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중원(中原)의 아들
옥탄하(玉呑河)는 곤륜산을 남북으로 끊으며 흐르는 강이다.
햇살이 찬란히 부서져 내리는 아침에 강물을 보면 마치 흰 옥이 부서져
떠도는 듯하기에, 옥탄하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계월아, 어서 떠나자꾸나."
옥탄하 가에는 일엽편주가 대어져 있었고, 수척한 미녀가 막 배에 오르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날씬한 녹의소녀가 서 있는데, 소녀는 노를 쥐고 있었다.
"정녕 떠나시고자 하십니까?"
"내가 강호계에 무슨 미련을 갖고 있을 수 있느냐? 누가 이기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아아, 그분이 미워 죽겠습니다. 아씨께서 그분의 아들을 낳아 주셨는데
도 그리도 잔혹하게 대하니… 어이해 아씨께서는 그분에게 그 사실을 말
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그는 악마 같은 자야. 그에게 이 귀여운 아기의 운명을 맡길 순 없어.
나는 그가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려 왔지만, 허사였지."
그녀의 가슴에는 갓난아이가 안기어 있었다.
아기는 배가 고픈 듯 칭얼거렸으며, 여인은 옷가슴을 풀어 풍만한 젖을
드러냈다.
젖꼭지가 아기의 입에 빨리어졌다.
탱탱히 부풀어오른 젖에서는 흰 젖이 콸콸 쏟아져 나왔으며, 몽룡이라는
아기는 젖을 먹으며 새근새근 잠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내 아기를 뺏길 순 없어!"
여인이 나직이 중얼거릴 때, 그리고 계월이라는 시녀가 배를 몰고 나가고
자 할 때였다.
팟- 팟- 팟-!
갑자기 배의 사방으로 혈포무사들이 떨어져 내렸다.
"카카카… 강호계의 요조숙녀라는 냉약빙에게 갓난아이가 있었을 줄이
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다는 말대로군."
"녠녠… 그나저나 사륵 도주께서 옥검성녀를 정중히 모셔 오라 했으니,
그렇게 해야지."
수십 명의 혈포무사는 배를 포위하였고, 계월은 겁에 질린 나머지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신풍도의 무사들!"
계월은 자지러지며 노를 휘둘러 댔다.
신풍도 무사 가운데 하나가 침을 뱉으며 손을 휘저었으며, 노는 뚝 끊어
지고 말았다.
계월은 뒤뚱이다가 배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무엄한 자들!"
냉약빙은 위기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무수한 영웅호걸을 수족처럼 다루어 본 여걸답게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사륵이라는 자가 보내서 왔느냐? 그 자가 나의 육체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걸 안다면 단념할 텐데…
…."
"불행히도 그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소."
신풍도 무사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히죽 웃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미녀라는 냉약빙의 젖가슴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마른침
을 꿀꺽 삼켰다.
"하여간 함께 가셔야겠소!"
"난 갈 수 없다."
"녠녠… 속하들로 하여금 완력을 쓰게 하시는군."
우두머리 무사는 슬쩍 눈짓을 하였으며, 젊은 무사 세 명이 배 위로 올라
갔다.
냉약빙은 연검(軟劍)을 쳐들었으며, 세 명의 무사는 비웃는 표정으로 그
녀를 품자형으로 포위했다.
무사들은 쇠사슬을 꺼내 빙빙 휘둘러 댔으며, 냉약빙은 빠져 나갈 길이
없음을 깨닫고 암담한 눈빛을 흘렸다.
'이런 종말이란 말인가? 아아, 사륵에게 끌려가 겁탈당하느니 죽을 수밖
에 없다. 내가 어찌 두 남자를 섬길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인자들을 몇 죽이고, 자기도 죽을 작정을 했다.
그녀가 연검을 휘둘러 대고자 할 때, 세 명의 인자가 갑자기 비명 소리를
내며 강물로 빠져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잇달아 이십여 명의 인자들이 허리를 꺾으며 곤두박질치
지 않는가?
"후후… 그 아이는 내 아들이야. 어떤 자라 하더라도 내 아들을 건드릴
수 없다!"
허공에서 냉막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흑영이 표표히 떨어지며, 흑의청년이 냉약빙 바로 곁으로 사뿐히 내려섰
다.
청년은 냉약빙과 눈길이 마주치자,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손을 내
밀었다.
남자의 손치고는 지극히 희고 깨끗한 옥수(玉手)가 아닌가?
"아이를 내게 주시오."
"으으… 아이를 줄 수 없다, 악마!"
"후후… 그 아이는 내 아기가 아니오? 내 아기를 안아 보고 싶소."
"닥쳐! 이 아인 네 아이가 아냐!"
냉약빙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앙탈하듯 소리치며 청년의 뺨을 후려쳤다.
청년은 날아드는 손바닥을 능히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았
다.
짝-!
소리와 함께 그의 뺨이 가볍게 충혈되었다.
그는 그래도 느긋한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이 뺨 한 대로 이제까지 내가 약빙에게 미안해 하던 마음을 속죄했다
여기겠소."
그는 백무영이었다.
"야수(野獸)!"
냉약빙은 기쁨에서인지 슬픔에서인지 모를 눈물을 펑펑 쏟아 내었으며,
백무영은 천천히 그녀에게서 아이를 건네 받았다.
그가 아이를 쳐들 때, 물 속에서 다섯 자루의 검이 치솟아 올랐다. 은잠
해 있던 다섯 인자가 떠오르며 백무영의 등줄기를 향해 검을 폭사시키는
것이다.
백무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저었으며,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오
며 다섯 인자의 가슴이 산산이 으스러졌다.
인자들은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아앙……!"
"녀석, 내가 네 아버지다. 프핫핫! 날 닮아 목소리가 크구나."
아이는 울었고, 백무영은 웃었다.
"아이를 안을 줄도 모르면서……."
냉약빙은 토라진 가운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이미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옥탄하의 물살은 흰 작살처럼 떨어지는 햇살 가운데 반짝거렸다.
그리고 냉약빙의 눈빛도 희게 반짝거린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냉약빙의 품안에 되돌려졌다. 냉약빙은 젖을 꺼낸 채 아이에게 젖
을 빨리고 있었다.
"부끄러워요. 빤히 보지 말아요."
"젖가슴을 보는 게 아니오.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요."
"그게 그거 아니예요? 흥!"
"미안하오."
백무영의 볼은 자꾸만 붉어졌다.
냉약빙은 뒤돌아 앉으며 조금 표독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다시 곤륜산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날 아내로
거둘 만한 영웅이 되세요. 백도의 영웅이 되지 않으신다면, 저와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백도의 영웅이 되신다면, 그대가 색마이며
학살자라 하더라도 기꺼이 그대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어요."
"정녕 날 기다려 주겠소?"
"일 년씩이나 기다렸거늘, 며칠 더 기다리지 못할 게 없지요."
"고맙소, 약빙!"
남녀지간에는 많은 말보다 육감으로 서로를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 사람은 말이 아니라 육체의 밀어로써 서로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생활해 왔다. 갑자기 친해진다는 건
무리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
람으로 맺어질 것이다.
"다녀오겠소."
"조심하세요."
냉약빙의 볼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백무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죽립을 고쳐 썼다.
아이가 있다는 건, 백만대군이 응원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어쩌면 그는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한 채 곤륜산에 묻히게 될지도 모른
다.
그러나 이젠 웃으며 죽을 용기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영원한 미소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미소는 나를 위해 지은 미소였으리라.'
그는 천천히 돌아섰으며, 그의 어깨 위로 시월의 차가운 햇살이 흰빛으로
반짝거렸다.
사륵은 능선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발 아래 보이는 산악을 보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가 내 발 아래 있다. 프하핫! 이제 백도와 흑도는 내게 장악되었다."
그는 강호의 천자(天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파죽지세로 백도맹을 격파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수한 무사들에 호위되고 있는데, 갑자기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울
려 퍼졌다.
호각 소리는 누군가 사륵 쪽으로 다가선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다가서는 자는 둘이었다.
하나는 이십 리 안으로 다가서고 있으며, 또 하나는 가까운 거리 안으로
접어들었다.
사륵은 곧 수하의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일남일녀(一男一女)가 탄금(彈琴)하며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동하
는 속도는 천리준구(千里駿駒)가 달리는 속도 이상이라 합니다."
"흐음, 그리고……?"
"그들은 사륵 나으리를 죽이겠다고 노래하며 오고 있으며,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괴인 하나가 가까운 곳으로 다가섰습니다. 그
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으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후후… 세상에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자가 너무 많군.'
사륵은 이 순간까지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축융곡 안으로 들어간 삼만여 제자들이 백도무사들에게 포위되어
속속 쓰러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백도의 힘은 극한으로 확대되었으며, 소림사의 고승들이 대거 합류하기
시작했고 그 기세가 보다 엄청나지고 있었다.
사륵은 축융곡 안에서 벌어진 정파대회합을 보고받지 못하였는지라, 곤륜
산이 자신의 영토로 화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오게 하라!"
백무영은 느릿느릿 걸었다.
그는 이미 신풍도 무사들 틈 속으로 접어든 상황이었다.
무수한 검사들은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사륵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씌워진 금관이 햇살에 황
홀한 금빛을 발산했다.
그는 마치 천자라도 되는 양 황금빛을 흘려 내는 보홀(寶笏)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는 백무영의 모습이 다가서자, 피식 웃었다.
"애송이로군. 강호의 숨은 기인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더니… 훗훗, 생쥐
같은 놈일 줄이야."
그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무영은 그를 힐끗 보다가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철차(鐵車) 한 대가 서 있는 걸 보며 그 쪽으
로 다가갔다.
"건재하시군요?"
"후후… 피차 마찬가지. 언제고 네놈이 돌아올 줄 알았다."
철차 안에는 봉두난발 차림의 형편없는 괴노인이 머물러 있었다.
"생쥐 사냥을 왔구나."
"그렇소이다. 생쥐를 잡으러 왔소이다. 그리고… 이빨 빠진 호랑이 행세
하는 늙은 나무를 베러……."
"훗훗… 날 꺾을 자신이 있느냐?"
노인은 함백(涵伯)이었다.
이십 년 간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던 함백의 몰골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
었다.
그의 전신은 상처 투성이였다. 하지만 백무영은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
청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을 때, 사륵은 상대가 바로 냉혈살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젠장, 네놈이었더냐?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지?"
그는 기겁을 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까지 냉혈살흔이 축융곡 안에 머물러 있다 여기고 있었던 것이
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사륵의 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가운데의 대
지(大地)가 검게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강해졌군."
"여전히 강하구료."
"후후… 넌 이미 네 아비의 경지를 능가했구나. 게다가 눈빛에 신기가 대
단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소림사의 최고 절학마저 터득한 듯하군."
"그렇소!"
"프핫핫… 이제야 나의 적수가 나타났단 말인가?"
함백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팔을 천천히 벌리기 시작하는 찰나, 이제까지 그의 팔목을 결
박하고 있던 은마삭이 찰나적으로 끊어졌다.
직후 함백은 손을 휘저었으며, 철차의 쇠기둥은 엿가락처럼 녹아 버리고
말았다.
함백은 기지개를 켜며 철차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앉아 지냈더니, 허리가 뻐근하군."
함백은 백무영을 빤히 바라보다가는 눈길을 사륵 쪽으로 돌렸다.
사륵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검게 물들고 말았다.
"잔골혈시단(殘骨血屍丹)에 당해 내공이 사라진 게 아니었단 말이냐?"
그는 자지러지며 쌍검을 뽑아 들었다.
함백은 느긋한 표정 가운데 손바닥을 활짝 폈다.
그의 장심(掌心)에는 동전만한 검은 점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잔골혈시단의 독은 네 것이니, 네게 돌려주겠다."
그의 손바닥이 온통 시커매지면서 검은 기류가 뭉게뭉게 흘러 나오기 시
작했다.
사륵은 자지러지며 장풍을 마주 쳐냈으며, 검은 기류는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우르릉- 쾅-!
요란한 폭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대에 모여든 무사들이 목을 쥐어뜯으
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잔골혈시단은 약간만 맡아도 즉사하는 독이다.
함백은 내공의 힘으로 독기를 손바닥 가운데 모아 둔 채 거의 일 년 세
월을 묵묵히 인고하며 지냈던 것이다.
"내 오른손은 불구가 되었다. 하나, 나는 일 년 간 고행하는 가운데 미처
터득하지 못했던 최후마검(最後魔劍)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른바 마녀혈
(魔女血)이다."
함백이 뿜어 낸 독무는 무려 이백칠십여 명을 핏물로 녹여 버렸다. 가히
백골천하(白骨天下).
근처는 텅 비게 되었으며, 오직 세 사람만이 서 있게 되었다.
함백과 사륵의 사이는 삼 장 정도.
사륵은 사지를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와 함백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의 기도(氣度)였다.
두 사람의 무공이 같다 하더라도, 사륵은 함백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함백이 한 걸음 나갈 때마다 사륵은 두 걸음씩 물러났다.
"제, 제발… 제발… 태상교주!"
그는 애처로울 정도로 비굴해졌다.
함백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
"네 아버지만도 못하군. 그래도 네 아버지는 자결할 용기 정도는 갖고 있
었거늘……."
"제, 제발……."
사륵은 사지를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함백은 그의 앞까지 다가가서 몸을 세웠다.
"네가 연환마교를 제대로 이끌었더라면, 나는 무공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무림을 떠났을 것이다."
"절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면, 후계자답게 행
동하겠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궁지에 몰리자 잘못을 뉘우치다니, 남자답지 못하다."
함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짐을 졌다.
그는 극천단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륵은 힐끗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은밀히 주먹을 거머쥐었다.
'마지막 기회다. 노마를 죽일……!'
그는 신풍도 최후의 암살절기인 호접살수(蝴蝶殺手)의 구결을 암송하였
고, 함백은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는 줄 모르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남아의 기개는 산(山)만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술(術)만 알지, 기(氣)를 모른다. 그러하기에, 나의 후계자가 못 되는
것이다."
그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사륵의 몸이 퉁기듯 떠올랐으며… 허공에 나
비 그림자가 무수히 퍼득댔다.
호접살수는 독(毒)과 수리검(袖裏劍), 그리고 지력(指力)을 동시에 시전하
는 최후의 살인절학이다.
무수히 퍼득대는 나비 그림자 가운데, 함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말해, 잎은 무성하되 뿌리가 얕다는 말이지."
그는 호접살수가 몸을 휘감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백무영도 팔짱 낀 채 수수방관할 뿐이다.
사륵은 쾌재를 부르며 독과 수리검, 지력을 동시에 발출해 함백을 으스러
뜨리고자 했다.
그의 호접살수가 극치의 위력을 발휘하는 찰나, 함백의 왼손이 퉁기어졌
다.
그리고 허공에는 한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미혹스러운 얼굴이 점점 거대해지는 찰나, 사륵의 얼굴이 게거품에 뒤덮
였다.
그가 시전한 모든 살수가 반탄력에 퉁겨져 그의 가슴으로 파고든 것이다.
"케에에엑……!"
사륵의 가슴은 피떡으로 뭉그러졌다.
그는 공중제비를 돌며 백무영 바로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무영은 칙칙한 눈빛을 흘리며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사륵의 미간에는 목각인형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건 함백이 일 년 내내 깎다가 조금 전, 완성한 소수미랑의 조각이었다.
조각은 머리뼈 속으로 한 치나 파고들었다.
"제, 제발… 내 부탁 하나를 들어 다오, 냉혈살흔."
사륵은 피고름을 쏟으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부탁이라면 들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백무영이 고개를 끄덕일 때, 사륵은 고맙다는 눈빛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
다.
"나의 수하들이 무수하다. 그들 모두 죄인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나의 지시에 의한 것이지. 으으, 그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
록 도와 다오."
"약속해 주겠다."
"고… 고맙다."
사륵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의 목젖에서 꾸루룩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죽어 가며 이렇게 물었다.
"한데, 네 얼굴이 낯익군. 내가 언제 널 만난 적이 있던가? 그 얼굴은 너
의 진짜 얼굴일 텐데……?"
"과거 한 번 본 바 있지. 넌 말을 타고 내가 몰던 마차를 뛰어넘은 바 있
지."
"으음, 기억이 난다. 그래, 난 그 때 냉약빙과 더불어 관도를 치달렸었지.
넌 인상이 강렬했었지. 일개 마부에 불과하였으되, 무엇인가 달랐다. 무엇
인가……."
사륵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뒀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백무영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으며, 감기워지지 못한 눈이 감
기워졌다.
백무영은 느릿느릿 함백 쪽으로 다가섰다.
함백은 그가 다가서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그는 기세만으로 백무영을 꺾은 바 있다. 그건 오래 되어 봤자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다시 내게 도전하려 하느냐? 어리석은 녀석! 사륵을 죽인 솜씨를 보지
못하였느냐?"
"봤소. 경이로운 솜씨였소. 그것은 일명 마녀혈! 그 초식은 극환(極幻)에
달하였소. 훗훗, 솔직히 그 초식으로 인해 나의 최근 고민 하나가 사라졌
소."
"고민?"
"이 세상에서 가장 변화막측한 검초에 대한 고민이랄까."
백무영은 여유 있게 웃었다. 그는 함백이 뿜어 내는 백팔 겹의 강기를 뚫
고 다가섰다. 함백은 그의 기도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고강하다 느끼며
진기를 배가시켰다.
"꿇어라. 그리고 내게 절하라. 널 나의 진정한 후계자로 만들어 주겠다."
"천만에, 내가 제왕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악에 대해 무릎을 꿇지는 않
소. 그것이 백가의 명예로운 전통이오."
"어리석군. 네 아비만큼이나!"
함백은 백무영의 기세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못내 섭섭하다는
눈치를 띄었다.
그는 진심으로 백무영의 자질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널 죽이진 않겠다. 다만 널 백치로 만들겠다. 그리고 몇 년이 걸리든, 널
고금 마도사상 가장 강한 무인으로 키우겠다. 그 후, 너의 지혜를 회복시
키겠다."
"후후… 난 쓰러지지 않소. 이미 넘칠 만큼 쓰러져 보았기 때문이오."
백무영의 모습이 보다 여유스러워 보였다.
그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다가섰다.
함백은 엄청난 힘이 엄습함을 느꼈으며, 혼신내공을 다해 그 힘에 대항하
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내공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백 장 안이 뒤흔들렸다.
일각 후, 함백은 휘청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너의 내공이 전에 비해 십 배 강해졌군. 그 사이, 어떤 기연이 있었느
냐?"
"많은 기연이 있었소."
"그랬군. 후후, 너의 내공이 나를 능가하는 걸 인정하겠다. 하나, 초식에
있어서는 내 상대가 못 돼."
"초식에 있어서도 난 태상교주를 능가하오. 난 태상교주가 마도제자들을
위해 항복하기 바라오."
"항복하라고?"
"스스로의 명예만 따진다면 싸우다가 죽어야 할 것이되, 귀하로 인해 마
검을 쳐든 무수한 제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항복해 주시기를 바라오."
"넌 네 아비보다 어리석구나."
"그렇소. 난 어리석소이다."
백무영은 처음으로 손을 쳐들었다.
지금 그의 표정은 광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수식은 이제껏 강호에 나타난 어떤 수식과도 달랐다.
"난 무수한 초식을 알고 있소. 그리고… 얼마 전, 나는 모든 초식을 잊어
버렸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초식에 지나지 않소!"
"하나의 초식?"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식이오. 그것을 완성하려면 무수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오."
백무영은 눈을 반개했다. 그의 표정은 해탈경(解脫境)에 접어든 고승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의 전신 모공에서 부드러운 진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지혜롭다기보다 우둔해 보였다.
강호제일의 천재라 할 수 있는 백무영이거늘, 지금 짓는 표정은 백치와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손짓은 춤사위와 비슷하다. 대체 어디를 겨냥하여 손을 흔들어 대는
것인지?
지켜보는 모든 무사들은 함백이 이기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한 사람만이 백무영이 얼마나 가공한 무공을 시전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바로 함백이었다.
'허무자연(虛無自然)… 아아, 손의 움직임은 바로 우주의 흐름이다. 저 녀
석의 그릇은 텅 비었다. 그러하기에, 삼라만상이 모조리 담기는 것이다.'
함백만이 백무영이 최근 깨달은 절정검의 비결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백무영이 그를 이해하듯, 그는 백무영을 이해하는 것이다.
"프핫핫… 넌 역시 나의 적이 될 만한 놈이다. 프핫핫! 이십 년 만에 처
음으로 호쾌히 싸워 보는군. 무사가 되어 세상에 적이 없다는 건 유쾌하
지 못한 일이야. 난 이십 년 간 고독하게 살아왔다. 프핫핫! 너로 인해
나의 고독이 깨어졌다. 좋아, 널 적으로 인정해 주겠다. 프핫핫! 이기는
자가 강호를 갖는 것이다."
함백은 웃으며 떠올랐고, 백무영은 춤사위 추는 동작 가운데 따라서 떠올
랐다.
두 사람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격돌하기 시작했다.
경천동지(驚天動地)!
두 사람의 격투는 천 년의 격투 가운데 가장 기괴했다.
백무영은 지극히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함백은 쾌속절륜하게 움직여 나갔
다.
그리고 열기와 더불어 한기가 뿜어지며, 일 마장 안이 짙은 안개에 휘말
려들었다.
열화우(熱火雨)와 더불어 폭설(暴雪)이라니?
함백이 시전하는 마공은 양강한 성질이기에 허공 가득 불우박을 내리게
하는 것이고, 백무영의 내공은 극천빙극단으로 인해 극음의 성질을 띠우
고 있는지라 내공을 시전함에 따라 폭설이 내리게 되는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고 한 시진이 될 때, 두 사람의 동작은 거의 비슷한 찰나에
정지가 되었다.
"……."
"……."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백무영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자세였으며, 함백은 위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휘저어 내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녀혈(魔女血),
절대검류(絶代劍流).
마도최후검과 백도최후검이 무형 가운데 격돌하는 것이다.
소리는 들리지 않되, 엄청난 힘이 허공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일 마장 안은 폭풍에 휩쓸리듯 유린되었으며, 꽤나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던 무사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무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며 신풍도 무
사들의 배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하나도 놓치지 마라."
"신풍도의 개구리들! 우리들이 죽었다 여겼겠지?"
속속 나타나는 무사들은 금비이십팔숙(金臂二十八宿)과 마검대교두(魔劍
大敎頭) 관욱량(關旭亮)이 이끄는 연환마교의 진짜 기둥들이다.
그들은 방대한 면적을 엄밀히 포위하였는 바, 무사들의 기세는 신풍도 무
사들과 관산검맹, 대명무문 쪽 무사들을 동시에 압도할 정도였다.
함백과 백무영이 격돌하는 가운데, 신풍도 쪽 무사들은 흑도 백도 양 파
의 공격 가운데 모조리 제압당하고 말았다.
정봉(頂峰).
거문고 퉁기는 소리가 은은히 메아리친다.
안색이 초췌한 청년이 거문고를 퉁기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승부가 났어."
"누가 이겼습니까, 왕야(王爺)?"
청년 앞에는 얼굴빛이 밀랍처럼 흰 여인이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상실한 눈이었다. 하지만 용모는 수선화처럼 아름다
웠다.
청년은 칙칙한 눈빛을 흘리며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긴 쪽은… 냉혈살흔이야. 그는 내공에서, 초식에서, 그리고 정신력에서
함백을 압도한다. 다만 그는 전에 비해 살기가 약하기에, 이기기를 보류
하는 것이다. 아아, 그 녀석이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여인은 허리를 숙인 채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깃들여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질지 모른다. 후후, 월방(月芳)! 나를 봐라."
"예, 왕야."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왕야라 불린 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너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널 납치했지. 그러나 너의 육체도 정
복하지 못하였고, 너의 정신마저 정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널 강시마녀
(彊屍魔女)로 만들고 말았다."
"……."
"내가 쓰러진다면, 나의 시신을 네가 거두어 다오. 나의 시신을 대막(大
漠)의 거친 모래에 묻어 다오. 그 다음, 냉혈살흔을 찾아가라. 그 놈은 만
사를 능히 해결할 녀석. 너의 강시마공을 풀어 줄 것이다. 그 다음은 네
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겠지."
왕야는 눈길을 스르르 내렸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이는 자였다.
키가 크고 깡마른 자, 그는 조금도 웃을 줄 모르는 자였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금음을 퉁겼다.
거문고 소리는 흐느끼는 듯, 절규하는 듯, 처량한 곡조를 흘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로 눈발이 쌓이기 시작했다.
"내 시신을 대막에 묻을 때, 아무도 날 위해 울어 주지 않겠지. 사실, 난
도망치고 싶다. 냉혈살흔은 나보다 훨씬 강하다. 그의 무공은 이미 입신
지경(入神之境)에 도달했다. 난 그의 일 검 상대도 아니 된다. 아아, 그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그는 먼 거리를 격해 함백과 백무영의 싸움을 해석하고 있었다.
그는 바람 소리, 숨소리, 그리고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와 무형의 기세
만으로 두 사람이 어떤 초식으로 싸우는지 알아 내는 것이다.
"중원은 위대한 땅이야. 너무나도 많은 영웅이 중원에서 탄생했다. 나의
고향은 늘 중원에 당해 왔지. 그래서 난 중원을 피로 씻어 복수하고자 하
였는데… 나의 시대에도 그 꿈은 이룩되지 않을 듯하군."
띠잉- 띵-!
금음은 날개를 달고 떠오르듯 충천해 올랐다.
여인은 금음이 어떠하든, 무표정할 뿐이다.
벽력(霹靂)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가까워지며 흙모래 바람이 오십 장 하늘로 치솟아 올
랐다.
"우우우……!"
백무영은 천룡신후를 토하며 최후의 검결을 시전했다.
그는 마음 속에 승리를 담지 않았다. 그는 마음의 그릇을 텅 비워 놓고
있었으며, 초식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의 흐름은 바로 검의 움직임으로 화한다. 그리고 형태를 생각하게 된
다면, 마음의 흐름은 구속이 되게 마련이며 검은 위력을 잃어버리게 된
다.
허무자재(虛無自在)… 마음을 우주로 풀어 버리면, 극한에 달하는 위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보라! 희뿌연 기류가 쌍장에서 떠올랐고, 그것이 뭉쳐 하나의 검으로 화
하는 것을.
형체가 없는 기세가 뭉치어 검강으로 화하였으며, 그것은 하늘을 가로지
르는 무지개 마냥 폭사되어 함백의 마녀혈검 속으로 파고들었다.
함백은 백팔 겹의 마강을 펼쳐 놓았는 바, 무형에서 유형으로 화한 검강
은 백팔 겹의 강기벽을 산산이 꿰뚫고 그의 심장 속으로 네 치 깊이로
파고들었다.
"우욱! 네가… 허무검도(虛無劍道)마저……."
함백은 피를 울컥 뿜었으며, 직후 그의 입가에는 허탈해 보이는 미소가
번졌다.
"고, 고맙군. 너로 인해 이십 년의 짐을 덜게 되었으니……."
그는 곤두박질치듯 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몸뚱이가 땅에 부딪치는
찰나 마음신후(魔音神吼) 소리가 중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나를… 살려 다오. 제발… 날 용서해 다오."
애절한 비명 소리, 그 소리가 천 개의 골짜기 구석구석 퍼져 나갈 때…
함백의 추종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실망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기 시작
했다.
"태상교주님이 지다니… 게다가 살려 달라고 비명 소리를 내다니? 그분
은 신(神)이 아니었던가?"
"으으, 진정한 천하제일인은 냉혈살흔이다. 누구도 냉혈살흔의 적이 되지
못한다."
"연환마교의 대권은 냉혈살흔님께 있다. 누구도 그분을 거역해서는 아니
된다. 이제 그분이 무림의 절대자이다!"
마도인들은 실망과 더불어 희망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함백은 포악하고 거만한 인물, 그는 남자다운 인물이되 너무나도 포악스
러운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 왔다.
그가 쓰러지다는 건 진정한 마도인들에게도 희망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
었다.
함백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기 곁으로 다가서는 백무영을 보며 히죽 웃었다.
"어때, 내 목소리가 그럴 듯했지?"
"고맙소, 태상교주."
"으음, 내가 네게 고마워한다. 넌 내가 이십 년 간 지고 있던 굴레를 벗
겨 주었다. 넌 자랑스런 중원제일인이야."
함백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 절대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걸 희생해
왔다. 그리고 지금에야 비로소 하나의 개인으로 평화를 찾은 것이다.
"마도인들을 모두 벌해선 안 된다. 물론, 네가 잘 처리해 주겠지."
"뜻을 이해하고 있소이다. 그리고 사실 태상교주는 나의 정신적 사부십니
다."
"고맙군."
함백의 눈은 빛을 잃어 갔다.
그는 평화감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소수미랑은 잘 지내고 있겠지?"
"채소를 가꾸며 지내십니다."
"내가 미안해하는 사람은 단 둘, 네 어머니와… 너다. 으음, 특히 네게 미
안해하고 있다."
함백은 의식이 몽롱해 가는 상황이었다.
그는 죽기 전, 할 말을 다하고 싶은 듯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네 어머니만 빼고. 난 물고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물고기로 태어나지 못한 걸 후회했지. 난 힘겨울 정도로 거대한
야망을 지니고 있었지. 그로 인해 일생이 늘 괴로웠었다. 네게… 대륙의
평화를 맡기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르던 금어(金魚)를 보살펴 다오. 가끔 물고기 밥만 주
면 된다."
함백의 입매가 경직되어 갔다. 그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졌다.
"누군가 널 부르는 듯하구나. 거문고 소리가 들리느냐?"
"들립니다. 분명 그 녀석이 퉁기는 거문고일 겁니다. 고월, 그 녀석이 절
부르는 소리겠지요."
"어리석은 녀석, 나를 닮고자 하는 녀석… 아아, 하지만 그 녀석도 네 상
대는 안 될 것이다. 그 녀석도 그걸 알겠지. 그러나 도망가지 않으리라.
네가 조금 전, 날 살려 주고자 하였지만 내가 죽기를 자청했듯이……."
함백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뒀다.
그의 얼굴에는 백비룡이 지었던 미소만큼이나 자비스럽고 평화로운 미소
가 감돌고 있었다.
그 미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그의 시신 위로 눈이 내린다.
백무영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제 한 번의 싸움이 남아 있다.
그를 찾아 먼 길을 온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백무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무영은 아까부터 그가 뿜어 내는 가공한 마기를 느끼고 있었다. 과거였
다면, 그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 혼절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
나 지금은 그러한 마기로 인해 인성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동정해 줄
정도인 것이다.
'네가 거기 없길 바란다.'
백무영은 극천단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고월. 넌 나의 적이 못 돼!'
고월은 산 위에 있었다. 그는 거문고 퉁기기를 멈추고 술을 마시고 있었
다. 그의 냉막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술 한 잔 들겠나?"
"좋아."
"후후… 잔(盞)이 없으니, 병째 마셔야 해."
고월은 술병을 건네 주었다.
백무영은 병을 받아 입가로 가져가 병 안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회색 하늘에서 눈이 뿌려진다.
거위털처럼 흐트러져 내리는 눈발이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소담스럽게 쌓
였으며, 백치가 되어 버린 음월방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에도 쌓였다.
세 사람 모두 흰빛으로 물들었다.
"대막에 가지 않겠나?"
"글쎄, 난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든 셈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네가
날 베어야만 하는 처지이듯, 나도 도망을 쳐서는 아니 되는 처지야."
"솔직히 말해, 자넬 벨 용기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이지. 서로 만난 시간은 짧되, 피차 진심으로 이해해 줄
줄 알았던 유일한 벗이었으니까."
고월은 또 하나의 술병을 비웠다.
눈이 모든 산을 하얗게 물들였다.
폭설은 해가 저물 때 눈보라로 화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검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사람이 극천단 위로 올라서고 있다. 잠
시 더 기다리다간 두 사람의 격투를 남에게 발각당하게 된다.
"술을 더 마시고 싶은데, 시간이 없군."
고월은 옷섶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으며, 강시 여인이 된 음월방이 재빨리 다가서며
검을 건네 주었다.
고월은 검을 쥐며 백무영을 바라봤다.
"음월방을 사랑하고 있네.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깨끗하네. 난 단양마공
(斷陽魔功)을 터득하기 위해 스스로 남근(男根)을 잘랐거든. 그러니, 여체
를 범하려 하더라도 범하지 못할 입장이지."
그의 미소는 자조적이었다.
백무영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혐오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눈보라가 더욱 심해졌다.
백무영은 텅 빈 술병을 내팽개치며 손을 쳐들었다.
'도망쳐도 비겁하다 여기지 않을 텐데… 어리석은 녀석!'
백무영은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무서운 마세가 다가섬을 느꼈다. 그 기운은 함백이 뿜어 냈던 마녀
혈검의 기세에 뒤지지 않았다.
백무영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허공에 하나의 점을 찍었다.
'자네를 위해 줄 수 있는 것은 고통 없이 제거하는 것뿐이란 말인가?'
그의 손이 점을 찍는 가운데, 극천단 위는 경천동지할 폭음에 휘말렸다.
그리고 극천단 위로 치달아 오르던 사람들은 허공으로 아홉 마리 금룡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또한 흰 무지개가 충천해 오르는 것도.
중인들이 극천단 위로 올라섰을 때, 극천단 위에는 아무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겼는지, 누가 쓰러졌는지, 밝혀지지 않는 것인가?
다만 아름다운 여인이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을 적시며
한 남자의 시신을 업고 북방으로 빠르게 날아갔다는 것만이 후에 밝혀졌
다.
백무영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잠풍. 그는 이 장 가량 붕괴되어 버린 극천단 위에 서서 향을
대신해 흙을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애석하군. 그 녀석이 천마왕야와 동귀어진하다니… 너무 아까운 놈이 죽
었다!"
그는 크게 소리치며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분명 어딘가 가서 술을 진탕 마시고 있을 것이다. 훗훗, 그
녀석은 이제 무림을 떠나고자 할 것이다. 그 녀석의 성격은 내가 잘 안
다. 그 녀석은 홀가분히 사는 걸 좋아하지. 그러하기에, 죽음을 가장하고
사라진 거야. 일단은 녀석이 죽었다고 소문을 내어 주어야지. 하나, 언젠
간 날 대신해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어야 한다. 넌 중원의 아들이다. 중
원을 떠날 순 없다, 무영(無影)!'
<大尾>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