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불교 명상
2)불교의 명상법
(1)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초기불교 명상을 크게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의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집중명상은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모든 망념을 멈추게 하여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방법으로서, 지법(止法) 혹은 사마타(samatha) 수행이라 한다. 통찰명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알아차림으로써 존재의 실상을 체득하는 지혜를 얻는 수행법으로 관법(觀法), 위빠사나 명상(vipassanā Meditation),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 혹은 사념처 수행으로도 불린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는 고통의 원인인 탐(貪)ㆍ진(瞋)ㆍ치(癡)를 제거하여 명지(明智)로 이끄는 집중(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ā)이 각각 탐욕과 무지를 제거하는 수행법임을 말하고 있다.
"… 탐욕을 곧바로 알기 위해 두 가지 원리를 닦아야 한다. 집중과 통찰이다.… 탐욕을 끊어버리기 위해 두 가지 원리를 닦아야 한다. 집중과 통찰이다… 성냄을 곧바로 알기 위해… 성냄을 끊어버리기 위해 두 가지 원리를 닦아야 한다. 어리석음을 곧바로 알기 위해… 어리석음을 끊어버리기 위해 두 가지 원리를 닦아야 한다. 집중과 통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명지로 이끄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두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집중과 통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집중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마음(心, citta)이 닦여진다. 마음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탐욕(貪, rāga)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통찰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무지(無知, avijjā)가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 탐욕에 물들면 마음은 해탈되지 못한다. 무지에 물들면, 지혜가 닦여지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사라지면, 마음에 의한 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 이루어지고 무지가 사라지면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 이루어진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상 수행의 두 바퀴인 집중과 통찰은 수행자가 두루 겸비해야 할 요건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사마타 수행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에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관찰의 대상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동요되는 것을 막는다. 이 과정에서 다섯 가지 장애가 사라지고 선정의 요소(jhānaṅga)를 계발하게 된다.
따라서 사마타(止) 수행은 집중을 통하여 고요함과 평온함을 계발하고 그로 인해 장애가 제거된 선정을 성취하는 수행이다. 또한 이 수행은 마음계발의 다음 단계인 위빠사나(觀) 수행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열반을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는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방법이며 불교수행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 경전(Pāli-Nikāya)에서 설명하는 불교수행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실 사마타는 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던 수행방법이다. 하지만 불타께서는 위빠사나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활용하셨고 필요에 따라 변화를 주셨다. 이 과정에서 불타께서는 사마타의 방법으로 얻어지는 선정의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현생의 생멸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삼법인(三法印)을 깨달으신 것이다.
즉, 사마타의 장점을 활용하여 위빠사나를 행하셨던 것이다. 『법구경, Dhammapada』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은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은 자에게 지혜는 없으니, 선정과 지혜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열반에 가까이 있다."라고 말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가 깨달음을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초기 경전 거의 대부분에 함께 나타나며 불타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심결(修心訣)』에서도 "자기 성품이란 걸림없는 고요함과 아는 것이 원래 무위여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함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정(情)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하고는 결론짓기를 "이것이 단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초기 불교 수행에 있어서는 낮은 데서부터 높은 데로 나아가서 드디어 완전한 정신의 안정을 얻어서 해탈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수행의 단계로서 아홉 단계가 설해지고 있다. 그것은 사색정(四色定),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의 아홉 단계다. 낮은 데서부터 점차로 깊이 들어가서 마지막 멸진정에 이르면,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정지된다.
그리고, 삼학(三學) 중에 '정(定)'의 범위 안에 있는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은 언제나 사념처수행을 설명한다.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마하시 사야도(Ven. Mahasi Sayadaw)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념처와 위빠사나는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그리고 고엔카지(S.N. Goenka)는 '위빠사나 수행은 사념처 수행과 같다.'고 설명한다. 이들 마하시 사야도와 코엔카지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명성을 얻고 있는 수행지도자이다. 이 의미는 오늘날 많은 수행자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사념처 수행 자체를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념처 수행으로 이끄는 '바른 마음챙김'은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팔정도를 삼학으로 구분하고 염처수행을 어느 범주 안에 국한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경전은 8정도의 집중(定) 안에 '바른 마음챙김(正念)'으로 사념처를 설명하고 있다.『대념처경』은 바른 마음챙김과 4념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상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법에서 법을 따라… 세상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머문다. 이것은 바른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한편, 정준영은 불교수행의 길을 계정혜로 구분해 보았을 때, 계(戒)를 갖추고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한 초행자도 집중의 범주 안에 속하는 사념처를 수행을 할 수 있으나 이 자체를 가지고 그를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경전의 설명에 따라 신체의 호흡이나 느낌을 통해서 몸에서 몸을,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관찰 속에서 무상, 고, 무아 즉 3법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아직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위빠사나를 위해서는 '계(戒)', '정(定)' 뿐만 아니라 '혜(慧)'를 포함하는 팔정도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즉 알아차림만으로는 위빠사나 수행이 온전히 행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념처 수행 자체만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보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오늘날 위빠사나를 이끄는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사념처는 "'지혜(慧)'의 범주라기보다 '집중(定)'의 범주 안에서 시작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위빠사나'는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불교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마타'와 조화를 이루어 '사마타-위빠사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불교 안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수행자는 고요함을 계발하는 사마타 수행과 내적 통찰을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조화를 이루어 수행한다. 사마타 수행을 이끄는 사마디(집중, samādhi)가 없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는 생기지 않는다. 집중은 지혜를 이끄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잠정적으로] 번뇌를 누르고, 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지혜와 함께] 번뇌를 잘라버리게 된다. 위빠사나의 목적은 발생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지혜를 얻는 것이다. 즉 무상, 고, 무아의 모든 현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알아차림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영원하지 않다(無常)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괴로움이다(苦)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법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無我)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Dhammapada)』에서는 세 가지 법의 특성, 즉 삼법인인 무상, 고, 무아를 지혜로써 관찰한다는 말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라고 이해 할 수 있다. 또한 불타께서는 이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위빠사나를 위해서는 사마디(samādhi, 定, 三昧)가 기본조건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바른 집중이 없으면 수행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내적 통찰로 이끌지 못해 결국 해탈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상윳따니까야』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사마디(samādhi)를 통해 '지혜(知慧)'라고 불리는 경험적 내적 통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를 계발하기 위해 수행자 스스로의 신중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은 체계적으로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기에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가정에도 준하지 않으며, 정신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신비적인 성향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스스로의 내적 통찰을 통하여 번뇌로부터 해방으로 이끄는 불교만의 수행체계이다.
이렇듯 불교의 명상법은 지와 관을 겸비하고 있는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 발생한 선(禪)인 사마타(samatha, 止)는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의 인도 문명 이래로 인도의 여러 사상이나 종교 및 철학 등 모든 사유의 근간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위빠사나(vipassanā, 觀)가 불교의 고유하고 독특한 명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의 현대심리학적ㆍ의학적 활용연구/ 이정은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