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錦山)접주 최공우(崔公雨)가 이끈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패한 후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자 남하하자 무리를 이끌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雲洲面) 산북리(山北里)에 있는 대둔산 미륵바위(715.1m) 정상으로 근거지를 옮겨 저항의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대둔산은 전형적인 바위산입니다. 수년 전 대둔산 항전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주위가 온통 바위로 되어있어서 오르기가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둔산 케이블카 정상 정류장에서 서쪽 계곡 아래에 있는 육각정(六角亭)으로 내려가서 서쪽 가파른 능선을 향해 다시 올라가서 가파른 고개를 넘어 석도골 골짜기로 다시 내려가 거대한 바위를 좌측으로 끼고 계곡으로 올라가면 정상 능선에 나옵니다.
여기서 조금 가다보면 좌측에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 데 그곳이 미륵바위로 좌측 옆을 돌아가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미륵바위 꼭대기에는 30, 40여 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당시 동학농민군들은 정상에 있는 평평한 공간에 제1 초막을 지었습니다. 사방이 낭떠러지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적이 쉽게 접근하기 곤란한 지형입니다.
일본군 기록에는 초막이 3채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기서 동쪽으로 내려가다 좌측 바위틈을 빠져나가면 1초막보다는 절반 정도 크기의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는 제2의 초막을 쳤고 제1초막에서 25m 쯤 남동쪽 계곡으로 내려와 제 3초막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 崔士文)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 30여 명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 충청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습니다.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으로 무장한 40여 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하여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동학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심영병(沁營兵=壯衛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습니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합니다.
대둔산부근 전투상보 요지 (1895년 2월 18일 특무군조)
1). 2월 17일(양) 지대(일본군 3개 분대와 한병 30명으로 편성)는 고산현에서 명령을 받고 오전 3시 30분 출발하여 오후 4시 30분에 대둔산에 도착했다.
2). 그 날은 한병(韓兵) 사관 윤세영(尹勢榮)과 김광수(金光洙)를 대동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정찰했다. 남쪽에선 6㎞, 북쪽에서 8㎞ 남짓했다. 적은 절벽 위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을 짓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하자 몇 차례 사격을 가해왔다. 작년 음력 11월 중순경부터 5, 6명의 적은 이 산 위 암굴 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공주 군대는 이것을 알고 15, 6일 전에 3일간 공격하다 돌아갔다.
그 후 민병이 와서 공격하다 1명이 총상 당하자 달아났다. 2, 3일 전에는 전주에서 군사가 와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여러 곳의 적들은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5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관군이 공격하면 큰돌과 거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총을 쏘기도 하여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적굴은 바위 위에 있으므로 사다리가 있어야 겨우 오를 수 있다.
3). 18일 오전 3시에 야습할 계획이었으나 바람 비가 심하고 안개마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동이 트기만 기다렸다. 오전 5시 고마쯔(小松直幹)에게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적의 배후로 40리 남짓 우회하게 했다. 그리고 소관은 6시 30분 일본군 1개 대대와 장위영병 30명을 인솔하고 적의 정면을 기어올랐다. 적의 소굴 100m전방까지 접근하자 돌과 나무토막을 떨어뜨렸다. 안개는 여전히 자욱하여 적은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말소리만 들려왔다.
4). 오전 9시 30분, 배치를 마치니 적의 전방 사면 왼쪽 200m 지점 고지에는 한병 20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한병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배후로 올라갔던 고마쯔(小松) 지대가 10시에 도착하자 뒤쪽 고지에 배치했다. 오전 11시 10분 경에 큰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적의 소재를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적은 5, 6명을 아래쪽에 배치하자 정면에 있던 한병이 저격했다.
다리를 맞고 새끼줄을 타고 올라갔다. 적의 소굴은 큰 바위로 삼면이 뒤덮여 지붕만 겨우 보일 뿐이었고 큰 돌을 쌓아 정면에 총구멍을 내었다. 위에는 거목을 올려놓아 우리 군대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것 같았다.
1시 40분, 세 방향에서 맹렬히 엄호사격을 가하게 하고 소관은 일본군 1개 분대와 한병 사관 두 명을 대동하고 산정에서 배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겨우 적의 소굴 뒤쪽 아래까지 돌진했다. 그런데 몇 길이나 되는 암석이 담벽과 같이 서 있어 전진할 도리가 없다. 갖고 오던 사다리를 중도에서 버렸으니 대책이 없었다.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한 사람씩 올라가게 하니 15분만에 전 대원을 등반시켰다.
다행히 적은 산이 험준한 것만 믿고 배후는 고려하지 않고 전방의 한병을 향해 계속 발포하였다. 이 틈을 타서 불시에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적도는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우리가 돌격한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한병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이 소년에게 적의 정황을 물었더니 적은 25, 6명이 있었는데 대개는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또 28, 9세 되는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金石醇)은 한 살 짜리 여아를 안고 천길의 벼랑을 뛰어 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박살이 나 즉사했다.
5). 압수된 서류를 조사해 보니 주요한 자는 도금찰(都禁察) 최학연(崔鶴淵), 도집강(都執綱) 장지홍(張志弘), 도집강(都執綱) 최고금(崔高錦), 도집행(都執行) 이광의(李光儀). 이광우(李光宇), 대정(大正) 이시열(李是悅), 접사(接司) 조한봉(趙漢鳳), 접주(接主) 김재순(金在醇), 접주(接主) 진수환(陳秀煥), 교수(敎授) 강태종(姜泰鍾), 봉도(奉道) 전판동(全判童)이다. 명단에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한편 오지영의 「東學史」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一日은 관병(官兵) 수백 명이 안개 속에 몸을 숨기어 가만히 그 산 후면으로 기어들어오며 일제히 총질을 하였다. 그 석굴(石窟)은 一夫當關 萬夫莫開之地(한 명의 힘으로서 빗장을 걸면 만명이 열지못하는 땅)임을 믿고 있던 그들은 졸지에 변을 당하여 총에 맞아 죽은 이도 많고 절벽에 떨어져 죽은 이도 또한 많았었다.
그러나 유독 최공우 한 사람만은 살아 돌아 왔었다. 그는 관병이 총질할 때에 있어 안마음에 생각하기를 내 비록 죽을지라도 결코 적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 하고 이어 空石을 무릅쓰고 千丈의 절벽으로 내리 굴러 떨어졌다. 담력이 큰 최공우는 오히려정신을 수습하였다. 절벽에서 굴러가는 최공우는 홀연 나뭇가지에 걸리어 있는 동안 空石 구멍으로 목을 내밀어 내다보았다. 내 一定 죽었거니 어찌하여 이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는가. 이것이 정말 죽음인가. 산 것이 도리어 이러한가. 스스로 의아하기를 마지 아니 하였다. 차차 정신을 돌이켜 가만히 空石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내다 보았다. 자기 몸은 이미 천장의 절벽 중간에 걸리어 殘命이 오히려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최공우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이리저리 살펴보니 어찌 轉身만 잘하고 보면 可以 할 도리가 있음을 뜻한지라. 이어 空石을 벗어버리고 절벽사이로 이리저리 몸을 붙여 나뭇가지도 붙잡으며 돌부리도 어루만지며 혹 기기도 하고, 혹 뛰기도 하고, 혹 둥굴기도 하여 천신만고로 죽을 힘을 다들이어 이윽고 평지에 내려섰다.
위 두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대둔산 항쟁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 결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1월 하순의 눈 쌓인 산 정상에서 고립무원의 동학농민군의 심정을, 적의 손에 잡히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절벽으로 뛰어들었던 그 심정을 헤아려 보면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첫댓글 내가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이 셨는데...멋있당.... 당연히 우리 정읍도 최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