을 놓치게 됩니다. 만약 내가 만민에게 가서 제자 삼게하는 것을 원한다면 예수님의 약속이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합니다.
매번 사람들이 저에게 그들이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제가 그들더러 가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된다고 합니다. 주를 위해 영혼을 얻게 되면 주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얻고 싶으면, 조건은 바로 나가서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약속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반드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빌립보서’ 마지막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약속이 매우 아름답지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며, 하나님이 평안으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사상이 성실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진실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사상을 속박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바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이해가 됩니까? 약속을 취하고 싶으면 자신의 본분을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아셔야 하는데, 왜냐하면 약속은 절대로 근거없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기 대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많은 약속들이 있지만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재삼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사상을 끊임없이 성실하게 아름답게 순결하게 진실되게 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고, 너희 마음에 바로 평안이 있고,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왜서 그런 환경에서도 여전히 평안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이 매우 절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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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바울이 쓴 ‘빌립보서’를 보겠는데, 이것은 로마에 쓴 또 다른 하나의 옥중서신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는데, 사실 응당 연금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먼저 지도상의 빌립보 지리 위치를 보겠습니다. 바울 세운 첫번째 교회가 바로 빌립보이고, 그는 여기를 천국의 식민지라고 하였는데, 이는 빌립보 이 도시를 하는 말이며, 의의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 도시가 바로 로마 제국를 건립한 동서 교통 요도에 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출발하여 네압볼리 항구에서 상륙하였는데,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도시를 방문할 기획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책략은 현지 주요 도시만 방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우리는 빌립보가 왜서 중요한 도시인지를 논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먼저 지도를 보겠는데, 헬라 북쪽 여기에 한 줄의 산맥이 있고, 동서 방향으로 된 전체 산맥 중에서 하나의 좁은 입구만 있는데, 바로 빌립보입니다. 그래서 이 도로는 산맥을 찔러 남쪽으로 행했는데, 하지만 빌립보에 하나의 도로가 있는데 이 산맥을 찔러 유럽 각 곳으로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지난 역사상에서 계속하여 하나의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났었는데, 바로 유럽 북쪽과 헬라 사이의 이 좁은 입구를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폐허가 된 이 도시를 보겠습니다. 현재 비록 현대 도시를 건축하였지만 원래의 옛 도시와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고, 그 산맥이 바로 멀리인 여기에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고고학자가 여기에서 능묘 하나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금은보화들이 담겨져 있고, 그 가치는 애굽 투탕카멘 바로 왕 능묘의 보물 다음에 갔습니다. 투탕카멘 바로 왕의 능묘를 여러분은 아마도 들었을것입니다. 하지만 이 능묘는 아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 바로 왕의 능묘 발견은 기세를 꺾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립보의 이 능묘의 보물 가치가 두번째로 갔고, 그것은 국왕의 능묘였으며, 빌립보 왕의 능묘였고, 빌립보 도시는 바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입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왕이었고, 마게도냐는 헬라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빌립보 왕이 아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알렉산더 대제입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31 세 때 당시의 세계를 정복했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빌립보 왕의 능묘이고, 그는 알렉산더 대제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산 언덕에는 풍부한 금광과 은광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합장한 그 금은보화들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2000년 전 여기는 하나의 번영한 대 도시였고, 풍경이 아름다웠으며, 빌립보 왕이 여기에 도시를 건축했습니다. 역사상 몇 차례의 중요한 전쟁 모두가 이 좁은 입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전 168년에 로마가 침략해서 이 도시를 정복했습니다. 주전 42년에 안토니안이 여기에서 브루테스와 카세우스를 격퇴했고, 그 후 주전 31년에 안토니안과 클레오페트라가 여기에서 전패하여 사망했습니다. 모두 빌립보에서 일어났고, 여기는 하나의 전쟁터입니다. 후에 여기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도 그에 과장된 이름을 하나 지었는데, 줄리아 아우구스투스 빌립보 식민지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빌립보 이름 모두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도시를 빌립보라고 간략해 불렀습니다. 그는 소형 도시였고, 도시 사람들은 로마인과 똑같이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목적은 이로 말미암아 로마인들더러 로마 제국의 문화를 가져와 여기에 와서 거주하려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 로마와 똑 같은 시민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보다 지위가 더 높은 지존자가 이 도시를 탐냈는데,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시를 천국 식민지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지리 환경이 아름답고, 유럽으로 통하는 대문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종 바울을 데리고, 여기에 그의 식민지를 세웠고, 천국의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이 로마의 식민지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갈라디아에서부터 여기에 데려왔고, 바울은 서쪽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속도가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보다도 더욱 급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금했고, 그를 서쪽으로 인도했습니다. 후에 바울에 꿈에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아서 그에게 힘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이 지역에 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를 바로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천국의 식민지라고 불렀는데, 그가 식민지라고 강조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로마 제국이 찍어 놓은 식민지였고, 복음이 바로 여기에서 유럽으로 전해 들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처음에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남자 한 명도 찾지 못했고, 거기에는 유대 회당이 근본상 없었으며, 단 여인 기도 팀 하나만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텐데 유대교의 규칙에 근거하면 반드시 남자 10명은 있어야 회당이 설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랍비라고 불리웠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12명 제자가 있었고, 그 중 제자 한 명이 배반하여 11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라고 불리웠던 것은 그에게 회당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은 건축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남자 10명이 랍비를 따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에서 남자 10명을 찾지 못했는데, 하지만 먼저 기도 팀이거나 혹은 가족 소그룹 모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 기도 팀은 바로 강가에서 진행했고, 리더는 빌립보 사람이 아니라 아시아 여자였고, 아시아 사람이었는데, 그는 장사꾼이었고, 자주색 천을 전문으로 팔았습니다. 그에게는 노예가 있었고, 그리고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온 가족은 가족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그리고 친척도 포함됩니다. 이는 현대 가족보다 훨씬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처음으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예입니다. 이 온 가족은 함께 주를 믿고 또한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바로 루디아 온 가족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릴 수 있는데, 유럽에서 첫번째로 주를 믿은 남자는 옥졸이었습니다. 그도 노예였고, 당시 간수들을 지키는 책임을 했는데, 이는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관례에 따라 먼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강가에서 이 여인 소그룹을 발견했고, 바로 여기서부터 복음을 전했으며, 복음은 바로 이렇게 유럽으로 전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항력이 아주 빠르게 도착했고, 뿐만 아니라 아주 심상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거리에서 전도를 할 때 어떤 여자아이가 그를 계속해서 따르며 소리치기를 ‘너희들 이 사람 말을 들어 보라. 그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 너희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진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면 전도에 도움이 되는 줄로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바울은 문제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이 여자아이에게 악령이 붙었다는 것을 보았고, 그는 눈치가 빨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인은 이 여자아이를 돈줄로 만들었고, 그는 점을 칠 줄 알았고, 아주 재미있는 것은 악력이 뜻밖에도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사람이 만약 틀리면 복음 전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악령을 여자에게서 쫓아내었고, 그는 더는 그들의 모임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의 주인이 돈을 벌 수 없게 되어서 번거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했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가 장사에 영향을 주어 미워했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그 은장인데, 지금은 또 이 여자아이의 주인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곧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고소 당하는 죄명은 ‘그는 유대인이다’입니다. 그들은 그가 남을 꼬드겨 로마 법령을 어겼다는 것인데, 사실 근본상 그런 일이 없었고, 이것은 반 유대인의 태도였습니다. 이왕 유대인인데, 그들은 바울이 아니라고 고소했고, 이제는 이방인이 그가 유대인이고, 로마 법령을 어기고 있다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날조된 죄명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래도 감옥에 갇혔는데, 결국 그들은 감옥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큰 소리로 찬양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몸은 감옥에 있고, 캄캄한 한 밤중인데,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는데, 바로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했고, 결국은 땅이 크게 진동하였고, 벽이 무너졌으며, 감옥 문 전체가 열려서 모든 죄수가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죄수 모두 도망하면 옥졸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고 겁을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큰 소리로 웨치기를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가?무슨 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부로부터 처형되는 형벌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당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바로 대답하기를 ‘당신은 예수가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이야기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그 날 밤에 바울이 몇 시간으로 그의 온 가족에게, 그 가족의 모든 노예도 포함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옥졸이 결혼을 했는지 모르고, 루디아가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 한 가족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고, 그래서 응당 결혼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그날 밤 바울이 그의 가족, 모든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모두가 준비되니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세례를 했으며, 그래서 교회는 이로써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의 로마 시민 신분으로 했는데, 이 방법이 빌립보에서는 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로마 시민 신분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죄도 없는 나를 감옥에 집어 넣은 것은 로마의 법령을 어기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더러 도시를 떠나라고 청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이 우리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가면 우리가 가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도시의 장관들이 그들을 보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기에서 얼마 머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몇 일일 것이고, 많아야 몇 주였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첫번째인 천국 식민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복음을 대하는 반응이 다른 곳보다 좋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건립 중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가 가장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은 유일하게 돈으로 바울의 교회를 지지했었으며, 바울은 그들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돈으로 지지했고, 이로써 계속하여 바울을 지지했습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가 돈을 로마에 보내어 바울을 도와 주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몇 년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혔으며, 가이사에게 항소했습니다. 몸은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보내졌고, 재판 받는데 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2년 사이에 누가 의사가 두 권의 책을 써서 그를 위해 변호했는데, 바울이 무죄 석방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 빌립보에서 보내온 두가지 물건을 받았는데, 그 중의 한가지가 돈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연금되었기 때문에 수입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는 매임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임’은 사실 한가지 사슬인데, 대략 1m 길이 뿐이고, 사슬의 다른 한 끝에는 병사가 차고 있고, 8시간마다 한번씩 교대합니다. 바울이 한 방언은 고린도 사람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욱 많았는데, 그와 함께 8시간 묶여있는 사람은 그다지 재미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선택이 없었으며, 결국한 한 명 또 한 명의 병사들이 이렇게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심지어 가이사의 집에까지 전해 들어갔다는데, 그러나 이것은 주제 밖의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매임 중에 있고, 나는 매임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연금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유스럽게 손님들이 오고 가고 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먼 빌립보에서 돈을 한 포대 가져왔습니다. 그더러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돈으로 음식을 사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돈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빌립보 사람들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밥을 해 주라고 했고, 또한 청소도 도와서 하고, 당신을 도와 집을 관리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빌립보 사람들이 바울이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를 도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현재 바울은 수입이 없으니 우리가 그에게 돈을 보냅시다. 그가 혼자 거기에 거주하고 있고, 아마도 밥도 제대로 해서 드시지 못할 것 같고, 집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것 같으니 우리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돌봅시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로마로 보내져 바울을 돌보았습니다. 이러면 사도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라는 이 단어의 뜻은 매우 광범위하고, 또한 매우 탄력성이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서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를 가리키고,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이며, 갑이라는 곳에서 을이라는 곳으로 임무 집행을 간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다섯가지 사도가 있는데, 예수님에게 사도라는 칭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머리이신 사도이고, 그것은 그의 직함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하늘에서부터 땅에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보내어져서 가입되기를 항상 기다렸고, 그래야 그가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사도는 두 사람 두 사람씩 함께 사역했는데, 에바브로디도까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보내짐까지 기다렸다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매번 제자들을 보낼 때 두사람 한 팀씩 했는데, 아주 재미있지요. 단독으로 다니는 사도들 조심하세요. 사도는 응당 두사람 한 팀이어야 합니다.
두번째 사도는 12명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그들입니다. 그리고 세계 각 곳으로 보냄을 받아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이 필히 가추어야 하는 조건은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고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알고 있으며, 법정에서 이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활을 위해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도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세번째 사도입니다.
오늘날에는 12명 사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증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의 특례였고,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지금은 이런 사도가 이미 없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이고, 오늘날에는 성경을 위해 편폭을 증가할 사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세가지 사도는 이미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네번쩨 사도 신분도 있었는데, 바로 선봉자인 선교사입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신약성경에 이런 사도가 매우 많았고, 오늘날에도 매우 많습니다. 교회에서 그들을 교회가 없는 곳으로 파견하여 교회를 건립하게 하였는데, 적어도 두사람 함께 갔고, 일반적으로 남녀로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하지만 사도 팀들은 두 남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도 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보내다’라는 단어의 라틴어는 오늘날의 ‘선교사’와 ‘유도탄’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선교사와 유도탄, 선교사는 유도탄처럼 안에 복음의 화약이 가득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도탄’이라는 단어는 ‘발사하다’라는 뜻이며, 그리고 ‘사도’는 바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네번째 종류의 사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고, 그들은 바로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이며, 이런 사도들은 성경을 기록하지 않지만 교회는 세웁니다. 바울은 두가지를 겸했고, 계시를 받아 성경을 쓰는 사도이며, 또한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입니다. 교회를 건립하는 사도는 매우 많습니다. 바나다, 실라, 그리고 많은 무명 사도들 처럼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사도들이 있었는데, 다만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파견하여 교회를 건립했고, 복음은 이로써 전해졌습니다.
다음은 다섯번째 종류 사도인데, 마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튼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는 사람 모두는 사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돈을 헌금하고 또한 에바브로디도 사도를 보내어 그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길복 교회에 책임 있는 총책임자 한 분이 계셨는데, 제가 기억하기로 그의 이름은 돈 마틴이었습니다. 그는 기술이 매우 좋은 목수였고, 그는 못이나 접착제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이런 목건을 만들었고, 또한 매우 탄탄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나사렛으로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당신은 목수이어서 단신을 나사렛으로 보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으로 가서 어느 병원의 빌딩을 증축하는 일을 도왔는데, 거기서 6 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는 비행기 타고 출국했던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큰 일이었습니다. 그가 나사렛으로 보냄을 받아 그의 목수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사도’라는 이 단어인데, 이는 특별하게 높은 곳에 있다는 말이 아니며,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기만 하면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다섯번째 사도는 빌립보에서 로마로 보내어져서 거기서 집사로 있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이 단어는 무슨 특별한 말이 아니고, 보냄을 받아 나가서 임무를 집행하면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는 기본상 바울이 기록한 한통의 감사 편지입니다. 바울은 두가지 일로 빌립보 교회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돈을 헌금해서 그더러 밥을 먹을 수 있게 했고, 또한 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돌보고 삼시세때 요리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와서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쓰러졌는데, 그의 병이 매우 중했습니다. 바울은 그가 중병으로 살 수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주 재미있는데, 신약성경의 치유 중점은 크리스찬이 치유 받은 것이 아니고 항상 복음 전하는 이 방면에 놓았습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몇 명 모두는 몸에 병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들의 병은 치유를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술로 위병을 치료해 보라고 분부했는데, 그는 술로 위를 마사지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가 병에 걸리면 그더러 대오에서 떨어져 남아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치유 권능은 크리스찬더러 건강을 지켜라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현명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께 치유를 구하라는 것으로 생각할까 무섭습니다. 사실 비크리스찬을 치유하는 것이 오히려 쉽습니다. 여러분은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진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치료하지 못했고, 에바브로디도는 위급했습니다. 이 소식이 빌립보에 전해졌고, 빌립보 교회는 그들이 보낸 동역자가 위급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좋기는 에바브로디도의 상황이 좋아졌을 때 빌립보로 보내서 그의 고향 사람들더러 걱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테니 그에게 이 편지를 가져가게 하겠노라. 너희들이 돈을 헌금하여 감사하느니라. 나는 그를 보내야 하는 것이 매우 유감스러우니라. 그는 좋은 형제이고 또한 매우 도움이 되었느니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을 아느니라. 그래서 내가 그를 보내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기본상 하나의 감사 편지였고, 바울이 남긴 유일한 한 통의 감사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또 다른 감사의 편지가 있는지 모르고, 또한 다른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 사이에는 매우 특별한 감정이 있고, 빌립보 사람들은 그가 바울을 도와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우리가 이 서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서신의 중점은 매우 다르게 더는 문제 해결을 하지 않고, 위기나 혹은 필요도 하지 않고,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더러 그들 사이의 관계에 조금 이해하게 했고, 편지에는 부정적인 정서가 없었고, 슬픔이 없었고, 분노도 없었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느낌인 따뜻함, 온유, 친밀, 우호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편지에서 본 바울은 전도인이나 혹은 선교사 뿐만 아니라 친구였고, 그는 그가 인솔하여 주를 믿게 한 자들과도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항상 기도했는데, 일반 사람들은 편지에 축복으로 시작하는데,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기도하겠는지를 말했고, 또한 그들의 아낌없이 베푼것에 감사했습니다.
이 서신에서 한가지가 아주 재미있는데, 그는 어떻게 끝내면 좋겠는지를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항상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라고 했습니다. 어떤 전도인들은 이처럼 그가 마지막으로라고 하면서, 적어도 25분 되어서야 끝납니다. 이 서신에서 ‘마지막으로’라는 말은 여러 번 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편지를 쓸 때 자주 보는 현상이며, 무엇을 또 말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편지를 썼던 경험이 있습니까? 또 다른 일을 말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맞아 또 한 가지 일이 있지 …라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마지막으로’라고 했고, 무엇을 또 말해야 할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한가지 단어를 언급했는데, 바로 koinonia 입니다. 단체라는 뜻이며, 교통 혹은 나눔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이 단어의 뜻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koinonia 라는 이 단어는 깊은 관계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항상 말하기를 ‘회의 후에 차가 있으니 모두가 모이세요’라고 합니다. 마치 차를 마시면 단체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인데, 차를 마시면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체의 관계는 세우지 못합니다. koinionia 라는 이 단어는 사업 동업자는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업자의 관계인데, 만약 사업이 실패하면 모든 동업자가 손해보게 될 것입니다. 동업자는 사업에서 단체의 관계가 있으며, 모두가 동고동락하며 예외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단체의 관계입니다.
제가 더욱 놀라운 예를 설명하겠는데, 전에 가끔은 샴쌍둥이가 출생했는데, 오늘날과 같습니다. 전에는 분할 수술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현대 의술까지도 분할 수술을 성공할지 모르겠습니다. 샴쌍둥이가 출생할 때 만약 측면으로 연결되었으면 혈관이 같을 것이고, 혈관이 만약 두 사람 몸에서 함께 통하면 분할이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에 이런 샴쌍둥이의 혈액에 koinonia 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두 사람의 생사가 연결되어 있고,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하여 똑 같은 조우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모임이 끝나면 함께 즐겁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친밀함입니다. 서로의 조우가 완전히 똑같고, 한 사람이 기쁘면 모두가 기쁘고, 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면 모두 함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어떻게 되면 모두가 그와 똑같게 됩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우리 서로 사이의 koinonia 를 논했습니다. 당신이 어떠면 나도 어떻고, 내가 어떠면 당신도 어떻고, 내가 영향을 받으면 당신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이 매우 강렬한데, 바울은 그들에게 있어서 항상 영적인 부모였는데, 하지만 그가 여기에서는 동업자로 자칭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편지에서 어떤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 중에 두 자매가 문제가 조금 있었는데, 한 명은 유오디아이고, 다른 한 명은 순두게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이름에 인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 두 자매가 문제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바울의 동역자였고, 바울에게 항상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교회에 문제를 가져왔고,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몇 마디를 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로마로 보내어졌을 때 바울에게 그들 교회 가장 큰 문제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드시 말씀 드렸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각자 서로 다른 전도인을 따랐던 것처럼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하나가 되지 못했던 상황은 교만에서 일어났으며,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상태가 스스로 잘난 체하여졌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 돌보고 다른 사람은 돌보지 않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성도가 만약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관계가 팽팽해집니다. 우리 교회에 한 연로한 여사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한번은 그가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너무 실망됩니다’라고 하여 제가 ‘왜요?’라고 물으니 그가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성령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저는 이 은사를 몇 년동안 구했는데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당신은 이미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언제요?’라고 하여 제가 ‘바로 그들이 받을 때입니다’라고 하니 그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들이 받을 때 당신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기쁘면 모두가 기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어떻게 되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은사를 받았다면 당신도 받았고, 우리 모두가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당신은 이미 이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집에 가서 주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집에 가서 기도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이 은사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언으로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은 있고 나는 없다’는 마음 태도가 그를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한 지체가 받으셨다면 당신도 받으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koinonia 입니다. 만약 당신 자신이 독립적인 개체라고 여기고 몸의 한 지체가 아니라고 여기면 그럼 점차적으로 하나가 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심오한 진리입니다. 몸에 어떤 물건을 받으면 전체가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것에 기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외의 수확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한 지체가 복을 받으면 몸 전체가 이외의 복을 받게 되는데, 이런 생각이 우리더러 하나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있고 나는 없다’라는 생각은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상황은 바로 이렇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욱 관심하면 바로 하나가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너희들이 나보다 자신들을 더욱 관심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를 관심하는 것이 모임할 때 당신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관심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소수 몇 명만 아니고 모든 지체와 함께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요. 이 서신에 단어 하나가 있는데, 여러분에게 왼쪽에 있는 이 그림을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분은 아마도 이것은 누구일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사진인데, 하지만 그는 사도 바울이 아니고 바울 스나이더입니다. 그는 제 마음속의 영웅인데, 여러분에게 그를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왜서 그의 사진을 보시려고 할까요? 우리가 돌아가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를 보겠습니다. 바울 몸은 옥에 있고, 그를 돌보던 에바브로디도 또한 곧 떠나게 되었고, 그는 홀로 미래를 대면해야 했고, 심판을 대면해야 했으며, 아마도 처형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편지에서 가장 말하기 좋아했던 것은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나는 정말로 기쁘고, 정말로 감사하느니라. 아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번은 제가 친구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문안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네’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옥중에서 편지를 했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이 사진은 바울 스나이더입니다. 그는 1930년 베를린 한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제가 전에 그 교회를 가 보았는데, 그의 홀어머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성도였고, 그 곳은 베를린 남쪽에 있습니다. 1930년대 바울 스나이더가 설교할 때 사악을 반대하는 파시즘이 히틀러를 따랐다고 하니 회중들이 그더러 이런 강의를 하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목사님을 잃을까 무서웠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시장님까지 와서 그더러 이 주제를 강의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속해서 강의했습니다. 어느날 새벽 3시, 게슈타포들은 이런 시간에 사람을 잡는데, 그들이 와서 그를 잡아갔고, 그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며 고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아내와 두살된 아들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배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웃음을 지고 가족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를 수용소에 가두었습니다. 저 여기에 문장 한편이 있는데, 그의 처지를 묘사했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를 채찍으로 때리고, 손목을 묶어 그를 매달았고, 그리고 그를 굶어 죽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관속에 넣고, 그의 아내와 그리고 가족들더러 그의 시체를 가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는 전 수용소에서 모범 죄수였다고 했습니다. 폐염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거짓말이었고, 이것이 바울 스나디어의 처지였습니다. 제가 바울 스나이더가 당시 수용소에서 그의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제가 그의 편지를 읽을 때 두 마지 말이 계속하여 나타났습니다. 즉 ‘나는 매우 기쁘다’와 그리고 ‘나는 주님께 너무 감사한다’였습니다. 여러분, 이는 현대의 바울이고, 영에는 똑 같은 기쁨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더욱 가까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대’잡지에서 이란 디바지의 안건을 보대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디바지는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고 감옥에 9년동안 갇혀있었고, 전체 안건이 서방 나라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버나리븐은 이로써 ‘시대’ 잡지에 감격적인 문장을 한편을 썼습니다. 디바지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사람더러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1993 년 12월 3일, 그는 드디어 재판받을 기회가 있었고, 디바지는 재판관에서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겸손하게 고백하기를 ‘제가 이 보귀한 기회로 인해 우주에서 가장 큰 재판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회교 율법을 배반했다고 고소 당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선지자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 세가지 모두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믿습니다. 그들이 제가 회교도를 배반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항상 신앙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가 태어나서부터 바로 회교도였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태초부터 크리스찬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회교도들은 저더러 돌아서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만약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품을 떠나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다니엘의 하나님이 그의 친구들을 불 속에서 지키고 건져주셨고, 9 년동안 저의 감옥 생활도 지켜주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디바지가 고백 중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었고, 그래서 저의 마음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런 하나의 예였습니다. 여러분, 크리스찬이 감옥에서 죽음을 대면하면서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심정은 완전히 성경 ‘빌립보서’의 묘사이며, 이는 한 성령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는 왜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대면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손해되는 것이 없습니다. 디바지가 말하기를 ‘나더러 살아서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가 있게 하였고, 죽음은 나에게 주와 함께 있게 하는 더욱 좋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거룩한 이름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나더러 만족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주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조금 일찍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재판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과 치유가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하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이고, 죽으면 이익이며, 소득이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했고, 그러나 남아 있기를 ‘바랬고’, 그는 빌립보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걱정하는데,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걱정되고, 나 자신은 아예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석방되기를 바라고, 석방되면 다시 새롭게 주를 섬길 수 있으며, 하지만 나는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데이빗 왓슨이 그가 암 말기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제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그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이 책에서 이 편을 인용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말하기를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 남으려는 ‘갈망’이 이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 것보다 못하느니라. 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저의 이 말에 감동이 되어 이런 기도를 그가 진심으로 떠나는 것을 ‘갈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했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입장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 저의 사역이 아직 필요하다면 저는 남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태도는 정말로 좋고 매우 멋집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다면 죽어서 이익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 짧은 서신에서 예수님을 38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38 번이나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했던 말을 응당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지언정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라는 말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48 번이나 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34 번 했고, ‘내가 주 안에서’라는 말은 50 번 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에서 총 132 번 ‘그의 안에서’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그의 주소였습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빌립보서’를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다음에 계속 강의하겠는데, 하지만 먼저 돈에 관한 것을 논하겠습니다.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들이 돈을 보내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헌금이 나더러 감동하게 하는구나.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니라. 왜냐하면 이는 너희들더러 더욱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헌금에 감사하는 것이 매우 특별하지요? 그는 그들이 돈을 헌금하여 축하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말 한 마디를 했는데, 제가 전도인들을 훈련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사용하여 그들이 단장취의를 하는지를 테스트합니다. 오늘날 전도인들은 쉽게 단장취의를 합니다. 특히 컴퓨터 색인의 기능이 정말로 사람을 해칩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어떤 주제를 겨냥하여 설교하기를 좋아하는데, 본문을 선택할 때 앞뒤 문장을 근본상 보지를 않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와 같은 것인데, 이 구절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결국 많은 사람들이 치유, 복음전파, 기도 등 각양각색의 답이 있는데, 돈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장으로 보면 이 말은 돈을 말하고 있고, 이 메시지가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울은 ‘수입이 많든 적든 나는 견딜 수 있느니라. 만약 나의 수입이 높으면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살 수 있고, 만약 나의 수입이 낮으면 나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잘 지낼 수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절대로 빚을 지지 않게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이 범죄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빚 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돈을 가져가는 것이고, 그것은 도독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빚 지는 것은 범죄라고 명확하게 가리켰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 빚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는데, 결국 삼분의 이가 되는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울로 말하자면 빚 진다는 것은 범죄였습니다. 도독질과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수입이 얼마든지 절대로 빚 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출은 빚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갚아야 할 돈을 갚지 않으면 그야말로 빚 지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자족하는 것을 이미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두가지 상반되는 마음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자족입니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경건에 자족을 더하는 마음은 큰 이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그의 간증을 나누면서 말하기를 십계명 중에서 그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제 10계명인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전형적인 바리새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약점은 바로 돈 벌기를 좋아하는 것이며, 그들은 돈이 있는 종교 인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경건과 부유를 함께 얻을 수 없느니라. 돈을 위해 살고 또한 하나님도 위해 살 수는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정곡을 찔렀습니다. 바울 이 바리새인이 전에는 돈을 탐냈었고, 돈 벌기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가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교적 쉽게 자족할 수 있을까요? 돈이 많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돈이 적은 사람일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가장 자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도 항상 자족하지 못하고, 더욱 많은 돈을 갖고 싶어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돈을 헌금해서 너무 기쁘니라. 너희들은 이로써 부유하게 될 것이며, 하지만 나는 이미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 왜냐하면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인 각도에서 이 구절을 보는데, 사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돈이며,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말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현황에 만족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좋아요. 우리가 먼저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여 ‘빌립보서’를 강의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빌립보서’의 매우 심상치 않는 구절 하나를 보겠는데, 현대 성경은 이 구절을 대부분 산문체가 아니고 시체로 인쇄했는데, 매 구절마다 모두 짧습니다. 이 여섯 구절이 마치 시처럼 보이고, 영어 번역으로 읽어도 시 같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빌립보서’에 대해 가장 익숙한 구절이고, 교회에서 자주 낭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많은 논쟁과 토론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물음은 당연히 이 구절을 왜서 여기에 넣었느냐입니다. 다른 구절과 그렇게 다른데? 여기에는 두가지 주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즉 낮아짐과 높아짐, 아래로와 위로입니다. 시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강림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고 또 높은 곳으로 올리웠다는 것을 생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낮추니 하나님이 그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왜서 여기에 놓여있고, 도대체 무슨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예배 중 낭독하는 문구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초대 교회의 자주 불렀던 시가를 인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모르겠고, 혹시 이것은 바울이 기록한 시가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깊은 감동을 받았을 때 자주 시를 썼고, 그가 마음의 감동을 받았을 때 바로 시를 써서 표달하였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문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해주고, 그리고 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느낌을 전달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시로 감정을 표달합니다. 매년 2월 14일이면 많은 시들이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이 날이 발렌타인데이기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날에 시를 써서 표달하고 싶은 심정이지요? 왜 생일 엽서에 항상 시를 인쇄했을까요? 왜냐하면 당신이 마음의 감정을 표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마음이 감동을 받았을 때 바로 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바로 시체이고, 아마도 ‘빌립보서’ 이 구절은 바울이 시를 인용한 것이거나 혹은 그가 감동에서 나와서 쓴 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가장 큰 논쟁은 바로 그를 심오한 신학으로 보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를 비우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이 점을 언급하겠는데, 왜냐하면 모든 주석책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비우다’라는 이 단어는 이 시의 ‘헛됨’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헬라 원어는 kenosis, kenosis 입니다. 그는 자신을 비웠고, 이로써 학자들은 계속해서 변론하기를 예수님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그가 인간 세상에 오셨을 때 ‘신성’을 도대체 얼마나 비웠고, 그는 어떤 ‘본성’을 비웠을까요? 이 변론은 매우 위험한 신학 인정을 일으켰고, 예수님이 세상이 계실 때 100% 신이 아니었다고 인정했는데, 이유는 그가 일부분 신성만 비우고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일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확실히 그의 영화를 내려놓았고, ‘그는 그의 영광을 버리고 강생하여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였느니라’ 성탄절이면 모두 이 찬양을 부릅니다. 그는 ‘무소부재’한 본성도 내려놓았는데, 이 방면에서는 확실히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소부재’를 나태내지도 못했고, 그는 어떤 일은 그가 모른다고 승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느 때에 다시 오시는지를 모른다고 하였고, 다만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은 그의 예상 밖의 일이었으며, 이런 일이 방생하리라고는 그가 몰랐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을 아시고 있습니다. 그는 ‘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본성도 내려놓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었기에 그가 기적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하지 않았고, 사람의 신분으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을 의지하여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 아들의 신분으로 했으면 우리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원래의 많은 특권, 그리고 능력들을 확실히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의 중점은 그는 여전히 100%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절반 하나님이거나 혹은 사분의 삼 하나님으로 변한 것이 아니고, 그가 반신 혹은 반인으로 변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렇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100%하나님이시고, 그리고 100% 사람이며,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또한 완전하신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본성을 비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권을 비웠습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구절은 자주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가져옵니다. 저는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었는데, 인간 세상에 올 때 100%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비로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저의 집, 차와 많은 저에게 속한 권리들을 포기한다면 이는 더는 제가 아니라는 표시가 아니고, 저는 단지 저의 특권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여전히 100%의 데이빗 팟슨입니다.
그가 비록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는 특권을 비웠지만 자신의 신성은 비우지 않았고, 그가 비록 자신의 지위, 그리고 특권을 비웠지만 자신의 신성은 비우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점을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오해가 항상 많은 상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잘못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예배에서의 낭독 구절이 아니고, 이 구절은 하나의 시가 아니고 또한 신학 원칙도 아니고, 이 구절, 이 구절은 도덕적 구절에 관련되어 있고, 도덕적 구절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태도와 그의 선택을 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사람의 선택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많은 케이크를 가지고 가서 한 사람더러 선택하라고 하면, 그의 선택에서 그의 성품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조부가 하나의 예인데, 만약 누군가 그에게 과일 한 광주리를 주시면 그는 반드시 보기 좋지 않은 것이나 혹은 상처가 있거나 혹은 상한 것을 고릅니다. 매번마다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부에게 왜서 항상 상한 것만 고르십니까라고 물었어요. 조부가 대답하기를 만약 제가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조부의 이런 방법으로 그의 성품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볼 수 있지요? 여러분은 항상 상한것만 고르십니까? 여러분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의 선택으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더러 예수님의 선택으로 그의 성품을 보게 하였고, 그의 첫번째 선택은 일반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아이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저 어항의 고기를 보라. 만약 네가 저 고기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그들이 대방을 물어 죽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만약 고기로 변하여 어항에 들어간다면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마도 너를 물어 죽일 수 있는데,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리가 때가 되면 너의 시체를 어항에서 건져줄 것이다. 그리고 너더러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로 이렇게 한다할지라도 한가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너를 원래 상태대로 회복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네가 이로써 항상 고기로 살아야 한다는 표시니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아마도 웃길 것인데,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원래는 하나님과 동등되고, 그는 성자이고, 하늘의 영광을 누렸는데, 하지만 일반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세상에 와서 우리를 도우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신분을 영원히 유지했고, 영원히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모두 인간의 신분이었고, 일반인이 되었는데, 이 선택의 대가는 정말로 컸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정말로 이렇게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또 두번째 선택을 했습니다. 가정해서 여러분이 부모를 선택한다고 하면, 여러분이 어떠한 가정이나 혹은 어떠한 사회 지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집을 선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종으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했고, 가장 낮은 계급을 선택하여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선택은 33 세 때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가장 창피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2-7 일이면 죽는데, 그는 33 세까지만 살기로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정인데, 그의 이지적인 생각이 아니고 그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심정이 그의 행위를 결정했는데, 이는 그의 심정이고 이지적인 생각이 그의 행위를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이 선택을 했기 때문에 하난미이 모든 권능과 능력을 그에게 주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을 주어도 안실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권력, 직위 그리고 돈을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만 믿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비록 부유하지만 가난을 선택했고, 이로써 우리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하였기에 우리가 살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일반인을 선택했기에 하나님이 천지의 모든 권능 그리고 능력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고, 또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하나님이 안심하고 그에게 우주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이익은 아랑곳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뜻입니다. 이 구절은 모두에게 어떠하든지 반드시 전체를 봐야하고 자신의 이익만 보지 말고, 먼저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져야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낮아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래야 하나님이 권능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신학이 아니고 예배 중의 낭독사거나 혹은 찬양도 아니고 이 짧은 시는 성품과 하나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단체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복음을 위해 견고히 서 있다는 것을 듣기를 갈망하느리라. 교회가 만약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 영향을 줄 방법이 없느니라. 교회가 만약 하나가 되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증명할 능력이 있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뜻은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반드시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라는 것이며, 이것은 너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래서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가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너희 서로 관계에 표현되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만 본받는 것이 아니며, 너희들은 이미 그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지만 너희들은 그의 마음이 너희 사이의 관계를 통치하지 않게 하였고, 이미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너희 관계에서 표현하여 내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어서 말하기를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좋아요 여러분, 이어서 우리가 나눌 것은 ‘빌립보서’에서의 중요한 가르침 몇 가지인데, 제가 여기에서 대강 몇 개를 정했으니 우리 보겠습니다. 제 3장 이후부터 …아니에요. 방금 얘기했던 예수님의 그 시가 후부터 바울은 그들에게 삶에서 어떻게 인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빠르게 한번 강의해 보겠는데, 우선 그가 경험이 있으면 생명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과 승천을 이미 경험했고,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이미 일을 했으며, 너희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했으면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식은 공의를 구하는 것인데, 하지만 의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자신의 의이고, 다른 한가지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한가지 일을 이해하기가 어려워하는데, 바로 악행을 위해 회개하는 것 외에 선행을 위해서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한 나쁜 일을 위해 회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자기의 득의양양한 선행을 위해 회개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더러 주를 믿게 하는 것이 좋은 사람더러 주를 믿게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은 충분히 나쁘지 않고, 자신의 선행을 위해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나 자신의 의를 생각하면, 그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직접 말하기를 나 자신이 방금 대변을 보고 난 아이와 같이 손에 요강통을 들고 하나님께 ‘이것 보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매우 매우 평이하고 소박한 단어인데, 번역하면 바로 배설물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내가 한 좋은 일은 사실 하나님 눈에는 배설물 같고,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가 헬라 원어에서는 바로 인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은 배설물이고, 그 악취가 비할 바 없으며, 나의 좋은 행위까지 모두 더러우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것은 그의 의이고 나 자신의 의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공덕을 쌓는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려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쫓아야 할 목표이고, 사람이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의이며, 가정, 생활 그리고 배경, 또한 교양 등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이룬 의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했고, 우리가 만약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의 부활과 몫이 있다면 그의 의를 가질 수 있으며, 늙어서 죽을 수 있고,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노력할 책임이 있고, 크리스찬은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 갈까지 찬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배후를 잊고, 과거에 있었던 실패나 혹은 성공은 잊고, 지나간 모든 것은 잊고 앞으로 주시하여 전진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위에서 내려오는 상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 종점까지 가지 못했는데, 하지만 나는 앞으로 향해 끊임없이 달리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한 태도이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한 상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배후를 노력하여 잊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즉 배후를 잊고 앞으로 향해 노력해야 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배우려는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서재에 거룩에 대해 논한 책이 많이 있는데, 하지만 제가 그 책에서 거룩을 배운 것이 아니라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이 주와 동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사람의 모범으로부터 배운 것이 책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조부모거나 혹은 친구로부터,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만 있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고, 그들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훈련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당신이 그들과 사귀기만 하면, 그들의 모범을 닮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예수님께서 본 것이 가장 높은 거룩의 모범입니다. 무슨 말을 더 할 필요 없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십시오’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땅에 둔 사람을 닮지 말고, 마음을 하늘에 둔 사람을 닮아 가십시오.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에는 이 두가지 사람이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배가 바로 그의 하나님이고, 손에 든 칼로 자신의 무덤을 파느나데, 그들을 배우지 말라. 마음을 하늘에 둔 사람을 닮아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모범이 당신의 생명에 큰 의미가 있게 될 것이며, 멀리 영향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더러 배워야 할 모범을 택해야 된다고 하였고,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을 택해야 하고, 그들을 닮아가고, 그들에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갈망을 논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와 함께 부활하려고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서일까요? 나도 죽음에서 부활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 원어에서 ‘나오다’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더러 부활하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해석이 있는데, 말세가 올 때면 두번의 부활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번째는 의인의 부활이고, 두번째는 다른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 것인데, 두 번 부활 사이에는 오랜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죽은 의인의 부활이고, 두번째는 다른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첫번째 부활은 나의 목표이기를 바라는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부활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여전히 노력하는 목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천국의 티켓을 받았으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노력하고 있느니라. 나는 첫번째 부활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의 부정적인 작은 경고인데, 여러분이 만약 소홀이 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부활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의인과 함께 부활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이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좋아요. 제가 가능한 ‘빌립보서’를 빨리 끝내겠습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서’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 성경에 많은 약속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약속에는 사실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약속 잡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포장된 쵸콜렛이 있었는데, 그 안에 축복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매일 축복 편지 한 장씩 꺼내어 열어 보았는데, 안에는 약속이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들에는 조건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반드시 너와 동행하리라’ 같은 것들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약속이지요? 하지만 이 약속의 조건은 만민더러 제자를 삼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며, 그들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두는 약속만 받고 싶어하고 복음은 전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러면 그 영광을 놓치게 됩니다. 만약 내가 만민에게 가서 제자 삼게하는 것을 원한다면 예수님의 약속이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합니다.
매번 사람들이 저에게 그들이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제가 그들더러 가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된다고 합니다. 주를 위해 영혼을 얻게 되면 주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얻고 싶으면, 조건은 바로 나가서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약속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반드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빌립보서’ 마지막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약속이 매우 아름답지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며, 하나님이 평안으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건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사상이 성실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진실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사상을 속박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바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이해가 됩니까? 약속을 취하고 싶으면 자신의 본분을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아셔야 하는데, 왜냐하면 약속은 절대로 근거없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기 대문입니다. 신약성경에 많은 약속들이 있지만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재삼 우리에게 당부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사상을 끊임없이 성실하게 아름답게 순결하게 진실되게 하면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고, 너희 마음에 바로 평안이 있고,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왜서 그런 환경에서도 여전히 평안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이 매우 절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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