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품 51~53장 공부; 대종경풀이(류성태님) 참고>
51장. 핵심주제: 공도헌신의 가치와 공도자숭배(관련법문: 대종경선외록 원시반본장 6장,요훈법훈장 1장)
*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이해관계에 의해 활동하고 이해충돌로 인해 시끄럽게 된다. 또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이해를 불구하고 무상으로 하는, 무소득의 도덕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보면 무루 복을 받는다. (박길진, 대종경 강의 중에서)
52장. 핵심주제: 이충무공의 심법 (관련법문: 한울안한이치에 마음공부 4장, 정산종사법어 공도편 5장)
* 이충무공은 이해를 떠나 국가의 일을 본위로 하여 일생을 살고 가신 분이다.... 공직자는 상부의 통제를 잘 받아야 질서가 문란하지 않으며 일의 순서가 생기게도 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알아줄 때 생명을 바칠 생각이 나게 된다. (박길진, 대종경 강의 중에서)
53장. 핵심주제: 서전 서문과 부귀‧ 권세에의 초연 (관련법문: 한울안한이치에 제1장 마음공부 20장)
* 유허일(柳虛一) : 1882~1958 본명 상은(相殷), 법호 유산(柳山). 전남 영광 출생.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워 사서오경에 통달하였다.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 받았다. 교직에 오랫동안 봉직하다가 1932년(원기17)에 친구 이재철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에게 귀의하고, 이듬해에 출가하였다. 출가 후 교단의 중요한 요직을 역임하였고, 재단법인의 설립과 원광대학 설립에 공헌하였다. 20여 년간의 출가생활을 통하여 뛰어난 한문 지식과 사회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교단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대봉도 법훈을 받았다.
* 서전(書傳): 유교의 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에 주해를 달아 편찬한 책. 송(宋)나라의 주자(朱子)가 채침(蔡沈)을 시켜서 만들었다. 모두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二帝): 중국 고대의 성왕인 요임금과 순임금/ 삼왕(三王): 중국 고대의 세 임금. 하(夏)의 우왕(禹王), 은(殷)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무왕(武王).
하걸(夏桀): 고대 중국 하(夏)나라의 최후의 왕. 이름은 이계(履癸). 유시씨(有施氏)의 딸 말희(末喜)에게 매혹당하여 포악 무도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마침내 은나라의 탕왕에게 패망했다. 실재 인물인지는 불확실하나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함께 전형적인 폭군으로 알려져 있고, 요·순과는 서로 대비된다. 걸왕과 주왕을 걸주라 하며 폭군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상수(商受):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말한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함께 중국 고대의 대표적 폭군으로 전해온다. 달기(쩉己)라는 계집을 총애하여 주색을 일삼고 포악한 정치를 하여 인심을 잃고 주무왕(周武王)에게 멸망 당했다.
*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보감이 된다. 성군은 성군대로, 폭군은 폭군대로 남겨주는 교훈이 있다..... 돈과 권리가 주어졌을 때에 마음을 놓고 함부로 하고보면 결국 실패와 망신이 온다. 우리가 공부할 때에 외연(外緣)을 쉬라는 것은 돈과 권리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박길진, 대종경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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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근동 아이들의 노는 것을 보고 계시더니 아이들 중에 무슨 시비가 생겨서 서로 다투다가 대종사께 와서 해결하여 주시기를 청하는 지라, 대종사 그 이유를 물으신대 여아 복균(復均)이 고하되 "저 막대기는 원래 제 것이온데 저 애가 줏어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하고, 남아 두은(頭恩)은 "이것이 원래 제 것이온데 저애가 자기 것이라고 달라고 합니다."하며, 옆에 있던 환두(煥斗)를 증인으로 내세우니 환두는 한참 생각하다가 제게 아무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이라 "저는 잘 모릅니다"고 회피해버리는지라, 대종사 그 일을 해결하여 주신 뒤에 인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어린 것들도 저에게 직접 이해가 있는 일에는 서로 다투고 힘을 쓰나 저에게 이해가 없는 일에는 별로 힘을 쓰지 아니하나니, 자기의 이해를 떠나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어찌 많을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자기의 이욕이나 권세를 떠나 대중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대중이 숭배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며, 또한 마음이 투철하게 열린 사람은 대중을 위하여 일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라." -대종경선외록 원시반본장 6장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생활을 육신의 힘으로만 사는 줄 알고 정신의 힘으로 사는 이치를 알지 못하며 그 이해를 목전의 이해만 알고 장래의 이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종경선외록 요언법훈장 1장
"충무공은 참으로 성장(聖將)이다. 그 강직한 점이나 그 위공망사(爲公忘私)하는 심경, 임금이 몰라 주되 불만이 없고 무슨 직에 처하나 충성을 다했다. 낱이 없는 외에 더 큰 것이 없고 사사가 끊어진 외에 더 선함이 없다." -한울안한이치에 제1장 마음공부 4장
말씀하시기를 [억울한 경계에도 안분하고 위에서 몰라 주어도 원망이 없으며, 공이야 어디로 가든지 나라 일만 생각하던 이 순신(李舜臣)장군의 정신과, 세상 사람이 비겁하게 여길지라도 나라를 위하여는 정적(政敵)을 피해 가던 조(趙)나라 인(藺相如)정승과, 지조 없다는 누명을 무릅쓸지라도 민중을 위하여는 벼슬을 맡았던 황(黃喜)정승의 정신은 공사를 하는 이들의 본받을 만한 정신이니라.] -정산종사법어 공도편 5장
"봄 기운이 오되 고목에는 꽃이 피지 않는 것과 같이, 지금 봄 시대가 돌아왔지만 내 마음에 봄 기운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 운을 받지 못할 것이다. 동남풍은 성현 군자의 바람이요, 서북풍은 영웅 호걸의 바람이다. 순 임금은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부르기를 `南風之薰兮可以解吾民之 兮로다. 南風之時兮可以富吾民之財兮로다.` 하였다." 번역하면, `남풍의 훈훈함이여, 가히 우리 백성의 한을 풀어 주도다. 남풍의 때 맞춤이여, 가히 우리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도다.` -한울안한이치에 제1장 마음공부 20장
대왕에게는 일곱 가지 잘못이 있어 대왕의 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1) 여색에 빠져들어 진실하고 바른 것을 공경치 않음이요, 2) 술을 즐겨 백성을 가엾이 여기지 않음이요, 3) 바둑 장기를 탐하여 예경을 닦지 않음이요 4) 사냥에 나가 살생하여 자애의 마음이 없음이요, 5) 악한 말하기를 좋아하고 착한 말을 하지 않음이요, 6) 부역을 무겁게 하고 벌이 과도함이요, 7) 도리에 어긋나게 백성의 재물을 강탈함이다. -잡보장경
유허일 柳虛一, 1882~1958
[주요약력]
본명은 상은(相殷). 법호는 유산(柳山). 법훈은 대봉도. 1882년 10월 19일 전남 영광군 불갑면 안맹리에서 부친 송제(松齊)와 모친 정백동(鄭栢桐)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중앙총부교감, 교정원장, 재단법인 원불교 초대이사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유허일은 4세에 한문사숙에 들어갔고 타고난 총명으로 5세에는 한시(漢詩)를 짓기 시작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다. 13세에는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하여 철리(哲理)에 밝았다. 이때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지혈(指血)을 어머니에게 드려 소생시킨 효자이기도 하다. 23세에는 8개군 합동 유림강회에서 《주역》을 강론하여 유주역(柳周易)이라는 별칭까지 받았다. 그 후 수년을 민족광복에 뜻을 두어 독립지사들과 모임을 갖고 상해에 건너가려다가 부친의 열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근신할 만큼 효성이 극진했다. 30세 때 상해로부터 독립운동하는 친구에게서 온 서신이 발각되어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일체 자유 활동을 제지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집에서 근신하며 신학문에 정진했다. 33세부터 영광보통학교 교원으로 13년간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재직 중에 중학교 교원으로 추천되었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48세에는 훈민정음 기념강연회 석상에서 국사 강의를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당했고, 이것을 빌미로 장흥보통학교로 좌천되었다. 이후 일본의 노골적인 감시와 교원활동의 방해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교원직을 사임했다. 그 뒤 몇 년간을 울분에 휩싸여 좌절하며 지내다가 원불교를 만나게 된다. 유허일은 1932년(원기17) 10월에 51세의 나이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입교하고 이듬해에 출가했다. 소태산은 유허일이 입교하기 3년 전에 이재철에게 명하여 유허일을 원불교에 입문하도록 청한 적이 있다. 유허일의 원불교 입문은 당시로서는 ‘영광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문화적 특색’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1933년(원기18) 52세의 나이로 전무출신을 서원하여 총부학원 교무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광복 후에는 유일학림과 원광대학에서 전무출신을 지망하는 청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국사교육을 했다. 대중들은 유산을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백과사전’이라 일컬었다. 1935년(원기20) 9월 10일에는 수위단 보궐단원에 피선되고, ‘유산’이란 법호를 받았다. 1936년(원기21)에는 공익부장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했다. 1937년(원기23)에는 총부교감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교정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근무했다. 1944년(원기29) 회칙개정 후 다시 총부교감으로 전임되어 《불교정전》간행에 공헌했다. 1945년(원기30) 8·15광복 후 전재동포 구호사업 사무장으로 임명되어 전력을 경주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대한건국 준비위원, 종교연합회 이사가 되었고, 중앙방송국 방송위원으로 매월 1회씩 1년간 국사와 불교 강의를 하면서 원불교의 명예를 빛내기도 했다. 1946년(원기31) 총무부장으로 임명되어 2년간 근무했고, 1948년(원기33)에는 다시 교정원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원기34)에는 순교감으로 전임되어 교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원불교재단이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원광대학 설립위원장을 맡았고, 1951년(원기36) 원광초급대학이 설립되자 조선역사·국사통람 등을 강의했다. 72세 이후로는 중앙수양원에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지방순교도 하며 《불교정전》과 《대종경》을 한역(漢譯)하고 〈국사가(國史歌)〉를 저술했다. 1958년(원기43) 12월 17일 77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유허일은 뛰어난 학문과 사회에 대한 넓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으로 교역자 훈련과 교서편찬 등 새 회상의 창건에 높은 공덕을 쌓았으며 한문학자·사학자·교육자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소태산의 정법문하에 입문 출가하여 혈성을 다한 공도자였다. 1988년(원기73) 9월 124회 수위단회에서는 2대말 성업의 결산기를 맞아 그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韓正釋〉
(원불교 인물과 사상) 유산 유허일 대봉도-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
23세에 유림강회에서 주역을 강론하여 '유주역'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소태산대종사는 그 박학다식을 경계하여 수양공부에 힘쓸 것을 권유했다.
원불교가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자 초대이사장으로 취임
(관련법문 교단품 15장, 정산종사법어 생사편 27장, 성가37장 일체중생 제도키로(석존성탄절 노래) 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