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내려놓기
2024.02.04.(주현후제5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2/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23/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 24/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2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26/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 27/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28/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2:22-28)
들어가는 말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하긴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저는 이러한 욕망을 ‘필사적 욕망’이라 부르겠습니다. 모순되게도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욕망이 없다면 어떤 생명체도 엄혹한 자연환경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류도 이런 욕망이 없었다면 진즉에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지금 저의 나이인 60세까지 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욕망은 과학적 지성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생명연장의 기술을 발달시켜왔습니다.
사실 죽음에 초월한 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러한 인간 욕망의 수혜자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 욕망을 실현시켜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 살아보고자 ‘형제로 하여금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누구도 자신을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우지 않았다’고 대답하시면서, 부유한 농부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농부는 자신이 거둔 소출이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삶과 현재의 삶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라는 사실에서 각자의 태도에 따라 생명을 연장시켜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수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행동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할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이 생명연장에 대한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도 없고, 더 나아가 부자가 되게 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왜 교회에 나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앞에 와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원한 나라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바로 이점에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태도나 요청에 의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영원한 삶을 앞에 두고 유한한 삶의 길고 짧음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나요? 하루살이를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하루살이가 이틀을 산다면, 인간으로 치면 2백 살을 산 것이니까 대단한 일일 테지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로서 생육과 번식을 위한 생명의 역할을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질문은 ‘인간으로서의 생명의 역할을 다했느냐’ 일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약속하신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오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존재적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일은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로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인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사랑하는 데는 게으른데, 그 이유가 저에게는 미스터리입니다.
무의미한 생명연장의 꿈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그 사랑의 나타나심이며, 그 사랑이 천국의 조건이라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도 사랑보다 미움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 이유는 더욱 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저승사자는 동서양 모든 문화에 등장합니다. 저승사자는 현생에서 잘못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어 그 죗값을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검찰이나 공직비서실 등을 저승사자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잘못을 감시하고 있다가 어느 날 잘못이 드러난 당사자에게 사망선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승사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습적 사고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생명의 심판자인 ‘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예수님은 생명연장이나 생명단축을 전제로 한 저승사자와 같은 심판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성경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미신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애썼습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의 바른 신앙관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쉽게 빠질만한 오해를 바로잡으면서 다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22)
제자들이 생명을 다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며,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일이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구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충돌은 걱정에서 출발합니다.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23)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음식이 곧 우리의 생명이며, 옷이 곧 생명을 유지합니다. 우리 생명을 이루는 구성 원소들은 우리가 먹은 음식이 일부이며, 우리 생명을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는 옷에 의해 보호,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은 곧 음식이며, 몸은 곳 옷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걱정 내려놓기
이 말씀이 진리가 되려면 영원한 기준, 즉 따름과 사랑이라는 기준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체는 음식이나 옷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가진 생명입니다. 이 기준 때문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것을 가지고 명령을 따를 것을 요청하셨기에, 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걱정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곧잘 비유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주인이 종에게 밭을 갈라고 하면서, 쟁기를 만들어 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밭을 간다는 목적과 효율성을 망치는 것입니다. 쟁기는 밭을 가는데 필수이지만 쟁기를 준비하는 것은 주인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24)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한낱 까마귀에 비유하신 것이 못마땅합니다. 우리가 까마귀에 비교될 정도라니. 아니 까마귀보다도 못하다니! 하지만 걱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까마귀는 우리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모범적입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걱정을 뿌리칠 수 없으니까요.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25)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가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우리의 걱정과 조심 등이 우리의 수명을 늘렸다고 생각하며, 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까마귀는 생명을 위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갑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걱정은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목적에 맞는 생명은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그렇게 살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26)
나가는 말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삶은 그것이 아무리 늘어나도, 그리고 화려해 보여도 생명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27) 누구도 백합화 한 송이와 수백만 원짜리 옷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보라면, 돌잡이 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도, 하나님 나라의 판단 기준도 우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28) 이제 믿음은 걱정의 반대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목적에 알맞게 존재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존재해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영원할 만큼의 위대한 존재의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놀라운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그 특별함이란 약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특별한 사랑을 이룰 존재적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