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경(無相境)>
‘무상(無相)’이란
공(空)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유상(有相)의 반대어이다.
무상에서 ‘상(相)’은 망상에 물든 마음, 망념으로 일어나는 허상을 말한다.
따리서 무상(無相)이란 집착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 laksana)’은 특히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 개념이다.
흔히 인식주관이 허망 분별한 객관대상의 형상, 특성, 감정 등에 얽매인다는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는 말이다.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상은 망념의 소산이며,
망념을 떠나면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법성(法性)을 체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無相)이란 4상(四相)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음을 말하며,
4상으로 인해서 생기는 일체의 분별과
차별과 온갖 장애를 여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상(無相)이란
어떤 사물(대상)을 보면서 그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
현상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멸변천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이며, 모든 집착을 여윈 경계이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무량의경(無量義經)>에서 무상을 확실히 정의하고 있다.
즉, 무상(無相)에서 ‘상(相)’이란 차별상이다.
무상이란
곧 절대의 이치는 차별상을 떠난 것이라는 뜻이다.
가령 인간들에겐 온갖 차별이 있지마는 불교의 목표는 모든 인간이 결국 부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기에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사람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될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르쳐 인도하기에 따라서는 지금 악한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상(無相)이고,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다.
또 그 반대로 가르쳐 인도하지 않으면 지금 착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도
거기서 멈춰 더 나아가지 못해 끝내 부처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물은 공이며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며,
무상이기 때문에 청정하다.
또한 무상은 차별ㆍ
대립의 모습[相]을 초월한 무차별 상태를 말하는데,
그 수행을 무상관(無相觀),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상(相)’이란
자기 마음속에 저장해 놓은 것,
― 즉 고정관념이 반연된 것을 말한다.
이런 마음속에 저장해 놓은 그런 것들이 없는 것,
― 고정관념이 없는 경계를 무상경(無相境)이라 한다.
‘경(境)’은
경계라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무상경(無相境)이란 모든 사물에는 고정된
또는 실제적 특질이 없다는,
다시 말해 미혹한 생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허상,
형상이 없는, 모든 집착을 여읜 경계를 의미한다. 그런 경계가 곧 진여법성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밖으로 모든 상(相)을 떠나면 이것이 무상(無相)이니,
능히 상(相)에서 떠나기만 하면 곧 청정한 법체(法體)가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진정한 무상(無相)이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
혹은 귀로 듣는 것,
이런 것들을 대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 감각기관을 통해 뇌에서 해석한 정보이다.
그것은 실제 대상이 아니라 우리 나름으로 인식에 있는 것이니 그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그 인식된 상이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상이다.
그래서 만법은 공하다고 한다.
인식하는 대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식하는 기능도 있고 그 대상도 있지마는
그 실제 모습은 본래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는,
사종 무상경(四種無相境)은 지ㆍ수ㆍ화ㆍ풍 4대로 구성된 나의 몸을 미혹에서 지키는 방법이라 했다.
아래는 임제 선사의 <임제록(臨濟錄)> ‘시중(示衆)’ 편에 나오는 사종(四種)의 무상경(無相境) 법문에
대한 무비 스님의 강설이다.
“무엇이 사종(四種)의 무상경(無相境) ― 네 가지 모양(형상)이 없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이 돼 가로 막으며,
한 생각 애착하는 마음이 물이 돼 빠지게 하며(흘러가버리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이 돼 타게 하며,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돼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이런 내용을 알 수 있다면) 경계에 꺼들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할 것이다.
동쪽에서 나타났다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났다 북쪽에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났다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났다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했기 때문이다.”
무비 스님【강설】
사람의 몸을 위시해서 물질을 형성하고 있는
네 가지 요소인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
사대(四大)에 대한 임제 스님의 독특한 해석이다.
의심하는 마음,
애착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이 네 가지 마음이 곧 사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은 우리들의 한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 네 가지 마음에서 일어난 지ㆍ수ㆍ화ㆍ풍이라는
경계도 내가 끌려 다니지 않고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한 생각에서 일어난 팔만사천 번뇌가 헛것이듯이
그 번뇌에 의해서 생긴 지ㆍ수ㆍ화ㆍ풍과 삼라만상도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했기 때문이다.
사대육신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하고 애착하고
성내고 기뻐하는 등의 인간의 감정들은 어째서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가?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은 왜 허망한가? 왜 공인가?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왜 개시허망(皆是虛妄)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도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물질도 마음도 다 같다. 모두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서
하나의 존재를 형성한다. 마치 갈대 묶음이 둘이 있을 때 서로 의지해서
서 있을 수 있듯이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쿼크(quark)도 끝내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른 무엇과의 결합체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모두가 서로 서로 의지했을 때만 존재한다.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인 원인과 조건, 곧 연기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분과 초를 다투는 시한부 존재다.
연기했다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시한부 존재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어떤 감정과 어떤 물질이든 다 같다. 사랑도 미움도 본래로 공인데,
시한부 인연에 의해 한순간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그래서 공이고 허망이고 무상이다.
그래서 연기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연기며,
연기가 곧 여래의 큰 깨달음이다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또 중도(中道)이다.
이 원칙에는 부처도 중생도,
미진도 우주도,
정신도 물질도 예외일 수 없다.
하물며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이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실상은 공이기 때문에
공으로만 보면 모든 고통과 일체 문제를 해결한다고
<반야심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보면,
“동쪽에 나타나서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나서 북쪽으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나서 가장자리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나서 가운데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고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삶을 말하고 있다.
이 한 구절로 결론짓자. 사대여몽여환(四大如夢如幻) ―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상법(無相法)은 형상에 구애됨이 없는 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특별한 곳에 계시지 않고
진리 그대로 함께 하기 때문에 특별히 불상(佛像)을 믿는, 불상(佛像)을 보고 불상을 존숭하는
도상숭불(覩像崇佛)의 신앙보다는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는 진리각오(眞理覺悟)의 신행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원은 불⋅보살을 모시는 장엄한 형식보다 불⋅보살을 깨닫는
심비(深秘)한 수행처로 만들어야 한다. 무상법(無相法)은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일에 기울어지는
마음을 바로잡아 보이지 않는 진리에 입각해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겉치레에 너무 집착해서, “동양 최대의 …”라고 한다든가
“세계 최고의…” 하는 식으로 ‘만드는 일’에 치중해 손님 끌기 경쟁이 치열하다.
신행은 없고 장사 속에 몰입한 천민자본주의의 현장이 돼 있다.
우리들로 하여금 통렬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