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 챌린저 해연에 도전하다 해저 1만 1,529m까지 내려간 자크 피카르(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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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3.14. 23:56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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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챌린저 해연에 도전하다
해저 1만 1,529m까지 내려간 자크 피카르(1960년)
요약 1960년, 자크 피카르는 트리에스트호를 타고 당시 가장 깊은 바다로 알려진 챌린저 해연에 도전했다. 트리에스트호는 해저 속으로 내려갔다 멈췄다를 반복해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빠르게 해저 1만 1592m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피카르는 방사능 물질과 해류 등을 조사한 뒤 무사히 올라왔다.
1960년 1월 23일, 당시 가장 깊은 바다로 알려진 챌린저 해연(10,893m)에 잠수했다가 3시간 27분 만에 떠오른 자크 피카르(왼쪽)와 돈 월시가 손을 흔들라는 사진기자들의 요청에 웃음을 터뜨렸다.
1948년은, 심해 잠수 사상 두 가지 신기록을 남긴 뜻깊은 해이다. 하나는 오티스 바턴이 잠수구를 타고 1,372m를 잠수함으로써 그가 15년 전 윌리엄 비브와 함께 세웠던 932m 기록을 경신한 것이며, 또 하나는 물리학자 오귀스트 피카르가 전혀 새로운 잠수정 FNRS-2호를 1,380m까지 잠수시키는 데 성공한 일이다.
FNRS-2호의 잠수는 비록 사람이 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지만, 잠수구처럼 쇠줄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53년 피카르는 아들 자크와 함께 FNRS-2를 더 발전시킨 트리에스트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26일 새벽 부자(父子)가 이 잠수정을 타고 카프리 섬 남쪽에서 심해에 도전했다. 이 날의 잠수 기록은 1,080m로, 그보다 12일 앞서 프랑스의 조르주 우워와 피에르 윌름이 FNRS-3 잠수정으로 세운 2,100m에는 훨씬 못미쳤다.
그러나 한 달 만인 9월 25일 피카르 부자는 폰자 섬 남쪽에서 3,050m까지 잠수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무렵 사람이 바다 속을 3,000m나 들어갔다는 것은, 사람이 처음 달에 간 것만큼이나 놀라운 뉴스였다. 1,000m 물속에서 1m2가 받는 수압은 11,000톤이 넘으므로, 아무리 두꺼운 쇠붙이라도 짜부라지고 만다. 그래서 세계 일주 비행이 유행하던 1934년까지도 사람은 1,000m 물속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대학 시절부터 기구(氣球) 띄우는 일에 열중해 성층권에 기구를 타고 올라간 기록을 세운 피카르는, 기구에서 힌트를 얻어 스스로 움직이는 심해 잠수정을 개발했다. 무거운 밸러스트(추)를 실어서 가라앉고, 뜰 때는 그것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기구가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이나 수소 가스를 기낭에 채우는 데 비해, 잠수정은 물보다 가벼운 가솔린을 채운다는 점만 달랐다. 가스를 넣자면 빌딩만한 잠수정을 만들어야 하지만, 가솔린이라면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물은 물의 압력을 받지 않으므로, 액체 가솔린을 채운 잠수정은 심해의 엄청난 수압을 견뎌낼 수 있었다.
1954년 1월 27일 FNRS-3호가 사람을 태우지 않고 4,100m까지 잠수하더니, 2월 15일에는 우워와 윌름을 태우고 4,050m까지 들어갔다. 심해잠수 기록 경쟁은 나날이 뜨거워졌다.
1960년이 열리자 자크 피카르가 그때까지 가장 깊은 곳으로 알려진 챌린저 해연(海淵)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만든 트리에스트호는 잠수함처럼 생긴 구명정에 가솔린을 가득 채우고, 그 밑에 사람이 들어앉은 잠수구 모양의 선실을 매단 모습이었다. 피카르는 트리에스트호를 1956년에 미국 해군이 사들이자, 4년 동안 예순네 차례나 잠수 실험을 하며 지구에서 제일 깊은 땅을 밟을 날을 기다려 왔다.
1월 23일 아침 8시 23분. 피카르와 미국 해군 대위 도널드 월시를 태운 트리에스트호는 괌 섬에서 남서쪽으로 350km 떨어진 마리아나 해구(海溝)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 91.5m 깊이에서 갑자기 잠수정이 멈추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지만 곧 그 까닭을 알아냈다. 물은 차가울수록 밀도가 높아져 무거워지므로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잠수정이 가라앉지 못하게 된 것이다. 구명정에 든 가솔린이 차가워져야 잠수정이 가라앉을 터인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밤이 되기 전에 올라가려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겠소."
"글쎄···, 가솔린을 좀 버리면 어떨까요?"
피카르가 가솔린을 조금 버리자 트리에스트호는 다시 내려가다가 얼마 못 가 또 멈추었다. 가솔린을 또 버리자 잠수정은 다시 움직였다. 130m, 162m···똑같은 일이 자꾸 되풀이되었다. 198m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솔린이 무거워졌다. 트리에스트호는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457m에 이르자 실내가 너무 추워졌다. 지름 193cm인 좁은 선실에서 두 사람은 가까스로 스웨터를 껴입었다.
11시 30분이 되었다. 8,000m를 넘어선 트리에스트호는 밸러스트를 버려서 초속 60cm를 초속 30cm로 늦추었다. 창 밖 바다 속에는 플랑크톤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가까워짐에 따라 두 사람은 속도를 더 늦추었다. 측심기(側深器)를 쳐다보고 있던 피카르가 외쳤다.
"월시, 이것 봐요! 이제 다 왔어요!"
바닥까지 90cm쯤 남아 있었다. 바닥에 부딪치거나 파묻히지 않도록 잘 조종해야 했다. 90cm를 내려가는 데 무려 10분이 걸렸다. 오후 1시 6분이되자 트리에스트호는 멈추어 섰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 보통 잠수함이 내려갈 수 있는 깊이의 27배. 트리에스트는 20만 톤에 가까운 수압에도 아랑곳없이 부드러운 흙 위에 조용히 자리잡았다.
문득 현창 밖으로 물고기 1마리가 보였다. 30cm 길이에 너비는 15cm쯤. 넙치로 보이는 그 물고기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침입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녀석은 수천 년간 사람들이 품어온 의문-그렇게 깊은 바다에도 두 눈과 단단한 뼈를 가진 생물이 살고 잇을까-에 대한 해답이었다. 새우 1마리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피카르와 월시는 수온을 재고, 방사능 물질과 해류 따위를 조사했다. 월시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기는 트리에스트. 위치는 챌린저 해연 바닥, 해저 1만1,529m이다. 이상."
놀랍게도 바깥 세상이 응답해 왔다.
"다시 말하라. 1만1,529m 맞는가?"
"맞다. 오후 5시에 올라가겠다."(1만 1,529m는 측심기가 잘못 잰 것이다. 챌린저 해연의 깊이는 뒷날 1만 893m로 밝혀졌고, 수심 1만 1,022m인 비티아즈 해연이 제일 깊은 바다로 공인되었다.)
밸러스트 2톤을 떨구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트리에스트호는 가뿐히 솟구쳤다. 두 사람이 벌벌 떨고 있던 어느 순간 갑자기 현창이 밝아지며 햇빛이 솓아져 들어왔다. 1960년 1월 23일 오후 4시 56분. 3시간 27분 만에 트리에스트호는 물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 그 전 기록은 * 1948년 / 잠수정 FNRS 2호 1,380m 잠수(무인) * 1953년 / FNRS 3호 2,100m 잠수, 트리에스트호 3,150m 잠수 * 1954년 / FNRS 3호 4,050m 잠수 * 1959년 / 트리에스트호 5,530m 잠수 * 1960년 / 트리에스트호 7,320m 잠수 [네이버 지식백과] 챌린저 해연에 도전하다 - 해저 1만 1,529m까지 내려간 자크 피카르(1960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