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존실태와 성격
<목차>
1. 머리말
2.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문화재 지정⋅등록 현황
1) 근현대 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
2) 근현대 문화유산 문화재 지정⋅등록
3) 근현대 문화유산의 지역별 분포 실태
3.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의 분포와 성격
1) 역사 문화유산
2) 문예 문화유산
3) 교육 문화유산
4) 종교 문화유산
5) 산업 문화유산
6) 생활 문화유산
7) 교통 문화유산
4. 맺음말
1. 머리말
현재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문화 역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주도하는 힘은 거대한 자본을 앞세운 미국문화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문화는 점점 보편화되고 그 중심부에서 강한 문화권력의 독점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이며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의 고유문화가 급격히 소멸하거나 존중되는 극단의 문화전쟁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역문화가 세계적인 보편성과 자기만의 고유성 내지 특수성을 공존시키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 내 문화자원을 적극적으로 발굴․보존 및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할 때 지역인의 문화수준도 한 차원 성숙될 수 있을 것이며 주체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지역문화의 토대도 구축될 수 있다. 따라서 지역 내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을 찾아내, 이를 효과적으로 보존, 관리, 활용하는 문제는 한 지역의 문화지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관건이 될 뿐 아니라, 문화 정체성 확립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주로 전근대 문화재에만 집중되어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남겨진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며 체계적인 관리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문화재, 또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통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동시대 역사에까지 확대될 필요성이 있을 뿐 아니라, 동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에 대한 이해야말로 현재의 문화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고 창조적인 미래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진정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무관심은 개발과정에서 무분별한 파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개발 우위의 근대화론은 개발을 위해서는 환경은 물론 역사문화자원도 서슴없이 파괴하는 전도된 가치관을 만들어내었다. 또한 ‘낡은 것’, ‘촌스러운 것’, ‘허름한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새 것’과 ‘서구적인 것’만 추구하는 서구 중심의 문화관은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근현대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방치하고 훼손하도록 조장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당연시하는 우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보존되어야 했을 수많은 근현대 문화유산들이 그 터만 남기고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전근대의 기념물이나 건조물은 그 희소성과 역사성 때문에 상당수 보존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지만, 근현대의 기념물과 건조물은 단지 ‘낡은 것’으로만 치부되어 파괴되는 운명을 맞이하곤 하였다. 또한 경제논리로만 가치를 평가한 결과 건물은 헐리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곤 하였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신축된 충청북도내 각 시군 청사는 현재 남아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 모두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여 한 시대의 건축미와 행정역사를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제시대에 세워진 교육시설물도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심지어 일제시대 대표적인 학교 강당으로 손꼽혔고 충청북도 초대 의회 청사로 쓰였던 청주 중앙초등학교 강당도 아무런 보존대책 없이 철거되었다.
그에 반해 선진국의 경우 오히려 ‘낡고 오래 된 것’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발견하여 가급적 보존하거나 재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부도 뒤늦게나마 근현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보존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국회는 2001년 2월 28일 ‘문화재보호법중 법률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으로 근대에 지어진 역사적 건축물을 문화재로 잠정 보호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직 국가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일반 문화재의 관리를 위한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문화재청 역시 그동안 문화재로서 잠재적 가치가 충분한데도 지어진지 오래 되지 않아 정부 차원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근대 문화유산’에 대해 본격적인 관리작업을 펼쳐, 그 일환으로 근대 건조물에 관한 기초조사를 거쳐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2010년말 현재 등록된 근현대 문화유산은 총 470건으로, 그중 충북지역 등록문화재는 22건이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는 생산년도가 50년 경과한 것 중에서 가치가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50년 전인 1950년대 이전까지만 등록 대상범위로 삼고 있다. 그 결과 1950년대 이후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제도적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더욱이 근현대 문화유산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조사⋅연구와 보존방안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특히 각 지방에 소재한 근현대 문화유산은 단순한 외관상의 가치 외에 그 지역의 근대성과 민중성이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지역역사․문화와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등이 밝혀질 때 진정한 역사적 가치가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는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최초 조사는 필자가 2001년도에 수행하였다. 필자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70년대 이전 시기에 건립된 역사적 기념물이나 건축물을 대상으로 총 96건을 조사하였으며, 이는 이후 조사⋅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그 뒤 충청북도는 2004년도에 충북지역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였고, 문화재청은 2009년도에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비중이 높은 종교건축물에 대한 일제조사를 단행하였다. 충청북도와 문화재청 조사는 근대문화유산의 시대범위를 1950년대까지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1960-1970년대 건조된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으며, 역사적인 기념물을 제외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지금까지의 조사⋅연구성과를 집대성하는 동시에, 충북지역에서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7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여 향후 보존 및 관리․활용을 위한 연구기반을 제공하고자 한다.
2.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문화재 지정 실태
1) 근현대 문화유산 개념과 범위
근현대 문화유산은 근대성을 지닌 역사적인 문화유산으로 전통적인 것과 구별된다. 이때 문제는 ‘근대’의 시대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한국사에서의 근대사 시작은 여러 설이 있지만, 1876년 개항으로 보는 시대구분론이 통설로 자리 잡고 있다. 개항 이후 서구문물과 종교 등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도 전통적인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를 지향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1876년 개항은 전통과 근대를 나누는 큰 분수령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현대사의 시점 역시 근대의 시점처럼 역사학자에 따라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나, 보통 1945년 8.15 이후로 보는 관점이 보편적이다. 1945년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편입된 한국은 1945년 이전과는 다른 근대 경험과 문화를 소비하고 생산하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공공시설이 들어서고, 기존의 교육․종교․문화시설이 파괴되거나 새로 생겨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76년부터 시작된 근대사와 1945년부터 시작된 현대사는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 형성과 서구문화 중심의 근대성 추구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지니며, 그런 면에서 ‘근대’는 근현대사를 통칭해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근대 문화유산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남겨진 유무형의 역사적인 문화자산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제는 편의상 근대의 종점을 어느 시기로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970년 이후 박정희정권 하에서 추진된 중화학공업정책과 새마을운동의 여파는 한국의 사회경제 모습과 생활양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한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한 경공업을 통해 제조된 생활용품과 공산품(시계․라디오․연탄 등)은 1970년대부터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지금부터 한 세대인 30년 안에 남겨진 문화유산의 경우 당대인의 삶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많은 유산이 보존되고 있으나, 적어도 30년 이전의 것은 ‘낡고 퇴락한 것’으로 간주되어 존재의 의의를 잃고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근대 문화유산은 1876년 개항부터 1970년대까지 시대범위를 설정하여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것, 일본적인 것, 서구적인 것, 여러 문화가 복합된 것 등 여러 형태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비전통적인 근대의 산물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그 이전과 이후라도 특별한 근대성과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근대 문화유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정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근현대(1876~1970년대) 시기에 형성된 ‘역사적․예술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문화재보호법 제2조 ‘문화재’ 규정).
②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종교․군사․산업 등 각 분야에서 시대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1876년 개항 이후 새롭게 창조․창건된 것, 해외 문화가 이입된 것, 전통문화와 서구문화가 잘 습합되어 형성된 문화 산물.
③ 역사적 사건과 장소 및 인물 등과 관련된 의미 있는 것(동학, 의병, 독립운동, 한국전쟁, 인물 생가 등).
④ 근대산업 발전과 지역개발과정에서 남겨진 각종 시설물, 건조물, 토목구조(공장, 양조장, 광산, 철도, 댐, 도로, 가로수 등).
⑤ 근대 생활상을 담은 독특한 건조물과 지역이나 장소(시장, 가옥, 주거지, 마을 등).
⑥ 근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특정지역만의 독특한 특성을 지닌 것.
⑦ 19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 중 ‘역사적․예술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매우 큰 것’은 포함함.
⑧ 이상의 것 중 여러 대상물이 존재할 경우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선구적인 것, 완성도가 높은 것, 지역 특성이 잘 반영된 것, 우수한 것만을 선정함.
이들 문화유산을 종류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근현대 문화유산 종류 역시 분류 가능한 모든 대상물을 선정한 것으로 실제 조사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다.
① 역사 문화유산 : 역사적 시설물, 기념물, 인물생가, 경찰서․도청․면사무소와 같은 관공서 등. 단, 건조물이 없는 역사유적지는 제외함. 이하 동일.
② 인문예술 문화유산 : 소설과․시인 등의 생가, 작품 배경지, 극장, 노래 등.
③ 교육 문화유산 : 최초의 학교건물 등 각종 교육시설.
④ 생활 문화유산 : 민가, 정자, 상여집, 디딜방아, 전적, 생활용품 등.
⑤ 종교 문화유산 : 성당․교회 등.
⑥ 건축 문화유산 : 학교․민가․공공건물중 가치가 있는 건조물.
⑦ 산업 문화유산 : 시장, 단양 석회산, 폐광산, 담배 건조실, 양조장 건물, 철도․댐․교량과 같은 토목구조물.
⑧ 자연 문화유산 : 가로수, 조경림 등.
2) 근현대 문화유산 문화재 지정⋅등록
2010년 말 현재 충청북도의 지정문화재는 아래 표와 같다. 아래 표에서 충청북도의 문화재는 총 706점으로, 국가지정문화재 169점, 도지정문화재 537점, 문화재자료 83점, 등록문화재 22점이 분포하고 있다.
<표 1> 충청북도 지정 문화재 현황
합계 | 국 가 지 정 문 화 재 | 도 지 정 문 화 재 | 문 화 재 자 료 | 등록문 화 재 | |||||||||||
소계 | 국
보 | 보
물 | 중 요 무 형 문 화 재 | 사
적 | 명
승 | 천 연 기 념 물 | 중 요 민 속 자 료 | 소계 | 유 형 문 화 재 | 무 형 문 화 재 | 기
념
물 | 민
속
자
료 | |||
706 | 169 | 12 | 80 | 3 | 19 | 9 | 24 | 22 | 537 | 274 | 22 | 119 | 17 | 83 | 22 |
이들 문화재 중에서 근대 시기에 건립된 것은 모두 54개로, 그중 등록문화재 22점, 가옥 12점, 사당 3점, 생가지 2점, 종교시설 3점, 교육시설(청원 부강초등학교 강당) 1점 등이다. 종교시설 3점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음성 감곡성당과 청주 성공회 성당, 그리고 청주 탑동 양관이다.
이들 근대 시기에 건립된 문화재 54점 중에서 등록문화재를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적인 건축물은 청주 탑동 양관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한옥 건축물이거나 최근 건립된 사당 등이다. 이는 곧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적을 뿐 아니라, 그것도 민족운동사 중심으로만 보는 단선적인 역사 이해 때문이다. 또한 전통문화에 대한 시간적 범위를 근대 이전으로 한정해서 보는 편협한 문화관도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1876년 개항 이후 근현대 역사 변동과정에서 남겨진 근대문화유산은 보다 총체적인 시각에서 찾아야 한다.
다행히 2002년 이후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국가적 자각을 통해 의미 있는 근대건축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여 법적인 보호장치를 마련하였다. 2010년 말까지 지정된 전국의 등록문화재는 470점으로, 충북은 전국의 4.7%인 22점이다. 이는 전국 16개 광역시도 중에서 9번째로 많은 것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표 2> 전국 등록문화재 현황
지역 | 충북 |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울산 | 경기 | 강원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제주 | 계 |
수 | 22 | 100 | 10 | 8 | 5 | 10 | 17 | 5 | 27 | 35 | 34 | 45 | 68 | 26 | 37 | 21 | 470 |
% | 4.7 | 21.3 | 2.1 | 1.7 | 1.1 | 2.1 | 3.6 | 1.1 | 5.8 | 7.5 | 7.2 | 9.6 | 14.5 | 5.5 | 7.9 | 4.5 | 100 |
*자료: http://www.cha.go.kr(문화재청) 2010년말 현재 |
보다 구체적인 충청북도 등록문화재는 <표 3>와 같다. <표 3>에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연차적으로 지정된 등록문화재는 충북도청 소재지이자 일제시대 충북도내에서 대도시였던 청주시에 소재한 것이 8점으로 가장 많으며, 나머지는 각 시군에 두루 걸쳐 있으나 충주시와 증평군⋅음성군⋅단양군에는 지정된 등록문화재가 없는 실정이다. 특히 1928년 충북선 충주역 개통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많았던 충청북도 제2의 도시 충주시는 한 건의 등록문화재도 지정되지 않았다. 이는 해방 이후 충주시의 개발과정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단양군의 경우에는 1950년대 이전만 하여도 외부의 인구와 자본의 유입이 극히 미약하였던 오지였기 때문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건조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충북지역 등록문화재 22점의 내용별 특징은 학교시설 5점, 공공시설과 산업시설 각각 4개, 교통과 종교시설 각각 2개 등으로, 학교시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은 충북도청 본관과 같은 공공시설과 대한통운 제천영업소와 같은 산업시설 등이다.
<표 3> 충청북도 등록문화재 현황
시군 | 문화재명 | 소재지 | 연도 | 등록일 |
청주시 (8) | 청주상고 구 본관 | 상당구 내덕2동 | 근대시대 | 2002.03.28 |
우리예능원 | 상당구 문화동 | 근대시대 | 2002.03.28 | |
충북도청 본관 | 상당구 문화동 | 1937년 | 2003.06.30 | |
대성여자중학교 강당 | 상당구 수동 | 근대시대 | 2007.09.21 | |
구 충북산업장려관 | 상당구 문화동 충청북도청 | 1936년 | 2007.09.21 | |
주성교육박물관 | 상당구 영동 | 1923년 | 2007.09.21 | |
청주 동부배수지 제수변실 | 상당구 대성동 | 1923년 | 2007.09.21 | |
충청북도지사 관사 | 상당구 수동 | 1939년 | 2007.09.21 | |
청원군 (2) | 국산 1호 항공기 ‘부활’ |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1953년 | 2008.10.01 |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 L-4연락기 | 남일면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 1948년 | 2010.06.25 | |
제천시 (3) |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 화산동 | 1941년 | 2003.06.30 |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 | 명동 | 1918년 | 2003.09.27 | |
제천 엽연초 수납취급소 | 명동 | 1943년 | 2006.09.19 | |
괴산군 (2) | 괴산군수 관사 | 괴산읍 동부리 | 1950년도 | 2004.12.31 |
괴산중학교 구 본관 | 괴산읍 대사리 | 근대시대 | 2007.09.21 | |
진천군 (2) | 대한성공회 진천성당 | 진천읍 교성리 | 근대시대 | 2002.03.28 |
덕산양조장 | 덕산면 용몽리 | 1930년 | 2003.06.30 | |
옥천군 (2) | 천주교 옥천성당 | 옥천읍 삼양리 | 1940년대 | 2002.03.28 |
죽향초등학교 구 교사 | 옥천읍 문정리 | 1936년 | 2003.06.30 | |
영동군 (3) | 추풍령역급수탑 | 추풍령면 추풍령리 | 1939년 | 2003.01.28 |
노근리 쌍굴다리 | 황간면 노근리 | 근대시대 | 2003.06.30 | |
영동 심천역 | 심천면 심천리 | 1905년 | 2006.12.04 | |
*자료: http://www.cbtour.net/(충청북도 문화관광). |
3) 근현대 문화유산의 지역별 분포실태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근현대 문화유산은 도 유형문화재 4점(부강초등학교 강당, 성공회 수동성당, 탑동 양관, 천주교 감곡성당)과 등록문화재 22점이다. 비지정된 근현대 문화유산은 현재 확인된 것만 총 75점이다. 비지정 근현대 문화유산은 개항 이후부터 1970년 이전에 건립된 역사기념물이거나 건조물로서, 근대성과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선정하였다. 그 외에 유형의 동산 문화유산(전적과 생활용품 등)과 무형문화유산 및 자연문화유산, 그리고 개인 주택과 희소성이 없는 담배 건조실, 복원건물, 일반 사당 등은 제외하였다.
따라서 지정 문화재를 포함한 충청북도의 현 근현대 문화유산은 총 101점이다. 이를 지역별로 분류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3> 충청북도 근대 문화유산 지역별 분포
지 역 | 청 주 시 | 청 원 군 | 진 천 군 | 음 성 군 | 충 주 시 | 제 천 시 | 단 양 군 | 괴 산 군 | 증 평 군 | 보 은 군 | 옥 천 군 | 영 동 군 | 계 |
근현대문화유산 | 27 | 12 | 8 | 6 | 10 | 9 | 5 | 11 | 3 | 3 | 7 | 5 | 106 |
* 근현대 문화유산 숫자는 2010년말 현재 지정 문화재와 등록문화재, 그리고 필자가 2001년도에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계하였다. |
<표 3>에서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은 지정 및 비지정 모두 포함하여 101건이다. 그 중에서 청주시는 27건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청주와 인접한 청원군이 12건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청주-충주-제천을 잇는 충북선을 따라 근현대 문화유산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1876년 개항 이후 근대화가 도청 소재지였던 충주와 1908년 이후의 청주, 그리고 청주와 충주를 중심으로 한 도시화,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축이었던 충북선 등이 근현대 충북지역의 발전축이었기 때문이다. 아래 <표 4>에서도 청주(현 청원군 포함)와 충주의 인구 증가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었다.
반면에 보은과 영동군은 각각 2건과 3건 밖에 조사되지 않았다. 보은은 충북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시군에 비해 도시화가 느린 농업지대였다. 이 때문에 외래문화의 유입이 지체되었고 전통문화가 강하게 온존될 수 있었다. <표 4>에서도 보은은 일제시대에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 증가율이 높지 않았다.
반면에 보은은 주로 전근대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는 지정 문화재가 충청북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보은지역이 근대 이전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반면, 근대 이후에는 근대화의 속도와 문화 유입 정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지체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표 4> 일제시대 충북지역의 인구 추이
| 인구 총수 | 1914년 대비 인구증가율 | ||||||
1914 | 1920 | 1930 | 1940 | 1914 | 1920 | 1930 | 1940 | |
청주 | 139,359 | 148,103 | 173,423 | 192,409 | 0 | 6.3 | 24.4 | 38.1 |
보은 | 57,311 | 63,080 | 72,484 | 64,522 | 0 | 10.1 | 26.5 | 12.6 |
옥천 | 53,997 | 63,511 | 76,062 | 73,989 | 0 | 17.6 | 40.9 | 37.0 |
영동 | 68,367 | 76,452 | 85,820 | 84,355 | 0 | 11.8 | 25.5 | 23.4 |
진천 | 43,266 | 46,494 | 45,162 | 46,688 | 0 | 7.5 | 4.4 | 7.9 |
괴산 | 91,181 | 98,820 | 109,753 | 107,455 | 0 | 8.4 | 20.4 | 17.9 |
음성 | 60,090 | 65,717 | 73,525 | 80,176 | 0 | 9.4 | 22.4 | 33.4 |
충주 | 85,204 | 98,452 | 109,638 | 122,577 | 0 | 15.6 | 28.7 | 43.9 |
제천 | 64,571 | 72,593 | 80.016 | 83,442 | 0 | 12.4 | 23.9 | 29.2 |
단양 | 41,014 | 44,105 | 48,825 | 43,259 | 0 | 7.5 | 19.0 | 5.5 |
충북 | 704,360 | 777,333 | 875,708 | 898,872 | 0 | 10.4 | 24.3 | 27.6 |
*자료: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 연도별 참조.
영동은 경부철도가 통과되고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유입도 두드러진 지역이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은 5점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때 영동지역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건조물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괴산은 지정문화재 뿐 아니라 근현대 문화유산도 많은 편이다. 괴산은 충북도내 11개 시군 중에서 지정문화재가 가장 많은 지역이지만, 일제시대 인구 증가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건에 이르는 근현대 문화유산이 있는 것은 첫째 전통적인 문화유산의 잠재력이 작동하고, 둘째 충북선이 통과하는 데다 일제시대에 비록 인구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을지라도 충청북도의 발전 중심지역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은 도청 소재지 여부, 충북선 개통, 도시화 정도, 인구 이동, 전통성, 한국전쟁과 같은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 남아 있다. 즉, 충청북도는 충북선이 닿는 청주와 충주․제천을 축으로 한 근대화가 이루진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이들 지역에 많은 근현대 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표 5> 충청북도 근현대 문화유산의 분야별 분포
분야 | 역사 | 문예 | 교육 | 종교 | 산업 | 교통 | 생활 | 기타 | 계 |
근현대 문화유산 | 26 | 2 | 12 | 22 | 26 | 8 | 8 | 2 | 106 |
이번에 조사된 106점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분야별로 찾아보면, <표 5>와 같다. 즉, 근현대 문화유산은 역사와 산업 관련 문화유산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종교, 교육 관련 유산이다. 역사 관련 유산이 많이 조사된 것은 기념비가 많기 때문이다. 기념비는 대부분 돌로 만들어 손쉽게 파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 관련 유산은 대부분 건조물이거나 산업시설과 관련된 것이어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 많다.
3.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의 분포와 성격
1) 역사 문화유산
개항 이후 근현대사는 조선왕조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근대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위로부터는 갑오개혁, 아래로부터는 동학농민전쟁이 대표적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조선은 결국 36년에 걸친 식민지지배를 받았고 민족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45년 해방은 또 다른 외세의 힘에 의존한 결과 분단으로 이어졌으며, 1950년 한국전쟁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은 자연히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많이 남길 수밖에 없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산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조사에서 역사 관련 조사대상은 역사적인 기념물과 주요인물의 생가,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건조물, 공공건물 등으로 한정하였다. 무형의 유산과 이동 및 파괴 불가능한 유적지는 제외하였다. 그 결과 역사 문화유산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표 5>와 같이 모두 26점이었다. 이는 전체 조사대상 106점의 24.5%에 해당되는 것으로 교육, 문예, 종교 등 다른 종류의 문화유산에 비해 높은 비율이다.
<표 5> 충북지역 근현대 역사 문화유산 목록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충북도청 본관 |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 1937 | 3층 철근콘크리트 | 등록문화재 |
2 | 충혼탑 | 충주시 탄금동 | 1955 | 현재 충북도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한국전쟁 기념탑(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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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대한민국독립기념비 | 청주시 상당구 중앙공원 내 | 1949 | 청주 7만 시민 일동 이름으로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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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모충사 |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 1914 | 동학농민군과 싸우다 순국한 장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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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로간부인기념비 | 청주시 상당구 제일교회 내 | 1921 | 충북지역 최초의 순수한글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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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충혼비 | 청원군 강내면 저산리 | 1958 | 해방 이후 유림 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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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단군전 | 청원군 강내면 저산리 | 1958 | 해방 이후 유림 동향, 단군 숭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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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신규식 생가 |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 19c | 독립운동가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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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신건식 생가 | 청원군 가덕면 인처리 | 19c | 독립운동가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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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신홍식 생가 |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 19c | 독립운동가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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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덕산면장불망비 | 진천군 덕산면 면사무소 내 | 1929 | 일본 연호(소화) 비문 수정 사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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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충주 단군전 |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 1946 | 해방 직후 지방 유림들의 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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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독립기념비 | 음성군 음성읍 설성공원 | 1945 | 해방 전후 지역 유지 동향 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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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일본병사위령비(1) |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 | 1894 | 동학농민전쟁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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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일본용사위령비(2) |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 | 1894 | 동학농민전쟁 유산, 충주박물관 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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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일본 천황등극림비 ① | 단양군 단성면 | 1915 | 일본 大正 천황 등극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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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일본 천황등극림비 ② | 단양군 영춘면 | 1915 | 일본 大正 천황 등극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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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일본 천황등극림비 ③ | 단양군 영춘면 | 1915 | 일본 大正 천황 등극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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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인산리고가 |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 1861 | 안채, 광채, 사랑채 등 목조와가. 홍명희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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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제월리고가 |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 19c | 사랑채만 잔존, 목조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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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신사참배 예배돌 |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면사무소 내 | 일제말 | 일제말 신사참배의 실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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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단군전 | 괴산군 증평읍 대동 | 1948 | 해방 이후 지역유림들의 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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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연병호 생가 |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 | 1890년경 | 독립운동가 생가, 원형 보존 | 도 기념물 |
24 | 삼산의원 |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 1990년경 | 시멘트벽돌 기와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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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청산 문바위골 |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 1894 | 최시형 은거지, 갑오년 기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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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노근리 쌍굴 |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 1950 | 한국전쟁 때 양민학살지역 | 등록문화재 |
형태별로는 기념비석류가 12점으로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가옥이 6점, 사당류가 4점, 기타 4점이다. 기념비가 가장 많은 것은 사건 당시에 건립된 것 외에 사건 이후 추모비가 건립된 데다가, 모두 돌을 사용하여 파괴되거나 훼손될 위험성에 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시기별로는 1910년 이전은 5점, 1910~1945년은 13점, 1945년 이후 1970년 사이의 것이 모두 8점이다. 시기별로는 일제시대에 조성된 것이 가장 많다.
또 하나의 위령비는 일본군 병참부가 위치했던 곳의 언덕 위에 솟은 바위를 깎아낸 뒤 새긴 비이다. 현 하가흥 노인정 도로 건너편 자연암반에 새겨져 있다. 위령비문은 바위를 깎아 새겼는데, 가로 55㎝, 세로 107㎝이다. 비문은 현재 주민들에 의해 훼손되어 전혀 판독이 되지 않으나, 훼손되기 이전에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3행 세로로 “大日本帝國 勇士 南海爲三郞 君之碑 明治二十七年十日月有志建之”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들 위령비는 방치된 상태이며, 특히 자연암반에 새긴 위령비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 위령비는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사실을 입증하는 유일한 유적인 만큼 잘 보존되어야만 한다.
일제시대의 문화유산은 모두 13점인데, 역사적인 주요인물의 생가가 6점, 비석류가 5점, 공공건물이 1점(충북도청 본관), 기타 1점(신사참배 예배돌)이다.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는 대단히 많으나, 그들의 생가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원형 또는 부분적으로 생가의 모습이 남아 있는 인물은 신규식, 신건식, 홍명희, 신홍식 등이다. 특히 연병호 생가는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편이다.
특이한 점은 단양에서 조사된 일본천황 등극기념림비 3기이다. 건립주체는 각각 단양군민, 영춘면민, 차의곡면민이다. 이들 비는 모두 1915년 11월 10일자로 세워진 것으로, 전면에 <御登極記念林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일제는 대정천황의 왕위 등극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記念林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충청북도는 1915년 도비와 지방비를 들여, 면과 학교 단위로 5반보를 표준으로 한 ‘御大禮記念林’ 144개소 140여 정보를 조성한 뒤, 소나무 등을 식재하였고 관리규정까지 만들어 특별히 관리하였다. 따라서 단양 3개면에 건립한 기념림비는 이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념림이 144개소에 이르렀던 만큼 다른 지역에도 기념비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확인된 것이 없다. 다른 지역은 해방되면서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식민지지배와 독립의 이중적인 얼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식민지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를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자료이다.
일본천황 등극기념림비 외에 이번 조사에서 주목되는 일제시대 기념비는 청주 제일교회 입구에 세워져 있는 로간부인기념비이다. 로간(J.V.Logan, 한국주재 1909-1920) 부인은 1909년 3월(53세) 자비량 선교사로 내한하여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펴다가 1920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12년간 복음 사역과 여성 교육에 헌신한 여선교사였다. 그가 죽은 뒤 서울 양화진의 선교사 공원묘지에 묻혔지만, 청주읍교회 지도자들과 청주 선교부에서는 청주를 중심으로 충북지역에서 행한 그의 활동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21년 6월 청주제일교회 앞마당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의 西面에는 “로간부인긔념비”, 북면에는 “구쥬 강생 일쳔구백이십일년 류월 일립”, 남면에는 “아메리가 나신부인 됴선에 건너오셔/봉승 샹테명령 진충갈역엿네/우리민족 구원려 교육구졔 힘다/십이년 여일죵 ㄷ쇼선별셰 텬당으로”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가 갖는 가장 큰 역사적인 의미는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한글 비석이라는 점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한글로 작성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비는 청주지역 기독교사는 물론 한글 및 민족운동을 밝혀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해방 이후의 역사 문화유산은 모두 8점이다. 내용별로는 독립기념비가 2점, 한국전쟁 관련 유산이 3점, 단군전이 3점 등이다.
독립기념비는 청주 중앙공원과 음성 설성공원에 세워져 있다. 청주 독립기념비는 1949년 8월 15일 청주시민 7만 이름으로 건립되었고, 음성 독립기념비는 1945년 8월 9일자로 음성군민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음성 독립기념비는 원래 일본 황태자(현 일본천황) 탄생기념비(연대 미상)를 개조한 것으로, 건립일자가 해방되기 이전 날짜로 되어 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그와 같은 독립기념비가 세워진 시기는 해방 이후로 보아야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독립기념비는 해방 전후의 시대상황을 반증할 뿐 아니라, 식민지지배의 역사와 해방의 역사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식민지지배와 독립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향토교육자료로도 활용해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역사 문화유산중 한국전쟁과 관련된 것은 3점으로 기념비 2점과 영동 노근리 쌍굴이 있다. 영동 노근리 쌍굴은 최근 부각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지역으로, 쌍굴 위로 경부철도가 통과하고 시멘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토목구조물이기 때문에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노근리 쌍굴은 한국전쟁기 비참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곳으로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어떤 형태로든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
<표 6> 충북지역 한국전쟁 기념조형물
이름 | 위 치 | 건립일자 | 비고 |
반공유적비 |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148 | 1962.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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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청주시 흥덕구 사직2동 111-6 | 1955.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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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충주시 탄금동 산1(탄금대 내) | 195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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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보은군 보은읍 죽전리 산11-3 | 1969. 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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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충혼비 |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 1961. 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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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옥천군 옥천읍 마암리 산1-12 | 1969. 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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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투사 위령비 |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227 | 1961.10. 7 |
|
충혼비 |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산3-1 | 1955. 9.15 | 1995. 재건립 |
충혼탑 |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234 | 1955.11.20 | 1989. 6. 移轉 |
반공투사 위령비 |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74-3 | 1961.10.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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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비/위령비 | 옥천군 군서면 동평리 582-4 | 1967.10.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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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산1-2 | 1967. 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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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산36-1 | 1959. 8.15 |
|
6․25격전지비 |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 잣고개 | 1961. 6.25 | 1978. 이전 |
전승비 |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1-1 | 1962. 8 | 1986. 6. 이전 |
전승탑 |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1-1 | 1967. 4 | 1986. 6. 이전 |
충혼탑 |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산1-1 | 1965. 6 | 1994. 6. 이전 |
충혼탑 |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160-2 | 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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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17 | 1968. 6.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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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국가보훈처, 1996『참전기념조형물도감』. 국방군사연구소, 1994『전적기념물편랍집』. |
한국전쟁 관련 기념비는 1955년 이후에 조성되기 시작하는데, 1970년 이전까지 충북도내에 세워진 기념조형물은 <표 6>과 같다. 충북도내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념조형물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1955년 9월 15일 세워진 충혼탑이나, 이 탑은 그 뒤 1995년에 해체되고 다시 재건립되어 역사적인 의미를 상실하였다. 원형이 남아 있는 충북 최초의 한국전쟁 기념조형물은 1955년 11월에 조성된 충주 충혼탑이다. 청주 사직공원에 있는 충혼탑은 1993년 보수로 원형이 변경된 만큼, 충주시 탄금동 탄금대공원 안에 있는 충혼탑만은 원형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표 7> 일제시대 충북지역 공공기관 목록 | ||||||
기 관 별 | 건 물 명 칭 | 현존 유무 | 소 재 지 | 건축 연대 | 구조 (면적) | 비 고(현 위치) |
행정기관 | 충청북도청 | 존 | 문화동 | 1937.6 | 벽돌2층 | 충청북도청 본관 |
청주군청 | 무 | 북문로1가 | 1923 | 목조1층 | 청원군청자리 | |
충주군청 | 무 | 중앙공원내 | 1931 | 목조1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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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읍사무소 | 무 | 북문로1가 | 1931 | 벽돌3층 | 청주전신전화국자리 | |
충주읍사무소 | 무 | 성내동 | 1917(?) | 목조1층 |
| |
제천읍사무소 |
| 서부동 | 1942 | 벽돌2층 |
| |
영동읍사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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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검찰기관 |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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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방법원충주지청 | 무 | 성내동 | 1915.9 | 목조1층 | 청주지방법원충주지청(교현동720) | |
경찰기관 | 청주경찰서 | 무 | 북문로1가 | 1931 |
| 6.25당시파괴,1956벽동3층 1997파괴 |
武德殿 | 무 | 북문로1가 | 1921 | 벽돌1층 | 1997 파괴, 尙武館(468M2) | |
충주경찰서 | 무 | 성서동중앙시장 | 1921.4.11 | 목조1층 | 교현1동419(1935.12.7신축이전) | |
충주 尙武館 | 무 | 성서동중앙시장 | 1924.4 | 목조1층 |
| |
철도사업기관 | 청주역사 | 무 | 북문로2가 | 1921 | 목조1층 | 청주시청 앞 사거리 |
영동역사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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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천역사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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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역사 | 무 | 봉방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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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천역사 | 무 | 영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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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1중앙선 원주제천간 개통에 따라 설치 | |
체신사업기관 | 청주우편국 | 무 | 북문로1가 | 1914.12 | (291평) | 청주우체국 자리 |
충주우편국 | 무 | 성내동 | 1926.6.28 | 목조1층 | 충주우체국 자리 | |
제천우편국 | 무 | 중앙로2가 |
|
| 1966.12.15 현위치 신축이전 | |
전매사업기관 | 경성전매지국청주출장소 | 무 | 영동 | 1925.12 | 목조1층 |
|
경성전매지국충주출장소 | 무 | 용산동 | 1932.10 | 목조1층 | 충주전매청 자리 | |
재무기관 | 청주세무서 | 무 | 문화동 93-1 | 1934.5 | 벽돌2층 |
|
충주세무서 | 무 | 성남동 102 | 1937.12 | 목조1층 | 충주세무서 자리(1986.6.27 新築) | |
영동세무서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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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기관 | 충청북도잠업검사소 | 무 | 영동 76 | 1927.10 |
| 112평 |
충청북도농사시험장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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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북도 잠종장 | 무 | 사주면 사창리 | 1921 |
| 444.12평(잠실184평) | |
*자료: ’99건축문화의 이해 충청북도 조직위원회, 1999『忠北의 建築文化』, 408쪽. |
끝으로 개항 이후 신축된 공공기관, 즉 관청건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충청북도 도청 본관이 유일하였다. 관청에는 도청 및 군청과 같은 행정기관 외에 재판 및 검찰기관, 경찰기관, 行刑機關 등과, 官業機關으로 체신․재무기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기관의 내력은 <표 7>과 같다.
<표 7>에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충북도청 본관 밖에 없다. 나머지 건물은 대부분 1980~1990년대에 걸쳐 철거되거나 개축되어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최근까지 남아 있던 옛 진천군청 건물인 진천읍사무소도 2001년 봄에 철거되었다. 진천을 끝으로 일제시대에 신축된 충청북도 각 시군청사는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충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공기관인 충북도청 본관은 1937년 큰 논을 메워 철근 콘크리트조 2층 평스라브로 신축한 것인데, 1959년 봄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하였다. 이 때문에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상과 같이 개항 이후 1970년 이전에 세워진 근현대 역사 문화유산(기념물과 건조물)은 상당수 파괴되거나 사라진 상황에서도 역사성을 간직한 대상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 식민지지배, 독립, 한국전쟁과 관련된 기념물과 건조물 등은 지난 근현대 역사의 산증인이자 살아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닌 것이 많았다. 이들 유산은 그 가치평가를 떠나 충북지역에서 전개된 근현대사를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구히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2) 문예 문화유산
개항 이후 근현대기에 충북 출신 문학가와 예술인은 다른 시도에 비해 출중한 인물이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한국 문학계의 거두로 손꼽히고 있는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향수」를 쓴 시인 정지용, 한국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알려져 있는 김복진, 일제시대 대표적인 농민문학가였던 이무영 등은 모두 충북 출신으로서 충북지역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현재 충북 출신 문학예술인들의 생가나 작품과 관련된 기념물과 건조물로서 보존가치가 있는 것은 <표 8>과 같다.
<표 8> 충북 출신 근현대 주요 문학예술인 | ||||
문예인 | 생몰연대 | 출생지 | 주요작품 | 비고 |
신동문 | 1927-1994 | 청원군 문의 | 풍선과 제삼 포폭 | 시인 |
권태응 | 1918-1951 | 충주시 칠금동 | 감자꽃(시) | 아동문학가 |
정호승 | 1916- ? | 충주시 교현동 | 모밀꽃(시집) | 시인 |
이 흡 | 1908- ? | 충주시 신니면 | 피에로의 노래(시) | 시인 |
홍구범 | 1923- ? | 충주시 신니면 | 봄이 오면(소설) | 소설가 |
이무영 | 1908-1960 | 음성읍 | 흙의 노예(소설) | 농민문학가 |
홍명희 | 1886-1968 | 괴산군 인산리 | 임꺽정(소설) | 소설가 |
김기진 | 1903-1985 |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 붉은 쥐(소설) | 소설가 등 |
김복진 | 1901-1941 | 상동 | 금산사 38척 불상(조각) | 김기진 형 근대조각가 |
조명희 | 1894-1938 | 진천군 벽암리 숫말 | 김영일의 死(희곡) | 민중문학자 |
조벽암 | 1908- ? | 진천군 벽암리 | 건식이의 길(소설) | 조명희 조카 |
오장환 | 1918-1951 |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 병든 서울(시집) | 시인 |
정지용 | 1903- ? | 옥천읍 하계리 | 향수 | 시인 |
구석봉 | 1936-1988 | 영동읍 설계리 |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전쟁시) | 시인, 소설가 방송작가 |
권구현 | 1898-1937 |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 | 흑방의 선물(시집) | 시인, 소설가 |
<표 9> 충북지역 근현대 문예 문화유산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김복진․김기진 생가 |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 19C | 첫 근대조각가인 김복진과 문학인 김기진 생가 |
|
2 | 오장환 생가 | 보은군 회북면 중앙리 | 19C | 충북 문인 생가 | 기념문학관 건립 |
근현대 충북지역 문예 문화유산으로 조사된 것은 앞의 역사 문화유산으로 분류한 홍명희 생가 외에 <표 9>와 같은 김기진․오장환 생가뿐이다. 그밖에 <표 8>와 같은 문학인들의 작품 배경지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념물이나 건조물은 조사되지 않았다.
팔봉 김기진(1903~1985)은 청원 출생으로, 평론가이자 소설가, 시인이다. 1923년에 일본 릿쿄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한 그는 1924년 신경향파 문학의 출발에서 1936년 카프 해체에 이르기까지 가장 역량 있는 평론과 소설을 썼으며, 시작에도 힘썼다. 프로문학을 주창한 최초의 인물이며 박영희와 함께 1920년대의 독보적인 평론가로 꼽힌다. 1940년 무렵부터는 수필․시․시조․평론 등 친일작품을 발표하였다. 1944년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에 선출되는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대표작은 단편소설로 『붉은 쥐』, 『불이야 불이야』, 평론으로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문예사상과 세계사상』, 『조선 프로 운동의 선구자』등이 있다.
井觀 김복진(1901~1940)은 김기진의 형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이자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한 인물이다. 1920년에 배재고보를 중퇴한 그는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년에는 朴勝喜․李瑞求 등과 연극단체인 土月會를 창립하여 방학을 이용하여 고국공연을 하는 등 예술적․지적인
이들 세 문예인은 김기진의 경우 친일문학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낳고 있을지라도, 세 사람 모두 근현대 문학․예술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의 생가 보존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생가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실정이다. 오장환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김기진․김복진의 생가는 수차에 걸친 개보수로 원형이 많이 변형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가는 원형보다도 근현대 문학계의 출중한 인물의 생가라는 점에 큰 가치가 있는 만큼 그 자체 보존할 가치가 있다. 이들의 생가 보존은 충북지역의 큰 문화자원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육 문화유산
한국의 근대학교는 1885년에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제학당 등과 같은 사립학교가 효시였으나, 한국이 주체적으로 근대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 이후부터이다. 정부는 1895년 4월 16일 한성사범학교 관제, 1895년 5월 10일 외국어학교 관제,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 1895년 8월 12일 소학교 규칙대강 등과 같은 근대학교 설립에 필요한 법령을 제정하였고, 그에 따라 속속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소학교 설립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1895년 8월에 제정된 소학교 규칙대강에 따라 관찰사 소재지에 公立尋學小學校를 각각 1교씩 설립하였는데, 이에 따라 충청북도의 관찰부인 충주에도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것이 충북 최초의 근대 학교인데, 1896년에는 學部의 지정에 따라 청주에도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표 10> 일제 식민지시대 설립된 충북지역 학교 현황 | ||||
지역 | 학교명 | 현 학교명 | 개교연도 | 비 고 |
청 주 ․ 청 원 | 청주공립보통학교 | 주성초등학교 |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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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공립보통학교 | 문의초등학교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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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공립보통학교 | 옥산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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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공립보통학교 | 내수초등학교 |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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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공립보통학교 | 부강초등학교 |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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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공립보통학교 | 오창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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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공립보통학교 | 강서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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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공립보통학교 | 가덕초등학교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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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립농업학교 | 청주농업고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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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공립보통학교 |
| 1921 | 고등과 | |
대성보통학교 |
| 1920년대 | 사립 | |
청남학교 |
| 1930년 이전 | 사립 | |
청주고등보통학교 | 청주고등학교 | 1924 | 현 청주중학교 | |
청주공립여학교 |
|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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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공립농업학교 | 충북실업고등학교 | 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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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고등학교 | 청주상업고등학교 | 1935 | 1936년 현재 교사 | |
충청북도립사범학교 |
| 1923 | 1929년 폐지 | |
청주사범학교 | 청주교육대학 | 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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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제2공립고등여학교 | 청주여자고등학교 | 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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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 회인공립보통학교 | 회인초등학교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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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공립보통학교 | 삼산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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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공립보통학교 | 관기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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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 청산공립보통학교 | 청산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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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공립보통학교 | 죽향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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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공립보통학교 | 이원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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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공립보통학교 | 안내초등학교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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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공립보통학교 | 군서초등학교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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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공립농업보습학교 | 옥천공업고등학교 |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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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공립여자 농업전수학교 | 옥천여자중학교 | 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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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 황간공립보통학교 | 황간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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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공립보통학교 | 양동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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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공립보통학교 | 장산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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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공립실업여학교 | 영동여자고등학교 | 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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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 진천공립보통학교 | 상산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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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립보통학교 | 이월초등학교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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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공립농업전수학교 | 진천농업고등학교 | 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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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 괴산공립보통학교 | 명덕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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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공립보통학교 | 연풍초등학교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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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공립보통학교 | 목도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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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공립보통학교 | 청안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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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 음성공립보통학교 | 수봉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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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공립보통학교 | 무극초등학교 |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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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평공립보통학교 | 삼성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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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괴학교 |
| 1930 이전 | 사립 | |
음성농업실수학교 | 음성고등학교 | 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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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 충주공립보통학교 | 교현초등학교 |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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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리공립보통학교 | 엄정초등학교 | 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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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원공립보통학교 | 대소원초등학교 | 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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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공립보통학교 | 노은초등학교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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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원공립보통학교 | 용원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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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공립보통학교 | 수안보초등학교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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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공립중학교 | 충주고등학교 |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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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공립고등여학교 | 충주여자고등학교 | 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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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 평동공립보통학교 | 백운초등학교 | 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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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공립보통학교 | 한수초등학교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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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공립보통학교 | 동명초등학교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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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공립보통학교 | 청풍초등학교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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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공립실과여학교 | 제천여자고등학교 | 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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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공립농업학교 | 제천농업고등학교 | 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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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 영춘공립보통학교 | 영춘초등학교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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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공립보통학교 | 단양초등학교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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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충청북도, 1992 『忠淸北道誌』 下, 1660~1675쪽에서 정리.
중등학교는 1899년 4월에 중학교관제가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교육목적은 중학교를 최종 학교로 보고 실업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지었다. 그렇지만 충북에는 1910년 이전에 설립된 중학교는 없었으며, 충북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은 1911년 11월 1일 조선교육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허가로 설립된 청주공립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이다.
1908년 현재 충북지역의 학교는 공사립 모두 47개교로, 공립학교 3개교 외에는 모두 불완전하고 중등학교는 없는 실정이었다. 공립학교는 1907년에 설립된 청주․충주․황간보통학교로, 모두 학과목은 보통과 일어, 수업년한은 4년이다. 현재 이들 학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일제 식민지시대에 들어와 여러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충북지역에 설립된 학교 현황은 <표 10>과 같다.
<표 10>에서 1906년부터 1945년 이전에 설립된 충북지역 학교는 청주․청원 19개교, 보은 3개교, 옥천 7개교, 영동 4개교, 진천 3개교, 괴산 4개교, 음성 5개교, 충주 8개교, 제천 6개교, 단양 2개교 등 총 61개교였다. 이중 청주의 대성보통학교와 청남학교, 음성의 매괴학교 외에는 모두 공립학교였다. 그리고 중등학교는 5개교, 실업학교는 9개교, 사범학교는 2개교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보통학교였다. 따라서 일제시대 충북지역의 교육은 보통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중등교육의 경우 실업교육이 우위에 있었다.
이 같은 충북지역 근대 학교는 대부분 현재까지도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학교의 대부분은 1960년대 이전의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校舍도 대부분 1970~80년대에 철거되거나 개축되어 개교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는 학교가 드문 실정이다.
<표 11> 충북지역 근현대 교육 문화유산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청주상고 구본관 | 청주시 상당구 내덕2동 | 1935 | 2층 적벽돌 492평 | 등록문화재 |
2 | 주성초 구강당 (주성교육박물관) | 청주시 상당구 영동 | 1923 | 1층 목조 흙벽, 37평 | 등록문화재 |
3 | 청주대 법과대 건물 |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 1957 | 청주대 교육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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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충북대 04․63동 |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 1956 | 충북대 교육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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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대성초등학교 강당 | 청주시 상당구 내덕2동 | 1963 | 50-60년대 강당 전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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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대성여자중학교 강당 | 청주시 상당구 수동 | 근대 | 일제시대 학교 강당 | 등록문화재 |
7 | 부강초등학교 강당 |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 1930 | 원형 보존, 특별교실로 사용중 | 도 유형문화재 |
8 | 이호신장학비 | 진천군 상산초등학교 내 | 1941 | 대표적인 일제시대 교육 관련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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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괴산중학교 구본관 | 괴산군 괴산읍 대사리 | 1949 | 해방 이후 신축된 충북 유일의 석조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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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 1936 | 교실 3칸 보존, 정지용․육영수 수학 | 등록문화재 |
11 | 옥천여중 구교사 |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 1944 | 전통가옥을 교사로 사용(1944~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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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양산초등학교 부속 전시관 | 양산면 가곡리 | 1909 | 조양학당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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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1>은 현재 남아 있는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12점이다. 초등학교 교사 2개, 중등학교 교사 3개, 초중등학교 강당 4개 , 대학 건물 2개, 교육 관련 기념비 1개 등이다.
초등학교 교사는 옥천 죽향초등학교, 양산초등학교 옛 건물이 현재 남아 있다. 특히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양산초등학교 옛 건물은 설립 초창기에 쓰이던 조양학당 건물인데, 1909년 10월 기존의 죽전․조양서당을 합병하여 신축한 3칸 한옥건물이다. 이 건물은 영동군 유일의 학당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근대학교 설립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보존 가치가 있다.
옥천 죽향초등학교 舊 교사는 현재 3개의 교실이 남아 있는데, 1936년에 신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실은 충북지역에서 유일하게 전형적인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지용과 육영수가 수학한 곳으로 교육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초등학교 부속 건물은 강당 4곳이다. 대성초등학교 강당은 1950~60년대 학교 강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가치가 있다. 반면에 주성초등학교 강당은 일제시대 학교 강당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성초등학교는 1907년에 청주제일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현 강당이 신축된 해는 1923년이다. 1948년에 현재의 교명인 주성초등학교로 개명되었고 2001년 2월 10일 기존의 강당을 활용하여 주성교육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평면형식의 흙벽 목조기와집(왕대공지붕틀에 모임지붕, 환기용 돌출창, 오르내리창 등)인 주성교육박물관은 78년이나 경과된 목조강당임에도 불구하구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청주지역 유지와 성금으로 신축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충북지역 교육시설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특히 강당시설로는 유일하다. 따라서 이 건물은 청주 더 나아가 충북지역의 근대교육사는 물론 건축사적 입장에서 보존할 가치가 매우 높다.
다음으로 중등학교 교사는 청주상고와 괴산중학교 및 옥천여중의 구교사가 조사되었다. 본관으로 쓰이던 청주상고 교사는 1936년에 신축한 것으로 건립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초기의 근대식 교육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괴산중학교 구본관은 일명 돌집으로 불리어졌는데, 1947년 3월에 서울중앙산업주식회사에서 착공하여 1949년에 준공한 건물이다. 이 교실은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교육문화유산 중 석조건물로는 유일하며, 특히 해방 직후 우리 기술진에 의해 건축된 도내 유일의 석조건물이란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크다.
옥천여중은 1944년 4월에 옥천여자전수학교로 개교하였는데, 개교 당시 99칸 전통한옥을 개조하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 한옥건물은 옥천여중이 1964년에 현재의 위치인 옥천읍 문정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하였는데, 현재 교사 일부와 당시 교무실로 사용되던 사랑채와 벽돌조 담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현재 민가로 사용되고 있는 사랑채 외에는 보존상태가 불량하다. 이들 건물은 전통한옥을 학교 교사로 사용한 사례를 보여주며, 특히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문화유산 보존차원에서 적극 보존대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죽향리에는 옥천여중으로 쓰이던 한옥 외에 주변에 보존상태가 양호한 전통한옥이 밀집해 있을 뿐 아니라, 인근에 정지용 생가가 있고 전통적인 학교 교실의 모습을 완연히 간직하고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가 있다. 따라서 이들 문화유산을 하나로 묶어 옥천군의 문화재단지로 집중 육성해도 좋을 것이다.
대학 교육유산으로는 청주대와 충북대 건물 3개동이 있다. 1941년에 세워진 청주사범학교(현 청주교육대학)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947년에 청주 수동에서 개교한 청주대는 1957년에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법과대 건물과 내덕동 캠퍼스이다. 현재의 법과대 건물은 1985년에 부분적으로 수리하였어도 1957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해방 이후 학교건축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충북대학교는 1951년 전시 하에서 청주초급농과대학으로 개교하였고 1956년 4월 충북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면서 같은 해 6월 12월에 각각 신축한 강의동이 바로 04․63강의동이다. 모두 흙벽돌로 지은 2층 양옥건물로 일제시대 건축양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이들 두 강의동은 충북대학교의 역사를 반증할 뿐 아니라 1950년대 건축양식을 이해할 수 있고 일부 충청북도민의 성금으로 지어진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밖에 교육 관련 문화유산으로 조사된 것 중 학교 건조물 외에 기념비가 하나 있다. 이 기념비는 진천 상산초등학교 내에 있는 ‘이호신장학비’ 1941년에 건립되었다. 이호신은 1940년에 5만7천원을 기부하여 학교 부지 6,900평과 교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종교 문화유산
(1) 문화유산 현황
개항 이후 충북지역에 남아 있는 종교 문화유산은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기타 민간신앙 관련 건조물이나 기념비가 남아 있다. 충북지역은 지정학적 위치상 중부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일찍 서구종교가 들어왔을 뿐 아니라, 천주교의 경우 공인되기 이전 제천의 배론성지와 진천의 배티성지 및 연풍성지 등을 중심으로 교세를 꾸준히 확장하였다.
그 때문에 충북지역에는 여러 종교 관련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데, <표 12>와 같이 모두 19개의 종교 건축문화유산이 있다.
<표 12> 충북지역 근현대 종교 문화유산 목록 | ||||||
구분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천 주 교 | 1/1 | 감곡성당 |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 1930 | 1930년에 건립한 고딕양식 성당 | 도 유형문화재 |
2/2 | 옥천성당 |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
| 철근콘크리트 기와집 | 등록문화재 | |
3/3 | 음성성당 | 음성군 음성읍 오성동 |
| 50년대 성당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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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증평성당 | 증평군 증평읍 장동 | 1956 | 50년대 성당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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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진천성당 |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 1956 | 50년대 성당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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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괴산성당 |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 1958 | 50년대 성당건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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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 청주 내덕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 1961 | 1950년 성당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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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청원 부강성당 |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 1961 | 청주 주교좌성당 모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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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 청주 서운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서운동 | 1962 | 1960년대초 성당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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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 충주 교현동성당 | 충주시 교현동 | 1964 | 1960년대 건축사 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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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 청주 수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수동 | 1966 | 1960년대후반 성당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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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 청주 보은성당 |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 | 1966 | 1960년대 독특한 성당 건축양식을 보여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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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독 교 | 13/1 | 청주 제일교회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 1939 | 2층적벽돌, 130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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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 청주 탑동 양관 | 청주시 상당구 탑동 | 1906 | 1906-1932년에 건립된 서양식 건물(선교사 사택) | 도 유형문화재 | |
성 공 회 | 15/1 | 진천교회 |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 | 1923 | 단층팔작지붕 한옥, 방형기둥, 한양절충식 | 등록문화재 |
16/2 | 음성교회 |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 1923 | 음성지역 최고의 성공회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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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 매일교회 |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 | 1938 | 벽촌에 세원진 성공회 성당 유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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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 대소교회 |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 1934 | 음성지역 초기 성공회 교회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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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 충주교회 | 충주시 교현동 | 1931 | 초기 서양식 교회 전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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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 수동성당 | 청주시 수동 | 1935 | 1930년대 대표적 성공회 한옥 성당 | 도 유형문화재 | |
기 타 | 21/1 | 인도교 창립기념비 |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 1933 | 일제하 신흥종교인 인도교 창립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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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 원불교 교당 | 청주시 상당구 탑동 | 일제 | 일제시대 일본 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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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로는 <표 13>과 <그림 1>과 같이 청주시가 7건으로 가장 많고, 다음 음성군 5건, 진천군 2건 등으로 충청북도의 서북부인 진천⋅음성⋅청주지역에 집중 분포해 있다. 그 이유는 서구의 근대종교가 서울과 인접한 음성⋅진천을 중심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음성지역은 충북지역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고, 또한 충청지역 성공회 선교의 중심지였던 진천과 인접하였다는 조건상 천주교, 성공회 관련 건축문화유산이 다수 현존하게 되었다. 청주 지역은 충북 지역에서 도청소재지로서 정치, 행정,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였으므로 근대종교관련 각종 건축문화유산이 현존하게 되었다. 반면에 충청북도의 오지라 할 수 있는 단양⋅제천⋅영동 등지는 한 건도 없는 실정이다.
<표 13> 충북지역 근현대 종교 문화유산의 지역별 분포 | |||||||||||||
지 역 | 청 주 시 | 청 원 군 | 진 천 군 | 음 성 군 | 충 주 시 | 제 천 시 | 단 양 군 | 괴 산 군 | 증 평 군 | 보 은 군 | 옥 천 군 | 영 동 군 | 계 |
천주교 | 3 | 1 | 1 | 2 | 1 |
|
| 1 | 1 | 1 | 1 |
| 12 |
성공회 | 1 |
| 1 | 3 | 1 |
|
|
|
|
|
|
| 6 |
기독교 | 2 |
|
|
|
|
|
|
|
|
|
|
| 2 |
기 타 | 1 |
|
|
|
|
|
| 1 |
|
|
|
| 2 |
계 | 7 | 1 | 2 | 5 | 2 | 0 | 0 | 2 | 1 | 1 | 1 | 0 | 22 |
종교별 분포 현황을 보면, <표 13>과 같이 천주교 관련 문화유산이 12건, 성공회 관련 문화유산이 7건, 개신교 관련 문화유산이 2건, 기타 2건으로 총 22건이다. 천주교 관련 문화유산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충북지역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다. 천주교는 선교 초기부터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전국 각지에 다수의 성당과 공소를 건축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현존하고 주요 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되어 있다. 충북지역의 경우도 그와 동일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충북지역 근대종교 문화유산 중 가장 특이한 점은 성공회 관련 문화유산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전체 22건 중 5건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성공회 선교 초기부터 충청지역 선교에 집중하였으며 진천이 충청지역 성공회 선교의 전초기지이자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고 인근의 음성, 청주, 충주 지역에 이른 시기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기타 종교문화유산은 인도교 창립기념비와 옛 大蓮寺 사찰건물이다. 인도교는 이태호(1861~1943)가 인도정의와 종교통일을 목적으로 괴산군 불정면 목도에서 창시한 신흥종교이다. 이태호는 인도교 창립 직후 1933년에 창립기념비를 건립하였는데, 현재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인도교 창립기념비는 격변기인 한국 근대기에 출현하였던 수많은 신흥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현재 청주 원불교 본당으로 쓰는 옛 大蓮寺 사찰건물은 원불교에서 1970년부터 사용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군부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을 옛 大蓮寺 사찰건물로 보는 근거자료는 일제 식민지시대 청주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李昌秀(1912년생)의 자서전이다. 이 자서전에는 일제시대 청주 평면도 지도가 나오는데, 현재의 원불교 위치에 大蓮寺가 표기되어 있다. 1934년도에 간행된 자료에는 충북지역 일본 사찰로 大蓮寺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찰건물은 1934년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현 원불교 본당 건물은 지붕, 창문, 기둥 등 식민지시대 일본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규모는 25평이고 1충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시기 일본의 불교사찰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므로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일본의 불교사찰 건물의 하나로 그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보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충북지역 종교 문화유산 22건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등록된 것은 <표 12>에서 22건 중에서 유형문화재 3건, 등록문화재 2건뿐이다. 현재 이는 <표 14>에서 볼 수 있듯이 전국 근대종교문화유산으로 지정⋅등록된 128건의 3%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정, 등록 건수도 절대적으로 적고 비율도 높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근대종교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근대문화유산 전체 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는 충북지역의 근대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충북지역은 내륙에 위치하여 개항지와 같이 외래문물이 빨리 유입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었고 또한 청주를 제외하고는 중규모 이상의 도시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문화유산의 토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미흡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존 및 활용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인천, 대전, 군산, 목포, 나주 등의 지역은 근대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일찍부터 깨닫고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적극적 발굴과 보호 활동을 전개한 결과 현재 많은 근대문화유산이 현존하는 반면에, 충북지역은 이와 같은 측면이 부족하여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사라진 것이다.
<표 14> 근대종교문화유산 문화재 지정⋅등록 현황 | ||||||||||||||||||
건물명 | 서울 | 경기 | 인천 | 강원 | 충남 | 충북 | 대전 | 경남 | 경북 | 부산 | 대구 | 울산 | 전남 | 전북 | 광주 | 제주 | 합계 | |
국가지정 | 사적 | 6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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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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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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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시도지정 | 유형문화재 | 7 |
| 5 | 2 |
| 3 | 1 |
| 1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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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3 |
기념물 | 1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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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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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 | 2 |
| 15 | |
문화재자료 |
| 2 | 1 | 1 | 3 |
| 4 | 1 | 2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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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 1 | 21 | |
기타 | 2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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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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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1 | 6 |
| 4 | |
등록문화재 | 4 | 1 |
| 9 | 4 | 2 | 5 | 3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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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1 | 6 | 2 | 1 | 54 | |
합계 | 20 | 8 | 8 | 12 | 13 | 5 | 10 | 4 | 9 | 0 | 6 | 1 | 13 | 24 | 11 | 2 | 128 |
(2) 종교별 문화유산 특징
① 천주교
⊡ 충북지역 천주교 수용과 확산
천주교는 프랑스 로베르 신부에 의해 17세기 초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전래된 뒤 충북에도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옹기굴을 경영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많이 있었고 1856년에 세워진 제천 배론 신학교에 이어, 1885년에 세워진 원주 부엉골 초가집 신학교가 강원과 경기, 그리고 충북지역의 충주, 청주, 괴산 등을 관리하며 당시 22개의 공소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 뒤 부엉골의 위치가 관할지역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어 관리하기에 불리하기 때문에 1896년 음성 감곡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부이용(R. Camillus Bouillon) 신부에 의해 감곡본당이 건축되고 선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음성 감곡성당은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그 뒤로 음성 감곡성당은 충북 북부지역에 천주교가 확산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충북 남부지역 천주교 확산의 거점은 1906년에 설립된 옥천성당이었다. 옥천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903년에 공주 본당의 신부인 파스키에(P. Pasquier)에 의해 옥천 공소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옥천이 교통이 요지로 새롭게 부상하자, 공주 본당은 1906년 5월 20일 옥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고 홍병철 구가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1909년에는 20평 규모의 성당도 완공되었으나, 이후 1948년 7월 본당으로 승격될 때까지 다시 공소로 격하되어 운영되었다.
1927년 현재 천주교 포교소는 23개나 되었는데, 음성 감곡성당을 제외하면 모두 공소였다. 프랑스인 1명을 비롯해 23명의 신부가 있었으며 신도수 역시 2,946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에 따라 청주성당(1932), 증평성당(1936), 제천성당(1940), 야현성당(1945) 등이 차례로 설립되어, 해방 이전 충북지역에는 모두 5개의 본당 성당이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전교가 어렵게 되자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1953년 서울 교구안에 충북 감목대리구를 두기로 하고 해방 전 평양교구를 맡아보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충북지역을 맡게 하였다. 이후 메리놀회의 후원과 전교 활동에 힘입어 1958년 청주 대목구로 독립하게 되었고, 1962년 청주교구로 승격된 이래로 60년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결과 1997년 당시 충북지역 천주교 신자 수는 108,763명, 본당수 52개소, 공소수 69개소 등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 충북지역 천주교 건축문화유산 현황
천주교는 도래 이후 꾸준히 교세를 유지하고 많은 성당을 건축하였으므로 현재 많은 근대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근대기 국내에서 건축된 천주교 성당은 건축형식에 따라 한옥 성당, 초기 고딕양식 성당, 후기 고딕 양식성당의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현재 1970년 이전에 건립된 충북지역 천주교 근대문화유산은 총 12동으로 고딕양식 성당 1동, 후기 고딕양식 성당 5동 등이 현존하고 있다.
한옥 성당은 한국의 전통건축물인 한옥을 기본적 건축형식으로 하고 서양 기독교의 전통적 바실리카식 성당(Basilican Church)의 건축요소를 수용한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시기적으로는 천주교 선교 초기와 개화기 당시 주로 건축되었으며, 충북지역은 사례가 없지만 국내에 전북지역에 화산천주교회와 최근 복원된 되재성당, 강경 북옥성당 등이 현존하고 있다.
초기 고딕양식 성당은 서양 기독교의 전통적 바실리카식 성당의 완성양식으로 평가되는 고딕 성당을 도입한 양식이며, 고딕양식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던 프랑스 출신으로 국내 천주교 초기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들이 주도하였다.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평면과 입면은 고딕 기법을 비교적 충실하게 답습하였으나 구조, 장식 등은 단순화된 기법으로 구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는 순수 고딕양식이라기 보다는 로마네스크 기법이 부분적으로 도입된 절충양식의 성격이 강하였다. 시기적으로는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중반기까지 주로 건축된 형식이다.
후기 고딕양식 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의 건축기법이 더욱 단순화된 양식으로 붉은 벽돌외에 시멘트, 석재가 도입되어 재료 및 구조가 다양화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평면, 구조, 장식, 수직성 등이 매우 단순화되었고 로마네스크, 비잔틴 등 다른 양식과 절충되어 변형되기도 하였다. 내부공간에서는 고딕적 분위기를 거의 찾을 수 없었으며 단지 외관에서만 종탑, 아치형 장식, 박공지붕 등에 의해 표현되었다. 시기적으로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 197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 음성 감곡성당
음성 감곡성당은 일명 장호원성당, 매괴성당으로도 불리는 감곡성당은 충북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출신 가밀로 부이용(R. Camille Bouillon, 임가밀) 신부에 의해 1896년 설립된 후 충북지역 천주교 선교의 시발점이자 중심으로 역할을 하였다.
설립 후 처음에는 소규모 한옥을 예배당 겸 사제관으로 이용하다 1903년 정면 3칸, 측면 10칸 규모의 새로운 한옥성당을 완공하였다. 신도가 점차 늘어나자 부이용 신부는 기존 대지에서 뒤쪽의 언덕에 새로운 대규모 성당을 결정하고 1928년 착공하여 1930년 고딕 양식 성당을 완공하였다.
설계는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1907년 건축, 강원 유형문화재 제69호), 원주 용소막성당(1915년 건축, 강원 유형문화재 제106호)과 인천 답동성당(1937년 건축, 사적 제287호)을 설계한 프랑스 출신의 시잘레(Chizallet) 신부가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시공을 하였는데, 재원과 석재의 부족뿐만 아니라 공사기간 중 심한 장마로 인하여 원래의 설계보다 건물규모가 축소 변경되었다고 한다.
고딕 양식 바실리카식 성당의 장축형 평면구성으로 내부는 현관(Porch), 신랑(Nave), 측랑(Aisle), 수랑(Transept), 제단(Apse), 유보회랑(Ambulatory) 등으로 구성되었다. 구조는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이용한 조적식 구조로 외벽에 일정 간격으로 부축벽(Buttress)을 쌓아 보강하였으며, 지붕과 종탑은 목조트러스 구조를 이용하였다.
전체 규모는 길이 40m, 너비 18.6m, 지붕높이 12.75m, 중앙종탑 높이 36.5m이다. 배치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고 동쪽에 반원형 평면의 제단과 회랑을 배치하였으며, 신랑 상부 천장은 목조로 곡면을 형성하고 기둥 간격에 맞추어 리브(Rib)를 덧댄 첨두형 배럴볼트(Pointed Barrel Vault) 형태이고 최고 높이 10m, 너비 7m이며, 측랑 상부 천장은 높이 6.1m의 평천장이고 너비 3.6m이다.
마감 재료로는 내부 바닥은 목조마루, 내벽 및 천장은 회반죽 플라스터, 지붕은 함석 등의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출입문, 창문 등의 개구부는 첨두형 아치 형태를 이용하고 일부 창은 초보적 수준의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로 장식하였다.
감곡성당은 전기 고딕양식 성당으로 명동성당, 약현성당 등 대표적 전기 고딕양식 성당들에 비해서는 규모, 건축기법 등에서 뒤떨어지지만 충북지역에서는 최초 설립된 천주교 성당이자 유일한 전기 고딕양식 성당의 사례로 매우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충북지역 근대건축문화유산 중에서는 가장 고딕양식 성당에 근접했고 또한 가장 고딕적인 성당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어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있고, 성당측에서도 성당의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보존에 적극적이고 또한 성당을 포함한 주변 일대가 천주교의 대표적 순례지로 적극 활용되고 보존 및 활용 여건은 매우 양호한 상태이다.
■ 음성 감곡성당 사제관
음성성당 사제관은 성당 건물의 제단 우측에 위치해 있다. 사제관은 화강석 석조 건물로 1934년에 완공되었으며, 외관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지만 내부는 그 동안 수차례 보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고 현재는 감곡성당 매괴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조지안 양식(Georgian Style)으로 정면은 현관을 중심으로 대칭형 입면을 구성하고 1층은 회랑, 2층은 발코니 형식으로 구성하였으며, 화강석 조적조 건물로 내부는 기둥이 없이 내력벽에 의해 구성하였고 지하층은 반 지하, 3층은 다락층 형식을 취하고 지붕은 함석 경사지붕으로 도머창과 굴뚝을 설치하였다.
매괴박물관으로 용도변경되면서 외관은 지붕과 창호 등이 개․보수되었지만 화강석 석조 외벽은 원형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내부는 내력벽은 유지한 채 마루 바닥을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로 변경하였고 내부 바닥, 벽체, 천정 등의 마감을 전체적으로 변경하였다.
전체적 개보수를 통해 건축원형 일부는 사라졌지만 매괴박물관으로 사용하면서 성당 측에서 지속적으로 관리 중이므로 건물의 유지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현재 내부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219호로 지정된 예수 성심기 및 성모 성심기 등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매괴박물관은 청주탑동양관과 더불어 충북지역 근대문화유산 중 서양식 주거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존가치가 높으며, 용도변경과 내부 개보수를 통해 일부 건축원형이 훼손되었지만 외관은 거의 그대로 건축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외관 중심의 보존, 관리가 요구된다.
■ 옥천성당
천주교 옥천성당은 1906년 홍병철 루가 신부가 옥천 본당을 설립하였다. 초기에는 한옥을 예배당겸 사제관으로 이용하다 1909년 옥천 죽향리 지역에 정면 2칸, 측면 5칸 규모의 한옥성당을 건축하였다. 점차 교세가 확장되자 1948년 옥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정면 2칸, 측면 4칸 규모의 한옥성당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이후 교세가 더욱 확장되자 1955년 한옥성당의 위쪽 언덕 지역에 벽돌조로 단순화된 고딕 양식에 대규모로 새롭게 건축된 성당이 현재의 성당이다. 현재의 성당은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랄프 드브랑크(Ralph Deblanc, 백수사) 신부에 의해 설계, 공사감독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기적 상황에서 이와 같은 비교적 대규모의 성당 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미국인 사제의 지원 때문으로 추정된다.
1991년 성당 제단 쪽 후면부가 대대적으로 증축되면서 평면 및 내부공간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우선은 수랑(Transept)이 증축되고 제단방향으로 확장되면서 평면이 단순한 장방형에서 라틴 십자형으로 변화되었으며 또한 내부공간에서도 제단 방향의 장축이 명확해지고 신랑, 수랑, 제단 등의 공간적 구분과 구성도 명확해졌다. 전체적으로 바실리카식 성당의 장축형 평면과 공간구성이 증축을 계기로 더욱 발전되고 명확해졌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시멘트 벽돌 조적조로 외관은 시멘트 뿜칠과 페인트 도색에 의해 마감되었지만 뾰족한 종탑, 아치형 창문, 부축벽, 박공지붕, 라틴 십자형 평면형태 등에 의해 단순화된 고딕기법의 성당을 구성하였으며 반면에 내부공간은 기둥이 없는 통칸의 홀 형식으로 평탄한 천장마감에 천장고가 낮아 제단방향의 장축을 제외하고는 고딕적 특성이 미약하다.
천주교 옥천성당은 충북지역 후기 고딕양식 성당의 대표적 사례로 일반적인 붉은 벽돌이 아닌 시멘트 벽돌을 주재료로 시멘트 뿜칠 마감에 의해 대칭적 외관을 구성하고 단순화된 고딕양식 기법을 구사한 점이 특징이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7호로 등록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으므로 건축원형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 음성성당
천주교 음성성당은 1953년 착공되어 1955년에 완공된 성당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장방형 평면을 구성하였으나 1959년 좌측에 수랑(Transept)이 연결, 증축되고 1983년 우측에 제의실이 연결, 증축되면서 라틴 십자형에 가까운 형태의 평면을 구성하게 되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한 조적식 구조와 목조트러스 지붕으로 높고 뾰족한 종탑, 아치형 창문, 측벽의 부축벽, 박공지붕, 라틴 십자형과 유사한 바실리카식 평면구성 등에 의해 단순화된 고딕기법을 구사하며 후기 고딕양식 성당을 구성하였다.
내부는 바닥이 본래 목조마루 바닥이었으나 후에 인조석물갈기 바닥으로 변경되었으며, 내부공간은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열주 기둥이 없는 통칸의 홀 형식으로 평탄한 천장마감에 천장고가 낮아 제단방향의 장축을 제외하고는 고딕적 특성이 매우 미약하다.
외관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정면으로 입면구성에서 다른 부분에 비해 비례와 조화가 부족할 정도로 과도하게 높은 종탑을 중심으로 대칭형 입면을 구성하였으며, 각각 박공지붕과 아치형 개구부에 의해 구성된 주출입구는 세 개를 돌출시켜 형성하고 중앙의 주출입구를 가장 크게 형성하였다.
천주교 음성성당은 붉은 벽돌 조적조를 기본형식으로 단순화된 고딕양식 기법을 구사했던 충북지역 후기 고딕양식 성당의 전형적인 사례로, 전체적인 건축형식과 기법은 주재료만 다를 뿐이지 천주교 옥천성당과 유사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와 유사한 건축형식의 후기 고딕양식 성당이 충북지역 곳곳에 다수 건축되었으며, 음성성당이 그들의 건축적 모델 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증평성당
천주교 증평성당은 본래 음성감곡성당 소속이었다가 1920년 분리되어 본당으로 설립된 후 1936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전 후 처음에는 초가집 성당을 신축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1955년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미카엘 신부에 의해 현재의 성당이 메리놀 병원(1987년 철거)과 함께 착공되어 1956년 완공되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한 조적식 구조와 목조트러스 지붕으로 높고 뾰족한 종탑, 아치형 창문, 측벽의 부축벽, 박공지붕, 단순한 바실리카식 평면구성 등에 의해 단순화된 고딕기법을 구사하며 후기 고딕양식 성당을 구성하였다.
내부는 매우 단순한 장방형 평면을 구성하였으며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열주 기둥이나 공간적 구분이 없는 통칸의 홀 형식으로 평탄한 천장마감에 천장고가 낮아 제단방향으로 향하는 장축을 제외하고는 고딕적 특성이 매우 미약하다.
외관에서 정면은 각각 박공지붕과 아치형 개구부에 의해 구성된 주출입구는 세 개를 돌출시켜 형성하고 중앙의 주출입구를 가장 크게 형성하였으며, 종탑을 높고 과도하게 구성하였지만 천주교 옥천성당이나 음성성당처럼 정면 중앙이 아닌 좌측에 치우쳐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천주교 증평성당은 종탑이 정면 중앙이 아닌 특이하게 좌측에 치우쳐 배치된 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 건축형식과 기법이 거의 동시기에 건축된 천주교 음성성당과 매우 유사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충북지역 곳곳에 건축된 붉은 벽돌 조적식 구조에 의한 후기 고딕양식 성당 중 음성성당과 더불어 선구적 사례이다.
■ 진천성당
천주교 진천성당은 본래 1915년 음성감곡성당의 공소로 설립된 후 청주본당에 속하였다가 1956년 청주 본당에서 분리하여 진천본당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한 조적식 구조와 목조트러스 지붕으로 높고 뾰족한 종탑, 아치형 창문, 부축벽, 박공지붕, 라틴 십자형 바실리카식 평면구성 등에 의해 단순화된 고딕기법을 구사하며 후기 고딕양식 성당을 구성하였다.
내부는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열주 기둥이 없는 통칸의 단일 홀 형식이지만 중앙에서 양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형성한 천장면 마감이 특이하며 전체적으로 천장고가 낮아 제단방향으로 향하는 장축을 제외하고는 고딕적 특성이 미약하다.
외관에서 정면은 각각 박공지붕과 아치형 개구부에 의해 구성된 주출입구는 세 개를 돌출시켜 형성하고 중앙의 주출입구를 가장 크게 형성하였으며, 뾰족한 종탑을 천주교 증평성당처럼 정면 중앙이 아닌 좌측에 치우치고 또한 정면이 아닌 뒤쪽에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천주교 진천성당은 전반적 건축형식과 기법이 거의 동시기에 건축된 천주교 음성성당과 매우 유사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충북지역 곳곳에 건축된 붉은 벽돌 조적식 구조에 의한 후기 고딕양식 성당으로 음성성당, 증평성당과 더불어 선구적 사례이다.
■ 괴산성당
천주교 괴산성당은 1957년부터 대지를 구입하여 1958년 현재의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초기에는 주출입구 부분만 외부로 돌출된 채 단순한 장방형 평면을 구성하였으나 1962년 종탑이 우측에 증축되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한 조적식 구조와 목조트러스 지붕으로 높은 종탑, 아치형 창문, 외벽의 부축벽, 박공지붕, 단순한 바실리카식 평면구성 등에 의해 단순화된 고딕기법을 구사하며 후기 고딕양식 성당을 구성하였다.
내부는 후기 고딕양식 성당의 일반적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매우 단순한 장방형 평면을 구성하고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열주 기둥이나 공간적 구분이 없는 통칸의 홀 형식으로 평탄한 천장마감에 천장고가 낮아 제단방향으로 향하는 장축을 제외하고는 고딕적 특성이 매우 미약하다.
외관에서 정면은 박공지붕과 아치형 개구부에 의해 구성된 주출입구를 음성성당, 증평성당, 진천성당 등 일반적인 후기 고딕양식 성당처럼 세 개를 형성하지 않고 중앙부 한 개만 돌출시켜 형성한 점이 다소 특이하며 후에 증축된 종탑의 위치와 형태도 일반적 후기 고딕양식 성당과 다소 다르다.
천주교 괴산성당은 전반적 건축형식과 기법은 충북지역 후기 고딕양식 성당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정면 주출입구, 종탑 등은 일반적 건축형식과는 다소 다르게 구성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충북지역 곳곳에 건축된 붉은 벽돌 조적식 구조에 의한 후기 고딕양식 성당으로 음성성당, 증평성당, 진천성당 등과
② 기독교
⊡ 충북지역 기독교 수용과 확산
개신교는 초기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구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 국한되어 선교의 힘을 집중하였으나, 1900년경 경기도 죽산군 둥벙리 교회에서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청주군 신대리에 사는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마을에 전도하여 1901년 충북지역 최초의 교회가 성립하였다.
그뒤 서울에 주재하며 미노아학당을 운영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밀러(F. S. Miller) 목사가 청주 선교에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신대교회가 생성되어 교회로 모인다는 소식에 접하여 본격적으로 청주를 목표로 자주 내려와 전도하며 준비하던 중, 1904년 김흥경 조사와 함게 설립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시작으로 1905년 밀러목사가 청주에 안착하여 미 북장로회 청주선교부를 설립하고 선교함으로써 본격적인 충북지역 개신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 감리교 역시 1900년 전후 충북지역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1902년 이전에 음성지역에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진천, 청주, 보은지역에도 감리교 신자가 생겨났다. 특히 서원보 선교사의 순회 활동으로 감리교 신자가 증가하였으며 교회수도 증가하였다. 1903년 충주 유봉교회, 1904년 청주 읍교회(현 청주 제일교회)와 제천 백운교회, 1906년 음성 감리교회와 충주 목계교회, 1907년 제천 제일교회, 1910년 영동 양산교회, 1913년 단양 감리교회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그런데 1909년 선교협정에 의해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의 남부지역은 북 장로회 구역이 되고, 이북지역은 미 감리교 구역으로 나눠졌다. 그에 따라 장로교로 출발한 충주 제일교회, 제천 제일교회 등은 감리교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충북지역은 다른 지역의 경우 단일 교단의 선교부 책임 하에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두 교파의 구역으로 나뉘어, 청주를 중심으로 이북은 감리교가, 이남은 장로교가 구역을 정하였다. 그 때문에 충북 북부지방의 감리교는 단일 구역으로 묶이지 못한 채 수원이나 제천 선교구역으로 편입되고, 청주 선교부는 북 장로회 여러 선교부 중에서 가장 열세한 선교부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나 병원에 대한 선교부의 지원도 약했다. 이것이 충북지역 근대종교역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당시 충북지역 장로교회는 42개나 되었으며, 영국인 1명과 미국인 3명을 비롯한 51명의 목사가 있었다. 신도수는 1,820명에 이르렀다. 반면에 주로 충북 북부지역에 분포해 있었던 감리교회는 19개 있었으며 30명의 목사가 활동하였다. 신도수는 1,668명으로, 1개 교회당 평균 88명의 신도가 있었다. 이는 1개 장로교회 평균 43명보다 2배나 많은 숫자이다. 그밖에 7일 안식교회가 2개 교회에 55명의 신자가 있었고, 동아기독교도 1개 교회에 9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렇게 놀라운 성장을 하던 개신교는 일제 말기에 극심한 탄압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해방 이후 다시 개신교 교세가 확대되어,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감리교와 장로교 등이 여러 교파로 갈라지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장로교는 1951년부터 분열되어 1951년에 고려파, 1953년 조신파, 1959년 총회의 합동파 등이 분파되었다. 더욱이 선교지역 분할정책법의 효용이 사라져 각종의 교파형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리스도교회(1945), 침례교(1952), 오순절교(1955) 등이 들어오고 지역에 따라서는 감리교, 성결교 등이 상호 침투하여 난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뒤 개신교는 놀라운 교세 확장이 이루어졌다. 1992년 통계에 의하면, 충북지역내 장로교 549개 교회, 감리교 273개 교회, 성결교 98개 교회, 침례교 101교회, 오순절교 114개 교회 등이 있었다. 그중 임대교회가 약 70%에 달하였다.
⊡ 충북지역 기독교 건축문화유산 현황
■ 청주제일교회
1901년 충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신대교회가 오천보 등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후, 당시까지 국내 개신교 선교지역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청주 중심의 충북지역이 새로운 선교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청주를 중심으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의 선교사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선교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적극적 활동을 한 인물이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밀러(F.S.Miller, 민노아) 목사였다. 그는 1901년부터 왕래하던 중 자생적 교회로 발생되어 있던 신대교회, 괴산읍교회(1903년 설립, 현재 괴산제일교회)를 방문하여 교회의 체계를 세우는 한편, 청주 지역 선교에 주력하였다.
밀러 목사는 마침내 1904년 미국 북장로교의 청주 선교부를 설치하고 거점교회로서 청주읍성 남문 바깥쪽 지역 초가를 구입하여 청주읍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청주읍교회가 오늘날 청주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1905년 현재의 위치 당시 청주 진영 터를 매입하여 1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914년 200석 규모의 단층 함석집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 현존하는 500석 규모의 교회 건물 건축을 시작하였다.
현재의 교회 건물은 1939년 착공하여 1940년 완공된 건물로 붉은 벽돌의 조적조, 2층 규모이며 공사 도중 일제 당국이 종탑 높이를 원래의 설계보다 9척이나 낮게 시공할 것을 강요하여 설계변경을 하는 등 온갖 방해와 간섭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49년부터 건물의 뒤쪽 장축방향으로 3칸 규모를 증축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1년 완공하여 현재에 이른다.
1층에는 소예배당, 사무실 등 부속실들이 위치하고 주기능인 예배당은 2층에 위치하였으므로 전면 중앙에 1층 출입구를 형성하고 양측에 남녀 분리를 위한 2개의 2층 진입계단을 형성하였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마감하고 1층은 장방형의 창문을 예배당인 2층은 첨두형 아치 형태의 창문을 각각 형성하였으며, 1층 전면 중앙에는 비교적 높지 않은 종탑을 세웠다. 내부 바닥은 목조마루 바닥이고 천장은 합판 위에 페인트로 마감하였다.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첨두형 아치 형태의 창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외벽에 부축벽을 형성하고 정면 중앙에 뾰족탑 형식의 종탑을 세우고 박공형식의 지붕을 구성하는 등 건축형태나 외관에서는 단순화된 고딕 양식과 기법을 도입하였지만, 내부공간이나 평면구성은 고딕 양식과 다소 거리가 있다.
예배당 평면은 장방형이지만 후진(Apse)이나 수랑(Transept)을 형성하지 않고 신랑(Nave)과 측랑(Aisle)의 구분이 없는 통칸 구조의 단일 홀 형식이며, 열주와 고측창도 형성하지 않고 내부 천장도 신랑과 측랑이 동일한 높이로 높지 않는 등 평면구성이나 공간구성에서 고딕적인 성격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청주제일 교회는 청주뿐만 아니라 충북 지역의 개신교 선교활동의 시발점이자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교회라는 역사적, 지역적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외관은 고딕 양식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내부는 고딕에서 벗어나 수평성이 강한 보편적 공간을 형성하는 등의 건축적 특성과 가치도 지닌 건물이다. 따라서 문화재로서 지정 또는 등록을 통해 그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건축원형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 탑동양관
청주 탑동양관은 1904년 미국 북장로교의 청주 선교부를 설치하고 청주 및 근교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 의료 활동을 선구적으로 전개했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밀러(F.S.Miller, 민노아) 목사가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을 위해 서양식 기법에 의해 건축했던 주택, 병원 등 총 6동의 양관 건물이다.
청주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우암산 끝자락 탑동 언덕에 1904년부터 대지를 매입하고 1906년 4호관을 최초 건립한 이후 최후로 2호관을 건립한 1932년까지 6동의 양관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1, 3, 5, 6호관은 두 건물 사이의 시기에 건축되었지만, 건축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최초로 건립된 4호관(현재 포사이드 기념관)은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건립되었으며, 연면적 511㎡,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한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지하실 부분의 외벽을 화강석으로 처리하였고, 지상층은 붉은 벽돌 및 흙갈색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사용하여 한옥의 지붕형식과 서구의 지붕형식이 혼합된 절충식 지붕형태를 구성하였다.
구조는 외벽은 흑갈색 벽돌을 이용한 조적식이지만, 내부는 조적식과 목구조가 함께 사용된 복합식 구조였으며, 내부 바닥은 장선바닥판 위에 쪽마루를 깔았다. 내벽과 천장은 졸대 위 플라스터 마감을 하였고, 최상층의 천장은 지붕구조가 그대로 노출되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설비 시스템은 서양식 설비를 선구적으로 도입하였으며 난방방식은 전통적인 온돌방 형식이 아니라 지하실에 보일러를 설치하고 증기난방과 벽난로 방식을 적용하였고, 부엌은 입식부엌으로 수도를 설치하였고, 위생설비로는 내부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외부에 정화조를 설치하였다.
4호관 건축 이후 주택을 비롯하여 병원, 성경학교 등의 용도로 1932년까지 5동의 서양식 양관이 건립되었으며, 해발 64m의 야산에 6동의 건물이 동서로 길게 산마루를 따라 배치되었다. 건축형식은 대부분 4호관과 유사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최초의 절충양식에서 점차 전통적 양식이 사라지고 점차 서양양식을 지향하여 서양식과 건축기법이 점차 강하게 표현되었다.
청주 탑동양관은 근대초기 서양식 종교와 선교사의 유입과 함께 도입된 서양건축 양식이 전통건축 양식에 수용되어 절충양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건축된 6동의 건물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대표적 근대건축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3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청주 탑동양관은 4동이 일신여자 중고등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6동 대부분이 당시 활동하였던 선교사들의 기념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③ 성공회
⊡ 충북지역 성공회 수용과 확산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가 1887년 코프(C. J. Corfe)를 한국 선교 책임자로 선임하여 주교로 서품한 뒤 1890년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한구 성공회가 시작되었다. 서울, 인천, 강화지역을 중심으로 주근거지로 삼아 선교활동을 하던 성공회는 단아덕 신부가 1904년에 제2대 교주로 부임한 뒤부터, 수원을 기점으로 하는 정책에 따라 점차 선교영역을 부산, 평양, 진남포, 의주, 수원, 진천 등지로 확장하였다.
단아덕 신부는 서울 정동교회(현 서울 주교좌 성당) 주임사제였던 김우일(金禹壹, Wilfreed N. Gurney) 신부로 하여금 1905년부터 진천지역 전도에 나서게 하였다. 그 결과 1907년에 진천지역 70여개 마을에 성공회가 전파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1908년 1월 3일 진천에 성공회 성당이 축성되었다.
특히 성공회는 1908년에 전국을 서울, 강화, 수원, 진천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그 지역 관할 사제를 두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그에 따라 진천 성공회 성당은 충북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성공회가 빠른 속도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진천을 중심으로 음성, 청주, 괴산, 충주를 비롯해 이웃한 충남의 목천, 경기도의 안성, 직산, 여주, 심지어 강원도 원주까지 교세를 확대하여 각 지방에 기도소를 설립하고 그 지역 유력인사들을 전도하였다. 선교 외에 의료 및 교육⋅출판사업을 통해 서구문명의 전파에도 일조하였다.
진천 성공회는 1908년에 진명학교(현 삼수초등학교)를 건립하여 진천지역의 근대교육의 효시를 열었으며, 1909년에는 애인병원을 설립하여 서양의술을 베풀었다. 강화에서 활동하던 로스(A. F. Raws) 선교사 부부가 진천에 와서 병원을 세웠다. 병원은 예배당과 같은 크기의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서울과 제물포에 이어 성공회의 세 번째 의료선교사업이었다. 또한 진천군 이월면 송현리에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충남 병천과 천안 부대동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이후 3․1운동의 기반을 닦기도 하였다.
진천에 전파된 성공회는 청주지역에도 확대되어, 1907년 동산리교회와 1908년 묵방리의 묵방교회가 설립되었다. 청주시내에는 다른 지역보다 늦은 1910년대 후반에 들어와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1916년에 이미 청주⋅묵방⋅동산⋅가덕 네 곳에서 선교활동이 이루어지었다. 특히 진천 성공회 소속 영국 출신 신부인 류신덕(G. E. Hewleet, 1862-1930) 신부와 이도암(A. W. Lee, 1893-1950) 신부가 청주읍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또한 3대 주교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 1862-1930) 주교의 지대한 관심으로 1920년대 초반 청주읍에 상당수의 교인이 있었다. 1927년 현재 성공회 성당은 공소를 포함해 11개소나 되었으며, 영국인 신부 2명을 비롯해 12명의 신부가 활동하였고 1,110명의 신자가 있었다.
특히 서울 성 니콜라 기숙사 출신으로 경성의전을 졸업한 오기택이 1921년에 청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는데, 1923년에 병원 옆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 청주 수동교회였다. 청주 수동교회는 1935년에 진천 성공회 교회에 있던 이도암 신부가 사제관으로 이사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고, 1935년에 현재의 한옥식 수동교회 성당이 축성되었다. 그에 따라 청주 수동교회는 충북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 이전까지 충북지역 성공회는 6개 성당, 5개 기도소가 성립하여 운영되었으나, 일제 말기를 거치면서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유지하면서 종교를 크게 탄압하였는데, 그에 따라 성공회의 교육 사업은 물론 의료사업도 중단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진천 애인병원도 1941년에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에도 교세가 크게 위축되어, 성공회는 오늘날 아주 작은 교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충북지역 성공회 건축문화유산 현황
성공회는 선교 초기에 인천, 서울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며 성공회 성당 건축과 더불어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라는 명칭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의료활동을 위해 병원도 설립하였다. 그 결과 근대기 성공회 건축물은 현재 주로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근대기 국내에서 건축된 성공회성당은 건축형식에 따라 한옥 성당, 서양식 성당, 절충형 성당의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충북지역 성공회 근대건축문화유산은 총 5동으로 한옥성당이 3동, 절충식 성당이 2동 현존하고 있다.
한옥 성당은 전통문화에 대한 토착화를 추구했던 성공회의 선교이념에 따라 발생된 건축형식으로 한국의 전통건축물인 한옥을 기본적 건축형식으로 하고 서양 기독교의 전통적 바실리카식 성당(Bascilican Church)의 건축요소를 수용한 매우 독특한 형식이다. 시기적으로는 선교 초기부터 일제강점기 중반기까지 동안 지역적으로는 충청도 등 주로 지방에서 건축된 형식이기도 하다.
서양식 성당은 영국 선교본부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건축된 형식으로 서양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성당 양식 중에서도 주로 영국에서 선호되었던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을 기본형식으로 한 건축형식이다. 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조적식 구조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에, 지역적으로는 인천, 서울, 부산 등 당시 대도시에서 주로 건축된 형식이기도 하다. 충북지역에는 현존 사례가 없다.
절충식 성당은 전통적 한옥 성당에서 근대적 건축양식의 성당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전환기적 양식으로 주로 한국 전통식, 일본식, 서양식 기법이 혼합된 양식이다. 주로 전통식, 일본식, 서양식 목조기법이 혼합된 목구조를 형성하고 아치형 창문, 종탑, 박공지붕 등의 바실리카식 성당의 기법을 도입하였다
■ 성공회 진천성당
1908년 건축된 최초의 성공회 진천성당은 1920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1923년 10월 현재의 규모로 다시 지어졌으며, 1976년 도시계획 도로 개설로 성당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언덕 경사지의 고단 지형에 건축된 청주 성공회성당과 달리 읍내 중심부의 평지지형에 건축되었으며, 본래는 남북축을 주축으로 배치되고 남쪽에 주출입구를 형성하였으나, 1976년 이건되면서 동서축을 주축으로 배치되고 동쪽에 주출입구를 형성하였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전통적 한옥 건물에 서양의 바실리카식(Bascilican) 평면구성을 적용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8칸의 장방형 평면으로 장변이 아닌 단변 방향에서 진입을 하도록 하고 전면과 출입구를 형성하였으며, 내부에는 중앙에 2열로 고주를 세우고 고주 양쪽에 퇴보를 걸어 측랑을 설치하여 三廊式의 성당 내부를 구성하였다.
건물구조는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대들보와 종보 위에 사다리꼴의 대공이 받치는 이고주오량 가구형식이며, 공포가 없는 민도리 형식으로 겹처마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벽체는 외벽을 벽돌과 시멘트 모르타르로, 내벽을 석회로 각각 마감하였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목재마루 바닥이다.
대한성공회 진천성당은 전통 한옥 목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서양 바실리카식 교회의 공간구조를 도입하였던 한옥성당으로 같은 교구였던 청주 성공회 성당(1935년 건립)의 직접적 모델이 되었으며, 건축형식은 근대초기 서양건축과 한국건축이 융화되어 나타난 절충형식으로서 동서 건축의 융합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사적 의의를 지닌 건물이다.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8호로 등록되었다.
■ 성공회 청주성당
충북지역에서 성공회 선교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던 진천 교구에 속해 있던 청주 지역은, 1922년 당시 진천 교구 관할사제였던 영국인 선교사 휼렛(George Ernest Hewlett, 유신덕) 신부가 청주 대성동에 거주하고 있던 윤달용 씨(1930년 사제가 됨) 집에서 정기적으로 가졌던 가정예배에서 성공회가 시작되었다. 청주지역은 이미 1916년에 청주․묵방․동산․가덕 네 곳에서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진천에 있던 휴렛(G. E. Hewleet 류신덕) 신부와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 주교의 지대한 관심으로 1920년대 초반 청주읍에 상당수의 교인을 얻게 되었다. 더욱이 1920년대 이후 청주가 신도시 계획에 의거 새롭게 개발되고 충북의 행정․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충북 지역 성공회의 중심축을 진천으로부터 청주로 옮기는 작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조치원-청주간의 충북선이 개설되고 1928년에 충주까지 충북선이 연장되면서 청주가 급속도로 성장하자 이러한 계획은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마침내 1924년 청주교회당 건축대지를 매입하고 건축을 위한 기금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1930년 제4대 주교가 된 구세실(C. Cooper) 주교에 의해 청주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1933년 7월 사제관 2동이 건축되어 4개월간이나 진천에 거주하면서 청주교회를 관할하던 이도암 신부가 7월 31일 청주 교회 사제관으로 이사하였다. 1935년 9월 24일에는 구세실 주교 집전으로 현재의 청주수동교회당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새로 건축된 성당은 ‘성그레고리오 성당’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것은 영국 버밍험에 있는 ‘세인트 그레고리오 교회’ 교인들이 청주교회 건축의 기금 마련에 상당부분 기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라 한다.
우암산록 언덕 위에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 교회당 건물은 전면 4칸, 측면 8칸 총 32칸으로 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조선시대 단층 한옥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토착적 기독교 문화의 향취를 담고 있는 우람한 청주수동성당은 1985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성공회성당은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우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가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시내 조망이 가능하고 또한 시내에서 성당이 잘 보일 수 있었다. 이는 종교적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입지에서 고단의 개념이 반영된 결과이다. 고단에 위치한 만큼 진입로부터 전통사찰과 같은 개념으로 계획되었다. 즉 굴곡진 경사로를 올라가면서 주변 공간의 변화를 느끼고 성당 건물의 정면에 이르도록 배치되었다.
성당건물은 한국 선교 초기부터 토착화를 시도한 성공회의 의도에 따라 진천성당, 음성성당 등 일반적 성공회성당과 마찬가지로 한옥성당 형식으로 건축되었으며 기본적 건축형식은 정면 4칸, 측면 8칸의 규모, 2고주9량의 가구, 공포가 생략된 민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방형 초석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대들보와 종보 위에 사다리꼴의 대공이 중도리를 받치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다. 전통적 형식의 한옥 목구조 건물에 서양의 바실리카식(Bascilican) 평면구성을 적용하고 종교적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장변이 아닌 남쪽의 단변 방향에서 진입을 하도록 하고 정면과 주출입구를 형성하였으며, 건물이 남북축을 주축으로 하고 제단이 북측에 위치되었다.
내부는 중앙에 2열로 고주를 세우고 그 사이를 신랑(Nave)으로 이용하고 고주 양쪽에 퇴보를 걸고 퇴칸을 형성하여 측랑(Aisle)으로 이용함으로서 삼랑식의 성당 내부를 구성하고 있다. 내부 바닥은 목재마루로 깔고 외벽은 하부를 적벽돌로 상부를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고 내벽은 석회로 마감하였으며, 창문은 상부를 아치형으로 장식하고 출입문의 상부는 네모의 교살창으로 하였다.
청주 성공회 성당은 전통 한옥 목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서양 바실리카식 교회의 공간구조를 도입하였던 한옥성당으로 대한성공회 진천성당과 유사한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이는 한옥 성당이지만 근대 초기 서양건축과 한국건축이 융화되어 나타난 절충형식으로 동․서 건축의 융합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사적 의의를 지닌 건물로 평가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 성공회 음성성당
1910년 충북지역에서는 진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음성지역에서 성공회 전도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성직자가 없이 지내다 1915년 5월 김희준 부제가 부임한 후 선교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는 진천과 함께 충북지역 선교의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 1923년 읍내리에 약 1,00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였으며 1928년에는 두 칸 규모의 교사를 지어 신명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읍성갑부였던 신도가 주택을 희사하여 그 주택의 부재를 가져와 1923년 건축된 현재 성당건물은 한국 선교 초기부터 토착화를 시도한 성공회의 의도에 따라 진천성당, 청주성당 등 일반적 성공회성당과 마찬가지로 한옥성당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5칸, 총 15칸 규모로 서쪽에 제단이 형성되고 동쪽에 각각 남녀를 위한 출입구 두 개가 형성되었다. 현재 주출입구는 후에 벽돌조에 의해 반 칸 규모로 증축 부가된 것이다. 지붕은 제단 쪽은 합각면을 지닌 팔작지붕이나 주출입구 쪽은 박공면을 지닌 맞배지붕으로 두 지붕형식이 복합된 독특한 형식이며 본래 전통 기와로 마감되었으나 후에 현재의 시멘트 기와로 교체, 보수되었다.
낮은 기단 위에서 외벽은 하부는 반방화벽이고 상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었으며 기둥 사이의 간벽에 규칙적으로 형성된 목제 창문은 서양식 여닫이 창이다. 내부 바닥은 목조마루이고 천장은 보, 도리, 서까래 등이 노출된 연등천장 형식이다.
내부는 신랑(Nave)을 중심으로 양측의 측랑(Aisle)에 의해 3랑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다른 일반적 한옥형 성당에 비해 신랑의 너비, 즉 기둥간격(span)을 비교적 넓게 형성한 점이 특징적이다.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3랑식 평면내에서 서쪽에 제단을 형성하고 제단 양쪽은 제의실과 성구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성공회 음성성당은 한옥성당 중에서도 내부공간에서 제단(Apse)을 서양 바실리카식 교회(Basilican Church)처럼 안쪽으로 파서 공간적 집중성을 높게 형성하고 내부의 3랑식 공간 구성에서 중앙 신랑(Nave)의 너비, 즉 기둥간격(span)을 다른 한옥형 교회에 비해 넓게 형성한 점이 특징이다.
현재 보존상태는 외관에서 전면 현관부가 증축되고 지붕이 전통기와에서 시멘트기와로 교체되고 외벽이 페인트로 도색되는 등의 변형이 발생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노후화가 진행된 상태이다.
반면에 내부는 전체적으로 한옥교회 특유의 공간적 특성과 분위기를 유지한 채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현재까지 교회로 지속적으로 활용, 관리되며 개․보수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노후화 상태가 진행되어 개보수 및 관리보존 대책이 필요한 상태이다.
■ 성공회 충주성당
충주지역은 당시 진천교구 관할사제였던 영국인 선교사 유신덕(George Ernest Hewlett) 신부에 의해 1924년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931년 8월 성당을 축성하였다. 기본적인 건축형식은 청주, 진천, 음성의 한옥형식 성공회성당과 달리 절충식 목조 성당이었다.
정면 3칸, 측면 6칸 규모의 단순한 장방형 평면으로 동서축을 주축으로 배치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주축을 중심으로 대칭형 평면과 형태를 구성하였다. 서쪽 정면에 각각 남녀를 위한 주출입구 2개소를 형성하고 동쪽에 제단을 배치하였다.
외관은 정면쪽에 높지 않은 뾰족한 종탑이 세워졌으며 지붕은 전체적으로 함석으로 마감된 박공지붕 형식이다. 외벽은 하단부는 시멘트 모르타르 뿜칠로 마감하고 상부는 첨두아치(Pointed Arch) 형태 목제 여닫이 창문을 설치하고 창문 사이의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칸 구조로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었으며 예배실 바닥은 목조 마루바닥이고 천장고는 약 3.3m이다.
1931년 건축 당시는 대부분인 논과 밭, 초가였던 주변 상황과 비교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매우 크고 종탑, 박공지붕, 아치형 창 등 서양식 건축기법과 형태 등에 의해 매우 주목을 받는 건축물이었다.
대한성공회 충주성당은 청주, 진천, 음성 등 한옥형식의 성당성당과 달리 서양식 목조, 함석박공지붕, 뾰족한 종탑, 첨두형 아치 창문 등 서양식 건축기법과 양식에 의해 건축되었다는 점이 주된 특징이며, 후에 음성 매일성당이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1975년 현재의 새로운 성당이 축성된 후 1931년 건축된 원래의 성당은 주일학교로 활용되다 1990년 이후 창고 등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현재는 전체적으로 노후화되어 보존 및 관리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이다. 현재 성당 측에서는 건물 노후화, 관리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철거를 계획하고 있어 보존대책의 수립이 요구된다.
■ 성공회 매일성당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에 위치한 성공회 매일성당은 삼성성당으로도 지칭되는 성당으로 1938년 축성되었다. 기본적 건축형식은 1931년 건축된 대한성공회 충주성당과 유사하다. 정면은 남서쪽에 제단은 북동쪽에 각각 형성되었으며, 장방형의 예배공간을 중심으로 현관 부분과 제단 부분이 각각 장축방향으로 돌출되었다.
외관은 지붕은 함석으로 마감되고 현관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박공지붕 형태이며 외벽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고 목재 기둥에 의해 분절된 4칸의 벽면마다 아치형 목제 여닫이 창문을 설치하였다. 내부는 바닥은 목조마루 바닥이고 천장은 무고주오량 형식의 지붕구조와 보, 도리, 서까래 등이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정 형식이다.
매일성당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정면 현관 부분이다. 현관 부분은 다른 부분의 박공지붕과 달리 우진각 지붕을 형성하고 상부에 사각형 평면의 종탑을 세우고 종탑 지붕은 사각형 평면과 일치되는 않는 육각뿔 형태로 형성하고 외부에 면하는 주출입구는 한 개이지만 내부 출입구는 각각 남녀를 위해 2개로 형성하는 등 여러 가지 독특한 기법을 구사하였다.
매일성당이 진천 광혜원성당으로 흡수된 후 성당이 사용되지 않고 오랜 기간 그대로 방치된 결과, 현재는 건물이 건축원형의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로 전체적으로 노후화, 폐허화되었다.
④ 구세군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부흥사 월리암 부드(Willam Booth)에 의해 1865년에 창설된 신앙공동체로서, 1878년에 ‘구세군(救世軍, Salvation)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하나의 기독교 교단을 이루어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는 1908년 10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구세군은 감리교와 장로교와는 달리 주로 중소도시와 시골을 중심으로 교회 영문을 건립하고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6년에 구세군 교회는 전국에 68개에 이르렀으며, 교인도 4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구세군이 충북지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11년에 충북 영동에 영문을 세우고 선교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14년에는 영동지방 지방장으로 설보덕(Bramwll Sylvester)이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엔 첫 한국인 담임사관으로 김병규가 임명되어 활발한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었다. 그 결과 구세군 영문은 영동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심천영문, 내촌영문, 양정영문, 용산영문, 가동영문, 영강영문, 신흥영문 등이 설립되었다. 1927년 현재 구세군 포교소는 7개소로, 영국인 1명을 비롯한 12명의 사관과 277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영동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영동에는 구세군 병원도 건립⋅운영되었다. 영동 구세병원은 구세군 한국 전래 2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어, 1934년에 영동읍 계산리 야산 밑에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착공되어 1936년에 부분 준공되었다. 1942년에 완공되어 종합병원으로 개원한 영동 구세병원은 근대 의료시설이 낙후한 영동지역의 의료 혜택을 베풀었으나, 구세군이 일본의 2차 대전에 협조하지 않아 강제 폐쇄됨에 따라 구세병원 역시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구세군은 영동지역을 벗어나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특히 구세군이 해방 이후에는 영동지역이 대전을 본영으로 한 충청지역에 속하게 되어 점점 그 위상이 낮아지게 되었다. 청주지역의 경우에도 1938년에 주로 일본인들이 참석하는 영문이 청주시 서운동에 설립되었으나, 1942년에 폐쇄되었다.
구세군은 일제시대에 영동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으나, 해방 이후 크게 위축되어 교세가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구세군 건축문화유산은 한 건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구세군이 다른 서양종교 처럼 거대한 성당 건축물을 축조하지 않은 점, 부족한 재원, 해방 이후 교세 위축에 따른 건축물 폐기 등이다.
5) 산업 문화유산
산업 관련 문화유산은 개항 이후 산업 발전과정에서 남겨진 유산으로 산업 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건조물, 기념비 등을 조사하였다. 조사된 것은 모두 26건인데, <표 15>와 같다.
<표 15> 충북지역 근현대 산업 문화유산 목록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조선운송창고주식회사 |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2가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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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삼창토건 |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3가 | 1942 | 일제하 경제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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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한국도자기 건물 |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 청주 최초 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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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충북상공장려관 |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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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문화재 |
5 | 초정약수공장 구건물 |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 일제하 | 초정에 남아 있는 일제시대 유일의 공장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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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미원엽연초생산조합 | 청원군 미원면 미원리 | 1913 | 충북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엽연초생산조합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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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진천연초생산조합 창고 |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 ? | 일제시대 대표적인 창고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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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진천농협지소 |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 | ? | 일제시대 진천금융조합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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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덕산양조장 |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 1930 | 충북지역 대표적인 일제시대 양조장 건물 | 등록문화재 |
10 | 충주비료공장 製粒塔 | 충주시 목행동 | 1958 | 한국 근대화의 중요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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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황색연초도입 20주년기념비 | 충주시 용산동 | 1936 | 충주 엽연초생산 기념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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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한일은행 충주지점 | 충주시 성내동 | 1939 | 일제 無盡會社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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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호암지 수리조합장 사업성공기념비 | 충주시 문화동 | 1933 | 호암지 축조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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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호암지위령묘원 | 충주시 호암동 | 1933 | 호암지 축조 관련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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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제천농지개량조합 | 제천시 모산동 | 1914 | 의림지 경영과 깊은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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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제천엽연초생산조합 사옥 | 제천시 명동 | 1918 | 중부내륙지방 엽연초 생산의 전초기지 | 등록문화재 |
17 | 제천엽연초 수납취급소 | 제천시 명동 | 1943 | 제천지역 엽연초 수납 취급 | 등록문화재 |
18 |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 제천시 화산2동 | 1941 | 일제시대 유일의 석조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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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조흥은행 제천지점 | 제천시 명동 | 1942 | 제천 최고의 은행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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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금성면 양화리 폐광산 |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 | 1950년대 | 6.25직후 30억 투자. 3층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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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주)아시아시멘트 제천공장 |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 | 1966 | 제천지역 시멘트산업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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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영춘담배건조실 | 단양군 영춘면 용진 |
| 1950년대 담배건조실로 단양에서 가장 오래 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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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칠성수력발전소 |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 1957 | 국내 최초로 우리 기술로 계획, 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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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청천농협창고 |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 1958 | 미제 철근 사용, 철근아연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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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엽연초생산협동조합 |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 1937 | 1층 목조, 도내 두 번째 연초조합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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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황간농협창고 |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 | 일제하 | 한국전쟁 때 총알 자국 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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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 15>와 같은 산업 관련 문화유산중 가장 많은 분야는 연초와 관련된 것들이다. 산업 문화유산 26건 중 7건이 연초 관련 건조물과 기념비인데, 1913년에 신축된 미원엽연초생산조합을 비롯해 엽연초생산조합 건물이 가장 많은 3건, 연초 창고 1건, 1936년에 충주 용산동에 세운 황색연초도입 20주년 기념비 1건, 담배건조실 1건 등이다.
이렇듯 충북지역에 연초 관련 유산이 많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10년을 전후 연초 제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담배 원료인 황색종 잎담배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러자 조선총독부 전매국은 황색종 재배를 계획하고 1910년 12월부터 후보산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충주지역이 선정되었다.
조선총독부 전매국은 1912년에 충주에 司稅局 출장소를 개설하고 251명의 경작인에게 확색종 14.7ha를 경작하도록 하였다. 전매국은 경작자에게 경작자재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謝金을 지급하여 촉탁경작하게 한 것이 우리나라 황색종 재배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충주연초경작조합도 설립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연초 경작지와 경작자는 해마다 증가하였다. 1927년 충청북도의 연초 재배면적은 4,415정보, 경작인원은 24,365명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단위면적과 인구 대비 전국 최고치였다. 재배지역도 충주 뿐 아니라 청주, 음성, 괴산 등지로 확산되었다. 연초 재배 장려기관도 京城煙草專賣支局이 청주와 충주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연초생산조합도 미원, 충주, 제천, 보은, 영춘, 진천 등 6개소에 설립되었다. 현재의 충청북도 내 연초생산조합은 <표 16>과 같다.
<표 16> 충청북도 엽연초생산조합 현황 | ||
연초조합명 | 설립연도 | 현 위치 |
보은엽연초생산조합 | 1927. 5. 1. | 보은읍 삼산리 |
미원엽연초생산조합 | 1912. 5. 1. | 청원군 미원면 미원리 |
진천엽연초생산조합 | 1927. 5. 28. | 진천읍 교성리 |
옥천엽연초생산조합 | 1935. 5. 1. | 옥천읍 문정리 |
충주엽연초생산조합 | 1913. 5. 1. | 충주시 용산동 |
음성엽연초생산조합 | 1933. 4. 1. | 음성읍 읍내리 |
제천엽연초생산조합 | 1918. 9. 22. | 제천시 명동 |
현재 일제시대 충북지역에 설치되었던 연초 전매사업기관 건조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엽연초생산조합은 설립 당시의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이 미원, 옥천, 제천 3곳이다.
미원엽연초생산조합은 1912년에 설립되었는데, 그 다음해 현재의 조합 건물이 신축되었다(건축대장에는 1937년에 신축된 것으로 되어 있음). 최근 목제창호를 철제로 교체하였으나, 전체 건물 형태와 마루바닥은 원형 그대로이다.
옥천엽연초생산조합은 1935년에 설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37년에 신축되었다. 옥천엽연초생산조합은 옥천군청 입구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옥천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합 건물은 1층 목조로 97.52㎡이며 보존 및 관리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그밖에도 사무실과 창고, 사택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연초산업사의 한 측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건축 당시에는 현 옥천여중 자리에 있던 큰 연못과 조화를 이루어 조합건물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제천엽연초생산조합은 1918년 9월 22일 창립되었는데, 제천시 명동 151번지에 34.3평의 1층 시멘트건물에서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 조합건물은 현재의 건물이 1977년에 세워지기까지 59년 동안 제천지역 엽연초 생산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제천엽연초생산조합 부속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으며 조만간 철거할 예정이라고 있다. 당시 제천지방은 조선시대 최대의 연초 생산지인 영월과 우리나라 황색종의 최초 재배지인 충주와 접속하는 지역으로 연초재배가 일찍 발달하였는데, 현재의 건물 옆에 있는 50년 이상된 회양목, 향나무 거목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건물은 충북 북부지역에 남아 있는 엽연초 관련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앞으로 엽연초생산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안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조사한 산업 관련 문화유산으로는 양조장도 1건 조사되었다. 일제시대 충북지역의 酒造業 비율은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다. <표 17>과 같이 일제시대 주요 사업체라 할 수 있는 귀속사업체의 분포상황으로 볼 때 충북지역의 사업체중 주조업 비율은 기형적이었다. 즉, 전국의 귀속사업체 업종별 비율은 제조공업(13.4%) > 식료품공업(12.5%) > 주조업(10.0%) > 섬유공업(9.6%) > 정미업(7.0%) 순인데 반해, 충북은 주조업(21.3%) > 섬유공업(18.8%) > 광업(12.5) > 정미업(10%) 순이다. 충북의 귀속사업체중 21.3%나 차지하는 주조업은 주로 양조장으로 모두 17개 업체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주조업체에 국한된 만큼, 실제 일제시대 충북지역의 양조장수는 17개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 17> 충청북도 도별⋅사업별 주요 귀속사업체 분포 | |||||||||||
업종 지역 | 서울 | 경기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강원 | 계 | % |
토 건 업 | 35 | 3 | 1 | - | 3 | - | 1 | 1 | 1 | 45 | 2.3 |
광 업 | 2 | 20 | 10 | 2 | 11 | 4 | - | 1 | 8 | 58 | 2.9 |
기 계 업 | 46 | 18 | 1 | 16 | 3 | 13 | 6 | 34 | 2 | 139 | 7.0 |
철 강 업 | 11 | 15 | 1 | 2 | 12 | 9 | 18 | 37 | 2 | 107 | 5.4 |
운 수 업 | 2 | 1 | 2 | 3 | 1 | 4 | - | - | 4 | 17 | 0.9 |
목 재 업 | 11 | 15 | 6 | 11 | 9 | 17 | 19 | 18 | 15 | 121 | 6.1 |
요 업 | 8 | 13 | 5 | 16 | 1 | 17 | 2 | 14 | 1 | 77 | 3.9 |
고무 공업 | 6 | 4 | - | - | - | - | 3 | 7 | - | 20 | 1.0 |
화학 공업 | 7 | 12 | 3 | - | 3 | 8 | 7 | 18 | 4 | 62 | 3.1 |
섬유 공업 | 20 | 15 | 15 | 18 | 7 | 23 | 33 | 47 | 13 | 191 | 9.6 |
출판인쇄업 | 17 | 4 | 3 | 5 | 4 | 3 | 9 | 12 | - | 57 | 2.9 |
식료품공업 | 25 | 19 | 4 | 19 | 17 | 27 | 47 | 76 | 16 | 250 | 12.5 |
酒 造 業 | 3 | 6 | 17 | 27 | 26 | 42 | 39 | 35 | 5 | 200 | 10.0 |
약품 공업 | 16 | 4 | - | - | - | 1 | 1 | 7 | - | 29 | 1.5 |
농 림 업 | 1 | - | - | - | - | 2 | - | 3 | 2 | 8 | 0.4 |
수 산 업 | - | - | - | - | 3 | 4 | 5 | 34 | 9 | 55 | 2.8 |
전 기 업 | 9 | 1 | - | 1 | - | 1 | 1 | 7 | - | 20 | 1.0 |
정 미 업 | 2 | 12 | 8 | 40 | 18 | 51 | 7 | - | 1 | 139 | 7.0 |
창 고 업 | 3 | - | 2 | - | - | - | - | - | - | 3 | 0.2 |
제조 공업 | 55 | 24 | - | 25 | 23 | 25 | 32 | 77 | 5 | 268 | 13.4 |
상 업 | 44 | - | 2 | - | 1 | 2 | - | - | - | 49 | 2.5 |
기 타 | 29 | 4 | - | 2 | 8 | 13 | 12 | 8 | 5 | 81 | 4.1 |
총계 | 352 | 190 | 80 | 187 | 150 | 266 | 242 | 436 | 93 | 1,996 | 100 |
% | 17.6 | 9.5 | 4.0 | 9.4 | 7.5 | 13.3 | 12.1 | 21.8 | 4.7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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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산업 문화유산에는 수리조합과 관련된 것도 3건이 조사되었다. 수리조합은 현재의 농어촌진흥공사의 전신인 조선토지개량협회(1938년 발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제시대 충북지역 수리조합은 1914년 결성된 제천 의림지 수리조합, 1928년에 조직된 영동 추풍령 수리조합, 1929년 괴산 이담 수리조합, 1930년에 만들어진 음성 생극과 옥천 안남 수리조합, 1933년 호암지 수리조합 등이 있었다.
또다른 수리조합 관련 유산은 충주 호암지이다. 현재 충주시 문화동 3889번지에는 호암지 수리조합장 사업성공 기념비가 있고 호암동 3888번지에는 호암지 위령묘원이 있다. 수리조합장 사업성공기념비는 1933년에 호암지를 축조한 뒤 세운 기념비이며, 위령묘원은 호암지 조성과정에서 죽은 일본인들의 무덤이다. 이 기념비와 묘원은 그 주체가 일본인이더라도 한 시대의 사회성격과 농업 실정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충주시의 젖줄인 호암지와 관련되어 있는 만큼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금융 및 상업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다. 충북지역에 설치된 최초의 금융기관은 1907년 1월부터 업무를 개신한 상당금융조합이다. 금융조합은 그 뒤에도 계속 결성되었는데, 1934년 말 현재 36개였으며 지소는 6개소였다. <표 18>에서처럼 충북지역 금융조합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이번 조사에서 일제시대 진천금융조합으로 쓰이던 건물이 조사되었다. 현재 진천농협지소로 쓰이고 있는 옛 진천금융조합건물은 건축년도는 미상이나 건물 형태와 창호 등으로 보아 일제시대에 건축한 것이 사실이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36개에 이르던 금융조합건물 중 하나라 일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원형이 크게 변형된 만큼 보존할 가치는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근대금융기관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표 18>과 같이 조흥은행 제천지점이 유일하다. 충북지역에 최초로 개설된 은행은 1906년 9월 20일 개업한 韓湖農工銀行 충주출장소로, 그뒤 조선식산은행 충주․청주지점(1928), 조선실업은행 청주지점(1920), 조선실업은행이 조선상업은행과 병합한 뒤 조선상업은행 청주지점(1924), 동일은행 제천지점(1938) 등이 설립되었다. 그중 현재 건물이 남아 있는 은행은 동일은행 제천지점(현 조흥은행 제천지점)이다.
동일은행 제천지점은 화재로 현재의 위치인 제천시 명동 4-16번지로 신축이전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제천 最古의 은행건물일 뿐 아니라, 현재 충북지역에 남아 있는 일제시대 충북지역 유일의 은행건물이다. 모두 314평의 대지에 87평의 건평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43년 10월에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여 조흥은행 제천지점이 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헌병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현재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일제시대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표 18> 일제시대 충북지역 금융 및 상업기관 현황 | |||||
건 물 명 칭 | 현존 유무 | 소 재 지 | 건축년대 | 구 조 | 비 고(현위치) |
조선상업은행 청주지점 | 무 | 청주시 남문로2가 | 1928.10 | 상업은행 자리, 1957.12.16신축 1954.1.9 구 한일은행 자리로 移轉 | |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 청주지점 | 무 | 청주시 남문로2가 | 1 | ||
조선식산은행 청주지점 | 무 | 청주시 북문로1가 | 1928 | 벽돌1층 | 현 산업은행 자리 |
청주 금융조합연합회 | 무 | 청주시 북문로1가 | 1921 | 벽돌3층 | 구 충북은행중앙본점 자리 |
청주 금융조합(도시금융조합) | 무 | 청주시 남문로2가 | 1928 | 벽돌2층 | 현 중소기업은행자리(40여평) |
상당 금융조합(촌락금융조합) | 무 | 청주시 남주동 | 1928 | 벽돌2층 | 현 신라예식장 자리 |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 무 | 충주시 성내동 | 1918(?) | 목조1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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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방금융조합 | 무 | 충주시 성내동 | 1926 | 목조1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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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무진(株) | 존 | 충주시 성내동 1 | 1939(?) | 벽돌1층 | 125.16평 |
조흥은행 청주지점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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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영동지점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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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제천지점 | 존 | 제천시 명동 | 1942.12.14 | 목조1층 | 1921.10. 개업 |
조선운송창고주식회사 본점 | 존 | 청주시 북문로2가 | 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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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연초원매팔조합 | 무 | 청주시 남문로1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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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극장 | 존 | 청주시 남문로2가 | 193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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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전기주식회사 충주지점 | 무 | 충주시 성서동 |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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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연초경작조합 | 무 | 충주시 용산동 |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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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99건축문화의 이해 충청북도 조직위원회, 1999『忠北의 建築文化』, 앞 책, 458쪽.
<표 18>에서 현재 남아 있는 금융 및 상업기관은 조흥은행 제천지점 외에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 충주지점, 조선운송창고주식회사 본점, 청주극장 등이 있다. 1936년에 문을 연 청주극장은 현재 원형을 거의 상실하였기 때문에 이번 조사에서 제외하였다. 그밖에 대한통운 제천영업소를 조사하였다.
조선중앙무진회사는 1922년 이래 각 지역에 생긴 많은 無盡會社를 통합하여 1942년에 조직되었다. 그 뒤에는 1946년에 조선상호은행으로, 1950년에는 한국상공은행으로, 1954년에는 한국흥업은행으로, 1960년에는 한일은행으로 개최되었다. 현 충주 성내동에 있는 옛 한일은행 청주지점은 소유가 한빛은행으로 되어 있으며 1939년경에 신축한 것도 알려져 있다. 현재 공예가구점으로 수리하여 사용하면서 원형을 많이 잃은 상태이며, 내부의 상태는 더욱 심각한 훼손 정도를 보이고 있다.
조선운송창고주식회사 청주지점은 청주시 북문로 2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청주-조치원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1921년 7월에 청주지역 상인 8명은 발기하여 동년 10월에 운수창고업을 개업하였다. 주로 운수창고업과 미곡․소금 판매를 주업으로 하였고, 1937년에 조선운수창고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되어 청주지점으로 발족되었다. 1949년 9월에는 상호를 한국운수주식회사 청주지점이라 변경하면서 창고 13동, 자동차 16대, 우마차 20대의 시설을 보유한 대규모 운수기관으로 변모하였다. 1963년 대한통운주식회사 청주지점으로 상호 변경되어 사용하다가 1965년 청주역 이전과 함께 민간인에게 매각되었다. 현재는 여러 점포와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근에 있던 창고건물도 현재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표 18>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현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역시 제천역의 영업 개시와 함께 완공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61평의 대리석 건물인데, 현재 남아 있는 일제시대 유일의 석조건축물로 1941년 9월 1일 제천역 영업 개시와 함께 마루보시운수 사무실로 준공되었다. 그 뒤 대한통운에 인수되었는데, 대한통운은 일제 때부터 있었던 미창운수와 마루보시(丸星)운수가 해방 직후 합병된 것으로 1968년에 민영화된 운수회사이다. 현재 사용에는 별문제가 없으나, 내부가 많이 변경되었다.
다음으로 일제시대 공장 건물이다. 1948년 충북지역에 있던 공업사업체는 <표 19>과 같이 모두 155개 업체에 4,102명의 노동자가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공업사업체는 대부분 1945년 이전 일제시대에 개업하였으며, 특히 일본인과 일본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대규모 사업체는 모두 해방 이전에 세워졌다. 이들 대규모 사업체는 모두 52개 업체였는데, 해방 이후 귀속사업체로 편입되어 1950년대에 민간에 불하되었다.
<표 19> 1948년 충북지역 공업사업체 분포 | |||||||||||
업종 사업체 | 총수 | 금속 | 기계 기구 | 화학 | 전기 수도 | 요업 토석 | 방직 | 제재 목제품 | 식료품 | 인쇄 제본 | 기타 |
업 체 수 % | 155 100 | 16 10.3 | 14 9.0 | 16 10.3 | 5 3.2 | 5 3.2 | 27 17.4 | 18 11.6 | 44 28.4 | 8 5.2 | 2 1.3 |
노동자수 % | 4,102 100 | 193 4.7 | 175 4.3 | 422 10.3 | 185 4.5 | 72 1.8 | 1,640 40.0 | 260 6.3 | 998 24.3 | 126 3.1 | 31 0.8 |
*자료: 南朝鮮過渡政府 勞動部, 1948 第二回 南朝鮮勞動統計調査結果報告.
<표 20> 충북지역 귀속공업기업체 업종별 분포 | ||||||||||||||||||||
b 업종 관리 | 酒 造 | 鐵 工 | 精 米 | 製 材 | 運 送 | 製 紙 | 石 炭 | 製 陶 | 印 刷 | 醬 油 | 石炭 판매 | 製 糸 | 製 瓦 | 文 化 | 鑛 | 麯 子 | 繰 綿 | 製 麻 | 청량음료 | 계 |
중앙 직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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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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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8 | 3 | 3 | 1 | 20 | ||||
지방 관할 | 8 | 1 | 7 | 7 | 1 | 4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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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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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임대차 | 7 | 1 | 4 | 7 |
| 1 | 1 | 1 | 3 | 2 | 1 | 4 | 2 | 2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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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47 |
불 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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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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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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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계 | 16 | 2 | 11 | 15 | 4 | 5 | 3 | 1 | 3 | 3 | 1 | 6 | 3 | 2 | 18 | 3 | 3 | 1 | 1 | 101 |
*자료: 國民日報社, 1952 忠北年鑑, 98쪽.
일제시대에 존재하던 155개업체중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많지 않으며, 이번 조사에서는 삼창토건, 한국도자기, 옛 충북천연탄산주식회사 세 공장건물을 조사하였다.
현 (주)삼창토건 사무실은 1942년 청석학원 이사장이었던 김원근이 사무실 3동, 공장 1동, 숙소 1동 모두 5동을 건축하여 사무실과 공장 등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그 뒤 1984년에 (주)삼창토건이 매입한 뒤 1동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관리만 하고 있다. 사무실과 공장의 외형은 건축 당시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바로 옆에는 현재 청석학원 김준철 이사장의 자택 건물들이 여러 채 있다. 이 자택 역시 1942년경에 전통 한옥양식으로 건립하였으며 정원 내에 있는 건물 중에는 일본식 건물도 있다. 현 삼창토건 건물과 김준철 사택 주변은 보호책을 강구하여 보존할 가치가 높다.
한국도자기는 충북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다. 한국도자기는 1950년대에 귀속사업체였던 忠北製陶社를 인수한 기업으로 1966년에 한국도자기로 상호를 변경하여 착실히 성장, 현재 충북을 대표할 뿐 아니라 전국 최고의 도자기 생산기업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공장으로 사용되던 뒤쪽 건물 1동은 거의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고, 또다른 공장 1동과 사무실은 2000년에 수리하여 사용하고 있다. 조만간 헐릴 예정인 뒤쪽 공장건물은 건물 자체보다 내부에 설치된 가마․틀 등 내부시설물을 잘 보존하여 우리나라 도자기 제조과정과 변천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 충북천연탄산주식회사는 광천수로 유명한 초정에 있다. 초정 광천수는 1910년 이후 中央鐵道會社에서 개발하기 시작하였는데, 1921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小林鑛泉에서 공장을 세워 초정약수로 천연사이다를 상품화시켜 외국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상호가 충북천연탄산주식회사로 변경되었고, 1947년에도 종업원 35명을 두고 사이다 등을 제조하였다. 그 뒤 귀속사업체로 분류되어 1953년 12월 12일 고려천연탄산회사장 신철우에게 불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Co2 뽑아내던 창고로 추정되며, 1960년대까지도 사용되다 현재 방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주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산업 관련 유산인데, 해방 이후에도 충북에는 한국경제 발전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건조물이 들어서는데, 바로 충주 비료공장과 괴산 칠성댐이다.
현재 새한미디어가 자리잡고 있는 충주 비료공장은 1955년 9월에 착공하여 3년 뒤 충주비료공장운영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그 뒤 우리나라 최대의 질소비료공장으로서 농업생산력 증대와 수출 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8년에 새한미디어에서 인수한 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製粒塔(Prill Tower) 뿐이다. 그렇지만 이 제립탑은 ‘조국근대화’의 씨앗을 돋구던 충주비료공장을 상징하는 탑으로 손색이 없다. 따라서 이 탑은 적극 보존하여 전망대 등으로 활용하면 충주의 명소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충주댐 관광과 연계하여 문화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충주 비료공장 못지않게 해방 한국 산업근대화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산업 문화유산은 괴산 칠성댐을 꼽을 수 있다. 괴산댐은 해방 이후 최초로 순수 우리 기술진에 의해 건설된 댐이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1년 9월에 건설기본계획이 확정되어 1952년 11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공사에 착수한지 무려 5년이나 걸려 댐을 준공하게 이르렀다. 당시 정부는 괴산댐을 건설하기 위해 일제시대 댐 건설에 참여했던 한국인 기술자와 노동자를 전국에서 불러와 모든 지혜와 힘을 모아 만들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이후 빈곤에 허덕이던 1950년대 불황경제에 활력을 집어넣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호롱불 대신 전기 불을 밝히고, 멈춰선 기계가 돌아가게 한 주인공이다. 따라서 괴산댐은 매우 중요한 우리 현대사의 산업 문화유산인 바, 현재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마땅하다.
그밖에도 한국현대경제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광업과 시멘트산업이다. 두 공업분야 모두 지금은 큰 비중을 차지 못하더라도 1960~1970년대 ‘조국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산업분야이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충북 북부지역에 위치한 제천․단양 등지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대표적인 폐광산으로 제천시 금성면 양화리에 있는 폐광산과, 대표적인 시멘트공장으로 제천시 송학면에 있는 (주)아시아시멘트 제천공장을 조사하였다.
6) 생활 문화유산
충북지역 근현대 생활 관련 문화유산은 <표 21>와 같이 모두 8건을 조사하였다. 청주 동부 배수지를 비롯해 일제시대 신축한 민가 3개, 관사 1개, 의원과 여관 건물 각 1개 등이다.
<표 21> 충북지역 근현대 생활 문화유산 목록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청주 동부 배수지 |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 1939 | 충부지역 최고의 상수도시설 | 등록문화재 |
2 | 우리예능원 |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 1924 | 2층목조흙벽, 26평 | 등록문화재 |
3 | 한국전력 청주관사 |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 1932 | 목조한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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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신명의원 |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2가 | 1921 | 충북 최초의 개인 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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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구)일해여관 |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 1가 | 1927 | 일제시대 여관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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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만승초등학교 사택 |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 | 1927 | 일제시대 학교 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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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괴산군 관사 |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 1919 | 1900년경 신축, 8.15이후 괴산군 기증 | 등록문화재 |
8 | 사정리 강당 |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 1935 | 마을씨족사 관련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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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 근대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1년이다. 1921년 4월 청원군 남일면 선도산 계곡에서 청주로 물을 급수하는 여과지 및 배수지 시설공사가 시작되어 1923년 4월에 완공되었고, 1939년에는 영운동 수원지와 대성동 동부 배수지 시설이 준공되어 청주시 생활문화의 급진전이 이루어지었다. 동부 배수지는 현재 4개의 배수 탱크와 관사 1동으로 이루어진 도면이 남아 있으며 우암산 끝자락 8부 능선 정도에 위치하여 수압을 통해 시내에 수돗물을 공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청주 동부 배수지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일제시대 청주의 근대화 산물은 여관 건물이다. 현 청주시 중앙우체국 일대는 근대 건축물들이 최초로 들어선 장소로서 1908년경 우체국 앞 비습지를 매립하여 관사의 신축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복점을 비롯하여 각종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조사된 구 일해여관 건물은 원래 小松屋 건물로 1927년에 신축되었으며 청주우체국과 마주보고 있는 일본식 목조가옥이었다. 이 가옥은 우체국옆 淸州館(남문로 2가 현 중앙투자신탁 자리)과 北一樓(남문로 1가)와 함께 당시의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현재 1층은 4개의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은 이들 점포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예전의 ‘ㄱ’자 형태의 건물형식은 아직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 조사된 것 중에는 충북지역 최초의 민간의원인 신명의원 건물도 조사되었다. 충북에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은 1909년 12월에 개설된 관립 자혜의원(현 청주의료원)이다. 자혜의원은 중앙공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근대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민간의원의 효시는 1907년 영국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천의 애인병원, 1916년 청주제일교회의 소민의원 등이다. 그렇지만 이들 병원은 모두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던 것으로, 순수 개인병원은 충청북도지사를 역임한 바 있는 李明求가 1921년에 개업한 新明醫院이다. 진료과목은 이비인후과였다.
현재 의원으로 사용되던 1층 목조한옥 건물은 그 형태가 거의 없어지고 의류타운 상가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하였다. 건물의 외벽은 일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지붕과 내부는 원형을 잃은 상태이다.
청주시 문화동 7-3번지에 위치한 우리 예능원 건물은 충청북도내에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일본식 목조주택이자 일제시대 청주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집으로 불리어졌고 해방 이후 YMCA가 30여년 사용한 건물이라 조사하였다.
이 집은 일제 식민지시대 청주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집으로 알려진 집이다. 당시에는 ‘뾰족집’으로 불렸다. 이 집은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식민지시대 문화상징물로서 한 시대의 역사성과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 현 소유자(이영순, 1932년생) 역시 이 집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항구적으로 보존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7) 교통 문화유산
충북지역 교통 관련 문화유산은 주로 철도 관련 유산으로 모두 7건 중 철도 관련이 6건이고 나머지 하나는 도로교량이다.
충청북도를 지나는 철도는 경부, 충북, 중앙선 세 철도노선이다. 경부선은 1905년 1월 개통되었는데, 충북지역을 통과하는 역으로는 영동, 옥천, 이원, 황간, 부강, 추풍령, 지탄, 심천, 매포 등이 있었다.
충북선은 경부선의 조치원역과 중앙선의 봉양역을 잇는 철도노선이다. 충북선은 1920년 3월 조선철도주식회사(착공 당시는 중앙철도회사)에서 조치원~청주구간 노선공사에 착수하여 1921년 11월에 개통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증평, 1928년 12월에는 충주까지의 총 91.7 km가 연장 개통되었다. 충주~봉양 구간은 해방 이후인 1955년 11월 17일에 착공하여 1958년 12월 31일 준공, 1959년 1월 10일 개통하여 중앙선에 연결되었다.
<표 22> 충북지역 근현대 교통 문화유산 목록 | |||||
번호 | 명칭 | 위치 | 연도 | 특징 | 비고 |
1 | 제천기관차사무소 검수고 | 제천시 영천동 338 제천역내 | 1941 | 중앙선 초창기의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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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연박터널 | 제천시 봉양읍 연박리, 공전리 | 1958 | 충북선 초창기 폐터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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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가곡 폐철도 | 단양군 가곡면 덕천 | 1945 | 태백선 초기 철도부설용 시설물(터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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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괴강교 |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 1956 | 1950년대 우리 기술로 최신 공법 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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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증약철교 |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 1905 | 경부철도 건설 당시 철교, 당시의 특수공법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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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추풍령역 급수탑 |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 1939 | 경부철도 추풍령역 급수탑 | 등록문화재 |
7 | 영동 심천역 |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 | 1905 | 경부철도 심천역사 | 등록문화재 |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역~경주시 경주역을 잇는 철도노선이다. 중앙선은 1937년 3월 1일 착공하여 1939년 4월 청량리~양평 구간이 개통되었고 1940년에는 양평~원주 구간, 1942년 4월 1일에는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중앙선은 경부선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철도로, 충북지역은 제천~단양구간을 통과하면서 충북 북부지역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이들 철도와 관련된 것 중 어느 정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대상물은 <표 22>과 같이, 경부선이 1건, 충북선이 1건, 중앙선이 2건이다.
경부선이 지나는 옥천 증약철교는 경부철도 건설 당시의 철교로 당시의 특수공법을 이용해 건축한 철도교량이다.
끝으로 괴강교는 괴산에서 연풍으로 가는 국도 교량이다. 1956년 10월 준공하였는데, 1950년대 우리 기술진의 신공법으로 건설하였다. 1993년 7월 신괴강교가 준공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괴강교는 해방 이후 1950년대 교통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할 필요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제월대․괴강․칠성댐과 같은 주변의 다른 문화유산과 연계한 관광코스로도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의 분포실태에 관해 알아보았다.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7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역사 기념물이나 건조물은 현재까지 확인된 것이 106건이다(지정 및 등록문화재 포함). 이들 근현대 문화유산은 역사, 문예, 교육, 종교, 산업, 생활, 교통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분포해 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은 주로 전근대 문화유산 위주이다. 1876년 개항 이후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최근 들어와 점차 높아지고 있긴 하나 아직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개인은 물론 공공기관,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오래 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잔재라는 이유로, 잊고 싶은 과거와 연관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개인적인 판단 등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치하거나 훼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근현대 문화유산은 동시대의 역사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근현대사를 보다 분명히 밝혀줌으로써 오늘의 현주소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다 확실히 비추어줄 수 있다. 또한 근현대 문화유산은 현대인의 삶과 의식 가운데에 있어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가치 부여는 삶의 질과 방향성을 제고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 연구자는 물론 공공행정기관은 근현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알고,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까지 파악된 106건의 근현대 문화유산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근현대 문화유산은 지속적인 발굴과 조사를 통해 증가할 것이며, 추가로 문화재로 지정 또는 등록될 전망이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주로 기념물이나 건축물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근현대 민가와 동산 문화유산 등은 제외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일제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있게 될 근현대 문화유산 일제조사는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를 토대로 유형․무형의 자료는 물론 기록물, 유물․유적 등을 망라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조사는 연차적으로 분야별(기록물․유적지․생활자료 등)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조사된 근현대 문화유산 중 보존 가치가 높은 것은 문화재로 적극 지정⋅등록해야 한다. 아울러 적어도 등록문화재만이라도 지자체 차원의 여러 보존 및 활용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다. 해당 등록문화재를 매입하여 관리하거나, 매년 일정한 유지․보수비를 지급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등록문화재의 소유자를 대상으로 일정한 연수교육을 받게 하여 보다 능동적으로 자율적인 보존방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한편, 문화재 지표조사 시 근현대 문화유산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내셔널트러스트운동과 같은 시민문화운동을 통해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보존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인은 물론 여러 기관․단체 역시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여러 홍보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현재 도 및 시군에서 발행하는 문화재 안내책자에는 근현대 문화유산이 누락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간행되는 안내책자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현대 문화유산 뿐 아니라, 지역 내에 분포하고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하여 홍보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일반인들도 근현대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보호할 것이다.
둘째, 현재 각 지자체 홈페이지에는 지정⋅등록된 문화재만 올라와 있다. 홈페이지 역시 지역 내에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적극 홍보하는 한편 근현대 문화유산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재 담당 공무원과 홈페이지 운영 실무담당자에 대한 일정한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역사문화기행이나 문화관광코스는 근대 유적지나 기념물이 누락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근현대 문화유산에 대한 홍보와 아울러 답사나 문화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그것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살아 숨쉬는 지역을 만들고 지역의 문화지표를 한 차원 향상시킴으로써 주민들의 삶의 질을 제고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